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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은 날씨에 조용하고, 은밀하고, 다소 바쁘게 하나 둘씩 모여 예배를 드린다.
- 언연의 손길에 의해 성경말씀이 지난주와 반복되는 기도문의 내용이라 옆의 말씀 누가 10장 25장 ~ 37절 말씀을 읽다.
- 언연 :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인데, 예배시간에 이렇게 말씀으로 들으니까 그냥 잘 새겨야할 것처럼 들려서 엄청 부담이 되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저한테 편안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부담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드네요. 말씀을 받지도 않고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 관옥 : 부담스럽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부담스럽겠지? 이렇게 해야 하는데, 나를 보니까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부담이 느껴지는 거지. 어떡하면 좋지? 아까 읽다보니까 똑같은 말을 예수가 두 번 했더라구. “가서 그렇게 하시오.” 그렇게 하면 되지. 내가 못 하고 잇다는 생각을 왜,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안했어? 했잖아. (웃음)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도와준 적 없어? (있지요.) 그럼, 했지. 나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넌 모자라, 넌 못해. 더 할 수 있는데.” 이런 말을 많이 들어서 자신한테 점수를 깎아. 그런 버릇이 있지 않나싶어. 그러니, “나는 안 돼. 나는 못 해. 나는 안 됐어.”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 생각 때문에 더 부담스럽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했잖아.
예수님은 판단하지 않거든. 얼마나 했느냐를 묻지 않아. 했냐 안 했냐로 차별하지 않아. 저 문의 계산방법이거든. 할 수 있을 때 하자. “했냐.” 그러면 “했다구.” (웃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 우쭐거리고 교만하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거는 달라. 남들 우습게보고 그러는 것은 아주 곤란해. 내 자신에게 positive하게, 긍정적으로 부추겨 주는 거야. 그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하다보면 저번에 비해서 잘하게 되고, 많이 하게 되고 그러지 않을까? 해봐야 되지 않을까?
웨인 다이어가 자기 생일날, 집에 몇 천불 있더래. 그것을 가지고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노숙자에게 50불씩 줬대. 자기 생일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몇 천불을 무조건 나눠주고 와봤다고 그런 해프닝을 했다고 썼더라. 재미있어. 집에 갈 차비만 놔두고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털어내 보는 거야.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오는 것을 재미로 해보는 방법도 있고, 꼭 돈을 주지 않고 얼마나 많은 게 있어. 그런 것을 자주 하자고.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 봤으면 좋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나는 예수를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당당하게 했다고 할 거야. 아버지가 “왜 그 모양이냐?” 그러시지도 않을 거지만 그러신다면, 나도 할 말있어. “어쩌란 말이예요.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선. 내가 누구 작품인데.” (웃음) (우리 아버지 속 터지겠는데요.) 노리치 줄리안 읽어보면 우리 아버지 절대 그런 말 안한다. (웃음)
- 소현 : 어제 조카가 5.18 진실위원회가 새로 생겼는데, 영구 용역을 받아서 5.18을 겪은 사람, 피해자, 만나서 어떻게 겪었는지,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조사해서 보고서를 쓰는 건가 봐요.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몇 사람을 소개했는데, 80학번 선배가 있는데, 그해에 전대를 와서 형 살고 나와서 학생운동을 하고, 서른 이전부터 굉장히 힘들어져서 알콜리즘도 오랫동안 있었고, 최근에 그 선배를 소개시켜줬는데, 제가 봐왔던 85년에 알았던 선배였는데, 최근의 모습이 가장 제대로 된 모습이예요. 그 선배의 부인이 고생을 많이 했죠. 어쨌든 그 언니가 자리를 지켜줬기 때문에 선배가 돌아올 수 있었고, 저는 잘 사는구나 싶었는데, 인터뷰를 하는데, 같이 만날 시간이 있었는데, 여전히 아픈 거예요. 선배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그래도 뭘 할 수 있을까요?
- 관옥 : 맞아. 뭘 해야 한다는 생각도, 어디선가 팃낙한이 “나 여기 있어. 내가 널 보고 있어.” 그런 얘기, 말로 만 그런 것이 아닌, 옆에 있어 주는, 그것이 말 몇 마디하고 돈 몇 푼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봐. 내 후배가운데, 목사야. 차가 가는데, 미친 듯이 지나가는 거지, ‘가다가 사고 날 텐데.’ 하고 돌아가니 꽝하고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더래. 사람이 형편없이 깨져서 널브러져 있는 거야. 할 수 없이 자기 품에 안고, 자기 품에서 숨을 거두더라는 거지.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가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면서 혼자 죽지 않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갔으니 복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래.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내 곁에서 지켜주는,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지 않을까. 그런 것은 할 수 있잖아.
여기 사마리아 사람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생각이 나면 하면 돼.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없다. 생각할 때는 존재, 관심, 얼마든지 곁에 있을 수 있잖아.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설교하지 않고 있어주는, “내가 네 곁에 있을께.” 그 이상 뭐를 어떻게 하겠어.
- 민들레 : 어제 1박 2일로 악양을 다녀왔어요. ‘되돌아보기’를 했는데, 하기 전에 집에서 10년도에 어떻게 살았는지 혼자 생각을 해보니까, 아이들을 만나는 모습이 보여요. 아이들을 만날 때, ‘시간 때우기 식으로 만났나?’ 생각이 들어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가족이었잖아요. 제가 5,6학년 수업을 하고 있으면 1학년 ~ 4학년까지 뭘 하게 만들 것인가에 더 신경을 썼던 느낌이 오는 거예요. 하나하나 질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간 때우기 식으로 만났구나. 생각이 들어오니 마음이 철컥하는 마음도 들고, 올해는 안 그래야지. 하는 다짐도 하고, 혼자 되돌아보기를 했어요. 늘 말일이 되면, 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데, 다시 시작되면 늘 돌아가고, 잊어버리지 않는 방법은 없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잘 잊어버리지 않게 깨어있자. 이런 바램도 들기도 해요.
- 관옥 :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앞으로 해야 될 것이 있는데, 올해는 4,5,6학년 아이들 만날 때 4,5,6학년 아이들만 만나자. 1,2,3은 한님께 맡겨 놓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한테 집중하자. 이런 마음을 먹은 거 아니야? (네.) 참 좋은 마음이야. 누가 말려? 내가 그렇게 하면 돼. 4,5,6 만나면서, 머리는 1,2,3에 가 있으니까, 얘들도 제대로 만나지도 못 하고 마음도 그러니. (수업할 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면 교사자격은 없는 거구요.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아이를 개별적으로 밀접하게 만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건데, 형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에게 밀려서 아이들 하나하나를 놓쳤다.)
좋아. 그러면 되지. (이웃이 누군지는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일에 전념하고 해보면 쉽지 않아. 순간을 영원히 산다는 것이 그것만 할 수 있으면, 그만큼 우리가 분산된 생각으로 사는 것이 뱄어. 지금 일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고, 고민하고 사는데 익숙해졌어. 그 버릇을 고쳐서 지금여기를 돌아오는 수련은 자꾸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지금 지금여기를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내 나름대로.’ 그러면 되지. 누구를 만나든지 지금은 너밖에 없어.
- 효선 : 오늘 본문을 다 아는 얘기이고, 마음에 바램을 가져봤어요. ‘달리 보이게 해 주세요.’ 본문을 묵상하고 그랬더니, 정말 달리 보이는 거예요. 본문에 예수는 “누가 네 이웃이야?” 물었을 때는 예수는 관객의 입장이고, 강도당한 사람, 강도, 그냥 지나간 사람1,2, 사마리아사람, “누가 선한 이웃이냐”라고 판단할 때는 얼마든지 이 사람이라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만, 강도짓을 한 사람은 나쁜 놈이지만, 그 사람도 한 동네에 사는 내 이웃이잖아요. 가르침에 의하면, 선한 것을 있게 하기 위해서 악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강도도 나한테 이웃이라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바라보자. 예수가 너의 이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에서는 모두가 이웃이 되지 않겠나. 좋은 이웃, 나쁜 이웃으로 분별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읽혀졌어요. 화호경에의 일원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서 일부러 슬퍼하는 사람에게 가서 외면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그분이 나로 사는 삶을 자책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 관옥 : 이 사람들 얘기와 지금 말한 얘기하고 사실은 차원이 다른, 세계가, 레벨이 같지 않은 얘기야. 높은 레벨에서 얘기하면 아마 바리새파 사람들이 질문을 안 했으면 이런 예화를 얘기 안 했을 거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의 예수님 말씀이 안 해도 될 말씀을 하실 때가 있어. “원수 사랑하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저는 원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너한테는 옛날에 내가 할 말이 의미가 없다. 너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경의 내 말이 너한테 쓸모없는 말이 됐음 좋겠다.” 그러시더라구. 그런 얘기야. 그렇게 보면 내 이웃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없지. 나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관계없이 다 내 이웃이지. 이 얘기가 돌아가는 차원은 그것이 아니야. 친구있고, 원수있고, 이런 비유를 드는 거야. (한 번도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달리 봤어요.) 그런 생각을 드는 사람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런 질문도 안 하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도 없는데.
불경에 어딜 보면 그래. 부처가 괜히 와서 쓸데없는 소리 많이 하고 갔다고. (웃음) 그런 차원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가 의미가 없어. 안 해도 되는 말, (그 말씀도 없으면 그 깨달음도 없는 거죠.) 부처가 저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는 49년 동안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자기 입으로 그래. “깨달은 뒤에 나는 49년을 살았는데, 나는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그 말이 뭔 말이겠어? 내가 한 말이 전부 말이고, 깨달음에 도달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경지가 있다. 그런 얘기지. (나도 그렇게 살게 해주세요. 그런 기도죠.) 살고 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지. (웃음) 나를 어떻게 대하든 간에 모두가 나의 이웃이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차원에서 살고 싶다.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못 알아들어. 너 잘났어, 그래. (그래도 내 이웃 이예요.) (웃음) 어디 지옥이 있어서 예수님이 지옥얘기를 했겠어.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다고 그랬는데. 그런, 지옥이라고 안 계셔? 하나님 계신 곳이 어떻게 지옥이야. 논리적으로 그래. 예수님은 지옥이 있다고 생각 안 했을 거야. 그러나, 사람들 그렇지 않잖아. 그 수준에 맞데 얘기해 줘야지. 부처가 아무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서 있는데, 사람들은 뭔가, 그러고 있는데, 빙그레 웃는 사람이 있었대. 저 사람은 말을 알아듣는구나. 어떤 말로 닿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대.
죽변교회에서 교인들과 읽다가 교인들에게 질문하기를 “왜 두 사람은 보고 못 본 척 지나 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왜 도와 줬나?” 성경에는 이유가 없잖아. 예수가 비유하는 것도 당시 기득권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비유야. 제사장, 레위사람은 아주 높은, 존경하는 사람인데, 예수에게서는 아주 인간도 아니잖아. 사마리아 사람은 다들 우습게 알고 멸시하는데, 예수의 말에는 인간답단 말이야. 비유할 때, 그렇게 설정하는 이유는 뭐야. 장로하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은 자기의 자부하는 그것이 새벽기도를 안 빠지는 사람이야. 새벽4시면 정확하게 종을 쳐. 나는 그 소리 듣고 깬단 말이야. 자기의 뿌듯한 거야. 그 장로님이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 새벽기도 열심히 나갔을 겁니다.” (웃음)
사람들이 얘기하기에는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이 좋다는데, 내가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거야. 중학생 녀석이 “제 생각은요, 이리 보니 자기 동네사람이었던가 보죠.” (웃음) 나는 깜짝 놀랐어. 나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했는데, 잘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가. 남이 아닌데, 내가 지나가는데, 반디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으면 내가 그냥 지나갈 수 있어? 말이 안 되잖아. 성령께서 너를 통해서 한마디 하시는구나. 어떻게 보이느냐가 문제야. 그 대상이. 내 눈이 문제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열쇠가 거기 있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나하고 잘 아는 사람, 그렇게 봤다 이거지. 그러면 그렇게 된다.
앞에 두 사람은 봤는데, 그냥 지나갔어.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 그러면 지나가. 남이야. 내 식구야. 내 형제야. 어떻게 지나가. 말이 안 되지.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끝이야. 얘기할 거 없어. 다 달라지는 거지. 모든 사람이 형제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야. 간디가 그 비슷했어. 내가 볼 때 간디가 제일 비슷한 인물이었어. 영국 관리들을 그렇게 본 거야. “내가 너희들하고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나는 할 수 없다.” 이것이 비협조야. “영국의 법에 나는 따르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적으로 보지 않겠다. 언젠가는 돌아올 내 친구다.”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좀 달라. 김구선생은 일본 놈들은 일본으로 가라는 거야. 간디는 “우리 땅덩어리 넓으니까 같이 살자. 그런데, 차별은 안 된다.” 차원이 달라. 사람들이 간디를 사회운동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성가로 보는 거야.
- 현빈 : 오늘 아침 눈을 뜨는데, 한 말씀이 들리는데,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그 말씀만 들렸어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듣는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질문을 갖고 있었는데, 성경을 읽는데, 제가 뭘 들었냐면, “가서 그렇게 해라.” 이게 저한테 들리는 거예요. 그런 의미인지 질문이 됐어요.
- 관옥 : 가서 그렇게 해라. (웃음) 몇 년 전에 묵상을 하는데, 그분이 그러셔. “70고개 넘었으니 네 삶을 정리해야겠지 않냐?” 그러시는 거야. “그렇죠, 그럴 때가 됐습니다.” 간단하게 “너 가만히 보니까, 너 근사한 말 많이 하더라. 한 가지라도 좋으니 좀 해보고 와라. 네가 떠든 대로 하나라도 좋으니 한 번 해보고 와라.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해볼만한 일이다.” 잊혀지지가 않아. 말은 근사하게 하는데, 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안 하는 거야. 소음공해만 일으키고.
- 김장로님 : 이 문장 읽으면서 아버님이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20대에 함경도에서 어머님이 보내주신 두꺼운 옷을 차려입고 가는데, 거지가 달라고 해서 옷을 벗어서 주셨는데, 예수님이 저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랬을 것 같아서 벗어줬고, 그 거지를 따라가 보니 다리 밑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은 아니였다는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코로나 때문에 세태가 어려운데, 그이유가 사람들이 자기 탐욕을 위해서 세상을 함부로 해서, 식물, 동물을 함부로 해서 생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닭 중에 다리가 아퍼서 노른자, 홍삼을 줘서 보호하고 있고, 토끼가 새끼를 낳아서 그 모습이,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모습이 애틋했어요.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차에 치여 죽고, 집에가 보니 죽어있어서 다섯 마리 중에 세 마리만 남았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착한 동물들도 이웃인데, 관심 있게 봐야겠어요.
- 관옥 : 그럼. 코로나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야. “자연을 향해서 잘 못한 것 너희가 회개해라.” 짐승이라고 우습게보지 말고, 그런 마음, 언젠가는 인간들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 알아들을 거야. 지금까지 잘 못한 것을 고쳐지겠지. 좀 더 기다려야겠지만, 벌써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들이 많을 거야. 코로나가 귀한 선물을 인간에게 준거라고 확실하게 믿어져.
새벽에 일어났는데, 아주 간단한 말이야. 영어문장인데, 암기를 못하고 읽으면서 번역을 했는데, 너희들이 쓸 수 있는 힘은 짐승과 달리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natural power(자연스러운 힘), 또 하나는 forceful power(억지로 쓰는 힘) 인간은 이것들을 쓸 수 있다는 거야. 동물은 자연스러운 힘밖에 못 쓴다는 거야. 인간만은 자연의 법을 어길 수 있다는 거야. forceful은 unnatural power(비자연적인 힘) 자연의 법을 어겨. 그게 인간이야. 자연의 법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한다면, 닭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길 줄 몰라. 그 힘이 없어. 선악과를 따먹을 힘이 없어. 인간에게만 줬어. 따먹을 수 있고, 안 먹을 수 있는데, 먹었어. 동물은 natural power 밖에 못 쓰는데, 인간은 unnatural power를 써. 인간들이 쟤들보다 위대하다고 볼 수는 있는데, 배워야하는 것은, 쟤들은 우리한테 배울 것이 없어. 우리는 쟤들한테 배워야 해. 쟤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힘을 가지고 사는지를 배워야 해. 야마키신인가 그 일본 사람이 양계장에서 배웠다고 그래서, 그 사람은 뭘 배웠는지 모르지만, 양계장에서 배웠다면 틀림없이 배웠을 거야. 암탉들이 병아리들을 품다가 하루아침에 탁 쳐버리잖아. “너희들 독립해.” 안 돌봐줘. 그런 것을 우리 인간들도 보고 배워야 하잖아.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인간들이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기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그러면, 틀림없어.
- 간송 :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율법학자도 얘기했고, 듣는 예수님도 그것을 이해했을 건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여쭈는 거예요.
- 관옥 : 같은 의미 아닐까? 영생, 영원히 산다. (예수님도 그렇게 들으셨을까요?) 글쎄, 그거가지고 서로 논쟁하지는 않잖아. 거기에 대해서 사란들한테 설명하는 것은 다를지 몰라도, 안 죽고 사는 삶. (그 시대에 안 죽고 사는 삶에 대한 추구가 있었을 거고, 하나님사랑하고, 이웃사랑하면 난 안 죽고 살아. 라는 답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영생 얻는다잖아. 영생가지고 말해봤자 모르는 거고, 그것을 정말 알고 싶으면 그렇게 해 봐. (웃음) 그러면, 영생이 그런 거구나. 그러겠지.
예수님이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아리까리한 말을 한다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죽잖아. 예수 자기도 죽잖아. 죽고 산다는 것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른 얘기지. 정말 나는 안 죽는다고 지금 믿어. 내가 예수님 믿으니까. 내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인데, 나는 나무이고, 너는 가지라는 얘기인데, 그것이 사실로 믿어지면, 몸뚱아리는 사라지겠지. 나는 안 사라지고.
- 경숙샘 : 작년에 뭔가 풀리지 않은 경험이 있었는데, 오늘 말씀 들으면서 정리가 됐어요. 올해 우리 동네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할머니가 있는데, 겨울이 되니 그 집에 불이 꺼지는 시간을 알 수 있잖아요. 6시가 되면 불이 꺼지는데, 저녁도 안 드시고 잠에 드시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서 저녁을 초대해서 먹어봤는데, 세 시간 동안 안 가시는 거예요. 방법을 달리 해야 하는데, 못 본척하기는 그렇고, 밥을 한 끼는 챙기고 싶어서 저희 집 반찬을 싸서 그 집으로 갔어요. 밥만 먹고 오면 최소한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밥만 먹어서 해결이 안 될 거 같더라구요. 짧은 시간에 할머니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뭘까. 이 할머니가 삶이 축제라는 것을 일상에서 경험했음 좋겠다. 내 일상도 그렇게 됐음 좋겠다라는 바램이 있었거든요. 할머니랑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하고, 하루에 좋았던 일을 말하고,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한 시간정도면 되겠더라구요. 시작을 했더니, 옆집에 숙모랑 같이 먹었는데, 그 다음에는 한 가지씩 준비하는 거예요. 냉이, 시금치 캐고 반찬을 풍성하게 준비해서 맛있게 먹어요. 제가 원하는 일상이 오히려 된 거예요. 기쁘더라구요. 저한테는 그런 경험이 많은 거, 이웃과 함께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훨씬 풍성해지는 일상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쉽게 하는 것 같아요. 올해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남들이하는 것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작년을 평가할 때, 다른 어떤 해보다도 큰 기쁨을 누렸거든요.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 기쁨을 누렸어요. 내가 한 것은 없는데, 내 삶이 굉장히 풍요로웠어요. 마음한편에는 억울함이 약간 있었어요. 더 뭔가를 해주기를 요청받을 때 불편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불편한 마음이 왜 생겼는지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그것에 대한 답이 와서 참 좋았어요. 풀리는 마음이 들었어요.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소망이 들었어요. 내가 하는 일, 돕는 일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이 불쾌했거든요. 그런 불쾌한 마음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
- 관옥 : 여기서 예수는, 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묻는 것이 “누가 왜 이웃입니까?” 이렇게 묻거든. 예수의 대답은 “너는?” 이러거든. 묻는 사람의 눈은 저쪽으로 가 있어. 누가 내 이웃인지 찾는 거지. 예수는 눈을 자기한테 돌리는 거야. 이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해. 예수는 항상 눈을 너한테 돌리라는 거야.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도 “죄 없는 놈은 쳐라.” 자기를 봐야 하잖아. 며칠 전에는 새벽에 꿈을 꾸는데, 쌍절곤을 만드는 거야. 헝겊에 물을 넣어서 두 군데를 묶으면 되는데, 내가 엄청 만들었어. 사람들 주고, 맞으면 아파야 하니까 물 한 개에 동전을 두 개씩 넣었어. (웃음) 깼네. 깨는 순간에, 쌍절곤, 영성적인 문구다. 누구를 치던지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는 거야. (웃음) 때리면 오잖아. 결국은 나한테 눈길을 돌리는 것이 저 분의 가르침이야. “너는 어떡하고 있냐?” 보통 우리들의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는 거야. 저기는 잘 보이니까, 나는 잘 안 보이고. “왜 저 사람 저러지? 왜 저 사람 나한테 그러지?”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예수는 “그러고 있는 너를 봐라.” 그게 대답이 아닌가 싶어.
- “이 세상 어딘가에” 부르고 김장로님 기도로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