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김광식 중도 2014)에는 도봉산에 관한 많은 일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는 산악인 엄홍길씨의 일화도 제법 소상히 적혀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은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데, 그곳에도 관련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관심이 다른 데 있어서 이 부분을 제대로 못보았을 것 같네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살던 곳'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ㅁ 그의 부친이 고성에서 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지
ㅁ 그가 살던 집은 어떤 곳이었는지.를 중심으로 해서 몇몇 부분을 모셔옵니다.
도봉산 계곡에 그가 살던 집터에는
'세살(1963년)부터 40살(2000년)까지 37년 살던 집터이다'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좀더 상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홍길의 선친인 엄금세는 1999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고향은 경남 고성이었다.
문수암이 있는 고성에서 결혼을 한 그는 처자식은 고향에 두고 도회지인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직장 일을 하다가, 그의 형이 근무하는 도봉산 너머의 미군 통신부대*를 찾아갔다.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봉산을 왕래하다가**
산꼭대기에 있는 망월사에서 1959년 무렵부터 5년간을 처사로 생활했다.
* 도봉산 너머의 통신부대라 함은 도봉산 역 또는 의정부쪽의 부대를 말할 겁니다.
흔히들 도봉산에 있는 능선 이름을 포대가 있었다고 하기에 '포대능선'이라고 하는데,
통신부대였기 쉽다는 걸 여기서도 점쳐보게 합니다.
** 어떤 연고인지 모르겠지만 도봉산을 왕래하다가....의 답은
도봉산 망월사 뒤쪽에 미군의 통신장비와 막사를 설치하는 일이기 쉬울 겁니다.
의정부 가도의 미군부대들은 전쟁 후인 1950년대 중반에 세워졌으니,
그 시절 도봉산 위에는 한창 막사 등을 지었겠죠.
성격이 칼칼하고 남의 밑에서 구속을 받는 체질이 아니었기에 직장생활은 거북해서 절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춘성의 너른 가슴과 호탕항 기개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는 춘성을 도우면서 망월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고향에 남아 있던 처자식을 데려올 형편이 마땅치 않아 편지로 연락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남아 있던 엄홍길의 모친은 엄홍길의 삼촌에게 길 안내를 받아 불원천리 길인 서울을 거쳐 도봉산을 향했으니 그때가 1963년이었다.
엄홍길은 세살이었기에 등에 업고,
여섯 살인 누이는 손을 잡아 걸려서 망월사에서 그리던 남편을 만났다.
그후 엄홍길의 가족은 망월사를 오르는 길가의 중턱에 별장으로 있던 집을 인수하여
경남상회라는 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그러니까 별장으로 있던 집이었다는 거네요.
이 별장은 물론 일제 시대 때의 것이기 쉬울 거고요.
그곳에 별장이 있었다면, 망월사 계곡이나 도봉산 입구 쪽에 더 많은 별장이 있었다는 뜻이기 쉬울 듯.
그런 별장들의 모습들을 사진에서나마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각이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죠....~~~
이상 엄홍길과 도봉산의 소소한 인연 이야기 한토막이었습니다.
--------------------------
덧붙여)
'춘성'의 저자는 엄홍길의 모친과 2008년 인터뷰를 했는데,
그 중에 엄홍길의 어머니는
"장사하기에도 바빠 망월사에는 자주 올라가지도 못했다"라고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언젠가 북한산성 계곡의 한 식당에서 여주인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시집온지 4,50년이 되었는데 아직 한번도 백운대에 올라가보지 못했다면서 웃던 게 기억납니다.
그시절 한국의 여인들 삶은 대체로 이랬죠.
정태춘 박은옥의 '양단 몇마름'의 가사 1절은 이렇습니다.
시집올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에 깊이 모셔두고서
생각나면 만져보고 펼쳐보고 둘러만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보고 펼쳐보고 둘러만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