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
이경
등가죽이 툭 꺼진 소가
빵빵하게 배를 채우는 그 시간 동안
정강이가 시린 아이 하나
산새처럼 앉아 있지 오도마니
무릎을 감싸안고 내려다보고 있지
고무신 뚫고 나온 하얀 발가락
빈 뱃속 가득 뻐꾹새 울어
하늘 명치끝에 숨이 닿게 울어
지친 해도 꼬빡 산을 넘는다
달개비 푸른 꽃으로 밤이 피어나
먼 산마을 오르는 저녁 연기를
우리 소는 되새김질로 휘휘 감아 삼키고
겨울 지리산
이경
사람도 짐승도 먹을 것 없는 밤이 깊었다
풀 먹은 닥종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새끼 가진 승냥이가 문밖에 와서 울었다
포식자들이 득실거리는 야생의 밤
우리에겐 호롱불 하나와 어머니가 있었다
감나무가 섰던 자리
이경
우두커니 말뚝으로 섰다
해마다 살빛 좋은 감을 달더니
길이 닦이면서 옛집은 허물리고
늙은 감나무가 밑둥만 남아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척박한 이 고갯마루의 영화
무슨 밤이 삼단같이 깊었을까
어디로부터 그 많은 갈가마귀 떼는
반딧불 무리는
물총새는 왔다 간 것일까
왔다 간 것일까 누가 죽은 혼으로
참나리꽃 비비추 으아리꽃은 피고 진 것일까
조그만 아이 하나를 만나는 일로
조그만 아이 하나가 그것들을 만나는 일로
은하는 밤마다 노래하고
강물은 서늘하게 뒤척였을까
저녁이면 몇 가대기 불이 켜진다
누가 지금도 아린 발을 누이는지
반듯한 땅뙈기 하나 없는 곳
쑥대밭도 비루먹은 산천에 와서
산청山晴
-비 개일 晴에 기대어
이경
우리 집에선 밥값을 해야 밥을 먹었다
내가 제일 처음 한 밥값은 소에게 아침을 먹이는 일
손에 꽉 차는 고삐를 잡으면
나보다 아홉 배도 더 몸집이 큰 소는 나를 데리고
길이 울툭불툭한 새벽 산을 올랐다
이슬에 입을 흠뻑 적시며
소가 산의 한쪽 비탈을 다 뜯어먹는 동안
나는 아직 눈뜨지 않은 산샘의 시간에 무릎을 꿇고
꿈이 칭칭 헝클어진 머리를 감았다
하늘이 물구나무 서는 샘물에
번개 같이 슬픈 꿈이 풀리어 맑아 오는 사이
아버지는 방금 베어 낸 해를 한 짐 지고 산을 내려오시고
어머니는 물꼬를 열어 논에 물을 받으시지
그때 강물은
쌀뜨물 같은 안개를 풀어 나락의 꽃을 피우고
<시인의 말>
첫 시집에서 2편 4시집에서 2편을 찾아 보냅니다. 낭송하기에 적합한 시를 고르소서.
대부분 시인들의 시가 그렇듯이 첫 시집에는 생래적 유년체험이 많이 담기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유년시절을 산청군 신안면과 진양군 명석면의 경계지점인 경호강 유역에 살면서 그 무렵 어린이들이 그랬듯이 밥값을 하느라고 소를 몰고 아침 산을 오르곤 했습니다. 도내고개는 제가 살던 마을입니다. 진주서 함양과 산청으로 가는 국도변입니다. 눅디, 오로골, 묵실, 단성 원지 같은 이름들이 제가 유년시절 많이 듣던 마을 이름들이었지요. 산청 사는 사람들도 그 비슷한 이름들을 고향으로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를 낭송하고 공부하고 계시다니 산청을 고향으로 가진 제가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시의 주제란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지 쓴 사람이 그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제 시를 읽고 느끼고 낭송하다보면 ‘사람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짜안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주제일 것입니다.
무더위입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이 경 합장
-약력
1954년 산청 출생
1993년 계간《시와시학》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경희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및《시와시학》편집장 역임
경희대 백석대 추계예대 등 여러 대학에 출강
시집으로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 『흰소, 고삐를 놓아라』,『푸른 독』,
『오늘 이라는 시간의 꽃 한송이』가 있음
유심작품상 수상
시와시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