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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수필 이론
비전환적 표현과 작가의 정체성 드러내기
ㅡ박귀덕의《사막으로 떠나는 배》에 부쳐서
강 돈 묵
1. 들어가면서
문학 장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에 의하면 문학은 서정·서사·극으로 나뉜다. 이 삼분법은 그동안 문학의 장르론에서 선유경향처럼 인식되어 온 이론이다. 하지만 엄연히 수필이란 장르에 속해 활동하는 작가가 한국문인협회 구성원의 1/4에 해당한다면 이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인원으로 하나의 장르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나름 장르적 특성도 가지고 있음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조동일, 김수업, 김존오 교수 등의 이론에 근거하면 문학의 장르는 시·소설·희곡·교술(敎述)로 4분하고, 수필을 교술문학의 대표격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때 ‘교(敎)는 알려주거나 주장한다는 뜻이고, 술(述)은 어떤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전류에서는 교술을 ‘사실을 가르치거나 전달하기 위한 기술’, ‘대상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는 문학 장르’쯤으로 밝히고 있다. 수필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함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가능하다. 작가 박귀덕의 수필에서 보이는 충실한 정보 제공의 기능은, <흙이 불을 만나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도자기를 굽는 일에 이만큼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퇴수기와 연지, 찻그릇에 물고기,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학, 연판 문양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연속적인 꽃 모양의 인화기법, 백토를 바른 후에 음각으로 조각했다는 조화기법, 백토에 조각한 다음 주변을 파냈다는 박지법, 붓으로 자연스럽게 칠한 느낌을 주는 귀얄기법. 유약에 덤벙 담갔다 꺼냈다는 덤벙기법 등’은 실로 해박한 정보의 제공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문학이고, 문학은 현상의 기록이 아닌 본질의 기록이어야 함을 토대로 인식해 보면 수필문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키는 쥐고 있는 셈이다. 막연히 자신이 경험한 바를 기술하는 데에 멈춰서는 안 되고, 작가의 삶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까지 찾아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교술이 비전환적 표현(非轉換的表現)이므로 객관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수필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문학 장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 비전환적 표현인 수필에서는 작가의 체험이 작품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박귀덕의 수필에서도 이는 가식 없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지금까지 지탱해 온 삶의 언저리에서 글감을 취택하여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독자 앞에 제시하고 있다. 어느 하나 자신의 삶에서 이탈하여 다른 이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 고백적 문학이다. 자신이 체험한 바를 짚어보며 성찰하는 삶을 그려주고 있다. 또 박귀덕의 수필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복잡하지 않고 단출하다. 대부분 가족이고, 직장 업무로 함께 한 사람들이거나 일정 기간 여행을 같이한 사람, 입원실의 환자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삶의 유형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수필은 작가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특히 박귀덕의 수필은 철저한 비전환적 표현이기에 작품 속에 둥지 튼 일상을 살핀다는 것은 바로 작가를 만나러 가는 일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 있어서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간 세계에 주는 애정의 눈빛으로 하여 그의 정체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작가 박귀덕의 수필을 통하여 다양한 삶의 모습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문학세계에 깊이 들어가 그만의 향취에 젖어 보고자 한다. 이는 한 작가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고, 감염병 팬데믹에서 견뎌내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2.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박한 자연
작가 박귀덕의 자연은 일상의 자연이다. 남들이 보지 못한 나만의 것도 아니고, 누구나 접하게 되는 자연 현상 그대로다. 그 현상에 작가의 해석이 가미되어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독자 앞에 다가서고 있다.
어머니도 소나무를 사랑하셨다. 정월대보름에 솔가지를 대문에 세워 잡귀가 번잡하지 못하게 보초를 세우고, 오늘 밤은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고 하셨다. 조카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솔가지를 넣어 만든 쌈줄을 대문에 걸었다. 이른 봄, 씨나락 담근 항아리에도 솔가지를 담가 놓았다. 솔가지로 만든 쌈줄을 간장 담근 항아리에 둘러놓아 부정을 막아내셨다.
소나무는 내 삶에도 친근한 나무다. 거실로 나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소나무다. 새들이 앉아 노래하는 안식처, 창문을 열면 소나무의 향을 즐길 수도 있다. 봄이면 송화가루와 찹쌀가루를 꿀에 버무려 다식판에 찍어 뒀다가 차를 마실 때 쓰기도 한다. 찻상에 오른 다식 중 색과 향이 으뜸이다. --<세한도를 닮은 소나무>에서
자연은 인간 삶의 현장이다. 늘 접하게 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의 유형은 다르게 나타난다. 작가의 어머니는 경건하고 맘대로 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오로지 활용하고 개인이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연은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하면 해결해 주는 존재였다. 잡귀를 몰아내는 존재. 쌈줄을 타고 앉아 부정을 다스리는 존재, 그게 자연의 소나무다. 작가에게 자연은 이롭고 소중하다. 새들이 노래 부르고, 솔향이 풍겨온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긍정적이고 서로 교감이 가능하다.
이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편안하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의 현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구름 속에 잠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베일에 감춰두고 보여주려 하지 않는 천지를 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버선발로 뛰어오지 않아 섭섭해서 토라진 것인지, 삼대가 적선을 하지 않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만나기 싫은 사람이 와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날씨라고 들었으면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다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구름이 천지를 가리니>에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이야기다. 상상하며 찾아온 천지. 산골짜기에 야생화가 곱게 피어있는 천지,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쪽빛 속에 잠긴 천지, 청노루 산토끼 다람쥐 꿩들이 새끼를 기르는 무릉도원 같은 공간. 마냥 동경에 찬 그림이다. 그러나 천지는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고, 천지에 두 손을 담그기는커녕 물빛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작가 박귀덕은 그 탓을 자신에게 돌리려 한다. 자연 앞에 경건하지 못한 자신 탓이라며 되돌아본다. 내리자마자 버선발로 달려오지 않은 탓, 삼대가 적선하지 않은 탓, 혹여 천지가 만나기를 꺼리도록 지은 죄가 있는 탓으로 자신을 성찰한다. 여기서 작가 박귀덕이 가지고 있는 자연관은 아주 지극히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소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은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작가 박귀덕은 자연을 바라봄에 있어 특별한 경우를 선정하지 않는다. 일상의 언저리에서 접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자연이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애초부터 내가 의탁해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다가 소망한 것이 어긋나도 자연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안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경건, 바로 이것이 작가 박귀덕이 자연 앞에 서는 자세이다.
3. 성찰의 삶과 회한의 시간들
쑥 캐기에 아직 이른 시기인 듯해서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정수장 능선 매화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나물을 캐고 있다. 다가가서 바구니를 보니 쑥이 한 움큼이다. 흙에 가깝게 다가가 앉았다. 낙엽 속에 숨겨져 있던 쑥이 보인다. 정수장을 돌며 건성으로 보았을 때 보이지 않던 쑥이다.
세상을 진지하게 살지 못하고 건성건성 살아왔던 날들이 스친다. ‘삶의 목표는 있었는지, 무엇을 좋아하며 살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지, 나답게 살려고 노력은 했었는지, 참살이를 하려고 고민해 본 적은 있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 보지 못한 삶들이, 짐의 굴레를 벗어나려 허덕이며 산 삶들이 스친다.…<중략>… 매화 나뭇가지 늘어진 언덕에서 쑥을 캔다. 땅 냄새가 쑥 향기가 매향과 조화롭다. 고향의 냄새에 푹 잠긴다. 봄 향기에 흠뻑 젖은 하루,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온몸으로 봄을 맞이한 날이다. --<매화 향기에 젖다>에서
감염병을 피해 칩거하다가 쑥을 캐러 나간다. 하지만 쑥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목에 매화나무 아래서 쑥을 캐는 아이들과 맞닥뜨린다. 그들은 캔 쑥이 한 움큼씩이다. 자세히 보니 쑥은 낙엽 속에 숨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자기 성찰에 들어간다. 매사에서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난 시간이 부끄럽다. 그동안 삶에 목표는 있었는지, 무엇을 좋아하며 살았는지, 하고자 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했는지, 나답게 살려고 노력했는지, 참살이를 하려고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매화향과 쑥향이 조화를 이루며 작가의 느슨한 삶을 깨운다. 쑥도 캐었으니 이젠 느슨한 삶을 움켜잡으면 되는 것이다. 오늘에 만족하는 작가는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성찰하는 삶은 분명 가치가 있다.
나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아이들 어려서는 직장 일에 얽매여 가족들에게 소홀했다. 주부와 엄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한 엄마로 살았다. 갑자기 비라도 오는 날이면 엄마가 가져다주는 우산을 쓰고 나란히 교문을 빠져나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를 그리워했을 아이들, 아이들이 심심해할 때 놀이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엄마였다. 진로 결정에도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고 상담에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어 고독했을 아이들, 젊음을 고민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생각만을 강요했다. 좁디좁은 소견머리, 나와 다른 생각을 소유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 아니 싫어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삶이 언뜻언뜻 스친다. --<백두산에서 만난 나무>에서
조물주는 인간에게 똑같은 능력을 준 것은 아닐까. 가끔 이런 생각에 맞닥뜨려 망상에 젖기도 한다. 다만 그 능력을 어떤 능력으로 채우느냐일 뿐. 한정된 능력을 갖춘 인간에게 여러 분야의 일을 떠맡긴다면 빈틈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 보면 작가 박귀덕은 가정을 건사해야 하고 공무원으로서 직장에 충실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언제나 일 처리의 순서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이다 보니, 늘 가족에게서 떠밀려 나와 이방인이 된다. 뒤늦게 지금에 와서 보니,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지 못했고, 우산 한 번 바쳐주지 못한 엄마였다. 그뿐만 아니라 진로 선택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에만 충실하였다. 좁디좁은 소견머리로 아이들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한 지난 세월이 후회로 남는다.
나무들도 헛꽃으로 곤충을 유인하여 수정하고 나면, 이내 혼인색을 버리는 지혜가 있다는데, 융통성 없이 아집만 가지고 산 지난 세월이 회한으로 다가온다. 이제 가족의 보금자리에는 이가 빠진 흔적이 확연한데 뒤늦게 찾아온 이 허전함은 어찌 달랠지 막막하다. 삶은 역시 끝없는 성찰인가 보다.
4. 뒤돌아본 옹이와 삶의 각질들
한 생을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지난한 일은 무수히 많다. 그때마다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하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와 가치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인간의 일생에 날카롭고 예리한 흔적을 남기기에 그의 정체성 파악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이 같은 몇 가지 흔적들은 모여서 한 인간의 특별한 품성을 규명하게 된다. 이번 수필집에서 작가가 현실에서 접한 사건들을 어떻게 인식하여 수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그 인식의 방법과 대처의 유형을 서로 견주어 보면 작가만의 인생관, 문학관, 세계관에 접근하리라 믿는다.
옆집으로 놀러 가는 게나 거품 밥 짓는 게를 쫓아가 잡으려다 놓치는 일은 다반사, 그래도 잡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게가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면 그 구멍 속에 손을 쑥 집어넣고, 손가락 끝에 까칠한 감촉이 느껴질 때 게딱지를 잡아 꺼내는 요령도 터득했다. 게 잡는 재미에 푹 빠졌을 때쯤, 손가락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놈을 만났다. 게를 떼어 내려고 허공에 뿌리치고, 게딱지를 잡아당겨도 보았지만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떨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더욱 세게 조여 왔다. 살점이 떨어질 듯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겁에 질려 울고 있을 때 아버지는 “게를 허공에서 떼어 내려고 하면 게도 저 살려고 더 꼭 물고 늘어지지. 그럴 때는 게를 땅바닥에 놓아주어야 한단다. 그래야 게도 저 살려고 너를 놓고 도망가지.” 하신다. 딸에게는 관심도 없이 낚시만 즐기시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물린 손가락이 너무 아파 아버지 말씀대로 게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때서야 게도 내 손가락을 풀어주고 도망쳤다. 손가락 살점에 구멍이 나고 피가 흘렀지만 살기 위해 도망가는 게를 잡지 않았다. .-- <아버지의 바다 >에서
부모와의 추억은 내가 가장 아팠을 때에 더 빛을 발한다. 아픔의 통증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준 배려의 사랑은 당사자에게는 더 깊고 오래 남는 일이다. 거기다 더해 상대가 나에게 배려하려니 미처 기대하지 않을 때 다가선 사랑은 가슴 뭉클한 것이다. 무심코 게를 잡다가 물렸을 때, 어쩌지 못하고 당황해 있을 때, 저만큼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신 아버지. 없는 듯 있는 깊은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라 했던가. ‘게를 땅바닥에 놓으라’는 아버지의 슬기는 작가가 아버지를 추억하게 만드는 확실한 메시지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없는 듯이 나타나 배려해 주는 사랑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말을 배우고,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는 모습에서 삶의 지혜와 윤리와 가치를 터득한다. 곁눈질로 배우더라도 그것은 앞으로의 삶에 확실한 지침서가 된다.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며,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모습에서 작가는 두려움을 깨고 한을 풀어내는 지혜를 터득한다. 그러기에 작가 박귀덕은 일상 속에서 창을 옆에 두고 아버지를 추억한다.
보따리가 무거워 질질 끌며 다가오는 대추 할머니는 여기 대추가 있는데 또 대추가 앉으면 안 된다고 하며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먼저 온 사람이 내놓은 물건 곁에는 자기 물건을 내놓지 않는 것이 할머니들의 질서였다.
젊어서는 가족들의 생계와 자녀들의 학비가 되었던 노점이다. 물기 다 빠져버려 앙상한 손이 된 할머니들은 한 푼이라도 벌어서 쓸 수 있어 그래도 감사하다며 얼굴 가득 강줄기를 만든다. 박꽃 같은 미소가 피었다. --<새우등에 핀 박꽃>에서
시장 거리의 좌판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허리가 새우등처럼 굽은 할머니들이 이른 새벽부터 나와 생을 살아 내는 곳이다. 더 늙기 전에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면 핏대를 세우는 곳. 그곳에는 빈자리가 없다. 등기되지 않은 땅인데도 임자가 있다. 등기 낸 사람은 없어도 아무나 나서서 물건을 팔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바로 여기 시장 골목 좌판 자리. 오늘도 물기 빠진 앙상한 손은 바쁘다.
하지만 여기에도 질서는 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대추 있는 곳에 대추는 깔지 않는다. 먼저 온 사람의 물건 옆에 내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 그 많은 좌판 거리의 모습 중에서 작가의 눈에 잡힌 것은 질서 의식이다. 이런 시각이 있었기에 올곧은 공무원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남의 자리 탐하지 않고 순리대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만의 삶의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장 좌판 거리에서 생선의 멱을 따더라도 나름의 목표 있는 삶을 산다. 그 목표는 대부분 후손에 걸쳐 있다. 배추 한 포기를 팔아도 손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밤 한 되박을 팔아도 손녀의 머리에 꽂을 리본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명절 대목에 새우등 할머니에게서 작가는 조상의 음덕을 끌어온다. 자손 된 도리를 다하려는 태도다. ’조상을 소홀히 모실 수 없는 할머니들, 대목장을 보려고 밭에서 푸성귀를 장만해서 팔러 나왔다. 그 푸성귀를 팔아야 밤, 대추, 곶감을 산다. 차례상에 고깃국도 올려야 하고 생선도 몇 마리 올려드려야 조상님을 뵐 면목이 선다. 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은 체면을 차릴 겨를도 주지 않았다.‘ 작가 박귀덕은 자손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대한민국 안주인의 여인상을 이 할머니들을 통하여 독자에게 제시한다.
오아시스를 만들지 못하고 신기루만 남은 사막에서 등짐을 진 낙타 한 마리가 걸어간다. 큰 덩치에 긴 다리, 슬픔이 배어있는 긴 속눈썹, 두꺼운 발바닥이 순한 걸음을 걷는다. 보기와는 달리 그는 능력자다. 가시풀을 먹고도 물을 만들어 낼 줄 안다. 사막에서 수맥을 찾아낼 줄도 안다. 모래폭풍이 올 징조가 보이면 평상시와는 달리 모래에 코를 박고 큰 소리를 낸다. 평생을 사막에 발 딛고 사는 낙타에게 준 조물주의 배려다.--<중략>--결혼식 전날 밤 ‘그 집 귀신이 되어라.’ 하시던 친정어머니, 그 말씀에 묶여 나의 결혼생활은 참는 것뿐이었다. 여름철 방역 대기조 근무를 마치면 밤 열 시가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그때까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엄마를 기다렸다. 아픈 남편은 누워있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오기만을 기다린다. 온 집안에 모래가 서걱거렸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건사하는 일은 누구와도 나눠질 수 없는 혼자만의 짐이었다.
--<사막으로 가는 배>에서
‘낙타’ 하면 우리는 으레 묵묵히 사막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모습을 연상한다. 결코 투정 부림이 없이 똑같은 속도로 앞으로만 가고 있는 낙타. 그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안쓰럽고 처절하다. 큰 덩치에 긴 다리. 슬픔이 배어있는 긴 속눈썹, 두꺼운 발바닥으로 오로지 앞으로만 걷는다. 아주 순한 걸음이다. 분명 그는 능력자다. 가시풀을 먹고도 물을 만들어 내고, 사막에서 수맥을 찾아낸다. 모래폭풍이 올 징조도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뻗대는 법이 없다. 작가 박귀덕은 이 동물에서 오직 참아내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다.
극한상황에서도 오로지 참아내는 낙타,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시집 귀신이 되기 위해 참는다. 밤 열 시나 되어 퇴근해 오면 아픈 남편은 누워있고, 아이들과 시어머니는 저녁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문득 절망이 밀려온다. 영락없는 낙타 꼴이다. 절망에 떨어진 작가는 마침내 ‘온 집안에 모래가 서걱거렸다.’로 자신의 처지를 일갈해 낙타와 하나가 된다. 사막에 부는 모래바람은 직장에서도 작가에게 몰려온다.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 민원 업무, 생각이 다른 시의원과 기자들은 심하게 ‘전주를 말아먹으려 한다.’며 질타한다. 여기서 작가는 구겨지고 짓밟힌 자존심을 구제할 방법은 오직 침묵뿐임을 깨닫는다. 실로 낙타인 것이 분명하다.
5. 연명(捐命)과 연명(延命)의 경계
숨탄 모든 것은 종내에는 죽는 것을. 사람들은 알면서도 남의 일인 듯 여기며 산다. 사는 동안도 자신에게 찾아올 마지막 순간은 없는 듯이 인식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삶은 끝없이 항해하는 고난의 항로이다. 막연히 바라본 노을은 곱고 아름답지만, 그보다 궂은날이 더 많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람이 외로운 나룻배를 휘감고 돈다. 돛을 달지 못하고 엔진도 없는 배. 인간은 뱃사공이 되어 서툰 노를 젓다가 떠나는 것이다. 태풍이 불까 봐, 눈보라가 칠까 봐, 거친 파도에 방향키를 놓칠까 봐 조바심치다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날도 해변을 걷고 싶다고 했다. 센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아 혼자 보낼 수 없어 따라나섰다. 어느 만큼 가다가 하얀 찔레꽃을 지켜보고 있다. 한없이 측은한 하얀 찔레꽃, 장사익이 부른 노랫말이 생각나는지 흥얼거린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꽃 한 송이 따서 향기를 맡는다.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나눠주던 젊은 시절이 그리운가, 꽃이 피면 지는 것을. 가슴에 서러운 덩어리로 남겨진 찔레꽃,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찔레꽃 노랫말이 가슴을 저민다.
퍽 아쉽다. 몇 달만 더 살면 팔순인데. 무에 그리 급해서 서쪽 하늘에 쪽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지…. 젊은 날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남들과 어울리며 허비했던 나날들을 죽음 앞에서야 후회한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 요단강 건너갈 거루, 뱃사공도 없이 항구에 떠 있다. 찔레꽃 한 송이 실어 밤하늘의 별로 올려보낸다. --<별이 된 뱃사공>에서
마침내 홀연히 떠나는 남편을 지켜보게 된다. 한 생을 같이 한 사람. 남들 다 보는 산수(傘壽)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눈앞에서 떠났다. 떠나기 전 위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늘 어두운 그림자에 싸인다. 갈수록 쇠약해지는데 오히려 질긴 목숨에 집착하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찔레꽃의 처연함에 가슴이 미어진다. 장사익의 처절한 노래가 만가(挽歌)처럼 가슴을 저민다. 목숨을 다하는 것은 어찌 되었든 남은 사람에게 한으로 깊이 내재한다.
옆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있다가 위장에 출혈이 있어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고통스러워 내뱉는 앓는 소리가 할아버지의 호흡이다. 아내가 곁에서 제발 그 소리 좀 내지 말라고 퉁을 줘도 몸속 깊은 곳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신음은 잦아들지 않는다. 저렇게 고통스럽게 살아도 그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사람답게 살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힘들게 하루를 견디다 보면 언젠가 완치 가능하단 믿음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여섯 가족의 하루>에서
병원의 입원실은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와 간병인이 함께 지내야 하는 열악한 공간이다. 부부애, 가족애로 병구완을 하지만, 고통스럽기는 매일반이다. 아니 오히려 간병하는 사람이 더 힘들 수도 있다. 환자 자신이야 질병과의 싸움이지만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가족은 의식이 온전하니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환자를 지켜보는 시각이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우선 온전한 간병인은 옆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나 의식에 더 관심이 많다. 서로 이해하는 듯이 보여도 더러는 환자의 가슴에 아픈 못을 박아 놓기도 한다. 작가 박귀덕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목숨에 대한 갈등에 쌓이게 된다. 인간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토록 고통스럽게 견뎌내는 삶의 의미는 뭘까. 살아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이토록 힘든 삶도 사람답게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저 환자들은 정말로 완치되어 퇴원할 것이라는 믿음이라도 가고 있는 것일까. 끝없는 질문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에 이른다.
그녀가 생각하는 간 공여자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혈액형이 같은 사촌 이내 형제들로만 알았다. 의술이 발달하여 혈액형이 달라도 생체 이식이 가능한 줄은 처음 알았다. 간 공여자를 물색해 봤다. 자녀와 형제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봐도 공여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살 만큼 산 사람이 앞으로 살아야 할 자식들의 간을 탐하면 안 된다고, 당신은 위암 수술을 받았으나 간 때문에 항암치료도 못 받는데, 자식이 간을 준다고 이식수술을 하면 몇 년이나 더 생명 연장이 가능하겠는가. 사는 동안 계속해서 면역력 억제 투병 생활을 해야 한다는데 그 삶이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느냐고, 간 공여자들이 앓는 후유증이 있다는데 우리 애가 수술이 잘되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그런 효도는 바라서는 안 된다고,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잘라 말했었다. --<용궁에 다녀온 그녀>에서
작가 박귀덕은 삶의 의미에 이어 연명의 문제에까지 뻗어간다. 의학의 발달은 목숨의 연장을 도모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롭던 가정에 갈등과 번민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환자의 몸에 붙은 병균을 내모는 일이라면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의학의 기술이 다른 사람의 몸 일부를 제공하여 치료하는 경우라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간과 같은 기관을 받아야 할 때 문제는 복잡하게 된다. 제공자를 찾기도 어렵지만, 제공하지 못한 가족들은 불효자가 되고, 못된 부인이 되고 만다. 의술의 발달은 한편으로 환자 가족들에게 심적 부담을 주고 있다. 노욕에 찬 환자가 가족들의 장기를 요구하게 되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작가 박귀덕은 연명(延命)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확실한 결론을 내려주고 있다. 연명(捐命)이다.
6. 나가면서
지금까지 작가 박귀덕의 수필 세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얻은 것은 한 작가의 정체성이고, 그의 삶의 수용자세이다.
작가 박귀덕의 자연은 일상 속의 삶 속에 있는 자연이다. 그는 이 자연에 아주 소박하고 인간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 원망하고 갈구하는 자연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빗나갔을 때는 자신의 허물을 찾아 나선다.
작가 박귀덕은 항상 성찰하며 자신의 삶에서 보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다음 삶에서는 윤택한 환경을 얻을 수 있도록 항시 노력한다. 또 가슴 아픈 회한은 인내하며 참아내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 인내의 태도는 수필집 전편에 걸쳐 있다. 그러기에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묵묵히 걷기만을 계속한다. 언제나 밀려오는 고통도 작가는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땅히 극복을 시도한다. 여기에는 정상적인 질서와 순리가 상존한다. 이에 따라 내딛는 발걸음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이 질서 의식은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몸은 순응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보살핌으로 이어져야 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배려는 한 평생 따뜻하게 작가의 가슴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또 가례에서도 조상을 섬기는 일은 한국의 안주인들은 마땅히 실행에 옮겨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는 한 작가의 의식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 여인상을 그려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술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놓았지만, 가족의 신체 일부를 받아 연명(延命)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제공자의 남은 생에 고통을 안겨주게 되고, 제공하지 못한 자에게는 평생 죄의식 속에서 고통스럽게 지내야 한다는 견해를 견지한다. 하늘이 주신 대로 연명(捐命)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작가 박귀덕은 철저한 생활인이었고, 끝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수필은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이 그릇에 담을 음식 또한 다양하다. 구색 맞추기 위해서는 작가가 선택하는 그릇도 다양해야 한다. 앞으로 작가 박귀덕은 그릇의 다양화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된다면 더 좋은 독자를 만나리라 믿는다. 다음 수필집을 기대하며 서평의 짐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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