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새들은 여름밤 언제 잠드는지 몰라도 일어나는 시각만큼은 오전 3시 반 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해 뒤척인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관은 청각이리라.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계 덕분에 방 안은 고요 그 자체였다. 외등이 있어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적막을 뚫고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 밝은 사람은 그 소리에 잠이 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쉼 없이 지저귀는 낭랑한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어느새 잠들 수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고국의 남쪽 지방엔 4월이 오면 먼 산에서 소쩍새가 퍽이나 많이 울었다. '솟쩍적 솟쩍적' 하고 우는 소리는 밤낮 없이 들렸다. 어찌나 구슬프게 울던지 그 소리를 듣노라면 내 마음도 덩달아 서글퍼지곤 했다. 소쩍새가 비교적 몸집이 큰 올빼미과이고 육식 포식자라는 걸 알기 전까지, 여리디여린 산새가 갈 길을 못 찾아 종일 헤매다 울고 있는 건 아닌가 여겨져 동병상련의 감정까지 느껴졌더랬다.
바람 부는 날이면 현관 입구에 매단 윈드차임이 챙그렁 울린다. 3층 스카이 윈도우를 통해 들리는 바람 소리는 윈드차임보다 낭만은 덜하지만, 원색 그대로의 소리를 훨씬 실감 나게 들려준다. 마치 바깥에서 바람을 온전히 맞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처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었을 때 책 속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은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캐서린의 차가운 하얀 손이 히스클리프를 찾아, 내 방의 창까지 두드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영향이었을까? 나는 바람 소리에 이따금 영혼이 실려 다닐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몇 년 전 6월, 고국을 방문했을 때이다. 한여름도 아닌데 기후는 아열대로 바뀐 듯 도심 곳곳의 지열로 체감온도가 40도를 웃돌았다.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다 역이민한 부부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더위도 피할 겸 도봉산 자락으로 드라이브하러 갔다. 산세가 험준하고 바위로 둘러싸인 산 중턱에는 도선사라는 절이 있다. 차를 세우고 절 주변을 산책했다. 속세와 동떨어진 그곳은 날씨마저도 선선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영지 같았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웅전 앞마당까지 발길을 옮기니 '부처님 오신 날' 매단 연등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의해 연등이 서로 부딪치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 소리는 마치 영혼들의 합창처럼 내 귓전에 신비롭게 울려 퍼졌다.
금요일 오후의 소리가 들린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우렁차고 활기차다. 이민 와서 처음으로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던 9학년 입학식 날, 덩치가 산더미만 한 아이들이 오가는 강당 입구에서 나보다 키가 작은 아들이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오른다.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과연 이민을 잘 온 것인가 하는 의구심으로 가슴에 돌덩이가 든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아들을 픽업하러 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는데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상기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친구도 생겼다며 한껏 들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일주일의 수고로움과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들리기 시작한 아이들의 왁자한 소리... 그 소리는 내게 아스라한 환희를 선사했고 이곳에서의 삶이 별거 아니리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느지막이 눈을 뜨는 날이 많다. 은퇴자가 누리는 특권이기도 하다. 나의 하루는 아침에 뜨는 해와 더불어 시작되지 않는다. 1층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가 내 잠을 깨운다. 남편이 움직이는 소리다. 그가 주방 기구를 건드리는 소리와 수돗물 트는 소리는 나에게 알람 시계나 다름없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면 남편이 내린 커피가 텀블러에 담겨 기다리고 있다.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비로소 나는 완전히 깨어나며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최근에 소리를 통하여 아우슈비츠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 영화 <The Zone of Interest>를 보았다. 영화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오직 소리로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각적 평화로움과 충돌하는 음울한 음향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귓가에 맴돌며 사라지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평생 수많은 소리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무심코 들려오는 소리 가운데에서도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재생되기도 한다. 만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 존재하는 소리, 듣고 싶은 소리, 듣고 싶지 않은 소리... 그 소리로 인해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내 마음은 은연중에 움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