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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으로 가는 길, 37조도품(助道品) // 참된 자기의 실현(八正道와 五分法身)
지난 시간에는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성제는 멸성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열반(涅槃)을 성취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삶의 방식인 팔정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성제의 도성제인 팔정도는 연기하는 법계(法界)의 실상(實相)을 여실(如實)하게 깨달아 여법(如法)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잡아함 785경> 에서는 팔정도에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번뇌와 집착을 가지고 좋은 세상에 태어나려는 목적으로 수행하는 세속의 팔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출세간의 팔정도입니다.
먼저 정견(正見)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견인가? 선행과 악행과 과보(果報)가 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고, 부모가 있으며, 세간에는 다음 생을 받지 않는 아라한이 있다고 보는 것이 세속의 정견이다.
어떤 것이 출세간(出世間~① 속계(俗界)를 세간(世間)이라 하는 데 대해, 법계(法界)를 이름. ② 속세의 생사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감.)의 정견인가? 성제자가 苦를 苦로 사유하고, 集, 滅, 道를 道로 사유하되, 번뇌가 없는(無漏) 사유에 상응하는 법을 선택하고 분별하고 추구하면서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이 출세간의 정견이다.
팔정도는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만 적용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바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 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착한 일을 한다고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다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만 많이 벌고, 출세만 하면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만을 인정하고 전생이나 내세는 부정합니다. 부모나 형제에게 해야 할 도리도 알지 못하고, 수행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 사견(邪見)입니다.
우리가 비록 번뇌를 끊지 못하여 자신에게 집착하여 내세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고 해도, 내세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사견을 버리고 인과를 믿고, 내세를 믿으며,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고, 생사를 초월한 수행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간의 정견입니다.
출세간의 정견은 사성제를 바르게 사유하여 무아의 도리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이 곧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사유하고, 그것은 무명에서 비롯된 자아에 대한 욕탐에서 비롯됨을 알아, 자아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 괴로운 실존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는 것이 출세간의 정견입니다.
정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아에 집착하여 행하느냐, 무아의 도리, 즉 사성제를 알고 행하느냐에 따라 세간과 출세간이 구별됩니다. 그러니까 정견에 의해 세간과 출세간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의도를 갖는 것입니다. 즉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지요. 괴로움이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서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갖고, 성내지 않고,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 가운데 탐(貪), 진(瞋), 치(癡)라는 의업(意業)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정사유이지요.
정어(正語)는 바른 언행입니다. 신, 구, 의, 삼업 가운데 거짓말, 이간질, 욕설, 아첨 등의 네 가지 구업(口業)을 짓지 않는 것이 정어입니다.
정업(正業)은 신(身), 구(口), 의(意), 삼업 가운데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 등의 세 가지 신업(身業)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정명(正命)은 여법하게 옷과 음식과 잠자리와 병을 치료하는 약을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당한 방법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재물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에서 사는 사람이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여 재물을 정당하게 모으는 것이 세간의 정명이고, 출가 수행자가 걸식을 하거나 보시를 받는 것이 출세간의 정명입니다. 출가 수행자가 직업을 가지거나 사업을 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은 그것이 비록 세간의 법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도 출세간의 법에는 어긋나므로 정명이 되지 못합니다.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입니다. 세간의 정정진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 선행을 행하면서 적절한 방법으로 악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출세간의 정정진은 사성제를 실천하기 위하여 적절한 방법을 취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팔리어로 된 <Digha...Maha- Satipatt hana Suttanata>에서는 사정단(四正斷)을 정정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정단(四正斷)은 산스크리트어 catvāri prahāṇāni 팔리어 cattāri padhānāni 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아래의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말한다.
①이미 자신이 짓고 잇는 악행은 끊기 위해 노력하고(斷斷),
②아직 행하지 않은 악행은 계율을 잘 지켜서 행하지 않도록 하며(律儀斷),
③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는 선행은 행하도록 노력하고(隨護斷),
④이미 행하고 있는 선행은 더욱 열심히 실천하는 것(修斷)
등이 정정진인 것입니다. 이 각각을 단(斷)이라 일컫는 것은, 이러한 노력이 나태함과 나쁜 행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임.
정념(正念)은 바르게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정념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정신 차리고 지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 소개한 에서는 사념처(四念處)를 정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잘 관찰하고, 자신의 느낌을 잘 관찰하고,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마음에 인식되는 것을 잘 관찰하는 행위가 정념입니다.
정정(正定)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견고하게 지니고서 교요히 삼매에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선정(禪定)을 의미합니다.
이상이 팔정도의 내용인데 그 내용에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가운데 사정단(四正斷 )과 사념처(四念處)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팔정도가 삼십칠조도품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아함경에서 열반을 구하는 수행으로 삼십칠조도품을 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사념처(四念處), 사정단(四正斷),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입니다. 이들 삼십 칠 가지의 수행을 실천하여 열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삼십칠조도품은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행의 출발점은 사념처입니다. 사념처는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생각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생각하고, 법은 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념처입니다. 그런데 중아함 <염처경(念處經)> 을 보면 여러 가지 사념처 수행 방법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념처(身念處) 의 수행은 자신의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자고 일어날 때 자신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주시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다 보면 이전의 습관에 의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던 잘못된 행동이 의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행동인지를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행동을 주시함으로써 과거의 악행을 발견하면 그것을 끊도록 노력하고, 선행을 발견하면 자신의 몸에 익히도록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정단입니다. 따라서 사정단은 사념차와 별개의 수행이 아니라 사념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사념처를 수행하는 가운데 사정단을 통해서 악하고 불선한 법을 떠나면 그것이 사선(四禪) 가운데 초선의 경지입니다. 자신이 초선에 들어가면 자신이 초선에 들어가서 초선에서 생기는 기쁨을 느끼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계속 주시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주시하는 가운데 제이선, 제삼선, 제사선에 차례로 들어가게 되면, 새로운 선정에 들어갈 때마다 주시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사선에 이르러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고 고요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몸이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음을 관하고 자신의 몸이 六界로 되어 있음을 관찰합니다. 구차제정 가운데 사선을 수행하여 도달한 제일처(第一處), 즉 촉입처에서 지, 수, 화, 풍, 공, 식, 육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촉에서 발생한 의식들이 모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이러한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하여 백골관이나 부정관을 하는 것이 신념처입니다.
수념처(受念處)는 신념처의 수행을 하면서 자신의 몸을 통해 느껴지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느껴지면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을 의식하고, 즐거움이 느껴지면 괴로움이 느껴지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느낌이 촉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수(受)가 실체가 없이 연기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 모든 느낌을 괴로움으로 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선정이 청정한 무관심의 경지인 제사선의 경지입니다.
심념처(心念處)는 자신의 마음속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기고 없어지는 탐, 진, 치에 대하여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탐, 진, 치에 묶여 있으면 묶여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해탈해 있으면 해탈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심념처입니다. 그러니까 심념처는 신념처와 수념처의 수행을 통해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결박으로부터 해탈로 향해 가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심념처인 것입니다.
법념처(法念處)는 심념처의 수행을 통해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잇는 것은 십이입처에서 생긴 의식들이 기억되어 모여 있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정단은 사념처를 수행하면서 선과 악이 의식되면 악은 그치도록 노력하고, 선은 증장하도록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정단은 사념처의 수행에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모든 수행에 들어갑니다. 팔정도와 뒤에 살펴볼 오근, 오력, 칠각지에 사정단이 정진의 내용으로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정단은 정진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여의족(四如意足)은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자재한 경지를 의미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허망한 존재, 즉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행을 멸하여 무위(無爲)의 열반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사여의족은 행을 멸하는 수행의 네 단계와 그로 인해 성취되는 수행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욕정단행성취 여의족(欲定斷行成就 如意足)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욕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욕정(欲定)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직 열반을 성취하리라는 의욕에 찬 생각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유위를 조작하는 삶, 즉 행이 그치는 것을 단행(斷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수행의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의욕에 마음을 집중하면 헛된 욕망이 사라져 유위를 조작하는 행이 멸한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정진정단행성취 여의족(精進定斷行成就 如意足) 입니다. 의욕이 있으면 노력해야 됩니다. 열심히 수행하는 데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정진정(精進定)입니다.
셋째는 심정단행성취 여의족(心定斷行成就 如意足)입니다. 심정(心定)은 마음이 삼매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색계 사선을 열심히 수행하여 제사선(第四禪)에 이르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유정단행성취 여의족(思惟定斷行成就 如意足)입니다. 사유정(思惟定)은 마음을 집중하여 깊은 성찰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제사선을 성취하여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무색계의 공처,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 등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여의족은 구차제정을 수행하여 행을 멸해 가는 과정을 네 단계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근(五根)은 신(信), 정진(精進), 염(念), 정(定), 혜(慧)를 의미합니다. 육근(六根)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언급했듯이 근(根)은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삶을 육근이라고 하듯이, 열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信根), 끊임없이 노력하면서(精進根), 사념처를 수행하고(念根), 구차제정을 수행하여((定根), 무명을 멸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慧根) 삶을 오근이라고 합니다.
오력(五力)은 오근의 삶을 통해 얻게 되는 보다 투철한 오근의 삶을 의미합니다. 수행을 통해 신, 정진, 염, 정, 혜가 더욱 굳건해지는 것을 오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칠각지(七覺支)가 남았는데 이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참된 자기의 실현(八正道와 五分法身)
지난 시간에는 심십칠조도품 가운데 오력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칠각지(七覺支)에 대하여 살펴보고 삼십칠조도품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칠각지란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수행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염각지(念覺支)로 사념처의 수행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택법각지(擇法覺支)인데 이것은 사념처를 수행하면서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을 분별하여 악법은 버리고 선법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정단(四正斷)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정진각지(精進覺支)로서 이는 사정단을 부단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는 희각지(喜覺支)인데 사정단을 수행함으로서 얻게 되는 초선과 제이선의 즐거움을 자각하는 단계입니다.
다섯째는 경안각지(輕安覺支)로 이것은 제삼선에서 얻게 되는 편안한 즐거움을 자각하는 단계입니다.
여섯째는 정각지(定覺支)인데 제사선을 성취하여 마음이 고요한 무관심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째는 사각지(捨覺支)인데 이것은 구차제정 가운데 사무색정을 닦아 삼계의 실상을 관하여 멸진정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무명을 멸하여 모든 유위를 버리고 무위의 열반에 이르는 것이 사각지입니다.
이와 같이 칠각지는 사념처에서 수행을 시작하여 멸진정에 이르는 과정을 일곱 단계로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삼십칠조도품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멸진정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십칠조도품은 팔정도라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아함의 모든 수행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러한 팔정도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계, 정, 혜 삼학의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지도론> 제 19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팔정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정어, 정업, 정명] 세 가지는 계분(戒分)이고, [정정진, 정념, 정정] 세 가지는 정분(定分)이며, [정견, 정사유] 두 가지는 혜분(慧分)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팔정도의 정어는 십선계 가운데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정업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명은 이러한 계행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십선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정사유를 혜분(慧分)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사유는 마음으로 짓는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십선계의 의업(意業)에 해당되므로 계분(戒分)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사유를 계분에 포함시킨다면 팔정도의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은 십선계(十善戒)로 살아가는 계행이 되는 것이지요.
정견(正見)이 혜분(慧分)이 되고, 정정진, 정념, 정정이 정분이 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와 같이 팔정도는 곧 계, 정, 혜, 삼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은 계율을 잘 지켜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통일시켜 제법의 실상을 관함으로써 지혜로 사성제의 도리를 깨달아 생사를 멸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단계에서는 도성제(道聖諦)의 내용이 되지만 무학도의 단계에서는 그대로 멸성제(滅聖諦)의 내용이 됩니다. 이것을 중아함 <성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정(正定)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가 악한 불선업(不善業)을 멀리하고 제사선(第四禪)에 도달하는 것을 정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해탈(正解脫)인가? 비구가 탐욕(欲)과 분노와 어리석음(癡)으로부터 그 마음을 해탈시킨 것을 정해탈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지(正智)인가? 비구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부터 그 마음이 해탈했음을 아는 것, 그것은 정지라고 한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學子)이 성취하는 팔지(八地)이고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성취하는 십지(十地)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사람이 성취하는 팔지라고 하는가? 배우는 정견에서 배우는 정정까지를, 배우는 사람이 성취하는 팔지라고 한다.
어떤 것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성취하는 십지라고 하는가? 무학(無學)의 정견에서 무학의 정지까지를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성취하는 십지라고 한다.
이 경에서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을 배움의 단계에서 행하는 팔정도라고 이야기하고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그 마음이 탐, 진, 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해탈했음을 자각하면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을 무학의 팔정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무학도의 아라한이 되어도 여전히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팔정도는 열반을 얻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열반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는 이(理)이고 도성제는 사(事)인데 무학도에서는 바로 이러한 이와 사가 합일되는 것입니다.
理와 事가 그윽하여 분별되지 않는 경지가 시방세계의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경지이다(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라고 하는 의상 조사 <법성게>의 말씀은 이를 의미합니다.
무학도의 팔정도는 오분법신(五分法身)의 구조를 갖습니다. 오분법신이란 계신(戒身), 정신(定身), 혜신(慧身), 해탈신(解脫身), 해탈지견신(解脫之見身) 을 말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의 구조를 갖습니다.
삼학은 수도의 단계에 있을 때를 말합니다. 무학도의 단계가 되면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가 생깁니다. 이렇게 정해탈과 정지가 생긴 무학도의 삶을 사는 것을 오분법신이라고 부릅니다. 계, 정, 혜 삼학은 계신, 정신, 혜신이 되고 정해탈은 해탈신이 되며, 정지는 해탈지견신이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삶을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는 것을 오분법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분법신은 우리의 참모습, 즉 무아(無我)를 성취한 부처님의 존재 방식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오분법신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온이라는 존재를 취하여 자기의 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중생의 오온 환신(五蘊 幻身)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은 삶의 그림자를 모아서 오온이라는 존재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기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온은 허깨비로 된 몸이라는 의미에서 환신(幻身)이라고 부릅니다.
오분법신은 모든 법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자아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 팔정도라는 삶의 방식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취하여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의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고 여법한 삶에 충실한 것을 오분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예불하는 의식 가운데 오분향례(五分香禮)라는 것이 잇습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之見香,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이 예불문에 나오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 오분법신을 의미합니다 계율에 자신의 삶의 방식을 살아가면 그 삶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이것을 계향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좋은 향기도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낼 수 없지만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며 살아간다는 소문만 들어도 마음에 그 향기를 느낍니다.
방콕 시장을 지냈던 태국의 잠렁 스리무앙이라는 분은 재가 불자의 팔재계(八齋戒)를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자로 살고 싶어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태국에서 장교가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크게 출세한 것입니다. 그 분은 육군 소장까지 지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아름다운 부인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넓은 정원의 잔디를 깎으면서 자신이 잔디의 종 노릇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비싼 전축을 도둑 맞고는 재산을 모으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팔재계를 자신의 삶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분은 이러한 삶에 충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계신(戒身)을 성취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향기는 온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마 정신(定身)과 혜신(慧身)도 성취하였을 것입니다. 해탈신과 해탈지견신을 성취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방콕 시장으로 재작할 때에 워낙 청렴해서 뇌물을 받지 않으니까 기업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데 매우 곤란을 느꼈던가? 봅니다. 그래서 몇 차례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경호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새벽에 혼자 길로 나가 미화원을 도우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몸으로부터 해탈하지 않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팔재계만 지녀도 그 향기와 공덕이 이와 같은데 출가 수행자가 비구의 계율을 잘 지닌다면 그 향기는 어떻겠습니까? 불교를 발전시키고 불법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불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자들이 불법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팔재계(八齋戒)란
오계(五戒~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婬),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음주(不飮酒))에
꽃이나 향으로 몸을 치장하고 오락을 즐기지 말 것[이도식향만이무가관청(離塗飾香鬘離舞歌觀聽)],
사치스럽게 꾸민 잠자리에서 자거나 높고 크게 잘 꾸민 자리에 앉지 말 것[이면좌고광엄려상좌(離眠坐高廣嚴麗牀座)],
때가 아니면 먹지 말 것[ 이식비시식(離食非時食)],
이 세 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시대까지는 이 팔재계를 재가 불자의 삶의 방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팔재계를 지키지는 못해도 날을 정해서 그 날만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풍습이 되었습니다. 재일을 정해서 팔재계를 지키는 것을 팔관재(八關齋)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옛 전통을 살려서 팔관재일을 정하여 가장 중요한 법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마음이 항상 고요한 선정에 머물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서는 계향보다 더욱 수승(殊勝)한 인격의 향기가 납니다. 이것을 정향이라고 합니다. 선정에 머물면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지혜롭게 관찰하게 됩니다. 즉 연기법에 대한 밝은 이해를 가지고 무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에서 나오는 지혜의 향기를 혜향이라고 합니다. 무아의 삶을 통해 마음이 탐, 진, 치와 같은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 삶의 향기가 해탈향이고, 스스로 해탈을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향기가 해탈지견향입니다.
이렇게 오분법신을 성취한 삶의 주변은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게 됩니다. 오분향례문(五分香禮文)의 광명운대 주변법계(光明雲臺 周遍法界)라는 말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광명은 밝은 지혜를 의미하고, 운대는 자비 공덕이 구름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구름은 비가 되어 모든 생명을 이익 되게 합니다. 그와 같이 오분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비 공덕은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구름에 비유한 것입니다.
오분법신의 삶을 통해 지혜의 광명과 자비 공덕의 구름을 법계에 두루 미치게 하고, 이 지혜와 자비의 공덕을 자신의 공덕으로 취하지 않고 시방 세계의 불, 법, 승, 삼보에게 공양하겠다는 것이 오분향례입니다. 불, 법, 승, 삼보에 공양한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부처가 되어 평등한 연기법의 진리 아래서 함께 화합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분법신, 이것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우리가 허망한 자기 존재에 속지 않고 삶을 바로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진실된 삶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오분법신의 성취에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평등합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으므로 무애(無礙)이고 자재(自在)이며, 무량한 공덕이 나오므로 신통입니다.
우리 모두 오분법신을 성취하여 온갖 신통으로 걸림 없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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