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승리
최원현
아시안 게임의 축구 경기를 보면서 삶이란 바로 축구 경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어떤 경기라고 인생에 비유할 수 없겠는가마는 이번 경기를 보면서 축구 경기야말로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았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8강전의 한일전 중계를 들으면서는 저처럼 기회와 행운이 같이 와 주는 경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즈베크와의 경기를 보면서는 월등한 실력 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지치고 좌절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삶이건 인생은 결코 여유나 넉넉함의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의 팽팽한 삶의 시합장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매정하게도 여지없는 실패를 지워줄 수도 있는 것이리라. 나는 삶을 짝사랑으로 생각하곤 한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건, 읽건 간에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이 나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기술을 총동원하고 내 있는 힘을 다하여 그의 가슴 속 사랑의 골문에 공을 차 넣는 행위. 어떨 땐 골인이 되어 그의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겠고, 그 단 한 번의 골인이 완전히 승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여러 차례의 골인이 되어야 승리를 얻는 경우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도리어 패해 버릴 수 있기도 하는 것이 축구 경기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결국은 나와의 부단한 싸움이며, 나의 헌신과 희생적 노력이 일방적으로 요구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결과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기에 그렇게 짝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나의 생각이 억측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곧잘 맨발로 축구를 했다. 물론 학교에서야 공을 갖고 놀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개인적으로 축구공을 산다는 것은 거의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해서 우리는 새끼줄을 공처럼 감아 만든 짚 새끼줄 공으로도 했고, 동네 잔치라도 있어서 돼지를 잡기라도 하면 방광(오줌보)을 얻어 거기에 바람을 넣어 그걸로 공차기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런 공은 신발을 아끼기 위해 맨발로 공을 차는 우리에겐 새끼줄공보다 훨씬 발도 덜 아프고 신명도 더 났다. 마땅한 놀이 기구가 거의 없던 시대였고, 또 아이들이라고 해도 고양이 발이라도 빌려야 될 형편인 농촌이니 어디 한가하게 공놀이를 할 수나 있겠는가. 아이들도 어른 못지 않은 몫을 해 내었고, 또 땔나무를 하거나 소, 돼지 등의 꼴을 베어야 하는 바쁜 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곧잘 어울렸고, 현장에서 즉시 마련된 놀이 기구로 우리는 신나는 한때를 보낼 수가 있었다. 또래 중에는 운동을 아주 잘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었지만, 특별히 운동을 잘하는 편이 아니면서도 시합을 하면 아주 엉성하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골문 안으로 공을 차 넣는 친구가 있었다. 참 이상했다. 다른 친구들은 기를 쓰고 이리 뛰고 조리 뒤며 골을 넣기 위해 애를 쓰는데도 번번이 실패만 하는데 그 친구는 별로 뛰지도 않는 것 같은데도 어느새 상대편 골문 근처에 가 있다가 살짝 골인을 시키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녀석의 실력이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도 녀석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고, 시합 때마다 그는 후보처럼 기용되어서도 한몫을 해내곤 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녀석의 실력을 참으로 인정하진 않았다. 이번 축구 경기를 보면서 내가 그 친구를 떠올린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이젠 이마큼 나이가 들어 있는 나는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슛을 날려 보았는가를 생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 슛은커녕 늘 어시스트만 해 주거나, 멋진 공격은 커녕 내 자리의 수비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만 받으며 살아온 삶은 아녔는지 모르겠다. 언제였던가. 축구 시합을 하는데 별로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나에게 주어진 포지션이 골키퍼였다. 그러네 하필이면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슛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이 굴러오는 것이 아닌가. 아주 쉽게 잠을 수 있는 공이요,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을 잡으려는데 너무 어줍잖게 굴러온 공이 글쎄 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어처구니없게 골인이 외었다. 결국 우리 팀은 그 때문에 지고 말았다.
주택 복권을 사도 500원 짜리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는 기대 행운은 어쩌면 한일전 같은 경기가 아닌 우즈베크와의 경기 같은 것이 내 삶의 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모든 경기에 승리만 있을 수 있으랴.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때도 있고, 져야만 오히려 유리해 질 수 있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나누기 빼기 더하기 곱하기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최선을 다한다면 거기에 행운이란 이름의 보너스도 꼭 남의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승부의 세계에선 어떻게든 이겨 놓고 봐야 한다던 어느 체육 지도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만든 그 분의 삶이 안타까워 보였던 것도 결코 나만의 꿈 없고 사치스런 생각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사는 오늘이 너무나 각박하고 세밀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일 것만 같다. '부끄러운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다'는 책이름이 생각난다. 일승 일패! 그만큼만 되어도 부끄러운 삶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어쩌면 삶은 이런 승리와 실패의 중간에서 크고 작은 소용돌이로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일전의 승리로 온 국민이 환호하던 순간보다도 우즈베크와의 패배로 속상해 하던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큰 진리스러움으로 가슴 깊이 뜨겁게 스며들어 오던 것도 나만은 아닐 것만 같다. 어린 날, 그냥 뛰노는 것만이 즐거웠던 그런 맨발의 축구가 그리운 것도 크건 작건 모든 것이 하나같이 승부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겪는 이 시대 아픔의 강에 띄어진 종이배이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어나는 것은 근심이요, 줄어드는 것은 꿈이라더니 글쎄 내 삶은 어떻든 일승 일패라도 될 수 있었음 싶은데 그나마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또 왜일까. 허나 단 한 번의 아주 작은 승리라도 참으로 인간다운 승리, 감격적 승리, 자랑스런 승리가 되게 하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공은 둥글다'는 말로 얼버무릴 수만은 없는 것이 숭고한 삶의 순간 순간이요, 그런 삶의 순간 순간이 모인 것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리라. 아주아주 작아도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승리라도 얻고 싶은 것은 내게는 욕심일 수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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