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릉(光陵)에서 파격적인 해설자를 만나다
광릉 국립수목원 관람을 마치고 서둘러 세조와 정희왕후의 묘인 광릉(光陵)으로 향했습니다. 1 km도 안되는 거리였으나 편도 1차선의 지방도로로 차량이 빈번히 왕래하니 맘편히 걸어갈 데는 아닌 듯 합니다. 3시경 정문에 도착하여 해설자를 찾으니 위쪽 정자각 부근에 있다네요. 그동안 20회가 넘게 왕릉과 고궁을 탐방했으나 해설자가 입구나 안내판 앞이 아닌 능 바로 앞에서 기다린 예는 없었습니다. 광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입구에서 홍살문까지, 그리고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다소 비탈져 있어 올라가는 것도 그리 수월치는 않았지만...
정자각 부근에서 마주한 해설자는 청바지 차림으로 외모부터 종전의 해설자와는 많이 달랐습니다(본인 말로는 환갑 나이라 했으나 그보다는 좀 아래로 보였슴). 해설 내용도 전반적인 조명보다는 특정 각론을 집중적으로 그것도 본인의 소신을 강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즉, 세조의 조카 왕위찬탈을 왕권강화를 위한 양령대군 등 왕실 종친들과의 합작품으로 미화한다든지, 심지어 기록(연산군일기)에도 나와 있는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위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고 사람이 쓰는 것인지라 무사공평할 수는 없다지만 지나친 부분이 적지않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光陵 :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이 세조릉이고 오른쪽이 정희왕후릉으로 전형적인 同原異岡陵 형태
그래서 이번에 아쉽게도 같이 오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역사에 해박하고 이미 光陵을 답사한 경력이 있는 류영철 회원의 정통 해설을 대신 붙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설에 앞서 그간의 통밥(?)으로 광릉이 다른 왕릉과 다른 점 몇가지를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1. 능 입구에는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2.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參道-혼령이 지나가는 神道와 王이 지나가는 御道)가 없다.
3. 통상의 합장릉이나 쌍릉이 아니고, 두 능침(陵寢)이 떨어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下馬碑에는 '大小人員皆下馬' 즉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라' 라고 새겨져 있는데, 유독 광릉에만 남아있슴
**光陵은 다른 왕릉보다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슴. 조선의 왕릉은 '非山非野" 즉 산도 아니고 평지도 아닌 야트막한 구릉지에 만드는게 원칙으로 통상 해발 100~200 m 높이에 조성
류영철님의 광릉(光陵)과 세조(世祖) 이야기
광릉(光陵) :
광릉은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고, 백성의 노동을 줄이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현실을 석실로 꾸미지 않고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 봉분 둘레에 병풍석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겨 조선 능제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또한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조선왕릉은 27명의 왕,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능을 총칭한 것이다. 조선조는 한 姓으로의 단일 왕조가 500 여년간 유지된 것도 전세계 역사상 조선이 유일하고 (단, 조선을 李氏 朝鮮 또는 李朝라고는 칭하지 말아야 됨.- 일제가 조선을 폄훼하기 위한 술책임 ), 500년의 왕릉이 인멸되지 않고 잘 보존된 것도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현재 조선 왕릉은 총 42기이나, 남한에 40기가 있고, 북한에 2기( 태조 원비인 신의왕후인 제릉과 조선 2代 왕인 정종과 정안황후의 후릉)가 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2009년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와 문화속에 인류문명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세조(世祖) :
역사의 주역이었던 왕이 되기 위한 처절한 권력투쟁과 왕으로서의 고뇌와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며, 국가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과 성품이 나라의 영고성쇠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 국가, 사회는 물론 개인으로서도 삶의 좌표를 되살피는 데 왕릉 답사의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세조의 행적을 간략히 되짚어 본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아우로 태어난 세조는 진양대군(晉陽大君)이라 칭하다가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文에 몰두한 장남 문종,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달리 거침없고 욕망이 강한 인물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기 바랐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반대로 역사는 흘러갔다.
1452년 병약한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세자인 어린 조카(단종)이 즉위한다. 왕이 미성년이므로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되나, 불행히도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세상을 떠남), 설상가상으로 문종은 세종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계비도 맞아들이지 않은 채 승하하신다.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단종을 보좌하였다. 반면에 강성하고 야심에 가득 찬 대군들, 특히 수양대군을 경계하기 위해 단종 즉위교서에 분경(奔競 : 하급관리들이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는 엽관활동) 금지를 지시하였으나, 수양대군이 강력 반발하자, 황보인은 수양의 분경금지 조처를 해제하여 향후 일어나는 비극을 자초한다. 분경금지 조처가 해제되자, 수양대군은 다양한 사람들을 자기 수하로 끌여 들였다. 대표적으로는 신숙주, 권람, 한명회, 홍윤성이다.
여기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숙주(申叔周) : 집현전 학사였던 그는 수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서상관으로 동행하면서 가까워져, 계유정난 이후 공신에 책록되고, 도승지에 올랐다.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단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여 보고하고, 절친한 친구들인 사육신및 후대에게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결국에는 정인지와 더불어 단종의 죽음을 주장하였다. 세조는 그를 唐 태종의 ‘위징’에 비견하였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알고 중용하였다. 59세에 죽으면서 거사를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권람(權擥) : 조선초 공신인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다. 권제가 첩에 빠져 어머니를 소박하자, 집을 나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쌓다가 한명회를 만나 절친하게 지낸다. 35세의 늦은 나이로 향시에 합격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등과 친밀하게 지내며 세를 키워가는 것을 본 수양대군은 불안을 느끼며 동지를 찾자,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에게 접근하여 거사를 모의한다. 이후 많은 무사들을 규합하여 정난에 성공하자 공신에 책록된다, 활을 잘 쏘며 문무를 겸비하였던 그도 높은 벼슬에 오르자 횡포가 심하고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다 50세에 죽었다.
한명회(韓明澮) : 수양대군의 좌장이 권람이라면, 한명회는 ‘장량’으로 책사였다. 모사와 술수에 능한 그는 과거에 번번이 떨어져 전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자, 친구인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에게 찾아가 거사를 논하게 하고,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성공적( ? )으로 수행하고, 단종 복위운동을 사전에 감지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 등을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하였다. 세조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승승장구하다, 성종때 개인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였다고 하여 탄핵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연산군 때 부관참시되었으난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홍윤성(弘允成) : 성격이 폭급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수양에게 권람을 천거하였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는 등 정난을 수행하였다 하여 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원상회의 때 자을산군(성종) 을 지지하여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재물을 밝히고, 성격은 횡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으나 세조, 예종, 성종의 비호를 받았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그의 잔혹함을 몇 가지 소개하는 것은 뒤에 언급할 조선 공신 책정의 무모성과 극심한 폐해를 알리기 위함이다
1) 홍윤성이 홀로 사는 노파의 전재산인 논밭을 빼앗자,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홍윤성은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때려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버려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2) 이조판서로 있을 때 홍윤성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그는 논 20마지기를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렵게 살 때 내게 의탁한 게 30년인데 출세했다고 이럴 수 있는가' 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타살한 후 후원에 암매장했다.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하기를 꺼려했으며 사헌부에서도 듣지 않아, 세조의 온양 행차중 직접 말했으나 홍윤성은 공신이라고 종만 죽였다고 한다.
3) 자기 집 앞을 흐르는 한강변에 말을 목욕시키면 쫓아가서 말과 사람을 쳐 죽였고, 자신의 집 근처에서 내리지 않고 말을 타고 지나가도 역시 죽여 버렸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않았다.
명분 없는 쿠데타 :
계유정란(癸酉靖難)은 계유년에 일어난 불순세력을 진압하고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의미이나, 이것은 수양대군 쪽에서의 아전인수격 표현이라 개인적으로는 적절한 용어가 아닌 듯 싶다(만약 계유정난이 없었더라면 황보인, 김종서의 지나친 권세로 역효과가 났을 것이라는 가정을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도 있음). 오히려 쿠데타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단종 1년(1453년) 10월 10일 그동안 세력을 키워 온 수양은 김종서를 주살할 계획을 측근들에게 이야기 했으나, 적극적인 호응이 없어 주저하자, 부인 윤씨(갑옷을 입혀주며 적극적인 추진을 보챔)와 한명회등이 즉각 실행을 강력 주장함으로 마침내 조선의 역사를 뒤바뀌는 정난의 비극이 시작된다. 수없는 유능한 인명을 살상하고, 수양은 혼자 의정부, 이조, 병조를 장악했으니 실질적인 왕이 된 셈이다. 무자비한 살육은 계속되어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죽이고, 왕을 지지한다고 하여 많은 왕족과 대신들을 무참히 죽였다. 쿠데타 닷새 후에 수양대군을 위시해 정인지, 한확, 권람, 한명회, 신숙주등 43명의 정난공신을 책봉하는 축제(?)를 벌였다. 게다가 희생된 왕족이나 대신들의 가족들(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을 비롯한 아들들 )을 39명이나 정난 10개월 후인 추석날 살해한다(무자비한 태종도 그토록 미워한 정도전을 죽이면서도 그의 아들은 주요 관직에 중용한 것과 대비된다). 이도 부족하여 단종 3년에 친동생 금성대군, 세종대왕의 서자인 한남군, 영풍군등 단종을 지지하는 왕족들을 귀양보내니,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왕권찬탈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다시 47명의 좌익공신을 책봉하였다.
세조 2년 (1456년)에 병자사화가 일어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의 사육신을 위시하여 약 70여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가고, 사회불안이 계속되니 불안한 세조는 공신들의 결속을 강화하려고 토지와 수백명의 부녀자들을 종친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인지는 박팽년의 아내, 한명회는 유성원이 아내와 딸을 심지어는 신숙주는 노산군의 왕비인 송씨를 받으려 했다는 말도 전해 온다. 얼마 전까지의 동료들의 부인이나 딸을 성적노리개나 종으로 부렸던 것은 치를 떨만한 부도덕의 극치였다. 그 해 6월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에 위리안치시켰으나, 살아있는 단종이 불안하던 차에 귀양 중인 친동생 금성대군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모의하자 그도 가차없이 죽이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주살한다. 더 나가 정인지와 신숙주가 노산군이 반역을 주도하였다고 사형을 강력 주창하니 금부도사 왕방연을 보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여 자살했다고 씌어 있으나, 후세의 학자들은 공생이 활시위로 단종를 교살했다고 한다.
명분없는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많은 공신을 배출했는데, 공신 정책의 문제점을 더듬어 보자.
1) 건국도 아니고 외침당한 것도 아닌데 자기의 왕위 찬탈에 공을 건국에 버금간다고 평가하며, 수많은 공신을 책봉 (정공신의 자제, 사위, 추종자들을 원종공신으로 책봉)하였는데, 무려 2,300여명이라 한다. 그 가족들을 감안하면, 약 10,000명의 새로운 특권층이 수양 개인의 사욕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2) 공신들의 범죄의 치외법권 : 공신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까지 범죄에 대한 면책, 공신들의 불법행위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면 사헌부나 형조에서 접수 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신들의 탈법, 범법이 심해지자 세조는 범법행위가 3차까지는 논의 조차도 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범법하면 승정원이 보고하라고 명을 내렸다.
3) 공신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 제공 : 공신전과 ,동료 대신들의 처, 첩, 딸, 노비및 땅을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대납권을 주었다(대납권 :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납부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데, 이 수수료가 작게는 세금의 두배이고 서너배가 보통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다). 이토록 피의 숙청을 주도한 자신의 행위와 정통성이 없음에 항상 불안한 그는 공신 결속만이 활로라 여겨. 공신을 법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그들만의 천국이지만 백성들에겐 지옥인 상태까지 세상을 바뀌어 놓았다. 만약 그가 불교신자로서 더욱 숭고하고 너그러운 성품이었고, 쿠데타를 거치지 않고,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면 세종에 버금가는 임금이 되었을 것임을 아래 치적등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세조의 치적 :
1. 중앙집권체제 강화 :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2. 국방력 신장 : 호적(戶籍)·호패제(戶牌制)를 강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 북정(北征)을 단행, 1467년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康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으로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다.
3. 경제정책 전환 :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많은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4. 문교 정책 및 경국대전 편찬 :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하였다.
5. 간경도감 설치 : 평소 불교를 숭상하였고, 왕위에 오른 후 왕위 찬탈에 가책을 느껴 더욱 불교에 믿게 되었다.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다. 또한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들 경전은 불교 보급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은 불교학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세조는 말년에 부쩍 겁이 많아졌다. 유교가 지도이념인 조선국가에서 성안에 절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집현전과 유생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절을 지어 참회하기도 하고, 오대산, 금강산의 절에도 다녔다. 52세의 삶동안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경험했고, 피의 숙청으로 얻어진 왕위도 14년에 불과하여 과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가라는 후회도 있었고, 세자로 책봉한 의경세자가 20세에 죽고 (세간에는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때문이라고 하나 단종이 죽은 시점과 의경세자가 죽은 시점이 약간 차이가 나 신빙성은 없으나 민심이 그만큼 세조를 떠나 있음을 말해 줌), 둘째 며느리(예종의 원비이고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와 손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가족사의 연속으로 말년을 두려움으로 보냈다. 세상을 뜨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해 자기 능관리를 철저히 해달라는 유명을 남겼다. 조선조 내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원상태로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높은 묘호(廟號)를 받았으나, 후세에 많은 질타를 받는 왕중의 하나인 세조에 대한 숱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아! 권력의 무상함이여! 비록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주 적더라도 감사하고 나누며, 더불어 사는 것이 중생의 도리이고 행복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류영철)
탐방단원들이 찍은 사진
스마트폰으로 전달받아 해상도가 떨어지네요!!
|
첫댓글 國史시간에 世祖 부분을 다 뗀 것 같습니다.
열강하신 류교수(?)에게 감사드림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세조는 역대 왕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질타를 많이 받는 왕으로서, 뒷 이야기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사육신,생육신을 빼고서도 단종의 고립무원의 배경, 수양과 안평대군의 암투, 양측의 책사인 이현로 ( 각색이 되어 영화화 됨 )와 한명회의 조우와 정적으로의 암투, 불교에 전력한 세조의 말년의 행적등에 대해서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괜챦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