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의 <방>
줄거리:
주인공 캐서린은 런던에 사는 마흔일곱의 기혼녀이며 아이를 원했으나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첫 장면부터 다른 유부남과 함께 그 남자가 얻은 초라한 방에 있다. 소설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남자와 캐서린은 간간이 오후에 만나 잠자리를 함께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품은 작은 호감을 보여주는 말은 “당신이 여기 있으니 모든 게 조금은 더 특별해 보입니다.”정도이고, 캐서린은 이제 적어도 남편 페어가 자신을 기만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캐서린은 혼외 관계를 즐기기 때문에 이 남자와 자는 것이 아니라 기만이 궁금해서 이 관계를 시작한 것이다.
캐서린의 남편 페어는 9년 전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샤론 리치라는 여성의 집을 드나들었는데 샤론 리치가 베개에 눌려 질식사한 날 그 집에 페어가 왔었다는 이웃 주민(샤론 리치의 아파트 맞은편에 사는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다. 경찰이 페어를 찾아온 날, 캐서린은 본능적으로 남편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문제의 날에 남편이 평소와 같은 시간에 퇴근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판사는 페어의 발소리를 알아들었다는 이웃의 증언이 불충분한 증거라고 판단하여 남편이 처벌을 피하게 되었지만, 캐서린 부부는 아직도 그 사건의 그늘에 있다. “우리는 둘 다 두려워해요. 우린 그 여자 꿈을 꾸고, 죽은 그 여자를 봐요. 그리고 아침이면 상대가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알죠. 아는데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캐서린은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직장생활이 큰 역할을 한다. 차터하우스 교육원에서 갑자기 해직을 당하게 되자 사무실과 직책과 암울한 마음을 달래주고 그 환영을 몰아내주는 동료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이 미치는 것을 막아주는 해독제 같았음을 깨닫는다.
한편,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던 그 사건을 남자의 방에서 그 남자의 호기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하게 된다. 이 오후의 연인은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아내에게 되돌아갔다. 그와의 관계가 끝나고, 이 방과는 끝이라고 생각한 날, 캐서린은 거리를 걸으며 지난 9년간 작동했던 억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과 사이에 9년간 단순한 위안을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지만, 사랑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적당한 순간을 택해 남편에게 떠나겠다고 말할 것이다.
감상:
-과거는 묻어둔다고 해서 묻히지 않는다. 캐서린과 남편은 과거를 이야기하기를 피하고 일하고 대화하고 여행을 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했지만 의문을 억누른 채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묻어둔 과거는 침묵 속에 무겁게 남아 이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사람은 참 복잡한 존재이며 결혼도 인간관계도 단순히 정의하기 어렵다. 남편의 과오를 알고도 그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연인을 둔 캐서린, 아내와의 관계가 전과 같지 않자 혼외 관계를 유지하다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 남자, 캐서린이 그들이 실패했던 결혼 생활을 바로잡아나갈 때 자신은 “그들 결혼 생활의 고비에 각주로서 존재했을 뿐”일 거라고 추측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레 사람은 모순되고 복잡한 존재임을 느낀다.
-언어는 중요하다. 말로 꺼내지 못하고 억제되었던 그 일을 입밖으로 내어 이야기하고 복기하는 순간 새로운 계기가 된다. 캐서린은 그 일을 이야기한 후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듯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글로 표현하는 일도 그런 면에서 가치 있고 중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