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 박미숙
고개 돌려 창밖을 보면, 막 돋아난 연두색 잎이 싱그럽다. 한쪽 벽면을 메운 책꽂이에는 즐겨 읽은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책상이 널찍하여 스탠드, 노트북과 책, 공책을 두고 찻잔도 올릴 수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옆에 두고 언제든 좋은 음질의 음악을 듣는다.
내가 꿈꾸는 방이다. 최근 들어 책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대부분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고 글쓰기 수업도 듣는다. 가끔은 거실의 낮은 탁자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한다. 큰 창으로 온통 초록인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고 몇십 년 된 가죽나무를 잘라 여러 달에 걸쳐 만든 귀한 데에서 공부하니 호사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짐을 이리저리 옮기지 않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짓는 내 공간을 갖고 싶었다.
학교 다니면서 책상을 가져본 적이 없다. 6남매 중 오빠만 있었다. 다섯 명의 딸은 상을 펴놓고 대신 써야 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책상이 있으면 좋겠다고 떠올리지도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기대해 봤자 안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급한 숙제나 했지, 공부는 대부분 학교에서 했다. 일요일에도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문을 열어 놓았다. 언니와 함께 빈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다, 엎드려 자다, 운동장 산책도 하면서 하루 종일 학교에서 살았다.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설계하여 지으면서도 딱히 내 책상을 둘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글쓰기 수업하면서 일상이 많이 바뀌니 생각이 달라졌다. 책상에 앉아서 줌(zoom) 수업을 듣고, 일기도 쓰며 책을 읽다 잠들고 싶어졌다. 남편에게 “나도 책상 하나 있으면 좋겠다.”라고 지나가듯이 얘기했다. 그러다 이번 주 글감을 받고 보니 더 간절해졌다.
다음 주가 환갑이다. 딸들과 언니들은 뭐가 필요한지 계속 묻는다. 무엇이든 말만 하란다.
“날짜가 다가오네. 뭐 받고 싶은지 생각해 봤나?” “사실, 책상이 갖고 싶어. 근데, 지금 우리 집에는 놔둘 곳이 없어서….” “거실에 두면 안 되나?” “현아 아빠가 짐 많이 두는 것 싫어하잖아. 몇 년 뒤, 산에서 살기 힘들어지면 아파트로 이사 갈 건데 그때나 마련해야 할 것 같아.” “언제가 될 줄 알고? 그러지 말고, 네 방에 둘 방법을 생각해 보면 좋겠네.” “거긴 좁은데….” “내가 사 줄게. 짐을 덜어내고 놓을 방법을 연구해 봐.”
큰언니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시누이 부부나 작은딸, 사위가 자고 가는 일이 많아 책상이 있으면 복잡할 텐데….’라던 것이 ‘한쪽 벽으로만 붙이면 되지 않을까?’로 바뀌었다. 그들이 오면 언제든 깔고 덮고 잘 수 있도록 이불을 운동 기구로 쓰는 상 위에 두었는데 둘 다 치웠다. 돈을 많이 주고 산 것이라 아깝지만 요즘 잘 쓰지 않으니 다른 곳에 두는 게 낫겠다. 왼쪽 구석의 큰딸 서랍장도 없애고 싶었다. 그 안에 있던 것 중 꼭 보관해야 할 물건을 둘 공간을 마련하려고 잘 입지 않는 옷도 좀 버렸다.
다 옮기고 나니 백토 침대만 남았다. 텅 비어 깔끔한 방이 좋아 ‘그냥 이렇게 지낼까?’라는 생각도 잠시 스친다. 아니다. 요즘은 환갑을 인생 1막 마치고 2막 여는 시점으로 여기던데, 책상을 마련하여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
주말에 생일 잔치하느라 가족이 다 모였다. 큰딸 편지에 ‘우리 앞으로 살아갈 시간,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요. 방에 책상이 생기게 된 것을 너무너무 축하해요. 엄마의 빛이 가득한 공간이 되길 기도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짐 늘리는 것을 싫어하여 깔끔한 그 상태로 지내는 것도 좋겠다던 남편은 내 방에 어울리는 커튼을 해 주겠단다.
꿈으로만 그쳤을 일을 현실이 되게 하는 데에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생 쓸 건데, 갈색 원목으로 살까? 그것보다 백토 침대랑 어울리는 하얀색이 더 낫지 않을까? 책상 밑에 3단 서랍장은 있는 게 깔끔하겠지? 짐을 다 치워 ㄱ자 구조도 괜찮으니 나지막한 책꽂이가 있는 것도 좋겠다.’ 가슴 설레는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첫댓글 환갑, 그 '제2의 인생'을 축하드려요.
저는 환갑 치르고나니 이제야 조금 어른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하
'제 2의 인생' 축하드립니다. 따님 말따라 선생님의 빛이 가득한 공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환갑이시군요. 선생님 지금부터랍니다. 그런데 이때부테 세월이 줄달음 치니까 조심히 붙들어 매셔야 합니다. 건강한 환갑을 맞으신 선생님, 축하드려요.
와, 벌써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소녀 감성이라 더 그런 거 같아요. 하하.
축하드려요. 마음에 쏙 드는 책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책상을 마련하시네요. 거기서 더 좋은 글 쓰겠네요. 축하합니다.
환갑에 가슴 설레는 고민을 하는 선생님, 남편분의 사랑이 깃든 방에서 책상의 후일담 기대하겠습니다.
환갑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