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부 읍성과 남문(연자루) (옥천변 1910년 무렵)
고려시대에는 토성의 형태로 축조 되었으리라 추정됨. 석성은 조선시대 세종(1430)때 최윤덕 장군이 쌓기 시작하였고, 단종때 완성 되었다, 일제의 성벽 철거령(1916)에 의해 동문에서부터 훼철 되었고 남문(연자루)은 시가지 재정비라는 명목으로 1930년에 마지막으로 헐렸다 (연자루는 김계선 선생의 후원금으로 1976년에 죽도봉에 복원됨)
연자루와 연자교 (1917년 무렵 그림) /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 매산학교 미술교사
매산등에서 바라본 순천부읍성(1910년 무렵)
매산 여학교 1910년 무렵 (금곡동 민가에서 시작된 학당 / 1대 교장 1912년 두애란<듀퓨이>)
매산 남학교 1910년 무렵 (향교주변 민가에서 시작된 학당 / 1910년 : 1대 교장 고라복<코잇>)
매산 여학교 1920년대
매산학교 체육대회 (1930년대)/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 순천 소식란에 매산학교 체육대회 근대화 교육 실림)
순천 향교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2019년 10월 5일, 향교 유형춘 전교님 인터뷰 내용일부)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의 국립교육 기관이다. 공자를 비롯한 선현에 대한 제례와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고려시대 성종 6년(987) 전국 12목에 학교를 세우고 교수를 파견하여 교육을 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12목 중의 한 곳인 순천(당시 승주목)에 세워진 학교가 순천향교의 시초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문묘와 강당이 한 건물에 있었음) 고려시대 때의 향교 구조에서 벗어나 문묘와 학교가 분리된 순천 향교는 1407년 새로 만들어졌으며. 정유재란과 풍수해 등으로 3회 이건 이후, 다시 1780년 홍내동으로 이건 하였고, 현재 위치에는 1801년에 옛 건물의 주춧돌을 가져와 세웠다.
요즘도 대성전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초 석전제를 지내며 매월 1일 15일 삭망에 분향 한다. 유학을 공부하던 명륜당에서는 학생들에게 한문과 예절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최근 들어 명륜당 건물의 주춧돌 1개가 깨지고 기둥이 기울었으며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져 그물망을 쳐 안전에 대비하고 있으며 명륜당 출입은 통제하고 있다. 건물 붕괴의 우려로 인해 전라남도 예산 8억 5000만원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내년부터 건물을 헤체하고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할 예정이다.
임청대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77호 (조위 ; 1454~1503)
임청대비는 1565년(명종20)에 세워졌으며 비석을 세운 일을 맡은 사람은 배숙이였다. 전면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필적이며 후면에 음각된 글씨는 정소가 썼다. 김종직의 문인이였으며 처남이던 조위가 149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로 압록강을 건너자 곧바로 황해도 의주에서 체포 되어 구속, 유배 되었다가 1500년에 순천으로 이배 되어, 옥천변에 돌을 쌓아 임청(항상 마음을 깨긋하게 가지라)대라 이름 지었고, 유배문학의 효시가 된 만분가를 지었으며 1503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옥천서원 :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학 진흥에 목적을 둔 교육기관이며 선현에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겸비 하였다. 옥천서원은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평안도 회천으로 유배된 김굉필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는 어머니의 상소로 1500년 순천으로 이배되어, 후진교육에 힘쓰다가, 갑자사화(1504)로 참혹한 화를 당한 김굉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고장의 지식인(배숙, 정소, 허엄, 정사익)들이 주축이 되어, 순천부사 이정(1564)에 의해 경현당과 옥천정사를 세웠다, 이어 순천의 유림들이 반론하여 1566년에 순천부사로 부임한 김계가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1568년(선조1)옥천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옥천서원의 사액은 전라도에서 최초이며 전국에서는 여섯 번째이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소실되자, 이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중건한 이후로도 중수와 중건이 이루어졌고, 1868년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8년 복설 되었으며 현재는 신실 3칸과 묘정비(호남지역 사림정신의 발원지로서 이 서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비를 1760년에 뜰에 세움))만 남아있다
매산관(1930) 등록문화재 123호 / 1910년 매산학원(사숙)-왓츠기념학교- 매산학교
현 매산중학교 : 1층 도서관, 역사관, 어학실 . 2층 1학년 교실) / 1937년 신사참배 거부 자진 폐교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매산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해방 이후 근대화의 일꾼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
안력산병원 격리병동 / 현 안력산 의료문화쎈터
안력산 병원의 전염병 환자를 격리 입원치료 하였던 곳이다. 병원 폐쇄 이후 민가로 사용하다 빈집으로 방치되고 있었는데 2017년 리모델링공사로 복원 되었다. 119 구급차가 전시된 것은 인휴 선교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가족들이 우리나라의 응급구조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형 구급차량을 제작하여 순천소방소에 기증하고, 미국에서 응급구조요원 교육강사를 초빙하여 순천소방소 응급구조요원을 교육하였다. 순천소방소는 오늘날 우리나라 119구급대 효시가 되었다
안력산(안렉산더)병원 1916년~1940)/ 안렉산더 후원금으로 건립 / 1940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
당시 남한에서 두 번째로 큰 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였다. 군산에 의료 선교사로 왔던 알렉산더가 부친 사망으로 본국으로 되돌아 간 후, 그의 부친의 유산 일부를 순천에 병원을 세우도록 보내줌으로써 그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표기해 안력산 병원이 되었다. 남해 진주 등 타지역에서 찾아온 환자도 많았으며 가난한 환자에겐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선교사 추방령으로 병원문이 닫혔으며 매산고등학교 강당으로 사용해 오던 중 화재(1994)로 소실 되고, 지금은 그곳에 학생 기숙사가 세워져 있다
로저스(로제세) 가옥 : 안력산병원 원장(1917~1941) / 현 매산여자고등학교 진로진학 비젼실, 상담실
프레스톤(변요한) 가옥(1913) 등록문화재 126호./ 현 매산여고 교목실
선교사가 순천에 주재한 1913년 이전부터, 보성 여수 광양 여천 순천 승주 고흥 낙안 곡성 구례 장흥 등 전라남도 남동부 지역에 많은 교회가 있었고, 선교활동이 활발헤게 진행 되었다. 광주에서 활동하던 프레스톤이 순천선교부 설립을 위한 자금과 선교할 일꾼 모집과 그들의 생활비 모금을 위해 본국을 방문하여 순천 선교의 필요성을 강연 하였다. 그곳에 참석한 조지왓츠(미국 남장로회 교인, 실업가)는 크게 감명을 받고서, 선교 부지 건축비 13000달러를 기부 하였으며, 선교사 생활비로 매년 13000달러씩 기부를 약속 하였다. 여러 교회에서 선교사 지원자가 나왔고 후원금도 모금 되었다. 그리하여 순천선교부는 안정된 토대 위에서 교육, 의료, 복음선교에 꽃을 피웠으며, 프레스톤은 농어촌 섬 지방 선교에도 힘썼다, 매산등은 여러 선교사들이 상주 하면서 순천 근대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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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 학교 (1910년대)/등록문화제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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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왓츠 기념관 (1925)등록문화재 127호 /보통성경학교 / 결핵환자 진료소 / 현 기독진료소
기독진로소는 현재 일반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이며 , 2층은 등대선교회(1970년 설립) 사료와 선교사들의 유품 및 자료 전시관이다
코잇(고라복) 가옥 (1913)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259호 / 현 애양원병원재단 소유
코잇 가옥은 프레스톤 가옥과 함께 순천 최초의 서양식 주거용 건축물이지만 지붕은 기와지붕 형식으로서 동서양의 조화를 의미 하는듯 하다. 코잇(고라복) 거주 이후, 광주 나병원 원장이였던 윌슨(우월순)이 나병원을 율촌으로 옮긴 후부터 거주하였다, 여수 애양원병원 시작은 광주에서 전라남도 남동부에 의료선교 나갔던 오웬(오기원)선교사가 급성폐렴에 걸려 장흥에서 가마에 실려 광주로 되돌아 가는데, 그를 치료하려고 목포에서 포사이트 의료선교사가 광주로 오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던 여자 나환자를 보고서, 말에서 내려 나환자를 자기 말에 태우고 광주로 가서 치료한 것을 계기로(그때 치료시기를 놓친 오웬 선교사 사망), 한국 최초 나병원인 광주나병원(1909)이 설립되었고, 계속 늘어나는 나환자로 인해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져서, 1927~1928년 율촌 신풍리로 터를 옮겼다
코잇 교장 (1921년) 송별 기념사진
코잇 선교사 기념비 (인품이 훌륭하고 인정이 많았음))
매산여자고등학교 뒷길 벽화 /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 매산학교 미술교사 (한국의 곷과 민담 : 한국최초식물도감)
백미다 생활관 / 매산여고 생활관(매산여학교 교장(1913~1949) 1910년 처녀 선교사로 한국에 와 독신으로 교육에 헌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기념비 (당시 한국식 이름 사용) / 위치 : 조지왓츠기념관 뜰 (기독진료소)
인휴(휴 린톤) 농어촌 섬지방 선교, 결핵퇴치, 등대선교회 초대회장 역임 / 보이열 (보이엘) 여순사건 매산등희생자 시신수습 <당시 프레스톤 가옥거주> / 변요한(프레스톤) 매산학교설립, 교회설립 / 고라복(코잇) 매산학교 초기 교장, 광양지방 활동 / 구레인(크레인) 매산남학교 교장 / 조지왓츠(실업가) 선교비 거액 기부 / 로티 위더스푼 벨 <배유지(유진 벨의 부인 : 인요한 외증조모)
원탁회의 기념비 :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기념비 옆에는, 일제의 교회탄압(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순천노회 수난과 저항의 역사가 담긴 비가 나란히 서 있다 / 현: 기독진료소(조지왓츠 기념관) 뜰
원탁회의 기념비가 세워진 내력은 순천중앙교회 청년민려회 회원 10 여명이 규합하여 성경연구를 한다고 앞에 내어 걸고, 실제로는 신사참배 반대와 독립자금 모금을 위한 원탁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 모임은 당시 중앙교회 장로이며 안력산병원 서무과장이던 황두연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회원들의 집을 순회하며 열렸는데, 원탁회는 당시 영국식민지인 인도에서 간디의 원탁회라는 저항 단체를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경찰에 의해 회원들이 구속 되고 배후인물 조사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목사들도 줄줄이 연행되어 설교를 트집잡아 수감 되기도 하였다. 황두연은 원탁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 하였으며,
해방 이후 순천읍 부 읍장을 역임하였고, 초대 순천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감찰위원회(현 감사원) 감찰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퇴직 후에는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서울에서 목회 하였다.
순천시 기독역사박물관 (2012)
순천부읍성 둘레길 약 1580 미터 (2017~2018) / (일제강점기(100 여년 전)에 성곽이 헐리고 도로가 되었음,
순천부읍성 상징화 사업으로 성곽을 이미지화 하고자 돌(석재)로 정비 (동문터, 북문터 바닥에 옹성 표시)
순천부읍성 서문터 / 서문 안내소 / 정원 (성벽, 역사 기록, 조형물, 유구) (2017)
서문을 상징하는 건축물 건립 / 마을 방송실, 마을 안내소, 전시관, 도서관, 어린이 놀이방 무인 택배함, 화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