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딸
김미순
딸 윤서만 생각하먼 원통하고 분통이터져서 견딜 수가 없다. 아무리 그렇지 손목을 굿고 기절을 하다니, 내가 뛰어들어가 솟구치는 피를 묶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다.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봉합수술을 마치고 집에 올 때도 입에 자크를 닫은 것 처럼.
나는 윤서의 눈치를 보며 늦은 저녁을 차렸다.
밥을 거부하는 윤서를 달래 두어 숟가락 먹였다. 약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남편은 당직이라 집에 안 올 것이고 미적대는 윤서를 달래 나와 같이 자기로 했다.
"윤서야, 왜 그랬어?"
"ㆍㆍㆍ"
"말 해봐, 무슨 일이야?"
'ㆍㆍㆍ"
"그래, 말하지마. 잠이나 푹 자"
윤서는 다음 날부터 자기 방에 처박혔다. 담임으로부터 몇 번이나 전화가 왔으나 며칠 쉬겠다고 애걸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모의고사가 있으니 최소한 월요일엔 학교에 오라고 담임은 신신 당부했다
커피숍에 점심을 먹은 교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척 바빴다. 덥고 습해서 에어컨을 빵빵히 틀고 졸고 있던 나는 오늘 매상이 쏠쏠할 거라 예상하고 바삐 움직였다. 윤서 학교 앞이라 얼굴이 낯익은 선생들도 꽤 되었다.
윤서의 담임도 있었다. 학기 초에도 담임을 뵙지 않았으니 선생들끼리 주고받는 말에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반 윤서라고 알지? 일등짜리 그 애가 학교를 며칠 째 안 와"
"그래? 엄마랑 통화해 봤어?"
"엄마도 영문을 몰라해"
"사춘기라 종종 그래"
"가시네들이라 예민해"
월요일이 왔다. 손목에 붕대를감고 학교를 갔다. 그러나 열 시도 안 돼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윤서가 자퇴를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필시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짐작하고 윤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윤서가 집에 온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이마트에 가서 쇼핑도 하고, 구경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번엔 새로운 말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검정고시 준비를 할테니 광주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2023년 4월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일정까지 짝 꿰고 있었다.
실력이야 차고 넘치는데 광주까지 보내달라니, 나는 나만 알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남편도 오케이하였다.
일단 커피숍은 방학이니 휴업을 하였고 광주로 갔다. 힉원 근처에 원룸을 얻고 기본적인 살림을 장만해 주었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으니 우선 밥을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머리가 좋아서 금방 해냈다. 일단 당분간 먹을 반찬을 사 주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광주로 오겠다며 안심시켰다.
나는 잘 할거리고 믿는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딸이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7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과 함께 광주 원룸으로 갔다. 윤서는 아주 활발해져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삼십 대 각시도 있었고 심지어 육십 대 할머니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 세긴 센가 보다. 나도 대학을 갔으면 좋았을텐데 ㆍㆍㆍ
해가 바뀌고 더 열심인 윤서가 살이 빠지고 헬쓱해졌다. 1월 어름에 내가 광주에 다녀온 지 이틀도 안 되었을 때
전화가 왔다.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우선 약국에 가서 두통약을 사서 먹으라고 햇다. 약사한테 증상을 말하고 내가 갈 때까지 참고 있으라고 했다. 남편 차를 타고 급하게 가니 윤서가 기진맥진 방에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윤서를 데리고 인근 병원 응급실에 갔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 임신이었다. 까무라치기 일보직전 남편이 나를 부축하고 입원실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되같고 딸이 임신한 것도 몰라?"
나는 정말 몰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초기 치료를 마치고 편안하게 누워있는 윤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룸에 와서 조용히 물어보았다.아이 아빠가 누구냐고~~
컴퓨터 기간제 교사라고 솔직히 말했다. 항상 일등을 하는 윤서에게 서울대 준비생이라고 모든 과목에 톱을 만들어 준다고 접근했댜. 처음에 윗팔을 잡더니 다음엔 목, 또 그 다음엔 엉덩이를 만졌다. 손목을 그었던 날은 전날 컴퓨터실에서 삽입을 했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갔다. 교감만 있었다. 그 기간제 교사를 찾았다. 기간제 기간이 끝났다고 하였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어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 일단 집으로 왔다. 여러가지 인터넷을 뒤졌다. 모른 체 하는 사람, 무고죄로 덮씌우는 사람, 합의하여 결혼하는 사람 등등
윤서는 낳아서 키우고 싶다고 하였다. 어차피 낙태는 할 수 없는 개월 수였다.
남편도 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광주에 24평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갔다. 윤서가 공부도 하고 산모로 편안히 지내려면 내가 옆에서 돌봐야 할 것 같았다.
윤서는 검정고시를 보고 한 달 후에 예쁜 딸을 낳았다. 미혼모의 삶을 살았다. 윤서는 더 당당해지고 씩씩해졌다.
내가 아기를 돌보고 윤서는 몸조리도 하지도 않고 사회복지사 공무원 시험에 돌입했다. 6월 22일 필기시험이 있어 밤샘을 했다. 최중 시험까지 세 달을 채우고 당당히 힙격했다. 나는 새옹지마란 말을 떠올리며 아이를 둘러매고 우리집으로 왔다. 커피숍은 남편의 말대로 아르바이트생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삐적마르고 거칠거칠한 아줌마였다. 내 나이만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산모였다.
" 아니? 이런 때에 병원에 가셔야지, 곧 나올 것 같은데요?"
"예, 남편이 와야지요. 지금 오고 있다네요."
나는 속이 탔다. 택시라도 타고 병원에 가면 좋으련만~ 한 이십 분이 흘러서 아랫배를 잡던 그 여자 밑에서 벌건 양수가 흘렀다.
급하게 커피숍 의자에 눕히고 힘을 주라고 외쳤다. 손님이라도 한 명 있으면 좋으련만~
아들이었다. 탯줄을 끊고 수건으로 아이를 감쌌다. 휴, 그 여자는 가만히 아이를 보고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남편이 왔다.내가 남편을 보고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여자가 남편더러
"여보, 우리 새싹이가 세상에 나왔어요. "
주뼛거리며 남편이 아이 손을 쥐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끝>
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