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길 / 양선례
‘어머님, 오랜만에 찾아뵙고 인사 드렸는데 편하게 해 주셔서 이틀 동안 편히 잘 쉬다가 내려갑니다. 현우 정식 발령 나면 어머님,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혼 순차적으로 준비해 나갈게요. 좋은 말씀 해 주시고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틀 동안 좋은 추억 만들고 갑니다.’
며칠 전부터 머리가 아팠다. 주변 지인들에게 뭘 준비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으나 나와는 처지가 달라서 큰 도움은 못 되었다. 제대로 하려면 집 청소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남편이 청소는 도와줘서 음식만 준비하면 되었으나 한 끼 잠깐 먹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아들이 취직되자 남편은 여자 친구를 정식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꽤 오래 사귄 터라 취직만 되면 결혼할 거라는 말을 작년부터 들어서였다. 그래도 이제 겨우 인턴 교육 2주 받아서 정식 발령지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인사 올 줄은 몰랐다. 늘어가는 오미크론 확진자로 학교도 비상이었다. 지난주에는 가족이 확진되어도 잘 견뎌 내던 교감 선생님도 확진되었고, 내 오른팔 역할을 하던 교무 부장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학교에 오지 못했다. 1일 3역으로 허둥대느라 안 그래도 바쁜 학기초가 더 피곤했다.
대학 입학하면서 집을 떠난 아들이 여자 친구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것은 군대 갈 무렵이었다. 여자 친구 만날 욕심으로 육군이 아니라 의경을 지원한다고 했다. 여러 번 탈락했지만 합격할 때까지 도전은 이어졌고, 대학 3학년을 마치고서야 겨우 군대를 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배치받은 곳이 광화문 한복판이었다. 때는 문재인 정부라서 매주 대규모 시위로 시끄럽던 ‘탄핵 정국’은 피했으나 어버이 부대나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의 교회 시위로 출동할 일은 잦았다. 그들은 아들에게 침을 뱉거나 욕을 하고, 심지어는 때리기도 한단다. 긴 시간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린 예비 며느리나 전역과 졸업, 취업 그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변치 않는 믿음으로 이 자리까지 온 아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는 요즘 젊은이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첫사랑과 십 년 동안 연애하고 끝내 결혼에 이른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었는데, 그건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들은 패러글라이딩 동아리에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 활공하려면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기에 기초 체력 훈련도 하고, 활공하기 좋은 곳을 찾아 여행도 잦은 모양이었다. 위험 부담도 높고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쉬운 운동이라서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조차 걱정이 되었으나 말릴 수는 없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에는 지도자 자격증을 딴다며 멀리 포항까지 가서 두 달을 지내다가 검게 그을려서 나타났다. 아들이 회장, 예비 며느리가 부회장을 하면서 친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게 요즘 아이들인데 아들은 그런 쪽엔 젬병이었다. 대학 가서 첫 번째로 사귄 여자 친구랑 오래 교제하여 결혼까지 한다니 내 아들이지만 신기하다. 세상의 반이 여자인데 한 여자만 바라보고 청춘을 보낸 건 좀 아쉽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가슴 아픈 이별도 해 봐야 유행가 가사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여러 번 사랑해도 흠이 되지 않는 건 청춘의 특권인데 말이다.
직장인에게 꿀맛 같은 휴일 아침잠을 포기하고 일어나자마자 잡채를 만들었다. 점심 메뉴로는 샤브샤브를 준비했다. 어제 시장에서 산 싱싱한 전복과 지금이 제철인 주꾸미, 오징어 등의 해산물과 차돌박이 쇠고기, 부드러운 미나리를 손질하고 육수를 내다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공항에는 –예비 며느리의 직장이 제주도다.- 남편이 마중 나갔다. 다행히 가리는 것 없이 뭐든지 잘 먹는단다. 먹는 걸 중시하여 다른 집보다 식비가 많이 드는 우리 집 며느리로 일단 합격이다. 게다가 술까지 잘한다니 남편이 좋아하겠다. 술 한 잔 못 마시는 나를 쏙 빼닮은 아들은 아빠의 술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기에 남편은 그 점을 늘 아쉬워했다.
씻고 채 꽃단장도 못했는데 예비 며느리가 들이닥쳤다. 어제 내게 알려준 시각보다 삼십 분이 일렀다. 평상복 그대로인 데다 머리카락은 젖었고, 립스틱 하나 바르지 않아서 혈색 없는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제 한 식구 될 것인데. 나부터 편하게 마음먹자.’ ,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한데…….’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더라.
남편이 좋아하는 양주와 제주도 공항에서만 판다는 ‘춘식이’ 를 선물로 사 왔다. 어쩌다가 내가 걔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을까. 제주도 공항에서만 살 수 있다는 ‘제주도판 춘식이’는 해녀를 형상화했다. 이마에는 커다란 수경을 쓰고, 오른팔에는 주황색 비닐로 된 테왁을 들었는데 그 위에는 앙증맞은 문어가 한 마리 앉아있다. 조랑말, 돌하르방, 감귤 춘식이까지 있다니 아이디어 시대라는 게 실감난다. 어찌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한 번 보면 어른도 금세 마음을 뺏겨버린다. 나만 해도 큰딸이 사 준 일반적인 고양이에 이어 정초에 파리바게뜨 이벤트에 당첨되어 아들이 선물한 호랑이 모양까지 벌써 세 개째다. 어릴 때도 가져 보지 못한 인형 복이 뒤늦게 터진 거다.
좋은 안주에 술까지 있으니 남편 입이 귀에 걸렸다. 술은 힘이 세다. 어려운 자리가 금세 말랑말랑해진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등이 가렵기까지 하는 아들도 술잔을 거들다 보니 오가는 이야기가 정겹다. 미나리와 해산물을 건져 먹기 좋게 잘라 주는 내 손길만 분주하다.
언제 아들이 이리 컸을까. 어느새 결혼한다니 그저 대견할 뿐이다. 객지 있는 동안 나 대신 아들을 챙기고 사랑해 준 예비 며느리도 고맙다. 바르게 키웠으니 아들의 선택도 존중해야지. 성인인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리라. 좋은 인연으로 우리 식구 될 예정이니 두 팔 벌려 환영해야겠지. 지금껏 내가 낳은 아이 셋하고만 지지고 볶았는데 이제는 새 식구를 들여야 한다. 사는 곳도, 가풍도 전혀 다른 아이와 가족이 되어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 큰일 한 가지를 해치워서 후련하면서도 걱정이 된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이제는 내가 번호표 탔다는 자각이 들 때처럼 경사스런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두 누나 제치고 먼저 결혼하는 게 흉이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많이 어렵고 불편한 걸음이었을 텐데 와 줘서 고맙다. 잘 먹고, 잘 놀아준 것도. 차차 서로를 알아가며 친하게 잘 지내보자.’ 나도 답을 보낸다. 그녀는 제주도로, 아들은 집합 교육지인 경기도 이천으로 떠났다. 시끌벅적하던 집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이제야 간밤부터 내린 봄비가 눈에 들어온다. 천금 같은 단비로 열흘이나 이어지던 울진의 산불이 진화되었다는 기사도 읽는다. 이렇게 또 어른이 되어 가나 보다.
첫댓글 그림같은 글 한편 잘 읽고 갑니다. 축하 드려요.
매번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시네요. 그렇더라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으니 가상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옛 말이 생각납니다. 의도적인 무관심이 자립심과 의사결정력을 키운다잖아요. 광야로 내 보낸 자식이 큰 나무로 자라 보란 듯이 돌아왔네요? 가슴 벅차겠어요. 축하합니다.
이틀의 무거운이 이제는 좋은 기억으로 남겠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가득한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랑듬뿍 담긴 엄마의 마음 느껴지는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출간 작가라 다르시네요.
하하 드디어 일이 벌어지는군요. 축하하고 주말 예비 며느리 맞느라 고생했습니다. 새 식구를 보고 가슴이 벅찼을거예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예비 며느리를 맞이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아니 벌써 시어머니 반열에 오르시네요. 축하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 넉넉한 품에는 늘 행복이 움트는군요.축하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드님 취직에 예비 며느리와 상견례까지 경사가 이어지네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혹시 창공에서 패러글라이딩 타고 하는 건 아닌지요?
선생님 댁의 경사가 글쓰기반 식구들 가슴을 훈훈하게 합니다. 언제나 정감있고 사랑스런 글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예비 며느리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가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