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너를 어떡하지? / 고혜숙 헤이즐넛 커피라. 그 낯선 이름에 귀가 솔깃했다. 알고 보니 헤이즐넛 인공향을 입힌 커피였다.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향기에 끌려서 가끔 마시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사양한다. 언제부턴가 향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던 거다. '에스프레소'를 볼 때면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의 섬>이 생각났다. 어감이 비슷해서였을까? 처음으로 에스프레소 커피를 시켰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토록 작은 잔에 담아서 내놓을 줄이야. 함께 주문한 토스트를 적셔 먹을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누가 알랴만 괜히 창피스러웠다. 해서, 커피 탐구 생활에 들어갔다.
나에게 커피는 삼시세끼 마시는 보약 같은 거였다. "기왕이면 제대로 한번 마셔봐야지.' 커피 내리는 도구를 이것저것 사들였다.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보겠다고 1인용 커피 머신 비알레띠도 샀다. 모양이 앙증맞게 생겨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에스프레소 자체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재미에 빠졌다. 아래쪽 용기에 넣은 물이 어느 정도 뜨거워지면 압력 때문에 "슈욱!" 소리를 내면서 위쪽으로 올라온다. 진한 커피 향과 함께. 오감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크레마라 부르는 황금빛 거품이 생기면 성공한 것이다. 가끔 우유를 넣어서 라테를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카페에서 마시는 것만 못했다. 커피 가루까지 위로 올라와 버리면 마시기가 꺼려졌다. 입 안이 깔끔해지기는커녕 앙금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매번 기구를 청소하는 일도 귀찮았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내릴 수 있다는 더치커피로 갈아탔다. 눈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지는 찬물이 원두 가루를 적셔 주면서 만들어지는 커피인지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열 시간 가까이 기다릴 때도 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다. 원두를 너무 작게 갈거나 물이 떨어지는 속도 조절을 잘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커피 추출 원리는 엄연히 과학인 점을 소홀히 생각한 결과다. 그래도 만들어서 냉장보관을 해 놓고 원할 때 바로 마실 수 있어서 좋았고 친구들한테 선물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커피 맛이 기대와 다를 때면 조금 우울해진다. 버릴 수도 없고, 떨어질 때까지 억지로 마시기도 싫고. 여름이면 냉커피 마시던 것을 그만두고 보니, 굳이 커피를 냉장고에 넣어둘 필요도 없어졌다. 점점 거창한 기구를 사용하는 일이 시들해졌다. 결국, 핸드드립으로 돌아왔다. 분쇄기는 새로 구입했다. 오래 사용해서 콩이 잘 갈리지 않기도 했거니와 뭔가 새로 시작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달까? 원두도 이곳저곳에서 여러 가지를 사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과연 어떤 것인지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역시나 신맛이 나는 커피가 내 입맛에 맞았다. 처음에는 쓰지만 구수한 맛이 나는 커피를 좋아했다. 케냐 더블 에이를 좀 강하게 볶으면 내 입에는 그런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약하게 볶은 것으로 커피를 내렸더니 쓴맛과 더불어 신맛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탄맛이 없어서 좋았다. 산미가 풍부한 콩을 사기 시작했다. 주로 예가체프나 케냐 더블 에이, 좀 변화를 주고 싶으면 시다모, 만델링 등. 게이샤는 맛이야 좋지만 값이 너무 비싸다. 원두가 전적으로 맛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루의 굵기, 물의 온도 그리고 커피를 내리는 시간 같은 것이 원두 자체를 빛나게 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커피를 잠시 끊은 적이 있다. 식도염 때문에 식습관을 고쳐야 했다. 천천히 조금씩 먹고, 밀가루 음식과 커피는 멀리하는 것이 좋단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다. 하루빨리 커피를 마셔도 괜찮은 몸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남편이 보이차를 권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섬세한 미각을 갖지 못한 탓인지 보이차는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얼마간 마셔 보았지만 그때마다 젖은 지푸라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보이차도 카페인이 들어있기는 마찬가지다. 허브나 꽃차도 커피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참에 커피를 아예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다. 유행 따라 살다 보니 마시게 된 커피 아니던가? 날마다 쓰고 버리는 여과지 때문에 마음이 찜찜할 일도 없을 텐데, 커피 그까짓 것이 뭐라고.
목에서 느껴지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던 결연한 의지도 수그러들었다. '몸에 좋다는 것만 먹고살면 무슨 재미? 불량식품도 가끔 먹어줘야지.' 담배의 좋은 점을 몇 페이지라도 쓸 수 있다던 시인을 떠올렸다. '하루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침에만 한 잔! 융드립으로 돌아갈까? 그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굴지 말자. 여과지야 서너 번 재활용해 쓰지 뭐.'
원두는 10그램 정도만. 콩을 가는 동안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면, 절로 마음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자세를 가다듬고 주전자에서 떨어뜨리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의 커피맛을 결정하니까. 명상에 잠긴듯한 고요한 순간이다. 호사가 따로 없다. 커피 한 잔으로 누리는 여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