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축으로 한 기존 한글 고소설 발전 도식은 허구"박상현 입력 2021. 07. 18. 07:05 댓글 5개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 조동일 명예교수 '한국소설의 이론' 비판
"작품 안 보고 이론에 끼워맞춰 문제..상상력 필요하나 기록 벗어나선 안 돼"
한글소설 '홍길동전'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글 소설 '홍길동전' 저자는 허균(1569∼1618)이 아니라는 주장을 꾸준히 해온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가 홍길동전을 출발점으로 삼는 한글 고전소설 연구 방법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18일 학계에 따르면 이 전 교수는 한국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한국연구'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1977년에 내놓은 '한국소설의 이론'을 고찰한 뒤 "한글 고소설 연대기에서 핵심축을 맡은 작품이 홍길동전이라는 견해는 실상과 거리가 먼 머릿속 허구"라고 주장했다.
이 전 교수가 '한국소설의 이론'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고전문학 연구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작이고, 지금도 중등학교 교과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에 비판한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김동욱의 '춘향전 연구'와 마찬가지로 '한국소설의 이론'도 기본적 내용이 사실에 어긋나며, 작품을 하나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이론에 끼워 맞춰 도식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이 전 교수는 특히 '한국소설의 이론'에서 "영웅소설은 본질적으로 17세기 소설", "영웅소설은 홍길동전에서 시작됐다" 등의 대목을 문제 삼았다.
그는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논의는 1960년대 말에 이미 나왔다"며 "조동일은 홍길동전을 분석하기 위한 대본으로 경판 24장본을 선택했는데, 이 이본(異本)은 방각본(坊刻本, 조선 후기에 민간업자가 출판한 책) 중에서도 후반부가 대폭 축약돼 원본과는 거리가 있다"고 했다.
홍길동전은 다양한 판본이 전하는데, 원본에는 경판 24장본이 아니라 충남대본이나 89장본이 가깝다고 이 전 교수는 주장했다.
앞서 이 전 교수는 조선시대 문인 황일호(1588∼1641)의 문집에서 한문으로 쓴 홍길동 일대기인 노혁전(盧革傳)을 발굴해 '홍길동전'이라는 이름의 한문 소설과 한글 소설은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허균이 설령 홍길동전을 썼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홍길동전과는 거리가 먼 한문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전 교수는 "조동일이 영웅소설을 3기로 나눈 것은 작자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홍길동전과 구운몽을 중심에 둔 뒤 내용상 관련이 있는가를 따진 결과"라며 "이기철학, 영웅의 일생, 자아와 세계의 대결 등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 고소설을 정리하겠다는 조동일의 연구는 고소설 실상을 왜곡하는 길로 나아갔다"고 강조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국문학계에서 연구 성과가 축적됐음에도 한국 고전문학 연구에서 이전에 확립된 견해를 면밀히 성찰하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이 전 교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중국 소설집 '전등신화'의 단순한 모방작이고, 금오신화는 후대의 한글 고소설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며 "허균과 박지원의 한문 소설도 작자 미상의 한글 소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양반 사대부의 글쓰기"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글 고소설의 창작은 중국 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익힌 소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됐고, 상류층에서 즐기던 오락인 소설 독서가 18세기에 책을 빌려주는 세책집이 생겨나면서 일반에 퍼졌다"며 "한글 소설이 대중 오락물이 된 뒤에도 19세기 후반까지는 독자가 수도권과 전주 등에 국한됐고, 1910년 무렵 활판본 고소설이 나오면서 전국적으로 확산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교수는 "한문 시조와 가사는 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지만, 한글 고소설은 저자와 창작 시기를 파악하기 힘들어 발생과 전개를 알아내기 힘들다"며 "한글 고전문학 연구에도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기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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