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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54) : 주객전도의 신앙
마태복음 15:1-9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승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전승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전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전도사님이 새로운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그 소명의 사건을 설교하는데 그 내용 가운데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라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얘기하면서 이 전도사님도 새로 부임한 그 교회 첫 번째 설교에서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랬더니 곧바로 아이들이 대답을 합니다. 김 선생님입니다.
김 선생님이라고.. 전도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을 김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그랬더니 주위 교사들이 나중에 가서 이야기해줍니다.
작년 여름 성경학교 때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그때 사역했던 그 전도사님이 오늘 하나님께서 이 장작이 말라 있지만, 불도 안 붙어 있지만, 저 하늘에서 이 장작에 하늘의 불을 내려서 이 장작을 캠프파이어로 만들어 주실 거라고 우리 함께 하나님 불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함께 외칩시다 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이 내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외치겠습니다. 하나님 불을 내려 주십시오. 두 번째 외쳤는데도 불이 내리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 전도사님이 한 선생님과 함께 계획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불을 내려 주십시오 하면 저 높은 나무에서 철사를 연결해서 불을 붙여서 불을 그쪽에 내려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불러도 불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 전도사님이 높은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김 선생님 이제 불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그걸 보고 아 하나님의 이름은 김 선생님 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 만들어낼 수련회, 여름 성경학교, 하나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아쉽고 안타까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그 수련회 여름 성경학교 교회 안에 있는 많은 행사들과 모임 교제와 친교를 너무나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추억은 항상 함께 나누고 같이 경험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더 그립고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 함께 하고 더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 추억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그 때를 소망하면서 다시 한 주를 보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 54번째 '주객전도의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객전도 主客顚倒 무슨 뜻입니까? 주인과 종이, 주인과 손님이 서로 뒤바꼈다 라고 하는 뜻이지요.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것을 주객전도 라고 얘기합니다.
예전에 제가 목회할 때 한 집사님께서 사생활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픈하지 않으신 거지요. 근데 어느 날 은혜를 받고 집을 오픈하고 심방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심방을 받는 것이니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구역의 식구되신 분들 함께 10명이 심방을 갔습니다. 모두 기대하고 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심방을 맞이하고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이라 어떻게 준비하는지 모르십니다.
사람들은 열 명이 가는데 음식은 2~ 3인분 밖에 준비가 안됐습니다. 음식 준비는 10가지를 준비했다는데 두 세가지 밖에 준비가 안됐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 함께 신방을 간 장로님께서 이제 심방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제 귀에다 대고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목사님, 육의 양식을 위해 말씀은 짧게 해주십시오. 그날 설교를 짧게하고 모든 성도들이 심방 예배를 드리자마자 주방에 뛰어들어갔습니다. 열 명이 함께 저도 같이 고기를 갖고서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한참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손님으로 간 성도들 저를 포함해서 모든 성도들은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작 그 집에 주인이 된 그 집사님은 본인이 일을 너무 많이 했다고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있구나..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뭐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런 저런 일들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그때도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심방을 간 성도들이 주인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주인인 집사님은 손님처럼 기다리는 모습이었는데 오히려 그날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식탁 공동체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 날 이후로 그 집사님은 교회에 잘 적응하고 교회 생활도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주객전도의 상황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죠.
그러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객이 전도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으로 영적으로는 절대로 주인과 손님, 주인과 종의 그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객이 전도된 신앙으로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을 손님과 종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신앙의 주객전도의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 그렇게 주객전도된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인간의 죄악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지요. 그들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지만 따먹는 것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에덴동산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규율과 법칙을 만드는 것이죠. 당신이 갖고 있는 그 공동체의 규율과 법칙을 만드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창세기 3장에서 보여준 태도는 하나님 대신에 내가 에덴동산의 규율과 법칙을 만들겠다 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형적으로 영적인 주객전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또한 성경에서는 이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주객전도된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여러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과 다르게 반석을 한번 쳐야 되는데, 두 번이나 치지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자기 멋대로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땅의 모든 것을 청지기처럼 다 맡기셨는데, 다윗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가지려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가는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인양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등등 수많은 인간의 죄악된 모습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 인간이 앉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죄인의 모습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우리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절에 보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왔다 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왔다 라는 표현은 물론 물리적인 장소의 이동을 표현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너머에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과 예수께 왔다 예수께 갔다 라는 상징하는 표현이 대조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통 관습 관행에 대한 것을 상징하고요, 예수에게 갔다 라고 하면, 예수는 그에 반해서 그런 잘못된 관행 관습 전통으로부터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개혁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1 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께 갔다 예수에게 왔다 라는 그 표현만 보더라도 오늘 이 본문에서 어떤 얘기를 하는지 우리에게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어떤 얘기가 나올까요?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듯 묻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 장로들의 율법을 범했습니다.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결례 법이라고 하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2 장에 보면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보이시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이 물은 정결례 율법에 쓰였던 물입니다.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손을 씻는 율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첫 번째 이적의 중요한 것은 포도주로 바꾸는 화학적 변화에 대한 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율법으로 지키고 있는 그 물을 하나님 잔치, 하나님 나라의 축제가 벌어지는 그곳에 포도주로 만들어주셨다 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 첫 번째 이적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어찌되었던 그런 취지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절에서 9절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3절에 9절에 이렇게 표현하시죠.
메시지 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어째서 너희의 규정을 빌미삼아 제멋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은 분명히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누구든지 부모를 욕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이 있어도 부모 대신에 하나님께 예물을 바쳤습니다 말하면서 그렇게 계명을 회피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너희는 너의 규정을 빌미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로 만들고 있다
이 사기꾼들아 너희 같은 사기꾼들에게 이사야가 정곡을 찔러 잘 말했다. 이 백성이 입바른 말을 거창하게 떠벌리지만 그들의 마음은 딴 데 있다 너희는 나를 경배하는 듯해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든 자기네 구미에 맞는 가르침을 위해 내 이름을 팔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이 율법 규정 법 법 법을 이야기 하니 그 법이 적용되는 실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너희는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느냐 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죠.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부모에게 드리지 못하니 또 다른 법을 만들어서 그 법을 어기려고 또 다른 율법을 만든 모습이지요. 부모께 드려야 되는데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라고 하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율법은 그대로 어기고 있는 것이죠. 법을 지키지 않고 있지않느냐 라고 우리 주님께서 반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사기꾼이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바른 말을 거창하게 떠들지만 그들의 마음은 딴 데 있다. 겉으로는 나를 경배하는 듯 해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구미에 맞는 가르침을 위해 내 이름을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있다 라고 말씀하지요.
그런데 이사야 말씀은요 부모 공경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 전체가 보여주고 있는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꾸중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는 오늘 장로님도 기도로 말씀하셨지만 최근에 한 사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정인이 사건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보여주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지요.
이미 아시는 대로 정인이 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한 기독교 가정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양부모는요 독실한 기독교 가정입니다. 그리고 입양된 정인이의 조부모는 목회자들입니다. 정인이의 부모는 유명 기독교 대학을 나왔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가정으로 알려졌습니다. 방송에도 나왔고 sns 에서도 자신들이 정인이를 입양한 것이 마치 대단한 선행을 베풀며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미화하면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sns 와 방송에서 그들이 목회자의 가정 예수 잘 믿는 젊은 부부라는 허울에 가려져서 입양된 정인이는 그곳에서 생지옥을 경험했고요 죽음까지 당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경 본문의 상황을 바로 이 순간 우리 대한민국에서 이 본문의 상황대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셨다면 부모의 공경례 대신에 이 정인이 사건으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양부모가 우린 입양했어, 불쌍한 아이들 입양했어요.
피붙이가 아닌 자식도 사랑으로 기른다며 입바른 말을 거창하게 떠들지만 그들의 마음은 딴 데 있었다. 겉으로는 나를 경배하는 태도, 예수 잘 믿고 신앙 잘 믿고 믿음의 가정처럼 보였을지라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든 자기네 구미에 맞는 욕심과 이익을 위해 내 이름을 팔고 있을 뿐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천만 명에 가까운 기독교인구 가운데 이 한 가정만 이상한 걸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2의 정인이 제 3의 정인이가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 한국교회 어떤 가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요. 그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모든 곳에 계신 그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걸까? 만약에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을 제대로만 믿고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정인이를 그렇게 때리고 죽기까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모든 곳에 우리를 보고 계신다 라는 그 사실만 믿고 있었다면 생후 16개월 된 정인이가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걸까?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어린 심령을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온전하게 닮아가고자 했다면 절대로 그 정인이와 같은 사건을 방치해서는 안되지요. 이 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교회 문제 아니야 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문제이고요 우리 한국교회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한국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말씀대로 내 이름을 팔고 있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있고 예수의 이름을 팔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대신에 우리는요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돈과 물질을 더 신뢰하게 되었고 성령님이 아니라 교회에서 가장 힘세고 목소리 큰 사람들을 더 믿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교회 목사와 터줏대감 같은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얼마짜리 교회냐, 몇 억짜리 건물로 교회 신앙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되었고 교회 안에서는 조용히 진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다수의 성도 보다 몇 명 목소리 크고 힘자랑하는 그런 성도가 교회 주인 노릇하는 주객이 전도된 한국 교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의 대화 속에서 제 3자가 되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 하는가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상징 이 말씀의 수사법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교훈이 있다면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결단과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여준 영적으로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과감히 끊어버리고 참 주인이 누구신지 구별하고 우리는 무엇을 우선으로 신앙가운데 살아가야 할 지를 이제 실천하는 삶이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합니다.
한번 말씀드린 예화입니다. 한 교회 예배 중에 한 사람이 애완동물을 데려 왔습니다. 그런데 애완 동물이 예배 중에 자꾸 돌아다닙니다. 그래 한 장로가 그 애완동물을 잡아서 거기에 목줄을 걸어가지고 의자에 항상 묶어 놓았습니다.
계속 그 일을 반복하다 1년이 지났습니다. 어차피 예배 전에 그 애완동물을 개 목줄을 매서 의자에 걸어놓은 일들을 계속해서 예배 전에 하게 되니 이것을 하나 예배예식으로 만드는 것이 어떨까 라고 제안을 해서 당회에서 이 거룩한 예배 가운데 애완동물이 오게 되면 목줄을 매주고 의자에 걸어놓는 것을 예배 순서의 하나로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경건한 마음으로 애완동물을 교회 의자에 묶어놓을 때 안아주고 3번 쓰담아 주고 교인들이 함께 박수치고 좋아해주면서 목사는 목줄을 애완동물의 목에 걸어서 의자에 걸어놓고 기도해주고 예배당으로 올라오는 이 예식을 예배순서의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새로운 교인들이 교회를 채우고 다음 자녀의 세대들이 주류 교인이 되었는데 계속해서 애완동물이 올 때마다 그런 예식을 하게 됩니다. 왜 그 예식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예배 중에 그렇게 하니 다들 그렇게 따라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목사가 은퇴하고 새로운 목사가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장로들이 와서 애완동물을 위해서 이런 예식을 진행해주십시오 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예배와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다 장로들과 교인들이 그 목사가 자기의 교회 전통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그 목사를 내쳤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죠. 예배와 예배자 그리고 예배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중요한데 어느새 그 본질은 사라지고 예배 형식이 주일 예배에 주인 행세하고 그런 사람들만이 남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배의 신학에 어떤 해석 어떤 이론이 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고쳐서 그 예배에 적용해서 그대로 온전히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죠.
본문으로 돌아와서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다 되었다라는 말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잘못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율법은 잘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따지고 묻고 하는 것으로 율법을 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지킬 때 제대로 된 율법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예배를 드리냐가 중요하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어떤 건물에서 드려야 합니까?
형식과 신학 이론 그런 것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세미나 하는 거 이런 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게 중요하지요. 우리 신학교에서 우스개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성서학자 성서학 교수님들이 성경을 제일 안 보고요, 기독교 윤리 학자들이 기독교적으로 제대로 못 삽니다. 예배 학자들이 예배학 교수님들이 항상 예배 때 지각하고 경건하게 예배를 안드린다고 저희들끼리 우스개로 얘기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씀을 보는 것 예배 때 진정으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데 학자가 되면 이론으로만 따지고 또 따져묻게 되지요.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못한 삶이 지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죠. 교회에서 전등 하나가 나갔습니다. 교체를 해야 되는데, 각 기독교 교파에서 이렇게 교체를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요 전등이 나가면, 곧바로 미사에 광고시간에 광고를 합니다. 전등이 나갔습니다. 헌금 바구니 돌리겠습니다.
헌금해 주십시오. 전등 보수비로 말입니다. 루터교회에서는 전등이 나가면 교회가 타락해서 생긴 마귀의 시험이라고 하는 공문을 부친다고 합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전등이 나가면, 즉시 함께 모여서 기도회를 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셔서 전등을 다시 켜지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우리 교회 같은 장로교회는 어떻게 할까요? 전등에 나가면 임시당회를 소집합니다. 한 장로를 위원장으로 해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 당외 때까지 검토해서 전등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어떤 메이커로 전등을 살지 누가 갈지 어떤 위원회에서 돈을 댈지 6개월 동안 회의를 하는 겁니다.
웃기죠. 설마 유머를 말하려고 그렇겠지 라구요? 아니요.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비슷한 일들이 교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모습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등을 갈고 바로 예배 드리는 것이 중요한데, 그 전등 누가 갈 것인지 어떻게 갈 것인지 두고서 교회가 그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진짜 하나님 말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은 가짜 주인 가짜 하나님이 너무 많습니다.
누구든 전등을 갈면 됩니다. 전등을 갈고 바른 예배를 드리면 되지요. 실천하고 적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율법에 묶여 따져묻기 시작합니다. 누가 할 것이냐 기도 할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주객이 전도된 신앙을 사시면 안됩니다. 주님이 앉으실 자리에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를 찾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앉아 계실 그 곳에 우리가 그 곳을 찾지하고 그 자리에 앉으면 안되죠.
한 목사님이 은퇴목사가 되어서 오랜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오랜만에 교회에 찾아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임 목사님이 맨 뒤에 있는 그 은퇴 목사님이 오신 것을 보고 광고시간 이렇게 광고했습니다.
여러분 저 뒤를 보십시오.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맨 뒤에 앉은 은퇴 목사님을 보고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고 매우 기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는데 정작 그렇게 소개받은 은퇴 목사는 기분이 나쁩니다. 왜냐고요?
후임 목사가 자기를 손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식이 나를 손님으로 밖에 안봐.. 성도들에게도 나를 손님으로 소개하는구나. 내가 몇 년이나 있었는데. 이 교회 내가 이렇게 세웠는데. 나를 손님이라고 소개해?
예배드리는 목사님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자신이 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축도 부탁을 받고 단에 서서 축도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인 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라고 하는 이 표현의 지점에서 이 은퇴 목사님이 갑자기 머리에 철퇴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회개 기도를 하고 울먹이면서 축도를 마쳤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은퇴 목사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그 애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축도를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원래 그 은퇴 목사님은 회개 기도 하듯이 축도를 하신 것이지요.
내가 교만 했구나. 내가 교회의 주인처럼 주인 행세를 하고 살았구나. 당연히 난 손님인데 인간적인 생각이 너무 가득 했구나.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손님입니다. 영원한 손님입니다. 하나님 만이 주인이십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회개 기도하고 도리어 자신은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손님일 뿐입니다. 주님 저희는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주님 저희는 이 교회 내 가정 내 일터 내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자연 환경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러한 참된 고백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에 여러분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의 위치를 깨닫고 참 주인 되신 오직 하나님만을 바로 섬기는 한 주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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