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종하지 말자던 김여정이 참지 못한 이유는?
정일영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새해를 맞으며 예기치 않은 ‘남북 대화’가 공중전으로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대북 강경정책을 천명하자, 북한의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로 응답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조금도 반갑지 않은 작금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 ‘힘에 의한 평화’ 재천명
새해 첫날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국내외 현안에 대한 국정운영 구상을 밝혔다. 사실 이번 신년사에서 한반도 문제는 전체 분량에서 그리 많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다. 다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작년부터 이어 온 ‘힘에 의한 평화’, 즉 대북 강경정책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재천명했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굴종적 평화가 아닌, 힘에 의한 진정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고히 구축해 나갈 것”을 재확인했다. 특히,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비해 한국형 3축 체계를 더욱 강력히 구축하는 데 속도를 낼 것”이며, “올해 상반기까지 증강된 한미 확장억제 체제를 완성하여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을 원천 봉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전히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상대의 선의에 의존한 굴종적 평화’로 규정하고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복원을 기반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것이다.(관련 기사: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와 2024년 전망, https://omn.kr/26xos)
서로 ‘상종하지 말자’던 김여정의 뜻밖의 ‘러브레터’
김여정 부부장은 남북이 더 이상 서로 ‘상종하지 말자’며 ‘절교’를 선언했던 장본인이다. 그런 김여정 부부장이 새해 벽두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콕’ 짚어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상종 말자던 김여정이 참지 못하고 입을 뗀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담화는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신년 메쎄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석열 대통령, 구체적으로 윤 대통령의 신년사에 대한 답장이다. 김여정은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한국형 3축 체계’ 구축과 ‘한미 확장억제체계’ 완성 등을 언급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공로’를 ‘찬양’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김여정은 윤석열 대통령이 “무차별적인 각종 규모의 합동군사연습들을 확대 강행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주적’인 우리(북한)의 분노를 최대로 격앙시켜주고 서울을 겨냥한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완전히 풀어준” 덕분에, 북한이 “불가항력의 군사력을 키우는데 단단히 ‘공헌’한 ‘특등공신’으로 ‘찬양’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야유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더 섬찟한 부분은 김여정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 ‘찬양’한 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참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북한이 “전력 강화를 위해 해야 할 일도 못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난’한 점이다. 김여정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돌이켜보면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고 진짜 안보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내는 김여정의 메시지는 “새해에도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 국가의 군사적 강세의 비약적 상승을 위해 계속 ‘특색있는 기여’를 하겠다는데” 쌍수로 환영을 표하며 마무리된다.
적대적 상호 의존의 씁쓸한 러브레터
다소 기괴한 김여정의 메시지에 대해 전문적인 분석을 진행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다만 김여정이 더 이상 상종말자던 절교 선언을 깰 만큼 왜 입이 간지러웠을지 짐작이 간다. 윤석열 정부가 9.19 남북군사합의를 무력화해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고 한미일 군사연합을 강화함으로써 한반도 신냉전을 부활시킨 점은 분명 북한의 입장에서 ‘꽃놀이패’를 쥔 듯 감사할 일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윤석열 정부 또한 한반도의 긴장 상황이 그리 싫지만은 않아보인다는 점이다.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서로 거친 언사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강 대 강으로 힘에 의한 문제 해결을 공약하지만 결국 소위 ‘적대적 상호의존’을 통해 국내에서 국가의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북한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시장의 확산으로 이완됐던 사회통제체제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작금의 남북대결은 적당한 명분으로 적절히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정도 암울하다. 윤석열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전체주의’와 싸우겠다며 연일 사자후를 내뿜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윤석열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반공전체주의’의 길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 통일이란 미래에는 더 이상 관심조차 없는 듯한 남북 당국의 ‘짝짜꿍’에 분노가 치민다. 특히 최근 북한의 행태는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 만들어진 남북정상 간 합의 정신마저 폐기해버린 듯하다. 결국 북한은 그토록 스스로 강조하던 ‘선대의 유훈’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인가? 여러모로 김여정의 담화는 수준 낮은 내용 이상으로 북한 체제의 약한 고리를 드러낸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