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호는 광대다. 다양한 재주에 재치와 기지가 넘친다. 기업인이 아니면 예술가가 됐을 법하다. 가을대추, 아침햇살, 초록매실, 하늘보리…웬만한 제품 이름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히트상품 제조기`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만큼 그의 손이 가는 족족 대박이 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는 늘 주연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났고 공부도 뒤지지 않았다. 군대서도 제일 먼저 내무반장을 했고 30대에 사장까지 올라 샐러리맨의 우상이 됐다. 이력서에도 정기승진은 없고 모두 특별승진뿐이다. 을보다는 갑의 위치에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를 오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룹 계열사 사장들 가운데 단연 인기 1위다. 비즈니스 세계보다 예술가 세상과 소통하며 사업을 펼치는 방법을 체득했기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풍물에서 화자와 연주자가 최고조에 이른 상태를 좋아한다는 그는 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자는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위기, 그건 새로운 `기회`다=새로운 일을 피하지 않는다. 재보거나 어렵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신한테 오는 것은 모두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로 그 운명의 주인이 된다. 남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할 때도 긍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90년 5월 웅진에 있는 고교 동창의 권유로 행원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은행 그룹 기조실 주임이라는 자리가 당시 은행 10년차 경력에 걸맞은 대우도 아닌 데다 이름도 생소한 회사에 주위에선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이 아니면 창의력을 발휘해 볼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에 바로 사표를 던졌다.
웅진에서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웅진인삼의 사업타당성 검토였다. 당시 웅진인삼은 그룹 계열사 중 가장 규모도 작았고 연 매출 50억원에 만년 적자에 시달리던 기업. 9년 동안 8번이나 사장이 바뀔 만큼 웬만한 사람은 두 손 들고 나갈 정도로 골칫덩어리였다.
95년 10월 가을대추를 출시할 무렵 또 한 번 주위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약재인 대추로 그것도 성수기를 제쳐두고 굳이 비수기가 시작되는 10월에 내놓겠다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후발 회사가 다른 대기업과 비슷한 시기에 제품을 출시하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는 생각에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며 광고까지 했다. 결과는 대성공. 한 달에 대리점이 10개씩 들어왔고 6개월이 지나서는 60개로 늘어났다. 출시 다음해에는 매출이 4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모 제과회사에서 부임한 사장과 의견 충돌로 1년6개월 만에 다시 원래 위치로 복귀했다. 조 사장이 떠난 웅진의 누적적자는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가 다시 돌아온 99년 1월 아침햇살을 내놓을 당시 회사 상황은 최악이었다. 한 달 매출 25억원에 매달 10억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추가 투자가 부담스러웠던 그룹에서는 아예 신제품 출시 자체를 반대했다. 하지만 발로 뛰며 내놓은 아침햇살은 음료업계 최단기 1억병 판매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다시 그 해 12월 출시된 초록매실로 깨졌다. 대박이었다. 결국 아침햇살 출시 후 두 달 만에 그는 37세의 나이로 사장에 올랐다. 수출 주문이 밀려들어 전 세계 26개국에 팔려나갔고 95년 연 매출액 70억원에서 지난해 2100억원으로 30배의 성장을 일궈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이뤄낸 쾌거였다.
◆메가 브랜드보다 `명품`을 만든다=우리 음료에 대한 그의 집착에는 명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배어 있다. '코카콜라는 전 세계에서 20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명품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콜라 성분은 인산이나 카페인 성분이 많아 선진국 고소득층에서도 기피상품으로 통하지요. 가격이 싸고 청량감 때문이지, 몸에 좋아서 마시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히트 브랜드, 메가 브랜드인 것은 맞지만 마실거리로 명품은 아닙니다.' 그는 에너지원까지 마실 수 있는 상품을 고민한 끝에 문득 밥 같은 음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밥처럼 질리지 않는 음료만 만들 수 있다면 대성공일텐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구상 끝에 쌀음료를 만들면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제 그는 용기와 내용물을 분리할 때라고 말한다. 용기는 서양이 먼저 발명했지만 그 안에 담는 내용물은 우리 것으로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20년 후쯤이면 우리 것이 세계 시장의 절반을 점유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때 가면 웅진은 코카콜라를 뛰어넘는 매출 20조원의 회사가 돼 있을 겁니다.'◆목표를 위해서라면 `구걸`도 마다하지 않는다=철저한 사전검증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옳다는 확신만 서면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하지만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하는 불도저`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여졌다. 아침햇살을 내놓을 때의 일이었다. 히트할 거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막연한 `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소비자 조사에 수천만원이 들어가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광고대행사에 있는 소비자 리서치 파트를 찾아다니며 공짜로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거의 구걸이었습니다. 히트만 치면 당신네 회사에 광고를 주겠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IMF 여파로 다들 거절하더군요.' 하지만 결국 끈질긴 설득 끝에 그는 광고회사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의 검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침햇살이 우리 입맛에 맞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고민 끝에 일면식도 없었던 초대 문화부 장관이던 이어령 씨의 집을 찾아갔다. 당시 TV에서 해박한 강연으로 청중을 휘어잡던 그라면 의미 부여를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달변가인 이씨의 입을 막고 20분간 신들린 듯이 혼자 떠들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은 많지만 숭늉을 해먹는 민족은 우리뿐이라는 이씨의 말에 `이거다`는 자신감을 얻은 그는 바로 제품 출시에 들어갔고 회사는 단숨에 흑자로 전환했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그가 26세 되던 해 우연히 만난 풍물은 그의 삶을 확 바꿔놓았다. '한국민속촌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풍물패의 `자반뒤집기` 동작을 봤습니다. 50, 60대쯤 돼 보이던 분들이 장구와 북을 메고 상모를 돌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어떤 분과 눈이 마주쳤어요. 그 눈빛은 신명나고 정말로 편안했습니다.' 당장 풍물을 배운 그는 그해 제일은행에 풍물패를 꾸렸다. 휴일만 되면 하얀 고무신에 한복을 입고 장구에 몰두했다. 주위에선 그를 기인이라고 불렀다. '한 번은 휘모리장단을 치는데 한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여기서 멈추면 장구를 못 배운다는 생각에 더 신명나게 손을 놀렸습니다. 그랬더니 순간 장단이 맞아들어 가더라고요.' '같은 박자 내에서도 잔가락을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하루 24시간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때 거기서 시간 사용법을 배웠다고 했다.
웅진에 들어와서 무슨 음료를 만들까 고민하던 중 그는 또 하나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자료를 만나게 된다. `외국 브랜드 한국 도입 연도표`라는 자료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음료시장의 브랜드가 전부 다 외국 것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음료가 모두 로열티를 주고 들여오는 것이었고 외국 브랜드 일색이라는 사실에 며칠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2조5000억원인 우리나라 음료시장의 80%를 메이저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주스나 사이다 콜라 등 탄산음료가 대부분이었던 구도를 깨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우리 음료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렇게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의 순발력에서 만들어졌다.
◆술, 아이디어 분출=우리 것을 고집하는 그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녁 때 술잔을 기울이며 그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소위 딴따라들이다. 시인이나 춤꾼, 디자이너를 술벗으로 삼는다. 술은 바닥이 보일 정도까지 마시지만 아무하고나 술에 취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술은 정신적 자문을 구하는 자리다. 술과 함께 말하는 것을 즐기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의 제품에도 술자리의 감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늘보리`에는 80년대 초반 민중시인이자 전원시인인 하종호 시인의 창작시가 담겨져 있고 아침햇살 포장 디자인은 서예가인 포헌 황석봉 씨가 해줬다.
그가 3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시 창작교실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를 적어서 평가받고 올릴 수 있는 장소가 없잖아요. 주로 주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1만5000여편의 시가 올라와 있습니다.' 4년간 진행하고 있는 햇살우체통도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편지를 잘 안 쓰잖아요. 하지만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있을 겁니다. 웅진이 우체국 역할을 하는 셈이죠.' 대부분 음료회사들이 스포츠 마케팅에 주력하는 데 비해 그는 이런 문화 마케팅으로 고객을 사로잡는다. '함께 이야기하고 감정이 녹아드는 일을 하고 싶어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돈, 반드시 쓴 만큼 다시 채워진다=돈에 대한 집착은 없다. 돈은 쓰는 만큼 다시 들어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식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돈은 따라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돈이 없어서 사업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돈보다는 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소비자의 잠재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기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출시하기까지의 노력이 즐겁고 그래서 그것이 돈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돈 맛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은 일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성공한 기업가보다는 사회운동가로 평가받고 싶다는 그의 말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10대=1962년 전남 해남 울돌목에서 태어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았고 그림, 문학 등 예술가적인 기질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전기도 안 들어오고 연탄도 없는 허허벌판 `깡촌`에서 여름과 겨울방학을 보내며 자연을 배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법관이 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그때의 시련은 그에게 악바리 근성을 가져다줬다.
◆20대=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제일은행에 입행했다. 행원 시절 부서에 할당된 신용카드 1000계좌를 혼자 해치우는 능력을 발휘했다. 밤에는 부산산업대(현 경성대)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풍물을 접하게 됐고 우리것에 눈을 뜬 계기가 됐다.
◆30대=10년간 일하던 은행을 뛰쳐나와 웅진에 입사했다. 웅진식품에서 제품 기획부터 상품 작명까지 도맡으며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시련도 있었다. 상사와의 의견 차이로 자회사 판매부장으로 발령됐는가 하면 영업본부장으로 일선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때를 기다린 끝에 37세 되던 해 다시 웅진식품으로 돌아와 히트작 `아침햇살`을 출시했고 두 달 후인 그해 3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사원으로 입사한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40대 그리고 내일=취임 4년 만에 매출 규모를 2000억원대로 끌어올렸다. 400억원이 넘던 누적적자도 말끔히 해소했다. 지난 2002년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아시아를 이끌 차세대 리더 18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내년에는 회사를 거래소에 상장시켜 앞으로 5년 동안 주식가치를 200억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또 앞으로 10년 안에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코카콜라와 같은 기업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개인 재산이 1000억원 정도 모이면 섬을 하나 사서 예술대학을 세우고 영화를 만들며 못 이룬 예술가의 끼도 펼쳐볼 생각이다.
내인생의 한 컷
코피 쏟으며 미친듯 공부 취직ㆍ야간대 동시에 준비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법관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고 대신 3남1녀의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군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더더욱 힘든 시기였습니다. 한때 마음 속에 담아뒀던 예술가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습니다. 가정형편상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상고에서 만난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보고 많은 부러움도 느꼈습니다. 제게 주어진 현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문했고 선생님은 야간대학 진학을 권하셨습니다. 그때부터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취직과 대학 두 가지 일을 함께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자갈치시장 아줌마들이 타고 가는 새벽 첫 버스에 몸을 실었고 도서관에서 쫓겨날 때까지 책에 매달렸습니다. 매일 코피를 쏟았고 코피가 터지지 않은 날은 스스로 게으름을 피운 것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소풍을 갔다가도 곧바로 도서관으로 직행했습니다. 정말로 하루하루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간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100m 달리기 도중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진정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상고를 마친 후에는 은행에 들어갔습니다. 적성과 상관없이 돈을 많이 준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일도 못하는 주제에 대학 다닌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1년 동안 코피를 터뜨리며 공부했던 이후로 주어진 일은 무엇이든지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조운호의 성공코드
▲감(感)=초상화를 그려주고 아내와 결혼했다. 문학, 그림, 풍물의 재능에 최근엔 서예에 맛을 들였다. 이런 예술가적 기질은 그를 대박으로 끌어올린 밑바탕이기도 하다. 돈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감은 모두 적중했다. 그에게 딴따라들과의 술자리는 그런 감각을 확인하고 넓혀주는 자리다.
▲운(運)=위기를 운으로 바꿨다. 조 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운수 운(運), 좋을 호(好)`로 풀이한다. 20세기 말 복고주의 바람이 한창이던 때 아침햇살을 내놓은 것이 운이 좋았고 웰빙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 자연의 맛을 내세운 제품인 `자연은`을 출시한 것이 시대적인 흐름을 적절히 탄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가 잡은 운은 타이밍이었다.
▲신(神)=신명 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회사 경영을 무당의 작두타기에 비유하는 그는 신들리지 않으면 발을 베이는 것처럼 신명이 나야 한다고 말한다. 철저한 시장조사나 자기와의 싸움 모두 신들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카콜라를 제치고 매출 20조원의 회사로 우뚝 설 때까지 그의 작두타기는 이어질 것이다.
▲풍(風)=풍물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징은 바람을 뜻한다. 그는 바람의 크기는 잴 수 없지만 형체가 없어 그 크기는 내 맘 먹기에 따라 커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이라도 내가 주인이면 달라진다는 얘기다.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 웅진식품의 올해 경영 목표도 `새로운 바람을 만드는 해`로 정했다.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그의 사고관이 묻어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