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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구법만행6. 옥천사
익어가기
익어가는 삶
한 친구가 카카오톡을 통해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거래.’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말이 마음에 다가와서 수업 시간에 친구가 보낸 메시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어느 학인學人이 그것은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 속에 나오는 가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노래를 들어보았다. 삶이 힘들고 외로워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사막을 걸어도 꽃길이라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가수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야 늙어가지 않고 잘 익어갈 수 있을까? 이번 만행은 이 물음을 화두로 삼아 떠나는 여정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옥천사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듣다보면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나보다.
옥천사로 들어서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자 도로 양쪽으로 돌기둥이 우뚝 서있었다. 오른쪽에는 ‘연화산 옥천사’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왼쪽에는 ‘이 문으로 들어오려면 지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 莫存知解.’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왠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다. 문득 지적인 이해만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이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늙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잡지 않으면 오늘 답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옥천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참 좋았다.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지식의 찌꺼기들이 저 멀리 날아가는 느낌이다. 길 위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옥천사는 이렇게 가을의 소식을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옥천사 경내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근현대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1902~1971의 부도와 탑비였다. 옥천사는 스님이 대승보살의 삶을 발원하고 출가한 곳이다. 이곳에서 잘 익어가는 수행을 통해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탑비의 서체가 낯설지 않아 자세히 보니, 한국불교의 대 강백으로 알려진 탄허呑虛 스님의 글씨였다.
대웅전에 들러 참배하고 여러 전각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더니, 스님께서 몸을 낮추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저 스님께 합장을 한 것뿐인데, 고맙다니! 순간 이런 모습이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 있는 구절이다.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가 허공에 가득한데雨寶益生滿虛空, 중생들은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네衆生隨器得利益.”
허공에는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가 가득하며, 그것은 우리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가 음식물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주변에는 요구르트나 치즈, 김치 같은 여러 발효 식품들이 있다. 이런 음식들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미생물과 만나서 잘 익어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잘 발효된 음식에서는 좋은 향기가 날 뿐만 아니라 맛도 매우 좋다.
그런데 부패를 일으키는 균이 활동을 하게 되면 음식은 익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썩는다. 부패한 음식에서는 좋은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진동한다. 인간이 이런 음식을 먹게 되면 몸에 해로울 수밖에 없다. 같은 음식인데도 어떤 균을 만나느냐에 따라 부패와 발효라는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사람의 인격에도 향기와 악취가 있다. 그래서 향기 나는 사람과의 만남은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악취가 나는 사람과의 만남은 고통일 뿐이다. ‘난향蘭香은 백리를 가고 묵향墨香은 천리를 가지만, 덕향德香은 만리를 간다.’고 하질 않았던가! 덕향은 다름 아닌 사람의 향기, 인격의 향기이다. 그 향기는 부패하는 것이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잘 익어가는 것이다.
결국 보배 비는 허공에 가득하지만, 그 비는 인격이라는 그릇에 따라 담아내는 양과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옥천사에서 만난 노스님을 통해 나는 잘 익어간다는 의미를 새길 수 있었다. 또한 잘 익은 벼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도 생각났다. ‘고맙습니다.’라는 덕향을 품은 옥천사의 가을은 내게 행복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너는 진정 늙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익어가고 있는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옥천사가 내게 묻고 있었다.
성인의 샘, 옥천
옥천사를 품고 있는 산은 연화산蓮華山이다. 산의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연화산’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된 옥천사를 인조仁祖 때 학명대사學明大師가 복원하면서 붙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비슬산琵瑟山으로 불렸다. 이 산의 동북쪽에 선유仙遊, 옥녀玉女, 탄금彈琴 등 세 봉우리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인仙人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다루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설명도 있다. 비슬琵瑟은 범어인 비슈누Vishnu를 한자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비슈누신이 사는 하늘에는 감로甘露의 샘이 솟아난다고 믿었는데, 이곳 역시 감로와 같은 옥천玉泉이 1년 내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어서 비슬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슬이란 이름이 내게는 그리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아픔의 역사가 이 이름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비슈누는 여러 모습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죽음의 신 시바Shiva와 함께 유지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문제는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면서 부처님이 비슈누의 아바타Avatar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비슈누는 이 세계를 유지하면서 여러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슈누의 화신化身, Avatar 사상이 비슬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기 때문에 연화산으로 바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꽃의 품안에 놓인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스님이 화엄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창건한 화엄10찰 가운데 한 곳이다. 다른 화엄 사찰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화엄사상을 통해 소외된 지역을 품고자 하는 이념이 작용한 곳이다. 옥천사가 위치한 고성은 본래 6가야 가운데 하나인 소가야小伽倻의 중심지였다. 나라를 잃고 신라로 병합된 설움이 남아있는 곳이다. 의상 스님은 옥천사를 통해 이 지역의 민초들 역시 통일 신라의 주인임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옥천사는 이름에 어울리는 감로수가 흐르고 있다. 대웅전 옆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그곳에 들러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저 샘물이려니 했는데, 시원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맛이 느껴졌다. 정말로 맛이 좋았다. 그런데 샘물이 나오는 이곳의 이름이 옥천각玉泉閣이다. 아니, 샘물에 각閣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다니! 전殿이 불보살님을 모신 공간이라면, 각은 성인을 모신 곳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 샘물은 산신각이나 독성각獨聖閣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샘물은 다름 아닌 성인이었던 것이다.
나쁜 물은 사람의 몸을 해치지만, 좋은 물은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어디 몸뿐이겠는가. 마음도 이롭게 해줄 것이다. 이곳 옥천사의 샘물은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샘솟고 있으니, 이곳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이 물을 마시고 몸과 마음 모두 잘 익어가지 않을까? 경내에서 만난 노스님이 잘 익어갔던 것도 혹여 이 샘물을 마신 덕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성인이란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격이 완전하게 익어서 불격佛格의 차원으로 나아간 사람을 의미한다. 연화산에서 샘솟는 감로수는 사람을 익어가게 하는 물이다. 이곳을 옥천각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옥천은 1987년 한국의 명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 샘물을 마셨으니, 늙어가지 않고 잘 익어갈 수 있을까?
마음 닦기
대웅전 맞은편에는 거대한 성채처럼 절 외곽을 둘러쌓은 자방루滋芳褸가 자리하고 있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 내부는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을 받치고 있는 보마다 아름다운 연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사찰 행사 때 법회를 여는 장소뿐만 아니라 군사용 회합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임진왜란 이후 전략적 요충지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찰을 건립한 예가 있는데, 옥천사가 이에 해당된다 한다. 옥천사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호국사찰의 역할도 함께 담당했던 것이다.
옥천사를 나와 부속암자인 백련암에 들렀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자 강아지 한 마리가 한쪽 다리를 절면서 내게 다가왔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옥천사에서 사온 연꿀방을 꺼내 입에 넣어주었다. 연근과 마, 통팥을 첨가하여 오븐에 구워낸 고급 수제빵이라 한다. 무척 좋아하면서 맛있게 먹는다. 그곳을 나오는데 다리를 절면서 배웅까지 해준다.
강아지를 뒤로 하고 또 다른 암자인 청련암에 들렀다. 이곳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찰피나무가 있다 해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찰피나무는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 해서 염주나무, 혹은 염주보리수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菩提樹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다. 보리수는 진리의 나무이므로 이곳 찰피나무 역시 잘 익어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찰피나무는 죽어있었다. 관리소홀로 방풍림을 제거한 것이 원인이 되어 고사되었다 한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잘 가꾸지 않으면 섞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본질이 부처라 해도 현실에서 마음을 닦지 않으면 그저 중생으로 살 수밖에 없다. 중생은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늙어가고 섞어갈 뿐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연화산 옥천사’라고 쓰인 돌기둥을 지날 때였다. 이곳에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는데, 돌기둥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三日修心千載寶, 백 년 탐한 물질은 하루아침의 먼지라네百年貪物一朝塵.”
스님들이 출가하여 맨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있는 구절이다. 비록 3일만이라도 간절하게 마음을 닦는다면 천년을 이어갈 소중한 보배가 되지만, 백 년 동안 물질을 탐낸다면 하루아침의 먼지와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물질과 자본에 주인의 자리를 내어준 채 이를 마치 천년의 보배처럼 여기면서 살아간다. 어찌 보면 수심修心이라는 참 보배는 외면한 채 하루아침의 먼지와 같은 일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삶은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것이며 썩어가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마음을 닦아가는 삶은 익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물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한다. 목표와 방향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무리 돈이 우선하는 세상이라 하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돈에게 주인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일이다. 돈에게 자신의 본래 자리, 즉 필요와 수단이라는 지위를 찾아주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야 익어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늙어가는 삶에서 익어가는 삶으로의 질적인 전환은 자신을 성찰하는 마음 닦기修心에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처럼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옥천사의 가을 단풍은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첫댓글 자방루(滋芳褸)...요새와 강학을 했던 곳. 청담스님과 인연 깊은 절. 전북불교대 재학 때, 백준기교수님 인솔로 가고, 회일스님의 우리절에서도 가서 참배했던, 일렬로 늘어선 불당들...옥천수 마셨던 절.
그러셨군요..^^
저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교수님 글을 여유있게 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_*
고운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차갑네요.
따뜻한 겨울 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야 두 손 모아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