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선흘 서연암 전경
서연암 잔디 운동장
지연된 귀환
문선일 저 | 이지출판 | 202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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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암 풍경
퇴직하고 친구의 권유로 소박한 절을 찾았다.
담쟁이덩굴 속에 푹 파묻힌 작은 법당이었다.
시원한 잔디 마당, 눈을 들어 시선을 돌리니 화산섬 숨골,
거문 오름이 한가로운 구름 밑에서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향이 은은하고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는 고요한 요사채,
정갈한 다기들 앞에서 우수에 찬 눈빛의 스님께 일 배를 올렸더니
조용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미망에 흔들렸던 지난 시간, 어깨를 누르는 짐이 무거워 끙끙 거려
보았지만 안개 속에 가려 암담하기만 했을 때, 담쟁이덩굴 속 20평
남짓한 법당과 포근한 잔디 마당이 편안히 다가왔다.
파란 담쟁이덩굴이 동그마니 남겨놓은 두 개의 유리창 옆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니 입술의 얇고 눈매가 가느스름한 부처님이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색색 연등의 고운 빛 아래에서,
단아한 자세의 스무 명 남짓한 신도들이 스님의 설법을 경청하고 있었다.
큰 키의 스님은 회색 승복 자락을 날리며, 깃털처럼 부드러운
음성에서 어느 새 서릿발 같이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이어지는 법문.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해 주었기에 경전을 모르는 초보자도 이해되었다.
‘절 찾지 말고 이웃 손 잡아주고 분별심 내려놓아
돈오(敦悟:단박에 깨달음)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스님의 법문은 무심히 앉아있던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엇에
찔린 듯 잔잔한 충격이 일었다.
‘지혜정’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자로 태어났다.
‘탐진치와 분별심 내려놓으면 그 순간 부처이고,
자연과 나와 남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부처님의 말씀.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지난 세월의 기도가 허망한 욕심임을.
당연히 짊어져야 할 세상 짐에서 벗어나려 절을 찾아 부처님에게
간구했던 일들이 미망이었음을….
드리웠던 안개가 스르르 걷혀 파란 하늘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흔들렸던 막연한 생각들이 고요해져 갔다. 비워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다가왔다. 환갑을 훨씬 넘기고서야,
오래 돌아서 온 듯했다.
2018년 8월 넷째 토요일은 음력 7월 15일,
불교에서는 우란분절, 하안거 해제일, 백중날이다.
법당에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 후, 친구와 둘이서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법당을 말끔히 청소했다. 태풍 ‘솔릭’의 지나간 흔적을
쓸고 닦는 친구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부처님 상단에 과일과 떡과 마지를 정성스럽게 올렸다.
이런 좋은 날에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의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하나 둘 모여든 신도들, 공양 간에서는 땀방울 흘리면서도
도란도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요사채와 화장실을 쓸고 닦는
얼굴들도 상기되어 있었다.
스님이 내미는 차 한 잔, 은근한 향이 입속에서 맴도는
순한 보이차를 마시니 모두의 얼굴이 아이처럼 맑아진다.
이날 스님의 법문은 우란분절의 의미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인 효도와 진정한 보시에 대한 불심을 쉽게 설법하시었다.
‘우리가 한 달에 한번 와서 법회를 여는 것도 사실은 필요 없는
것이다. 절에 오지 말고 자기 자리에서 낮은 자세로 곁에 있는
부처님을 존경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狀布施)가 절에 있는 죽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
‘돈오(頓悟)의 실천은 보시에서 시작하라’지만,
내 것이라는 생각에 갇혀 있는 중생이기에 나누는 보시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기에 한 달에 한 번 이렇게라도 모여
공양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는 정진의 시간이라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는 스님의 마무리 법문은 늘 실천에 한계를
느끼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고요한 법당에 찬불가의 여운이
은은하다. 어느 새 다음 법회에 스님 법문이 기다려진다.
부처님 오신 날은 서연암의 잔칫날이다.
신도들 가족과 지인들, 동네 이웃들, 제법 많은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드넓은 초록의 잔디밭에 펼쳐진, 하얀 천막
그늘 의자에 심신을 내려놓았다. 천막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큼직한 접시에 담겨 열 지어 놓였다.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회를
마치신 스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이렇게 기쁜 날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 맛있게 드시고
성불하십시오.”
스님께서 인사하며 합장하시면 앉았던 이들은 일어나서 하나의
긴 줄로 이어졌다.
“우와! 맛있겠다.”
“무얼 먹을까?”
세계 여러 나라의 신기한 음식들. 하나하나 맛보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문득 이게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을 잠시 극락으로 모신 보살님. 귀한 공양 재료들을 준비 하시고
구슬 땀 흘리며 정성껏 만들어 내 놓으셨다. 코로나19 거리두기로
막히기 전까지 이런 부처님오신 날 ⁴대중공양이 6년여 계속 이어졌다.
한 달에 한번 열리는 법회에도 보살님의 행복한 요리는 신도들을 위해
자주 빛을 발하셨다. 넉넉한 보시로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시는 분.
불심 깊은 보살님 덕분에 심신의 허기를 채우면,
편안한 마음으로 법당의 뜰을 천천히 걷는다. 잔디를 손질하던
스님이 남겨놓았을까, 몇 개의 노란 개민들레가 무심히 웃고 있다.
유별난 여름, 담쟁이들은 폭염을 버터내기 위해 잎들을 급하게
내려놓고 벽을 가까스로 붙잡아 마른 갈색 빛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병마에서 꿋꿋하게 잘 버티어 내었던 한 사람.
남편은 병마를 붙들고 힘들 때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했다.
의연하고 끈질긴 담쟁이덩굴처럼 오래 오래 동행인이 되어 주었으면….
은밀한 기도처럼 나무아비타불을 염불한다.
코로나 19로 거리두기로 절에도 신도들의 발걸음을 막았다.
절과 스님과 신도들의 소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 하시던 스님께서
유마경 영상강의를 시작하였다.
법당에서 몇 분의 신도님들과 강의 동영상을 촬영하시는
동파거사님께서 수고해 주셨다.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토요일 40분씩 2회씩을 강의해 주셨다.
2년 반 동안 동파거사님께서 편집해서 유투브 등에 올려 주신다.
영상강의는 코로나로 힘든 신도님들과 불자님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다.
세계의 많은 불자님들이 동영상 강의를 시청하고 있다. 스님은
어려운 유마경전을 현대 과학에 접목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마음의 알아차림을 제대로 해석하고 지혜롭게
한 마음 챙기도록 아주 쉽게 강의해 주신다.
뇌과학, 사회과학, 심리학, 철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유마경을
재해석하려고 애쓰신다.
‘부처님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열강에 때론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망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아 주고 있는
스님의 강의에 마음을 모아보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아래로 중생을 가르쳐 깨달음으로
이끌라는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경전을
연구하고 부처님의 바른 뜻을 전하고자 애쓰는 불심 깊은 스님과의
귀한 인연에 감사한다.
◇◇◇
23.07.01 금요일, 오후
공부하는 절, 정법도량 서연암을 지키시던 65세 각문스님께서
열반하셨다.
“생사가 둘이 아니다. 살아서도 죽은 것이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설법,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생사의 순간 이니 매 순간
집중하라.” 하셨던 스님은 열반을 평소의 법문처럼 우리 눈앞에서
자연스레 보여 주셨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화엄사에 서연암을 헌납하신 올곧은
유족들의 훌륭한 결단에 감사드린다. 스님은 가셨지만 스님의
혼과 뜻은 서연암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스님의 유골은 서연암 마당, 화엄사 부도탑에 모셔져 불교
정법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어내신
법 높은 스님의 덕을 오래도록 기리게 될 것이다.
8월 18일 여법한 49재, 화엄사에서 마지막 절을 올렸다.
각문스님! 별나라에서 편안히 극락왕생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