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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旨文學見麗史 | 翰林學士 | 尙書左僕射 | 光祿大夫 | 擢魁官至銀靑 | 初諱鍊成 | 軌 | ||
궤 |
궤(軌) (初諱 錬成 尙書左侯)
고종 갑자5월 장원으로 급제 벼슬이 간의대부와 한림학사 승지 예부시랑을 거쳐 상서좌복야가 됨. 6형제를 두어 자손이 번창 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초명 김연성(金鍊成) 본관 경주
[부]김인경(金仁鏡)
[조부] 김영고(金永固)
[증조부] 김수지(金壽之)
[처부] 민광균(閔光鈞)
[처부2] 권위(權韙)
1264년(원종 5) 몽고가 친조(親朝)를 요구하자 왕은 음양가(陰陽家)인 백승현(白勝鉉)의 말을 믿고 마리산(摩利山)에 가궐(假闕)을 지어 모면하려 하였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으면서 “혈구(穴口)는 흉한 산인데 승현이 대일왕(大日王: 摩利毘盧遮那의 음역으로 태양이 가진 속성처럼 중생들을 두루 비추어 지혜의 광명을 내는 부처라는 의미)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불사를 일으키도록 고종에게 권했지만 얼마 아니되어 고종이 죽었다.”고 하는 전왕(前王)의 일을 들어 박송비(朴松庇)를 통해 당시의 권신 김준(金俊)에게 승현의 말을 물리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승현의 말을 믿고 있던 김준에 의해 죽음을 당할 뻔 하였다.
1269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된 뒤 1272년 동서학당이 설치되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별감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외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갑오 21년(1234), 송 단평(端平) 원년ㆍ금 천흥 3년ㆍ몽고 태종 6년
○ 봄 정월에 큰바람이 불고,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
○ 병부시랑 홍균(洪鈞)을 보내어 서경을 안무하게 하였다.
○ 여러 도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궁궐과 백사(百司)를 짓게 하였다.
○ 2월에 장군 김보정(金寶鼎)을 몽고군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 변경에서 보고하기를, “몽고 군사가 동진(東眞)에 백여 기(騎)를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끌고 돌아갔다." 하였다.
○ 연등(燃燈)하러 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 고 참정(故叅政)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삼고, 민가를 헐어 연(輦)이 다닐 길을 넓히었다. 이 때는 천도한 초창기이나, 대체로 구정(毬庭)과 궁전과 사사(寺社)의 이름을 다 송도를 본떴고, 팔관(八關)ㆍ연등ㆍ행향(行香)ㆍ도량(道場)은 한결같이 구식(舊式)에 의거하였다.
○ 3월에 대장군 조숙창(趙叔昌)을 저자에서 베었으니, 필현보(畢賢甫)의 말에 인한 것이었다.
○ 큰바람이 불고, 대궐 남쪽 동네에서 불이 번져 건물 수천여 채가 연이어 불에 탔다.
○ 여름 5월에 김연성(金鍊成) 등 31 명과 명경(明經) 2 명과 은사(恩賜) 8 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시중 김취려가 졸하였다. 취려는 계림 언양군(彦陽郡) 사람으로, 절약하고 검소하며 정직하였다. 일찍이 조충(趙沖)과 더불어 거란 군사를 막아 싸울 때, 군중의 일은 모두 조충에게 사양하고, 싸움에 임하여 적을 제어함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계교를 많이 내어 큰 공을 이루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니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진정으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시호를 위열(威烈)이라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논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덕이 아직 쇠하지 않았을 때에 화란의 싹이 혹 일어나면, 반드시 걸출하고 재지가 있는 신하가 임금의 위임을 받아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게 되니, 사직의 신령이 가만히 도와 주는 것이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최씨 부자가 대를 이어 정권을 잡아, 안으로는 견고한 병갑에 의지해 권력을 휘두르니, 지혜 깊은 자가 쓰일 수 없다. 또 밖으로는 나약한 군사에게 공격과 전투의 책임을 맡겨 놓고 공을 많이 세운 자는 의심하니, 이런 때에는 공을 세우려 힘쓰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금나라가 운이 다되자 요나라의 흉악한 자들이 난을 일으키어 우리 나라 강토를 엿보고 소굴을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멀리까지 와서 싸우는 궁한 도적이라 그 칼날을 당할 수 없었다. 원나라 태조가 일어나자 만리에 장수를 보내어 국경을 압박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적을 토벌하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에 응하려 하자니 그들의 뜻대로 맡겨 둘 수 없었고, 그에 거스르자니 반드시 다른 변고가 생길 염려가 있었다. 국가의 안위가 판가름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좌우로 보좌하여 멀리 있는 나라와 연합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였다. 그렇게 하여, 몽고가 일어나는 초기에 종맹(宗盟)을 정하고, 숨돌릴 사이에 국가를 안정하게 하였으니, 어찌 걸출하고 재지가 있는 신하이면서 사직의 신령이 가만히 도운 것이 아닌가. 그가 좋은 음식을 마다한 채 부하들의 거친 밥을 나누어 먹으니 그들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였고 명령하면 반드시 그대로 행하여져서 추호도 범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하겠다. 개평(開平)의 전쟁에는 그가 두 번이나 중군(中軍)을 구하였는데, 사현(沙峴)의 전쟁에서는 노공(盧公)이 도와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 불평이 없었기 때문에 혐극(嫌隙)이 생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다른 여러 사람에게 공을 돌렸으니 이는 대인 군자의 마음씀씀이다. 먼저 합진(哈眞)에게 나아갔던 것은 진실로 동맹한 우방의 마음을 굳히게 하였고, 만노(萬奴)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존왕의 의리를 분명히 한 것이다. 다지(多智)와 한순(韓恂)의 목을 베고서는 군사를 거두어 전투를 끝내어 변방 백성을 편안히 하였으니 원모(遠謨)와 대절(大節)이 더욱 견줄데 없다. 사관(史官)이 그 충의를 칭도하고 태상(太常 시호를 논의하는 관청)에서 위열(威烈)이라고 시호를 내리니, 역시 의당하지 않느냐." 하였다.
○ 가을 7월에 내시 이백전(李百全)을 보내어 왕의 옷을 남경(南京)의 가궐(假闕)에 봉안하였다. 어떤 중이 도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부소산(扶蘇山)에서 갈려 나온 것이 좌소(左蘇)로서 그것을 아사달(阿思達)이라 하였으니 옛날의 양주(楊洲) 땅입니다.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면 나라의 운세가 8백 년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 8월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으나 짙은 구름으로 보이지 않았다.
○ 9월에 회안공(淮安公) 정(侹)이 졸하였다.
○ 겨울 10월 경인일에 최우를 책봉하여 진양후(晉陽侯)로 삼았다. 이 보다 먼저 왕이 조서를 내려, “최우의 천도한 공은 후로 봉하고 부(府)를 세울 만하다." 하니, 백관이 모두 그 집에 가서 하례하였다. 왕이 을해일에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최우가 조서를 맞을 예물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사양하므로 이 날을 택한 것이다. 이에 주와 군에서 다투어 선물을 바쳤다. 우가 제 집을 짓는데,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또 소나무ㆍ잣나무들을 실어다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 원림이 넓기가 무려 수십 리였다.
○ 11월에 태조(太祖)의 신어(神御)를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 봉안하였다.
동국이상국문집 연보
연보(年譜)
갑오년(1234, 고종 21) 공의 나이 67세.
5월에 춘장 지공거(春場知貢擧)로 열시(閱試)하여 김연성(金鍊成) 등 31인과 명경(明經)에
이방수(李邦秀) 등 2인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 정당문학 감수국사(政堂文學監修國史)에 제수되어 칙명(勅命)을 받고 송광사주(松廣社主) 법진각국사(法眞覺國師)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동쪽으로는 울산군계(蔚山郡界)까지 61리, 장기현계(長鬐縣界)까지 83리, 남쪽으로는 언양현계(彦陽縣界)까지 62리, 서쪽으로는 청도군계(淸道郡界)까지 76리, 영천군계(永川郡界)까지 53리이며, 북쪽으로는 영일현계(迎日縣界)까지 3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다. 한(漢) 나라 오봉(五鳳) 원년에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으며 이 뒤로부터는 방언(方言)으로 왕경(王京)을 서야벌이라고 통칭하였다.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脫解王) 때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基臨王)이 다시 신라로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 하였다. 뒤에 승격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으며, 성종(成宗)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또 유수사(留守使)라 일컬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때에 강등(降等)시켜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고, 또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다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하였다. 그때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경유수를 둔 것이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州)ㆍ군(郡)을 겁략(劫掠)하므로 사자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뒤에 동경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尙)ㆍ청(淸)ㆍ충(忠)ㆍ원주도(原州道)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반란을 음모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고, 관내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을 빼앗아 안동(安東)ㆍ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유수로 고치고, 충렬왕 때에 계림부(鷄林付)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태종조(太宗朝)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쓰고,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중략>
김인경(金仁鏡) 처음 이름은 양경(良鏡)이었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여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글안(契丹) 군사를 강동성(江東城)에서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인경은 문(文)ㆍ무(武) 재주가 모두 넉넉하였으며, 천품이 맑고 아름다워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郞署)에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왕공이나 부녀로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김연성(金鍊成) 인경의 아들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한림(翰林)을 거쳐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 사람이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온화하며 너그럽고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며 담략(膽略)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민간이나 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였는데, 갑자기 최항(崔沆)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김혼(金琿) 경손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대장군 중찬(大將軍中贊)이 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간 뒤에는 임시로 행성사(行省事)를 서리(署理)하였다. 뒤에 낙랑군(樂浪郡)으로 봉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순효대왕 1(元宗順孝大王一) 갑자 5년(1264)
○ 국자좨주(國子祭酒) 장일(張鎰)을 몽고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표(表)를 올리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상조(上朝)의 덕에 의하여 동쪽 경계에 봉하여졌습니다. 전에 친히 뵙고 돌아오려 할 때에, 갑자기 두 번 조회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물러가서 전란에 흩어진 쇠잔한 백성을 거두어 모두 옛 땅에 나와 살게 하여, 안정이 될 때에 이르면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밝으신 훈계를 공손히 받고 돌아와서 작은 나라의 정상을 살펴 본 즉, 병란과 흉년과 역질이 서로 덮친 지 30년에 거의 모두 없어지고 망하였으니, 산으로 바다로 유리표탕(流離漂蕩)한 남은 백성을 4ㆍ5년 동안에 어떻게 불러모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회복하고 경영하는 것이 끝나지 못한 것은 왕래하는 사신이 실제로 본 것입니다. 이제 조서로 부름을 받으니 실로 더욱더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부름이 있으니,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릴 여유 없이 즉시 길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薄)한 폐백과 간단한 행장이나마 어찌 잔폐(殘廢)한 번국(藩國)이 쉽게 마련할 수 있으며, 먼 길 혹독한 더위가 진실로 약한 몸으로 감내할 바가 아니니, 서늘한 시절을 기다려 대궐에 조회하려 합니다. 이런 사사로운 편의를 봐주시길 바람은 또한 특수한 용서와 애휼을 오로지 믿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지극한 인덕(仁德)으로 길이 깊은 사랑을 내리소서." 하였다.
○ 중랑장 백승현(白勝賢)이 참정 김준(金俊)을 통하여 아뢰기를, “친히 참성단(塹城壇)에 제사지내고 또 삼랑성(三郞城) 신니동(神泥洞)에 가궐(假闕)을 지으며, 친히 오성도량(五星道場)을 베풀면 몽고에 조회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고, 삼한(三韓)이 변하여 황제국이 되고 큰 나라가 와서 조회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믿고 대장군 조문주(趙文柱), 좨주(祭酒) 김구, 장군 송송례(宋松禮)와 승현 등에게 명하여 가궐을 창건하게 하였다. 예부 시랑 김궤(金軌)가 우복야 박송비에게 말하기를, “혈구(穴口)는 흉한 산인데 승현이, '대일왕(大日王)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 하여, 일찍이 고종(高宗)께 아뢰어 크게 불사(佛事)를 열고 임금의 의대(衣帶)를 봉안(奉安)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 고종이 승하하셨다. 이제 또 감히 부언(浮言)을 만들어서 아뢰어 가궐을 창건하고 또 혈구사(穴口寺)에 친히 대일왕도량을 베풀 것을 청하니 이것은 믿을 수 없다. 청하건대, 공은 금하게 하라." 하였다. 송비가 김준에게 고하였으나 준은 승현의 말에 깊이 혹하였기 때문에 김궤를 베어 죽이려다가 그만 두었다.
○ 도둑이 횡천(橫川)ㆍ홍천(洪川) 두 고을에서 일어났다. 과거에 횡천 백성 시가대(屎加大)는 8명의 아들과 한 사위가 산골짜기 사이에서 고기잡고 사냥하며 살고 있었는데, 홍천과 횡천 사람들이 미워하여 야별초 지휘(夜別抄指揮)에게 고(告)하여 잡기를 청하였다. 그 집에 이르니 마침 9명이 사냥하러 나갔으므로 그 부모와 처자만 죽였는데 이에 9명이 원수 갚기를 도모하여 드디어 일어나서 도둑이 되어 두 고을 백성 30여 명을 죽인 것이다. 충청도 안렴사(忠淸道按廉使)가 아뢰기를, “오랑캐 군사가 밤에 단천(簞淺)을 건넜다." 하여, 조정과 민간이 경동하여 야별초로 하여금 탐지하여 보니 곧 횡천 도둑이었다.
○ 김주정(金周鼎) 등 2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원종 순효대왕 2(元宗順孝大王二) 임신 13년(1272)
○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하고, 판비서성사 김궤(金軌)와 상서좌승선 문열(文烈)을 별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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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맑고 푸른하늘 만큼
오늘도 상쾌하게 시작 하시고
멋진일들로 가득채우는
신바람나는 11월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가을날의 맑고 푸른하늘 만큼 오늘도 상쾌하게 시작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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