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위와 탐심
박래녀(여)
마당가의 매화가 탐스럽게 피었지만 난달에 있는 물이 꽁꽁 얼 정도로 강추위가 사흘째다. 꽃샘추위에 다리 밑 거지가 동사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내가 늙은 것인가. 올해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탄다. 겨울이 되어도 실내에서 맨발로 다닐 정도로 추위를 안타던 내가 올해는 털양말을 한 시도 못 벗었다. 고무장갑을 끼고도 찬물에 설거지를 못하겠다.
산골짝 야생 머위 밭의 첫물은 늘 아랫집 형님과 나만의 특허품이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머위가 피는 곳이다. 해마다 머위를 뜯으러 산에 오른 기록을 적으니 비슷한 시기에 채취에 나선다. 일 년 만에 오르는 산이다. 올해는 형님이 영 힘이 든단다. 겨우내 춥다고 웅크린 탓도 있지만 나이 탓이다. 노인의 건강은 한 해가 다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오히려 건강해진 느낌이다. 꾸준히 한 수영 덕인지 꾸준하게 먹는 울금 가루 덕인지 모르나 걷는 게 한결 수월하다.
숲에서 참꽃을 찾는다. 진달래를 여기서는 참꽃이라 한다. 먹을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철쭉은 개꽃이라 한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해마다 첫 머위를 따러 갈 때면 참꽃이 살짝 볼 붉히며 꽃받침을 열고 내다보곤 했는데 올해는 눈을 씻고 찾아도 발그레한 참꽃봉오리가 없다. 겨울은 따뜻했는데 의외로 꽃샘추위는 진한 것 같다. 그래도 골짝의 물은 풍부하다. 머위는 생각 외로 적게 솟아 있다. 조금만 따고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머위 꽃 맺은 것은 따지 않고 둔다. 멧돼지가 낸 길인지 사람이 다닌 길인지 머위 밭 위로 가랑잎을 밟은 흔적이 뚜렷하다.
머위를 적당량 뜯어놓고 형님의 가방도 채웠다. 서울아줌마인 형님은 일손이 느리다. 내가 한 가방 뜯을 때 반가방도 못 채운다. 올해는 머위가 많이 피지 않아 욕심껏 뜯지 않았다. 첫물이니까 시댁과 우리 집 한 두 끼 반찬거리면 만족이다. 갈색 가랑잎 속에 초록색은 돋보인다. 여기저기 덤불 속에 소복소복 나 있는 달래도 캤다. 달래장에 머위나물 초무침이면 저녁 한 끼는 특별 식이 된다.
빵빵해진 가방을 챙겨 하산을 하다 골짝의 너럭바위에 앉아 숨 고르기를 한다. 세상이 어쩜 이리도 고요할까. 포롱, 포롱, 날아다니던 산새들조차 조용히 나뭇가지에 앉아 바라본다. 산자고의 긴 잎사귀도 별로 안 보인다. 산자고가 유난히 많은 곳인데. 지난해 봄에 오르고 첫 길인데 주변이 한산하다. 야생복숭아 나무와 돌배나무가 여러 그루 수난을 당했다. 고목이니 열매를 따기에 불편한 것은 알지만 제 욕심 채우고자 나무 자체를 베어버리는 행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이 안 된다. 특히 벤 나무를 골짝에 던져 놓고 가는 행위는 욕 나온다. 왜냐면 여름에 폭우 내리면 그 나무에 지푸라기가 걸려 골짝의 형태가 바뀌니까. 골짝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나무 등걸을 꺼내 안전한 산비탈 위로 올려놓고 한숨을 쉰다.
부처님은 이생을 살면서 이타 행을 하라 했건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모두 자기본위로 산다. 남을 위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손해 보는 느낌부터 가진다면 그런 사람이 과연 이타 행을 할 수 있을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라도 알면 고마운 일이다. 야생 돌배나 돌복숭아가 귀한 무공해 약이라고 알려지면서 수난 당하는 나무가 되었다. 특히 편하게 차가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산골짜기는 남아나는 게 없다. 나무 열매는 따 가되 다음 해를 위해 나무는 살려두는 아량을 가졌으면 좋겠다. 야생 배나무나 복숭아나무가 자라 열매를 달기까지 적어도 오년 이상이 걸린다. 야생일수록 귀하게 여길 수는 없을까.
집 앞에 커다란 야생 돌복숭아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우리가 터 잡고 집을 지을 때 내 손가락 크기만 한 것을 파버리지 않고 키웠었다. 돌복숭아 나무는 십 수 년이 지나자 아주 탐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복사꽃이 피면 얼마나 탐스럽던지 집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그만큼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하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달았다. 길가에 차를 대 놓고 우리 집까지 들어와 돌복숭아를 따 가는 사람들이 무시로 생겼다. 돌복숭아는 야생이라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키우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이태 전,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돌복숭아 나무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작은 톱으로 잘라 열매를 땄는데 나무의 형태가 볼썽사납게 변해 있었다. 결국 남편이 나무를 베어버렸다. 벤 이유는 사람들 탐심을 자극한다는 거다. 그 나무를 키우는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거다. 나무가 너무 우람하게 자라서 시야를 막는다는 것도 이유다. 그 옆에 있던 자두나무 역시 베어냈다. 봄이면 온통 내 마음을 향기롭게 하던 꽃나무다. 열매보다 꽃이 좋아 사랑하던 나무다. 화사한 분홍빛 복사꽃과 너무 희어서 옥빛이 도는 자두 꽃무리는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내 허락 없이 베어버린 남편이 한동안 얼마나 미웠는지.
그래도 사람은 산다. 온갖 기억을 잊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며 사는 동물이 인간 아닌가 싶다. 그렇게 살다 자신도 모르게 늙어가고, 어느 날 이승을 떠난다. 이승에 올 때도 발가벗은 홀몸이었듯이 저승 갈 때도 발가벗은 홀몸으로 간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나는 머위를 깨끗하게 가려 살짝 삶았다. 된장, 식초,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한통은 따로 담아 멸치 볶음과 미역국을 끓여 시댁에 갖다 드렸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머구나물 덕에 입맛이 돌아왔다고 좋아하셨다.
<2016. 그린에세이 3, 4월 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