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 이야기 4
항거 정선, 아리랑 고개를 넘고 또 넘은 정선사람들
<고단한 울타리를 뚫은 정선사람들>
사북 낡은 사택 앞에서 봄날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정선아라리를 소리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노인의 나이는 언뜻 보아도 80세를 훌쩍 넘겼습니다. 이마에는 깊게 주름이 잡혀도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서려 있었습니다. 노인은 나에게 되물었습니다.
“사북 항쟁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요.”
“예.”
노인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정선아라리의 후렴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를 어떻게 알고 있나요?”
노인은 내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정선아라리>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아마도 정선사람 중에 아라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요. 그중에 후렴인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는 참 깊은 의미를 띠고 있지요.”
노인은 갑자기 <정선아라리>의 후렴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랬습니다. 이 구절은 꿈을 찾아 대처로 나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게 담긴 구절입니다. 얼마나 고개를 넘고 싶으면 소리마다 이렇게 후렴을 달았을까요. 그러나 정든 삶의 터전을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고, 또 용기가 없어서 고개를 넘지 못했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를 넘겨주게’라고 부탁합니다. 어쩌면 정선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말끝에 ‘있잖아요’, ‘제가요’처럼 ‘~요’자가 많이 붙고 높여 말하는 사투리도 이런 특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선아라리에서 ‘나를 넘겨주게’라는 후렴을 들을 때마다 가슴 먹먹해집니다. 정말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아니까요. 그러나 자신들의 힘든 삶 속에서도 울타리에 갇힌 현실을 뚫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늘 가슴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지요. 그만큼 기존 삶의 굴레는 자신의 꿈을 옥죄는 높고 큰 울타리였습니다. 노랫말이 말하듯 누군가 함께 하고 등 떠밀어 주면 울타리를 나와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정선을 꿈꾸게 했던 검은 황금>
노인은 정선아라리 얘기를 한참 하다가 다시 사북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구원의 손길이라 할까. 검은 황금이 무진장 쏟아졌지요. 1962년돈가 할거요.”
노인은 사북리 노른가리에 살면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땅뙈기에 가끔 화전을 해서 옥수수, 메밀, 감자를 심어서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았지요. 소출은 많지 않아도 끼니는 때울 수 있으니, 그래도 하루 두 끼 먹는 이웃들보다는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인이 20살 젊은 청년이었을 때입니다.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검은 황금이 막 쏟아졌지요. 석탄 말이요. 천지개벽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요.”
그 순간 노인의 눈동자에는 반짝 빛이 났습니다. 아마도 옛 사북의 황금기를 떠올린 것일 겁니다.
“정말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지요. 농민 몇십 명이 살던 마을에 갑자기 수만 명의 사람이 왔어요. 와, 정말 엄청났어요.”
사북과 고한의 계곡마다 집들이 들어서고, 시장이 서고, 화려한 술집이 생기고, 아이들이 늘어나 학교 교실을 늘리다가 모자라 수업을 2교대로 했습니다. 정말 호황을 누렸지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호황을 누린 탄광 일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라, 저금은 생각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번 만큼 썼으니까요. 고생 참 많았습니다. 화려한 이면에 담긴 아픔이었지요. 부인들까지 탄을 고르는 선탄(選炭)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생사를 걸고 탄을 캤지만, 막상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낙원이라 여겼던 황금 석탄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점점 지옥으로 변해 갔습니다. 노인은 힘주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의 노임과 복지가 이뤄지기를 바랐어요. 복권처럼 일확천금을 바라지는 않았지요.”
<진달래 움튼 1980년 4월 21일,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자 뭉친 그날>
노인도 그날 사북 항쟁 현장에서 목소리 높여 외쳤다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정선의 진달래는 4월이 되어야 움틉니다. 두위봉 꼭대기에 아직 눈이 쌓였는데, 진달래는 분홍색 속살을 드러냅니다. 그때였어요. 사북의 탄광 노동자들은 진달래 꽃망울 터트리듯 일한 만큼의 정당한 노임과 복지를 외쳤습니다.”
참고 참다가 터진 봇물이라 할까요. 노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자 편을 들며 이익을 챙기는 일명 어용노조였어요.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어용노조 퇴진과 노동조합 직선제실시, 합리적 임금 인상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순수한 노동자들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절이라 법적으로 정당하지만, 노조의 투쟁은 통용될 수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현실의 고개를 넘으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사용자는 정부와 결탁하여 암행 정찰대를 만들어 노동자를 감시했습니다. 시위를 막기 위한 사용자의 폭력은 더해갔습니다. 자동차로 시위 현장을 밀고 나가 노동자와 경찰 160여 명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국가 혼란을 기도하는 ‘난동’과 ‘폭동’이라며, 대서특필했습니다. 결국 사건이 확대되자 정부는 협상단을 꾸려 24일 타협했지요. 4일에 걸쳐 행한 노동쟁의는 막을 내렸습니다.
“정부는 노동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81명의 노조원을 강제로 연행하여 군법회의에 넘겼어요. 광부들이 잠시 아리랑 고개를 넘고자 외쳤던 일인데 말입니다.”
노인은 그날의 고통을 생각하며 순간 눈물을 뚝 떨궜습니다.
<살갗 따가운 사슬을 뚫고 이룬 하이원리조트와 강원랜드>
“진달래 피는 사북의 4월은 참 의미 있는 날이지요. 사북의 노동쟁의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장식했지요. 노조도 뭉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줬거든요. 사북의 노동쟁의는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어요.”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1980년 4월의 사북 노동쟁의 정신은 이어졌어요. 1995년 ‘폐광지역 개발자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 합의문’을 이뤄냈지요. 소위 ‘3·3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사북 뿌리관에 새겨 있어요.”
정선 하이원리조트와 강원랜드가 생긴 내력입니다. 노인이 왜 사북항쟁을 물었을 때 <정선아리리>의 후렴을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선사람들은 아리랑 고개를 드디어 넘었습니다. 진달래 피는 4월 분홍빛 진달래가 활짝 피듯 정선사람들은 민주화 꽃을 피웠습니다. 오늘따라 할머니 어머니가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콩밭 매며 부르던 아리리 소리가 더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