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지망생 스물여덟 살 덴마크 청년 말테,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오지만, 오히려 곳곳에 가득한 죽음과 불안의 냄새를 맡는다. 지독한 가난과 소외, 죽음마저 규격화된 도시의 비정함...그는 예민한 감성으로 대도시의 허상을 기록하는 한편,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깊이 침잠해 들어가, 실존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철저한 고독을 깨달아 간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만이 정말중요한 일이었다."
릴케가 로댕을 방문했을 당시의 파리에서 받았던 인상을 <말테>라는 젊은 시인의 눈을 통해 그려낸다. 완결된 형식과 줄거리를 포기하고, 메모와 산문시, 편지, 회상, 철학적 성찰 등 다양한 형식을 지닌 71개의 몽타주로 엮어 낸다. 화려한 문명의 이면을 지배하는 고독과 죽음,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手技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려진다.
첫 부분부터 문화 예술의 도시 파리의 명성을 한마디로 부정하는 혹독한 악평이 들어 간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테가 파리에서 보고 듣는 것은 만개한 도시 문명의 화려함이 아니라, 주로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한 병원이고,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 냄새에 섞여 "불안의 냄새"를 풍기는 골목 아니면, 무너진 집터와 건물의 잔해 등 비참하고 우울한 장면들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비틀거리며 힘겹게 발을 옮기는 임신부나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 양배추 수레를 끌고 가거나 수줍은 목소리로 신문을 팔고 있는 장님들, 식당에 앉은 채로 죽은 사람, 반신불수의 환자 등 정상적인 일상의 조건에서 이탈하거나 죽음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이런 인물 형상이나 모티프들이 냉정한 시선으로 묘사된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
말테는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 노력은 거의 언제나 지긋지긋하게 추한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고독과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말테의 영혼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며 또 그 노력의 무서운 진지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추악과 혐오감을 릴케는 시야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현실에서의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 현실을 빠짐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그처럼 예술작품으로 전환될 때, 추악한 것도 그 부정적 영토에서 구원되고, 오히려 보다 큰 긍정으로의 잠재력이 된다.
말테가 대도시 파리에서 겪는 실존의 불안은 "공장 생산 방식"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장례 절차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이 "고유한 죽음"을 상실한 것에 대한 말테의 탄식은 "고유한 삶"을 상실한 것에 대한 탄식과 다르지 않다. 말테가 파리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또한 획일화된 대중문화 속에서 개인이 지닌 고유한 삶의 의미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말테는 평범한 사랑의 결합은 "고독의 증가"를 뜻할 뿐이라고 말하며, "목적 없는 사랑"을 지향한다. 그에게 사랑은 능동적인 활동이며, 새로운 실존의 창조 행위이다. 그는 "사랑받는 사람의 삶은 나쁘고 위험하다"고 한다. 그것은 상대에게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로 그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괴테에게 무수한 짝사랑의 편지를 보낸 베티나, 오빠에 대한 금지된 사랑 때문에 죽어서 눈물의 샘이 된 신화의 주인공 비블리스, 실연의 아픔을 불후의 명시로 남긴 이탈리아의 여성 시인 가스파라 스탐파 등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설"을 열거한다. 사랑을 받기만 한 사람들의 미래가 텅 빈 자리로 남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그들의 능동적인 마음이 확보한 실존의 공간으로 가득 차게 된다. 릴케는 원고 여백에 이렇게 적는다.
사랑받음은 불타 버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소진되지 않는 기름으로 빛을 낸다는 것이다. 사랑받음은 덧없음이요, 사랑함은 지속이다.
Letter from Rainer Maria Rilke to Auguste Rodin
▶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출을 했다가 자선병원 몇 군데를 보았다. 한 남자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후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좁은 거리의 곳곳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튀김의 냄새, 불안의 냄새였다. 여름에 냄새가 나지 않는 도시는 없다.
▶ 나는 많은 얼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도 많지만, 얼굴들은 더 많다.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을 몇 년씩이나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얼굴은 써서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히고, 여행 중에 끼고 다닌 장갑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꿀 줄도 모르고, 씻을 줄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얼굴이 충분히 좋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증해 보일 수 있을까? 이제 생기는 당연한 의문은 그들도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얼굴은 무엇에다 쓸까 하는 것이다. 다른 얼굴들은 잘 보관해 둔다.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개들이 그것을 쓰고 나가는 일도 생긴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는가? 얼굴은 얼굴일 뿐인데.
▶ 무서웠다. 사람이 한번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그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 거다.
▶ 내가 직접 봤거나, 들어서 아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봐도 그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저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을 마치 포로처럼 자신의 갑옷 안에 지니고 있던 남자들, 아주 늙어서 몸은 작아졌지만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온 가족과 하인들과 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얌전히, 그러나 위엄 있게 저세상으로 떠난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예사로운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온 정신을 다해, 지난날의 그들이 지녔고 또한 미래의 그들이 품었을 법한 죽음을 맞이했다.
▶ 우습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이 여기 내 작은 방 구석에 앉아 있다. 여기에 앉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이 존재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회색빛 파리의 6층 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은 일에 쫓겨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곧 버림받은 부류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들은 거지일 뿐 아니라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은 쓰레기다, 자기의 운명을 탕진해 버린 인간들의 껍질이다. 운명이 뱉어낸 침처럼 축축하게 벽에, 가로등에, 광고탑에 달라붙어 있거나 아니면 뒷골목에서 천천히 흘러내려가는 하수처럼 칙칙하고 더러운 흔적을 남기고 간다.
▶ 이제 이 모든 걸 쓰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손이내게서 멀어져서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 말을 쓰게 될 날이 올 거다. 지금과는 다르게 해석할 때가 올 것이고, 말과 말이 연관성을 잃고 모든 의미가 구름처럼 해체되어 빗물처럼 내릴 것이다. 그렇듯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결국은 어떤 위대한 것 앞에 서 있는 인간과 같다고 느낀다.
▶ 공기의 성분 하나하나 속에 들어 있는 무서운 것의 존재. 너는 투명한 공기와 함께 그것을 들이마시게 되지. 그러면 네 속에서 그것이 비처럼 내려서는 딱딱해지고 몸의 기관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완성한다. 형장에서, 고문실에서, 정신병원에서, 수술실에서, 늦가을의 아치형 다리 아래에서 고통과 공포를 경험한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은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갖고 있으며, 자기 주장을 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질투하면서 끔찍한 자신의 현실에 매달려 있다. 인간들은 그중에서 많은 것을 잊어버렸으면 한다.
▶ 사랑받는 사람들의 삶은 나쁘고 위험하다. 아아, 그들이 자신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은 안전하다. 아무도 그들을 수상히 여기지 않으며, 그들 자신은 배반할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서 비밀은 치유가 된다. 그들은 비밀을 밤꾀꼬리처럼 통째로 내지른다. 그 비밀은 나뉜 부분이 없다. 그들은 한 사람을 위해 하소연한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그들과 동조한다. 그것은 하나의 영원한 존재를 위한 탄식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뒤늦게 허둥지둥 따라간다. 그러나 벌써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그를 추월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오직 신이 계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