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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만세,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문화로 여는 힐링의 장 마련
코로나블루 극복하기에 앞장서온 문화만세(회장 노상근, 현석시활동가)가 하반기 연말모임행사를 지난 14일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현석시활동가(전주서중 교장)와 이삭빛시인의 공동진행으로 전주초원갈비 VIP룸에서 문화로 여는 힐링의 장을 마련했다.
이날, 본행사 고문인 서거석 전)전북대학교총장, 배철전주신경정신과원장을 비롯해 김정숙군산대교수, 서길주전주용덕초교장, 김형태한국그린문학이사, 고광석 전)교보생명보험이사, 김홍혁 전)교장, 박전진 산업자재PG 탄소재료사업단 전주공장장, 양창수 천사본부장, 조현철군산대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날 채수억기타리스트(화백)와 채윤수의 듀엣을 첫 무대로 ‘향수’, ‘사랑의 시’라는 노래로 무대를 열었다.
이어 고양숙시낭송가가 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라는 시낭송으로 코로나블루에 힘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시를 선사했다.
또한 양경희 교사(독서전문가)가 현재 유튜브의 최고비즈니스책임자(CBO)로 재직 중인 저자의 유튜브 성공 비법과 함께 유튜브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담은 책, ‘유튜브 레볼루션’을 읽고 정리한 내용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이삭빛시인의 시읽기 프로그램에서 백석과 자야의 이성적 사랑을 뛰어넘어 이시인의 ‘너와나’라는 시를 발표해 물질만능시대에 참 의미를 되새기고 시를 만끽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편, 노벨생리의학상 후보인 함정희콩박사의 토종콩의 비밀을 소개, ‘GMO(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특성(유전자)을 도입한 생물체를 말함. - 제초제에 강한 유전자를 콩에 도입하여 특정 제초제를 처리하면 잡초는 모두 죽고 GM콩만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 것)없는 음식이 우리 몸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다.’라는 내용으로 잠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직접 만든 콩물도 참석 전원에게 선물했다.
더불어 박전진 공장장의 포도주 제공으로 행복한 시간을 배로 즐겼다는 평이다.
특히 참석 전원에게 마지막 덕담의 시간이 주어졌고, 서을지홍보국장, 김민우사무국장, 채수억문화국장, 이삭빛운영위원장, 노상근회장 등에게 1년 동안 수고했다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문화만세는 코로나블루로 인한 문화예술인들의 가치를 높이고 선양하는데 지속적인 방안을 간구해 나갈 계획이다.
너와 나 - 이삭빛
한여름, 하얀 눈이 펑펑 내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홀로 눈을 맞는 일이다.
시린 세상을 가장 약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더 걸어가는 것이다.
백석은 자야를 사랑하고 눈 (雪 )이 되었고,
자야는 백석을 사랑하고 시 (詩 )가 되었다.
아픈 사랑은 그리움이 천 년보다 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1938. 3>
백석시인과 자야여사 사랑이야기
백석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백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고 한다.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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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학원 3학년 시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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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의 백석>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그는 함흥시의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도 배웠다.
백석과 김영한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에 이루어진다.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내 사랑 백석’에서 )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바다와‘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
-자야의 글 중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후 도망쳐 나와 자야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金英韓, 본명: 김진향,법명: 吉祥華,1916~1999)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 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이동순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그녀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고재종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문단사적으로 대가들이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백석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의 어느 신의주 변방에서 1948년 잡지‘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당시 백석의 단절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백석과 자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 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 했습니다.
http://cafe.daum.net/Kyat/19hH/249 주소 복사
퍼 왔습니다
가난에 쫓겨 기방에서 청춘을 시작했던 어느 할머니가
1천억원대에 달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희사하여,
현대적인 정신운동의 도량으로 발전시키도록 했을 뿐 아니라
공부하고 싶어하는 과학도에게 쓰이도록 1백억원대를,
또한, 백석문학상 제정에 2억을 흔쾌히 내놓았습니다.
-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吉祥寺)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寺刹)인 길상사 !!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이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에 있는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찰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吉祥華)를 따
길상사(吉祥寺)로 명명(命名)하였던 것입니다.
97년 당시 길상사의 개원은 장안의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졌으나,
큰 재산을 선뜻 내놓으면서 한사코 자신을 감추려고 한 김영한씨는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다>는 겸손의 말을 남겼습니다.
길상사의 전신인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筆名 金子夜)은
천재 시인 백석(白石)과 3년간 동거하였던 기생(妓生)이었습니다.
백석(본명 백기행)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였습니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니,
백석이 남긴 빛나는 사랑의 시(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子夜) 김영한과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합니다.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여,
30년대 활토색 짙은 서정으로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백석,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김영한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 김 자야의 ‘내 사랑 백석’에서
김영한은 백석에 의해 자야(子夜)로 불리웠으며,
김영한은 '자야'를 필명으로 평생 사용하였습니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하였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하였습니다.
백석은 그녀가 사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입니다.
- 김영한,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필명은 자야(子夜)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하여,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으려고 강제로 결혼시켰으나,
백석은 결혼이 끝나자마자 도망쳐 자야에게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행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거절하였습니다.
백석의 당시 심경을
이그조틱한 여인의 이름, 나타샤를 인용하여 노래한 詩가
그의 대표적 연애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고 합니다.
이 시(詩)에서는 김자야(金子夜)를 향한,
백석의 뜨거운 마음, 고귀한 사랑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눈이 내리는 밤,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로 가 움막을 짓고 살자며 당당히 유혹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백석의 고독감과 쓸쓸함이 내비치며,
마지막 구(句)의 당나귀 소리는 더욱 애틋한 정취를 자아냅니다.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놓을수 없던 올곧은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합니다.
< 백석의 시는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 자야의 ‘내 사랑 백석’에서
- 길상사 내의 김영한(법명 吉祥華) 기념비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쪽의 "기념비"로 남아,
길상화(吉祥華)처럼, 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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