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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申東曄, 1930년 8월 18일 ~ 1969년 4월 7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태생으로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편집] 생애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8년 동맹 휴학으로 학교가 잠시 쉬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시인은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국민방위군)에 각각 징집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후 첫 작품 〈나의나〉를 완성했다.
특히 국민방위군 시절 부패한 군간부와 공무원들이 군수품을 임의로 처분하는 바람에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강한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은 살아있는 가재 때문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일생을 두고 고통을 겪었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제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에 지원, 합격을 했으나 발령은 받지 못했다. 그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1]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이와 함께 신동엽 또한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그리고 훗날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하고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7일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편집] 증언
현재 짚풀생활사 박물관장으로 있는 부인 인병선은 “1959년에 시가 입선되고 난 후라 (신동엽 시인이) 서울에 있었다. 그때 디스토마를 앓고 있었는데 병도 좀 낫고 해서 취직을 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종일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에 들어왔는데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눈은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4.19 당시 신동엽 시인의 하루를 소개했다. “온 몸과 구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았다”훗날 4.19 시인으로 평가받는 신동엽 시인 스스로가 바로 그날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의 함성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증언인 셈이다.
신동엽 시인은 인정식 선생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인 씨는 “데이트를 시작한지 3일 되던 날, 신동엽 시인이 아버지의 성함을 물어봤다. 내가 성함을 말하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깜짝 놀라더라. 자신이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고 그 분의 책도 다 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우리 아버지에 대해 주위 분들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상적 문제 때문에 나도 학교에서 굉장히 외롭고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동엽 시인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너무 감동받아 마음을 금방 준 것 같다”고 밝혔다.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농촌 문화를 되살리고자 줄기차게 연구해온 ‘짚풀문화’가 이제 그의 남편이다. [2]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외경을 / 알리라 // 아침 저녁 /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연민(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조심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엄숙한 세상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체, 초판 1979년, 개정판 1989년에 내놓은 같은 이름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참여 저항시, 신동엽은 4.19 때만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었다고 말한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체,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시)’
인병선은 ‘참여시인 신동엽의 아내’나 ‘짚풀문화 연구가’로 불리지만, 좀더 잘 아는 이들에겐 일제 강점기 때 사상가 ‘인정식씨의 딸’로도 기억된다. 그가 신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철학도를 꿈꾸던 이화여고 3학년 때인 1953년 시인이 일하던 서울 돈암동 고서점에서였다. “온통 그에게만 심취해 있었다”는 인씨의 고백처럼 이후 둘은 담백하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주고받았다. 1957년 인씨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중퇴를 감행하면서 가난한 시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대책이 없는 신 시인은 1969년 인씨와 2남 1녀를 남기고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씨는 지금까지 혼자 자녀들을 키워내며 짚풀문화를 연구해 왔다. 출판사 등에 다니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한편 신동엽 시인의 육필 원고를 모아 책을 냈다. 신 시인이 알려진 것은 온전히 인씨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다. 70년대 민주화의 상징시 ‘껍데기는 가라’는 출판되자마자 곧바로 판매 금지되지만 절창은 숨겨질 수 없었다.[3]
[편집]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