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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집 제10권 / 기(記) / 호좌일기 계묘년(경종3, 1723)〔湖左日記 癸卯〕
계묘년 3월에 아버님을 모시고 호좌(湖左)의 여러 승경을 찾아갔다.
18일 정유일. 아침에 비가 왔는데 오시(午時)에 개어서 길을 떠나 남한산성의 개원사(開元寺) 서료(西寮)에서 잤다.
19일. 해가 뜨자 길을 떠나 현절사(顯節祠)에 배알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척화 삼학사(斥和三學士)를 제향한 곳이다. 경안(慶安)에서 아침을 먹고, 정오에 이천(利川)의 광현(廣峴)을 넘어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여주(驪州) 읍내에 있는 원화백(元華伯)의 집에 투숙하였다. 서울부터 여기까지가 160리이다.
20일. 읍촌의 친지들을 두루 방문하였다. 오후에 천서(川西)를 건너 이씨 집으로 시집간 외사촌 누이를 찾아보았다. 저녁에 원주(原州) 가야동(伽倻洞)에 있는 안씨(安氏) 집에서 잤다.
21일. 아침밥을 먹은 뒤 출발하여 칠암(漆巖)을 건너 충주(忠州) 영죽(英竹)의 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가 기울어서 가흥(可興)에 있는 이순안(李順安) 범(範)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오후에 날이 흐렸다.
22일. 아침에 가랑비가 왔다. 조반을 먹고 나서 길을 떠났는데 날도 개었다. 누암(樓巖) 우재서원(尤齋西院)을 찾아가 배알하였다. 충주읍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포탄(浦灘)을 건너 오취강(梧翠江)의 외구댁(外舅宅)에 이르렀다. 여주에서 여기까지가 140리이다.
23일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오후에 황강(黃江)에 다녀왔다.
24일. 맑음. 아침밥을 먹고 선암(仙巖)으로 향하였는데 외구도 함께 갔다. 수산역(壽山驛)에서 점심을 먹고 동남쪽으로 갔는데, 길가의 촌락과 전답이 아늑하고 넓어서 살 만한 곳이 많았다. 그 이름을 물으니 부치촌(釜峙村)ㆍ수락동(水落洞)ㆍ수촌(水村)ㆍ대전(大田)이라 하였는데, 수촌이 특히 아름다웠다. 남령(南嶺)에 올라 빙 둘러서 내려오노라니 고갯길이 매우 힘들었다. 걸어서 시내 골짜기를 나오는데 맑은 샘과 드높은 바위, 꽃나무가 울창하게 뒤덮고 있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힘들게 간 수고를 아예 잊었다.
신생 혜동(辛生惠東)의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시내를 거슬러 중선암(中仙巖)에 이르니 시냇물이 지난 봄에 비해 더욱 웅장하였다. 쌍폭포의 물이 모여드는 곳에 앉았노라니 마치 큰 파도 위에 뗏목을 띄운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수일암(守一菴)으로 올라가니 해가 이미 졌다. 이날 60리를 갔다.
25일. 아침밥을 먹고 절문을 나가서 상선암(上仙巖) 못가에 앉았는데, 조금 있으니 빗발이 가늘게 내렸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바위는 기이하고 희었으며, 물은 맑고 드넓었다. 가다가 앉았다가 하였는데, 아름다운 경치 아닌 곳이 없었다. 경천벽(擎天壁)이 솔숲 사이로 은은히 비치었는데 바라볼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경천벽이 다한 곳에 이르니 물살이 더욱 다투듯 콸콸거려서 시내 좌우에 걸터앉았다가 어느새 옷이 젖었다.
중암(中巖)으로 돌아와 조촐하게 술을 마시고 시내 동쪽을 건너 넓적한 바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깊고 맑은 녹색의 못을 굽어보았다. 양쪽 가에는 깎은 듯한 암벽이 마주 솟아 서로 가리고 있었는데, 형세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그윽하고 묘한 것이 특히나 빼어나게 느껴져,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하였다. 철쭉은 대체로 아직 활짝 피지는 않았으나, 굽이굽이 찾아다닌 곳은 전년보다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말을 타고 하암(下巖)에 이르러 배회하노라니 조금 지나 비가 제법 세차졌다. 바위 밑에서 한참 몸을 피했으나, 돌이 축축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흥을 다할 수 없기에, 도로 피치(皮峙)를 넘어 송좌수(宋座首)의 집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비가 그치자 좌수의 아들 세륭(世隆)과 함께 선담(銑潭)을 찾아갔다. 선담은 곧 운암(雲巖)의 상류이다. 시내를 따라 3리쯤 가니 층층 바위가 시내 좌우로 5, 60보(步)에 이어져 솟아 있었는데, 모두 앉을 만하였다. 그 아래 푸른 못은 깊이가 몇 장(丈)이나 되었다. 근자에 비가 세차게 내린 바람에 바위가 무너져서 폭포 물 떨어지는 곳이 더 이상 옛날 모습이 아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역시 아름다운 곳이긴 하였으나 창석(蒼石)의 기(記)는 사실을 너무 과장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인암(舍人巖)의 사선대(四仙臺)에 이르러 한참을 거닐고, 잠깐 서당에 들렀다가 푸른 벼랑 아래에서 잠시 쉰 다음 단양 읍촌으로 돌아왔다. 마을은 화재를 입어 백여 집이 연달아 타버린 탓에 쓸쓸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잠시 이요루(二樂樓)에 앉았다가 고(故) 이합천(李陜川)의 집에 투숙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26일. 장회(長淮)의 객점(客店)에서 아침밥을 먹고 괴곡(槐谷)에 이르러 고깃배를 얻어 구담(龜潭)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가 너무 작아서 불안하였는데, 오로봉(五老峰) 아래에 제법 큰 거룻배 한 척이 있어 뱃전을 나란히 하고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 안 가서 바람이 크게 불어 삿갓이 물에 빠졌는데, 급히 배를 옮겨 못 가운데 이르러 건져 내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고 노를 돌렸다.
구봉(龜峰)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심해져서 배를 두고 걸어서 괴곡을 나가 말을 타고 강 남쪽 언덕을 따라 논곡(論谷)의 칠송정(七松亭)과 호곡(湖谷)의 여러 외당(外黨)을 방문하였다. 논곡은 북쪽 물가에 있었는데 언덕이 막고 있고 시내가 휘감고 있어, 깊고 외진 것이 가히 숨을 만하였다. 칠송정은 논곡 위에 있었다. 호곡은 남쪽 물가에 있었는데, 강물이 마을 어귀로 구불구불 들어와서 호수를 이룬 것이 자못 넓었다. 마을 앞에 시내 바위가 있었고 골짜기 또한 그윽하였다. 그 뒤에서부터 백치(白峙)를 넘어 오치(梧峙)로 나가면 바로 수산역(壽山驛) 뒤이다. 오강(梧江)에 이르니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웠다. 이날 80리를 갔다.
27일. 막 괴산(槐山)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소진사(蘇進士) 후유(后由)가 단양(丹陽)에서 뒤쫓아 왔다. 오강을 건너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연풍(延豐) 수입(水入)의 객점에서 점심밥을 먹고, 유현(楡峴)을 넘어 무릇 30리를 가서 고산정(孤山亭)에서 쉬었다. 괴산 군수 이장(李丈) 직(溭)이 마침 이곳에 있어서 마침내 함께 정자 앞에 배를 띄웠다. 정자는 바로 유서경(柳西坰)의 별장이었다. 시내는 동쪽에서 흘러와 북쪽으로 꺾였고, 서쪽으로 돌아서 또 북쪽으로 흘렀는데, 구부러진 것이 마치 활을 당긴 듯하였고 작은 산들이 불쑥 솟아나 있었다. 서쪽으로 돌아 그 북쪽으로 가니 좌우에 푸른 절벽이 이어 뻗어있는데 소나무가 울창하게 덮고 있었다. 그 아래 녹색의 못이 자못 깊고 넓으며 흰 모래가 어리비치었는데 경계가 활짝 열려 기뻐할 만하였다. 정자 오른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시내에도 또한 깎아지른 벼랑이 있었는데, 그 위에 천사(天使) 주지번(朱之蕃)의 글씨 ‘隱屛(은병)’ 두 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 동안 물결을 오르내리다 군재(郡齋)에 돌아와 잤다. 정자로부터 10리 되는 곳이었다.
28일. 아침 일찍 쌍계사(雙溪寺)로 향하였는데, 이장(李丈)과 소생(蘇生)이 함께 갔다. 애한정(愛閑亭)에 들러 쉬었다. 애한정은 군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큰 내에 닿아 있었는데, 고(故) 별검(別檢) 박지겸(朴知謙)이 남겨놓은 별장이다. 고송이 고고하게 드문드문 늘어서 있고, 정자 오른편에는 한 기슭이 불쑥 나와 있어서 또한 정자를 세울 만하였다. 다파현(多坡峴)을 넘어 사동(寺洞)으로 들어가니 산봉우리가 빙 둘러있고 골짜기가 깊었는데, 나무와 바위들이 푸르게 우거지고 가파르게 솟아 있었으며 수석이 점점 아름다워졌다. 길가의 치솟은 바위가 시내 가운데에 찌를 듯 솟았는데, 그 위의 작은 정자는 축요당(祝堯堂)이라 하였다. 물은 남쪽에서 졸졸 흘러와 바위 서북쪽에 이르러 맑은 못이 되었다. 그 북쪽은 더욱 깊고 넓으며 지극히 맑아 모래와 돌을 셀 수 있을 정도였으며, 경계가 뛰어나게 맑았다. 점심때까지 머물러 앉아 있노라니 바람 기운이 서늘하여 깊은 가을 같았다. 당 앞에 화봉현(華封峴)이 있어 ‘축요당’이라 명명한 것인데, 정장암(鄭丈巖) 호(澔)가 그 정자를 지었다.
그 위로 수백 보 되는 곳에 작은 암자를 지어 선비들이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며 층진 너럭바위와 맑고 깊은 물을 자주 보았다. 5리쯤에 이른바 떡바위[餠巖] 언덕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두 절벽이 가까이 솟았는데 그 사이로 어지럽게 물이 쏟아져 깊은 못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깊은 웅덩이와 거대한 바위를 더욱 빈번하게 볼 수 있었다. 2리쯤 되는 곳이 용추(龍湫)로, 너럭바위가 가장 컸고 샘물이 굽어 꺾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떨어져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깊이가 대략 몇 장이요 너비가 수십 이랑이었다. 그 동쪽에는 바위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있었는데, 깎아지른 듯 기이하였다.
갑자기 세찬 비를 만나 가까스로 소나무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조금 있으니 비가 그쳐서 웅덩이 가에 있는 서쪽 바위에 앉았는데, 지는 햇빛이 절벽에 어리비치어 더욱 기이하였다. 백 보쯤 거리에 절이 있는데, 시내 두 갈래가 절 앞에 이르러 합류하기 때문에 ‘쌍계사’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저녁에 서료에서 잤다. 절은 군의 치소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괴산군의 젓대 부는 이가 뒤따라 왔기에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마다 젓대를 불게 하였더니 또한 기뻐할 만하였다.
29일. 아침에 출발하여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2리쯤 갔다. 길 오른편에는 물방울을 내뿜는 폭포와 맑은 못이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10여 리 가서 계수령(桂樹嶺)을 넘어 관청평(官廳坪)을 지나갔는데, 깊숙하고 넓어서 거주할 만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문경(聞慶) 땅이다. 또 15리를 가서 맥항현(麥項峴)을 넘었는데, 산길이 극히 험하고 좁아서 걷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였다.
또 10여 리를 가서 봉암사(鳳巖寺)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길 오른편에는 너럭바위가 평평하고 넓어서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고, 빛깔 또한 밝고 깨끗하였다. 시내는 남쪽에서 흘러와 그 아래에서 평평한 못을 이루었는데 시원하게 트여서 기뻐할 만하였다.
바위 앞에는 ‘夜遊巖(야유암)’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못 서쪽으로 석기(石磯)가 높이 솟아 있었는데 ‘取適臺(취적대)’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4, 50보 거슬러 올라가니 또한 평평한 너럭바위와 맑은 못이 있어 노닐 만하였다.
또 수백 보를 올라가니 절이 있었다. 봉황문(鳳凰門)을 들어가 석교(石橋)를 지나가노라니 다리 가에는 작은 비석 2기(基)와 법당 7구(區)가 있었는데 모두 정교하고 고왔다. 누각의 이름은 용화루(龍華樓)로, 모두 53칸인데 극히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절 서쪽에는 지증비(智證碑)가 있었는데, 최고운(崔孤雲)이 글을 짓고 석(釋) 혜강(慧江)이 글씨를 썼으며 당(唐) 용덕(龍德) 4년 갑신에 세웠다. 도중에 병화(兵火)로 인하여 벗겨지고 갈라진 곳이 많았으나, 비석 빛이 푸르고 매끄러워 새것 같았고 글자도 막 새긴 것 같았다. 또 그 서쪽 백여 보 되는 곳에 정원비(淨源碑)가 있었는데 근자에 세운 것이었고, 거기서 또 약간 서쪽에 정진비(靜眞碑)가 있었는데, 고려의 한림(翰林) 이몽유(李夢游)가 글을 짓고 장단열(張端悅)이 글씨를 쓴 것으로, 비석 또한 새것 같았다.
절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하얀 너럭바위가 매우 거대하였는데, 겹겹의 층이 서로 어긋나 있는 모습이 개 이빨 같았고, 여울물이 요란하게 치달리고 있었다. 바위의 형세는 지극히 웅건하였고 물살의 기세도 매우 장대하였다. 그 서쪽 바위 봉우리가 특히나 높이 솟았는데, 깎아지른 모습이 도봉산의 만장봉(萬丈峰) 같았으나 더욱 거대하여서 바라보자니 매우 기이하였다. 너럭바위 위로 푸른 바위들이 쌓여 있기에 그 틈으로 들어가 남벽(南壁)에 제명(題名)하였다. 너럭바위에서 밥을 먹고 한참 거닐다가 돌아왔다.
산의 이름은 희양(曦陽)이고, 구룡봉(九龍峰)이 산의 서남쪽에 있다. 승려가 지증(智證)이 용을 쫓아낸 일을 말해주었는데, 매우 허탄하였다. 서쪽으로 20여 리 가니 외선유동(外仙遊洞)이었는데, 골짜기로 들어서자 하얀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졌다. 물길 따라 수백 보를 올라가니 맑은 못과 세찬 여울이 아름다운 곳이 매우 많았다. 비록 골짜기가 깊숙이 외져있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자갈로 채워져 있었으니, 요컨대 전부가 다 돌이었다. 가장 위의 너럭바위는 평평하고 반듯하여 섬돌 같았는데, 가운데에 갈라진 곳이 많아 물길이 그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해 질 때까지 이곳에 앉아 있었는데 유달리 시원하고 청량해서 기뻐할 만하였다. 다만 좌우의 봉우리와 절벽은 질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었다.
암자가 그 아래 백여 보 되는 곳에 있었는데, 이름은 수운암(水雲菴)이었다. 그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이 고을의 신 찰방(申察訪) 필정(弼貞)이라는 자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저녁에 정자에서 잤다.
30일. 해가 뜨자 걸어서 앞 시내를 경유하여 어제 앉았던 곳에 이르러 잠시 노닐다가 말을 타고 불안치(不安峙)를 넘어 10리를 가서 다시 관청평(官廳坪)을 나갔다. 서쪽으로 또 10리를 가니 내선유동(內仙遊洞)이었는데, 너럭바위와 폭포가 맑고 시원하여 빼어났으며, 산봉우리와 절벽이 빙 둘러있어 매우 예스러웠다.
시내 오른편으로 집채만 한 큰 바위가 대(臺)를 이루고, 앞으로 푸르게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올라가니 여울과 못을 다 볼 수 있었고, 층지고 꺾인 것이 모정(茅亭) 세우기에 알맞아 보였다. 그 옆에는 어지러운 바위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거북이 엎드린 모양, 두꺼비가 웅크린 모양 등 사물의 형상과 흡사한 것이 서너 개였다. 한참 동안 앉아서 조망하다가 물을 따라 수백 보를 내려갔다.
시내 오른편에 또 높이 치솟은 바위가 있었는데, 그 아래 뭇 바위들이 입 벌린 채 떠받치며 문을 이루었고, 시내가 그 바닥으로 흘러들어 못을 이루었는데, 매우 깊었다.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는 석기(石磯)가 많았다. 시내를 건너 십여 보 되는 곳에 이진안(李鎭安) 현익(顯益)의 초당이 있어 그곳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초당 앞에는 거대한 바위가 불쑥 들어와 있었는데, 바위 옆에도 정자를 세울 만하였다.
언덕 하나를 올라 남쪽으로 1리쯤 가니 칠송정(七松亭)이었는데, 솔숲이 길을 끼고 양쪽으로 매우 울창하였고, 흐르는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들판은 넓게 트였고 밭은 기름졌으며 사방으로 산이 빙 둘러 안고 있어 사람 살기에 매우 적합하였다. 예전에는 마을 객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다시 시내를 따라 6, 7리쯤 가노라니 기이한 절벽과 맑은 못이 자못 아름다웠다. 여기서부터는 굽이마다 모두 그러하더니, 1리도 못 가서 과연 파곶(葩串)이 나왔다.
길 왼편으로 너럭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졌는데, 수천 명이 앉을 만하였다. 혹 터지기도 하고 혹 우묵 들어가기도 하고 혹 대략 층이 지기도 하였지만, 요컨대 하나의 평평한 너럭바위였음에도 눈길 닿는 곳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였고 기상이 드넓었다. 그 사이로 물길이 펼쳐졌는데, 격하게 모여들지도 않고 어지러이 흩어지지도 않는 것이 상쾌하게 탁 트이고 평평하면서도 시원스러웠으니, 가히 ‘큰 펼쳐짐’이라 이를 만하였다. 좌우에는 회화나무와 소나무가 줄지어 서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 위에는 아직 다 짓지 못한 초당이 있었는데 그 뒤로 바위 봉우리 하나가 기이하게 뾰족 솟아 있었다. 시내 위에 죽 이어서 벌여선 뭇 봉우리들도 모두 웅장하게 솟아 있었지만 울퉁불퉁한 맛이 부족할 뿐이었다. 시내 북쪽에는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많아서 해가 기울 때까지 앉아 있다가 물을 따라 수백 보를 내려왔다. 시내 좌우에 절벽이 첩첩 솟아 있어 매우 웅장하였다. 그 위로 소나무가 무성한 곳이 학소암(鶴巢巖)이라 하였다.
다시 백여 보를 가니 시내 오른편에 거대한 바위가 꿈틀꿈틀 서리어 매우 기이하였는데, 이름이 와룡암(臥龍巖)이었다. 그 등 가운데가 갈라져서 구불구불 꺾인 곳은 또 용이나 뱀의 자취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또 수백 보를 가니 시내 좌우에 벼랑이 높이 치솟아 있었는데, 이름이 첨성대(瞻星臺)였고, 바위의 형세는 마치 처마 모서리가 아래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아래 벽면에 숭정(崇禎)의 어필(御筆)인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 우재(尤齋)의 글씨 ‘大明天地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여덟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소발(小跋)이 있었다. 그 위쪽 옆에는 또 만력(萬曆)의 어필인 ‘玉藻氷壺(옥조빙호)’ 네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후세 사람이 나중에 새긴 것이다. 시내 오른편에 또 석벽이 마주 서 있었는데 이름이 오운대(五雲臺)였다. 그 뒤가 바로 환장암(煥章菴)으로 가는 길이다.
첨성대로부터 수백 보를 가니 바로 서원이 나왔고, 서원의 서쪽으로 우옹(尤翁)이 살던 집이 있었다. 늙은 여종 칠례(七禮)라는 이는 나이가 76세였는데 옛일을 말해 주었다. 이어서 서원에 배알하였는데, 서원의 편액은 바로 선왕의 글씨였다. 만동묘(萬東廟)는 서원 뒤편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문의 편액에 ‘星拱院(성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앞에는 바위 하나가 시내에 닿아 있었는데 ‘泣弓巖(읍궁암)’ 세 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우재가 효묘(孝廟 효종)의 제삿날 곡하던 곳이라고 한다. 서원 서쪽에 있는 소양재(昭陽齋)에 앉아 숭정의 친필 ‘비례부동’과 숭정이 쓰던 붓, 정축년 황력(皇曆)과 제공이 읊은 시를 보고서 날이 어두워져서야 암자로 돌아왔다. 승려 밀엄(密嚴)은 나이가 71세였는데, 또한 옛일을 자못 자세히 말해주었다. 밤에 이 암자에서 잤는데, 암자의 당우(堂宇)는 매우 정결하였다.
4월 초하루 경술일. 아침에 일어나니 가랑비가 내렸다. 승려와 함께 밥을 먹고 암서재(巖棲齋)에 이르렀다. 암서재는 절의 서쪽 백 보쯤 되는 바위 위에 있었는데, 수석이 맑고 기이하였다. 우옹이 지은 것을 근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바위 위에는 후인이 새긴 ‘華陽水石大明乾坤(화양수석 대명건곤)’ 여덟 자가 있었다. 읍궁암에 한참 앉아 있다가 열천재(冽泉齋)로 올라갔는데 열천재는 소양재 서쪽에 있었다. 장시간 비가 그치지 않았다.
동문(洞門)을 나오니 시내 왼편의 푸른 절벽이 매우 높고 거대하였는데 이름이 경천벽(擎天壁)이었다. 5리를 가니 시내 왼편 언덕에 후영정(後穎亭) 터가 있었는데, 고(故) 이상국(李相國) 경억(慶億)의 정자였다. 조금 높고 평평해서 살 만하였고 숲에 덮인 산봉우리도 아름다웠으며, 지금까지도 이씨 별장에 딸린 종이 살고 있었다.
이장(李丈)은 여기서 헤어져서 돌아갔다. 구불구불 20리 길을 돌아서 만경대(萬景臺) 앞으로 나오니 비가 거세게 내렸다. 시내를 건너 빙 돌아서 또 20리를 가서, 정오에 사담(沙潭)에 있는 이 부솔(李副率) 하곤(夏坤) 어른의 별장에 도착하였다. 시내 두 갈래가 별장의 오른편에서 합류하여 물굽이가 삼면을 돌면서 가운데에 한 작은 기슭을 이루었다. 집은 그 기슭을 뒤로하여 동북을 향해 있었는데, 새로 지어 밝고 환했다. 작은 누각에 앉아서 빙 둘러선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운무를 삼켰다 토해냈다 하는 것이 더욱 기이하였다. 집 동남쪽으로 10보쯤 되는 곳에 작은 누각이 바위 위에 지어져 맑은 못을 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못가에는 석벽이 홀로 솟아 매우 험준하였는데, 이름이 비래봉(飛來峰)으로 또한 자못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녁에 비를 무릅쓰고 공림사(空林寺)에 올라갔는데 정자에서 3리도 되지 않았다. 뭇 봉우리가 구름 속에 푸르고 험준한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골짜기로 들어가니 오래된 회화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큰 것은 더러 백 뼘이나 되어 울창하게 솟은 모습이 매우 장엄했다. 절은 오래된 큰 사찰이었으나, 근래에 화재를 겪어서 겨우 삼 분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러 요사를 두루 보고 승려 신징(信澄)과 함께 이장(李丈)의 집으로 돌아가 잤다.
2일. 아침에 공림사 승려 홍혜(弘慧)를 데리고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였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마을이 아늑하고 고요하였으니, 바로 상주(尙州) 땅으로, 마을 이름은 용화(龍華)라고 하였다. 10리를 가서 고개를 하나 넘으니 보은(報恩) 경내였다. 아침 해가 여러 봉우리를 비추는데, 푸른빛과 흰빛이 서로 섞이어 웅장하게 빛나는 것이 가히 기뻐할 만하였다. 30리를 가서 골짝 입구에 들어갔다.
법주사(法住寺)에서 2, 3리 못 미쳐서 신천동(新川洞)이라는 마을이 나왔다. 길 왼편의 넓적한 바위에 큰 소나무가 갈라져 자라 있었는데, 수십 장(丈)이나 되는 키에 푸르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큰 시내를 건너 앞으로 가니 고목이 길 양쪽으로 푸르게 우거졌고, 절터는 평평하고 넓었다. 문 밖에 있는 구리 돛대는 높이가 백 장은 됨직하였는데, “통화(統和) 24년(1006)에 조성하였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구름을 찌를 듯한 5층 누각이 있었는데, 팔상전(捌相殿)이라 하였다.
그 서쪽의 용화전(龍華殿)에는 장륙금불(丈六金佛)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 뒤편 법당 다섯 곳은 극히 장엄하고 아름다웠는데, 가장 뒤에 있는 것이 바로 대웅전(大雄殿)이었다. 그 동쪽에 못을 파고 돌을 쌓은 것이 마치 우물 같았는데, 이름이 석옹(石甕)이었다. 또 동쪽에는 철곽(鐵钁)이 있었고, 그 북쪽에는 석조(石槽)가 있었는데 모두 지극히 거대하였다. 옆에는 또 작은 석조 둘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남여를 타고 복천사(福泉寺)로 올라갔는데, 7리 길이 매우 험하였다. 절은 세조 대에 창건되었는데, 법당이 지극히 정교하였다. 승려 신미(信眉)의 가사(袈裟) 역시 세조가 하사한 것이었다. 또한 어찰(御札) 두 개, 여러 왕자들의 모연문(募緣文), 김괴애(金乖崖)가 기록한 임행시사(臨幸時事)가 있었다.
걸어서 동대(東臺)로 올라갔다. 대는 매우 높았으나 지세가 좁고 막혀 있어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동북쪽 여러 봉우리들뿐이었다. 그중 이름을 얻은 것으로 천왕봉(天王峰)과 비로봉(毗盧峰)이 있는데, 비로봉은 자못 기이하고 가팔랐다. 동대 꼭대기에 쌍탑(雙塔)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른바 복천(福泉)을 보았다. 샘물은 법당 뒤 암벽 틈에서 나오는데 물맛이 맑고 차가웠으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고개 하나를 넘어 대략 6, 7리를 가니 중사자암(中獅子菴)이 나왔는데, 여기서부터가 외산(外山)이었다. 차지하고 있는 경계가 유달리 높고 아득하여 먼 산이 궤안에 들어와 있었고, 거대한 너럭바위가 뜰 앞에 펼쳐져 있었으며 그 옆에는 배꽃이 만발하였다.
또 서쪽으로 3, 4리 가니 대암암(大巖菴)이 나왔다. 대암암은 관음봉(觀音峰)에 있었는데, 그 앞에 우뚝 선 큰 바위가 높이가 백 장이나 되어 지극히 크고 웅장하였기에 암자 이름으로 삼았다. 문장대(文莊臺)는 산의 정상으로 중사자암과 대암암 사이에 있는데, 중사자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6, 7리 위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영남의 승려가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기에 올라가지 않았다.
해가 이미 기울어 돌아오는 길을 찾아 3, 4리를 가서 내문암(內門巖)을 나가고, 다시 3리를 가서 외문암(外門巖)을 나갔는데, 모두 바위틈으로 걸어갔다. 또 3, 4리를 가서 법주사로 돌아와 저녁에 연경전(蓮經殿)에서 잤다. 연경전은 대웅전 뒤에 있었는데 밤새도록 두견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3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수정봉(水晶峰)에 올라갔다. 수정봉은 용화전 서쪽에 있었는데 바위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 가팔랐다. 그 꼭대기에 구암(龜巖)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는 우암이 지은 소갈(小碣)에 상세히 실려 있다. 이내 가장 높은 석대에 오르니 험준한 산들이 모두 발아래 놓였다. 대개 산은 매우 웅장하게 뻗어있고, 봉우리는 바위가 많아 모두 험준하였으나 다만 골짜기가 궁색하고 좁은 편이었다.
큰 시내가 곳곳에서 요란하게 바위 골짜기를 울렸으나 전부가 어지러이 널린 돌과 가파른 바위여서 볼만한 게 없었다. 고목과 묵은 덩굴이 서로 휘감고 있었는데, 가을 깊어 단풍이 들어 그 경관이 절로 기이하였다. 산속에는 작은 암자가 또 대여섯 군데 있었는데, 버려져 황폐해진 곳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봉우리 밑으로 내려와 산호전(珊瑚殿) 터에 올라갔다. 그 남쪽에 벼랑을 파서 석비(石碑)를 박아 넣었는데, 지정(至正) 임오년에 새긴 것으로 이숙기(李叔琪)가 글을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글씨를 썼다. 밝은 아침 햇빛이 얼굴을 비출 때 절에 가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만경대 앞을 경유하였는데, 맑은 내가 굽이져 휘감아 흐르고, 고목과 기이한 바위가 점철되어 있어 매우 기뻐할 만하였다. 무릇 50리를 가서 청천(靑川)의 객점에서 점심을 먹으니, 곧 청주(淸州) 땅이었다. 40리를 가서 저녁에 청안(淸安)의 대송리(大松里)에서 잤는데, 벼룩과 빈대에 시달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4일. 30리를 가서 진천(鎭川)의 석탄(石灘)에서 아침밥을 먹고, 40리를 가서 안성(安城)의 옥정(玉井)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양성(陽城)의 묘 아래 40리 되는 곳에 이르렀는데, 말이 지쳐서 여러 번 자빠지는지라 하마터면 도달하지 못할 뻔하였다.
5일. 양성에 머물렀다.
6일. 진위(振威)의 청호(菁好)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월곡(月谷)의 묘사(墓舍)에서 잤다.
7일. 과천(果川)의 냉정(冷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집에 돌아왔으니, 양성으로부터 150리였다. 이 유람은 20일 사이에 20개 군(郡)의 경계를 넘어 다녔으며, 노정을 계산하니 1100여 리였다.
[주-D001] 계묘년 : 당시 오원의 나이는 24세로, 이해 2월에 증광 회시에 합격하였다.[주-D002] 아버님 : 작자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吳晉周, 1680~1724)로, 자는 명중(明仲), 호는 무위재(無爲齋)이다. 1714년(숙종40) 증광시에 생원, 진사에 합격하였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금성 현감(金城縣監), 공조 정랑을 지냈다.[주-D003] 개원사(開元寺) 서료(西寮) : 개원사의 서쪽 요사(寮舍)이다. 요사는 절의 숙소를 말한다. 개원사는 호국 사찰로서 남한총섭(南漢總攝)이 있던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이며, 군기(軍器)ㆍ화약ㆍ승병이 집결되어 있던 곳이다.[주-D004] 현절사(顯節祠) :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있다. 숙종 14년(1688)에 병자호란의 삼학사(三學士)인 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ㆍ홍익한(洪翼漢)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祠宇)이다.[주-D005] 광현(廣峴) : 이천의 지명으로 광주(廣州)로 통하는 길이다. 우리말 이름은 넉고개이다.[주-D006] 원화백(元華伯) :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이다. 오원과 친밀한 관계로 그와 관련된 시가 《월곡집》 권1에 〈원화백에게 부치다[寄元華伯]〉, 〈김화로 가는 도중에 원 장군의 사당에 참배하고 느꺼워서 율시 한 편을 지어 따라서 장군의 후손인 원화백에게 주다[金化路次 拜元將軍廟 感成一律 因贈爲將軍孫者元華伯]〉 등 여러 수가 있다. 원경하의 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창하(蒼霞)ㆍ비와(肥窩)이다. 1736년(영조12) 세자익위사 부솔(世子翊衛司副率)로 정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1739년에 영조의 뜻을 받들어 완소(緩少) 계열과 함께 정언(正言)으로 붕당이 나라를 그르치는 화근임과 탕평책을 진언하였다. 아울러 신임사화로 화를 입게 된 조태억(趙泰億)ㆍ조태구(趙泰耉) 등을 신설(伸雪)하는 데에 앞장섰다. 노론과 소론만의 탕평인 소탕평을 반대하고 동서와 남북의 당파를 다 포함한 대탕평(大蕩平)을 창도하였다. 특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의 탕평책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예문관 제학, 청풍 부사 등을 거쳐 판돈녕부사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그가 죽자 왕이 친히 제문을 지었고, 치제(致祭)를 명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창하집(蒼霞集)》이 있다.[주-D007] 천서(川西) : 여주에 있는 지명이다.[주-D008] 가흥(可興) : 충주의 지명으로 창(倉)이 있던 곳이다.[주-D009] 이순안(李順安) 범(範) : 이범(李範)의 자가 순안(順安)인 것 같다. 미상.[주-D010] 누암(樓巖) 우재서원(尤齋書院) : 누암은 충주에 있는 지명이며, 우재(尤齋)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이다. 송시열과 권상하 등을 제향하는 서원인 누암서원을 가리킨 것 같다.[주-D011] 오취강(梧翠江)의 외구댁(外舅宅) : 오취강(梧翠江)은 오강(梧江)으로, 청풍에 있는 강 이름이다. 외구는 장인으로, 오원의 죽은 첫째 부인의 부친인 권정성(權定性)을 가리킨다. 권정성은 권상하(權尙夏)의 손자로, 오원이 16세(1715)에 권성성의 딸과 혼인하였고 19세에 상처하였다. 《월곡집》 권1의 시 〈오강에서 느낌을 적다[梧江志感]〉에서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였다. 〈오강에서 처남 권형숙의 시운을 따라 지어서 주다[梧江 次贈婦弟權亨叔韻]〉에서는 처남 권진응(權震應, 1711~1775)과의 이별에 즈음하여 추억을 되새겼다.[주-D012] 황강(黃江) : 충청도 청풍군(淸風郡)에 있는 지명으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머물며 강학하던 곳이다. 이곳의 황강서원(黃江書院)은 송시열과 권상하 등을 제향하는 곳이다.[주-D013] 선암(仙巖) : 단양팔경에 속하는 승경인 상선암(上仙巖), 중선암(中仙巖), 하선암(下仙巖)이 있는 계곡이다. 아름다운 바위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다.[주-D014] 수산역(壽山驛) : 충청도 청풍군(淸風郡)에 있는 역(驛)으로 군 남쪽 26리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4》[주-D015] 신생 혜동(辛生惠東) : 신혜동(辛惠東)으로 자가 국보(國寶)이다. 《월곡집》 권4에 시 〈칠월 칠석에 신생 국보 혜동이 와서 잤는데 운을 명하여 함께 지었다[七夕辛生國寶 惠東 來宿 命韻同賦]〉에 이름이 보인다.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기사에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이 올린 서얼 금고법을 폐지해 주기를 청하는 상소문에 ‘유학(幼學) 신혜동(辛惠東)’으로 그 이름이 들어있다.[주-D016] 수일암(守一菴) : 상선암(上仙巖) 부근에 있는 암자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머물며 공부하고 강학을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권상하의 문집인 《한수재집(寒水齋集)》 권1에 시 〈수일암에서 성달경과 함께 유숙하며 밤중에 읊다[守一菴 與成達卿共宿夜吟]〉가 실려 있다. 오원의 《월곡집》 권1에 시 〈수일암에서 수암의 시운을 따라 지어 유인상인에게 주다[守一菴 次遂菴韻贈惟印上人]〉가 있다.[주-D017] 상선암(上仙巖) : 단양팔경의 하나이다. 기암괴석과 옥계수가 어우러진 절경으로 삼선구곡의 상류에 위치해있다. 이름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지었다. 《월곡집》 권1에 시 〈상선암(上仙巖)〉이 실려 있다.[주-D018] 경천벽(擎天壁) : 상선암(上仙巖)에 있는 바위 벼랑을 말한 것이다. 경천벽은 두 곳이 있는데,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1곡도 경천벽이다.[주-D019] 중암(中巖) : 중선암(中仙巖)을 말한다.[주-D020] 하암(下巖) : 하선암(下仙巖)을 말한다.[주-D021] 송좌수(宋座首) : 좌수(座首)는 지방 자치 기구인 향청(鄕廳)의 우두머리이다.[주-D022] 선담(銑潭) : 단양의 명승지의 하나이다.
운암(雲巖)은 사인암(舍人巖) 상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는 바위로, 검은 돌이 층층으로 쌓여 물가에 닿아 있다. 이곳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다고 한다.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9의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서 운암과 선담의 물을 승경으로 들었다.[주-D023] 창석(蒼石)의 기(記) : 창석(蒼石)은 이준(李埈, 1560~1635)의 호이며, 기(記)는 그의 문집 《창석선생문집(蒼石先生文集)》 권13에 〈선담기(銑潭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준의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으로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고, 이괄의 난 때 의승군(義勝軍)을 모집하였으며, 정묘호란 때 의병과 군량을 조달하였다. 예조 정랑ㆍ단양 군수 등을 거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24] 사인암(舍人巖) : 단양팔경의 하나로, 남조천(南造川) 가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흐른다. 암벽이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금이 가 있으며 녹색과 황토색 등 여러 빛깔이 군데군데 어우러져 있고 그 위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승경으로 추사 김정희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칭송을 받았다. 고려 말의 학자인 역동(易東) 우탁(偶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재직 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였던 임제광(林齊光)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단양읍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다.[주-D025] 사선대(四仙臺) : 운암 아래에 있다. 《경암유고(敬庵遺稿)》 권1의 시 〈도옹 중서와 더불어 삼선암을 유람하다[與島翁仲瑞遊三仙巖]〉에 “운암의 아래 사선대[雲巖之下四仙臺]”라고 하였다.[주-D026] 이요루(二樂樓) : 옛 단양 관아 입구에 있던 이층 다락으로, 남조천(南造川) 가에 봉서정과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二樂樓’ 편액은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며, 김일손(金馹孫)의 〈이요루기(二樂樓記)〉가 전한다. 단양군(丹陽郡)의 서쪽 30보에 있었다고 한다.[주-D027] 고(故) 이합천(李陜川) : 합천 군수를 지낸 이증영(李增榮, ?~1563)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증영은 명종 때 합천 군수를 지냈고, 1563년에 청주 목사로 재직할 때 사망하였다.[주-D028] 괴곡(槐谷) : 옥순봉 부근의 지명이다. 옥순봉은 현재 충북 제천시 수산면(水山面) 괴곡리(槐谷里)에 있다.[주-D029] 구담(龜潭) :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龜潭峰)이 있는 곳이다. 물속에 잠긴 바위에 거북이 등 모양이 비쳐 구담이라 하였다고 한다.[주-D030] 오로봉(五老峰) : 구담봉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옥순봉의 건너편에 솟아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로 가은산(加隱山) 줄기이다. 채운봉(彩雲峰), 현학봉(玄鶴峰) 등이 이 부근에 솟아 있다.[주-D031] 외당(外黨) : 앞에서 외구(外舅)와 함께 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처족을 말한 것 같다.[주-D032] 수산역(壽山驛) : 충청도 제천시에 있는 역(驛)으로 군 남쪽 26리에 있었다.[주-D033] 오강(梧江) : 충북 청풍에 있는 강 이름이다. 《월곡집》 권9 〈청협일기(淸峽日記)〉에 이름이 나오며, 송환기(宋煥箕)의 《성담집(性潭集)》 권23에 “청풍의 오강[淸風之梧江]”이라는 구절이 보인다.[주-D034] 소진사(蘇進士) 후유(后由) : 진사 소후유(蘇后由, 1695~?)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영숙(穎叔)이다. 1721년(경종1)에 증광시 생원에 입격했다. 《영조실록》 1년 6, 7월에 생원 진사 등이 올린 상소문에 연명(連名)되어 있다. 《월곡집》 권1에 〈삼선암, 선담, 사인암, 구담의 유람을 기록하여 소진사 후유에게 주다[記三仙巖銑潭舍人巖龜潭之遊 贈蘇進士后由]〉가 있으며, 《뇌연집(雷淵集)》 권2에 시 〈탄금 허후유에게 주다[贈彈琴蘇后由]〉가 있다.[주-D035] 연풍(延豐) 수입(水入) : 연풍현(延豐縣) 수입촌(水入村)으로 연풍현은 충청도에서 동쪽으로 문경현, 서쪽으로 괴산군, 북쪽으로 충주에 접해 있다.[주-D036] 고산정(孤山亭) : 《성호전집》 권56의 〈주태사 고산도시 발문[朱太史孤山圖詩跋]〉에 의하면, 태사 주지번이 〈고산도(孤山圖) 36운(韻)〉이라는 장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고산정은 지금의 괴산현에 있으며 푸른 절벽과 맑은 강물로 호서 지방의 절경 중 하나이다. 바위 벼랑 위에는 아직도 ‘은병암(隱屛巖)’과 ‘제월대(霽月臺)’라고 커다랗게 새겨 놓은 글씨가 있는데, 이 또한 태사의 필적이다. 그 뒤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뒤이어 조선에 와서 〈고산기(孤山記)〉를 지어 주었는데, 《황화집(皇華集)》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라고 하였다.[주-D037] 이장(李丈) 직(溭) : 이직(李溭)을 높여 부른 말이다.[주-D038] 유서경(柳西坰) : 유근(柳根, 1549~1627)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이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1572년(선조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87년 이조 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1593년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이어 한성부 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1604년 호성 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서경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주-D039] 주지번(朱之蕃) : ?~1624. 명나라의 대신이며 서화가이다. 산동(山東) 치평(茌平)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介), 호는 난우(蘭嵎)이다. 만력(萬曆) 23년(1595)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1606년(선조39), 한림원 수찬으로서 명나라 신종(神宗)의 손자가 태어난 것을 알리기 위한 사행의 정사(正使)로 조선(朝鮮)에 왔다. 이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편액과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안향(安珦) 사당의 편액 등을 그가 써주었다고 한다. 저서에 《봉사고(奉使稿)》가 있다.[주-D040] 군재(郡齋) : 괴산 군수(槐山郡守)의 거소를 말한다.[주-D041] 쌍계사(雙溪寺) : 충북 괴산의 칠보산(七寶山)에 있는 계곡인 쌍계(雙溪)에 있는 절이다. 쌍계는 지금 쌍곡(雙谷)으로 불린다.[주-D042] 이장(李丈) : 괴산군수 이직(李溭)을 가리킨다.[주-D043] 소생(蘇生) : 진사 소후유(蘇后由)를 가리킨다.[주-D044] 애한정(愛閑亭) : 충북 괴산에 있는 정자로, 박지겸이 낙향하여 머물던 곳이다. 1614년(광해군6)에 건립하였다. 1637년(현종14) 당시 괴산 군수였던 황세구(黃世耉)가 박지겸의 손자 박정의(朴廷儀)의 효심에 감동하여 사비를 내어 중건하였다. 그 후 1712년(숙종38), 1718년(숙종44), 1775년(영조51), 1979년에 각각 중수하였다.[주-D045]
박지겸(朴知謙) : 1549~1623.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경(孟卿), 호는 애한정(愛閑亭)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로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위한 공으로 별좌(別坐)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 때 낙향하여 충북 괴산(槐山)에 애한정(愛閑亭)을 짓고 살았다. 〈애한정 팔경시(愛閑亭八景詩)〉, 〈제애한정기첩후(題愛閑亭記帖後)〉를 비롯하여 시고(詩稿) 약간이 있다. 묘는 충북(忠北) 괴산면(槐山面) 대덕리(大德里) 갈전동(葛田洞)에 있으며,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槐山郡)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조부 박세무와 함께 배향되었다.
宋時烈 | 1607 | 1689 | 宋聖賚 | 恩津 | 英甫 |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尤齋 | 文正 |
[주-D046] 축요당(祝堯堂) : 정호(鄭澔)가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강론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교유하였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신정하(申靖夏)의 《서암집(恕菴集)》 권11에 〈축요당기(祝堯堂記)〉가 실려 있다.[주-D047] 화봉현(華封峴)이 …… 것인데 : 화봉(華封)은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화(華) 땅에 봉해진 사람이 요 임금에게 장수하고 부유하고 아들을 많이 낳기를 축원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신정하의 〈축요당기〉에 의하면, 화봉현은 축요당 앞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주-D048] 정장암(鄭丈巖) 호(澔) : 정호(鄭澔, 1648~1736)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이다.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부친은 감찰 정경연(鄭慶演)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75년(숙종1) 송시열이 유배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썼다. 그 뒤 1682년에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사사당하자,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그 뒤 광주 부윤, 부제학, 대사헌 등을 지냈고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21년(경종1)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1) 우의정이 되어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주-D049] 떡바위[餠巖] : 쌍곡계곡의 구곡 중 제3곡으로, 거대한 바위인데 그 모양이 시루떡을 잘라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주-D050] 관청평(官廳坪) : 괴산 남하면(南下面) 관청평리(官廳坪里)를 가리킨다.[주-D051] 봉암사(鳳巖寺) : 문경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본산이었다. 통일신라 시대인 879년(헌강왕5)에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세웠다.[주-D052] 야유암(夜遊巖) : 신라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이다.[주-D053] 석기(石磯) : 물가에 돌출한 거대한 암석을 말한다.[주-D054] 取適臺(취적대) :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이다.[주-D055] 지증비(智證碑) :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를 말한다. 지증대사(智證大師)는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조(開祖) 도헌(道憲, 824~882)이다. 신라 경애왕 1년(924)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찬술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도헌이 882년(헌강왕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주-D056] 석(釋) 혜강(慧江) : 신라 시대의 승려이며 서예가이다. 그가 83세(924) 때 〈지증대사 적조탑비〉를 썼다.[주-D057] 당(唐) …… 갑신 : 지증대사 적조탑비가 세워진 때는 신라 경애왕 원년(924)으로 갑신년이다. 이 시기는 당나라(618~907)가 멸망한 후 송나라(960~1279)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인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이다. 용덕(龍德)은 후량(後梁, 907~923)의 제3대 황제인 주우정(朱友貞)의 연호로 그 기간은 921~923년이다. 924년은 후당(後唐, 923~936)의 제1대 황제 이존욱(李存勖)의 연호인 동광(同光, 923~926) 원년이다.[주-D058] 정원비(淨源碑) : 상봉당대선사비(霜峯堂大禪師碑)를 가리킨다. 정원(淨源, 1621~1709)의 호가 상봉(霜峯)이다. 상봉대사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선사로 화엄경에 정통하였는데, 봉암사에서 중국 규봉대사(圭峰大師) 종밀(宗密)이 쓴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와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쓴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과문(科文)을 지었다. 과문은 간단한 어구와 줄을 그어 그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문장가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지었다.[주-D059] 정진비(靜眞碑) :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를 말한다. 고려 시대의 청석(靑石) 탑비로 광종 16년(965)에 건립되었다. 정진대사(靜眞大師, 878~956)는 935년(태조18)에 봉암사를 재건한 승려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활동한 승려이다. 당나라에서 2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왕씨(王氏)이며 속명은 긍양(兢讓), 시호는 정진(靜眞), 탑호는 원오(圓悟)이다.[주-D060] 이몽유(李夢游) :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3년(성종2) 좌집정(左執政)으로 최승로(崔承老)ㆍ유언유(劉彦儒)ㆍ노혁(盧奕)과 같이 진사를 시취(試取)하였다. 1027년(현종18)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033년(덕종2) 사공(司空)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주-D061] 장단열(張端悅) : 고려 전기의 문신, 서예가이다. 한림원 서박사(書博士)를 거쳐 군부경(軍府卿)을 지냈다. 〈정진대사원오탑비〉 외에 여주 혜목산(慧目山)의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를 썼다.[주-D062] 만장봉(萬丈峰) : 도봉산의 빼어난 봉우리의 하나로, 넓고 큰 바위가 천장만장으로 깎아지른 듯 서 있어 그 기세가 웅장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주-D063] 지증(智證)이 …… 일 : 지증대사가 봉암사 터를 잡았는데, 그 자리에 큰 못이 있어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므로 지증대사가 신통력을 써서 용들을 구룡봉으로 쫓아낸 뒤에 못을 메우고 봉암사를 세웠다는 창건 설화가 있다.[주-D064] 외선유동(外仙遊洞) : 문경에 있는 승경으로 화양에서 50여 리 떨어져 있다.[주-D065] 신 찰방(申察訪) 필정(弼貞) : 신필정(申弼貞, 1656~1729)이 찰방에 제수되었으므로 이와 같이 일컬은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병옹(病翁)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역학(易學)과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숙종 4년에 천거로 참봉, 찰방(察訪), 주부(主簿)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탐구에만 몰두하였다. 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아들 신사일(申思日)에게 기략(機略)을 일러주고 의병을 일으켜 고모산성을 방어하여 남침을 저지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저서로 《훈몽역의(訓蒙易義)》가 있다.[주-D066] 내선유동(內仙遊洞) : 괴산에 속해 있는 승경이다. 문경의 외선유동과 구분하여 이른 말이다.[주-D067] 이진안(李鎭安) 현익(顯益) : 이현익(李顯益, 1678~1717)이 진안(鎭安) 현감을 지냈으므로 이와 같이 이른 것이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겸(仲謙), 호는 정암(正菴)이다. 1708년(숙종34)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고, 1710년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영조의 왕자사부(王子師傅) 및 진안 현감을 역임했다. 이기설(理氣說)과 사칠설(四七說)과 경설(經說) 등은 조선 후기의 경학사(經學史) 및 유학사상사(儒學思想史)에서 중요시되고 있다. 김창협(金昌協)과 권상하(權尙夏) 등 송시열의 제자를 사사(師事)하였다. 문집 《정암집(正菴集)》이 있다.[주-D068] 파곶(葩串)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화양구곡 중 제9곡으로 송시열이 은거했던 곳이다. 파곡(葩谷)이라고도 한다.[주-D069] 학소암(鶴巢巖) :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를 말한 것이다.[주-D070] 와룡암(臥龍巖) : 화양구곡의 제7곡이다.[주-D071] 첨성대(瞻星臺) : 화양구곡의 제5곡이다.[주-D072] 숭정(崇禎)의 …… 있었고 :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연호로 기간은 1628~1644년이다. “비례부동”은 《중용장구》의 구절이다. 《송자대전》 부록 제7권 연보의 〈숭정 47년(1674) 갑인, 선생 68세〉에 의하면, “노봉(老峯) 민공(閔公) 정중(鼎重)이 연경(燕京)에 가서 의종황제(毅宗皇帝)의 ‘비례부동’ 네 자를 쓴 수필(手筆)을 얻어 와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드디어 시냇가 벼랑의 돌에 모각하고 그 곁에 암자(庵子)를 세워 승도(僧徒)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환장암(煥章庵)이라 이름하여 그 진본을 암자 속에 간직하게 하였다.”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의 《강한집(江漢集)》 권10의 〈운한각기(雲漢閣記)〉에서, 환장암의 옆 거대한 바위 위에 집을 지어 운한각(雲漢閣)이라 하고 어서(御書)를 보관하였다고 하였다.[주-D073] 우재(尤齋)의 …… 있었는데 : 우재는 우암 송시열의 호이다. 《한수재집(寒水齋集)》 권22 〈화양동 애각 뒤에 쓰다[書華陽崖刻後]〉에서 “‘대명천지 숭정일월’ 이 여덟 글자는 배신(陪臣) 송시열이 일찍이 어떤 이에게 써 준 것인데, 이것이 이 산중에 꼭 알맞은 글이므로 삼가 모(摹)하여 새기노라.” 하였다. 동권의 〈주촌사당기(舟村祠堂記)〉에서는, “주촌(舟村) 신만(申曼, 1620~1669)의 선비와 부인이 호란 때 자결하여 조정에서 특명으로 정려(旌閭)하게 하였으나, 공이 《춘추(春秋)》의 법에 ‘적(賊)을 토벌하기 전에는 장(葬)이라고 쓰지 않는다.’라는 것 때문에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양(華陽)의 노선생께서 일찍이 이곳을 누차 방문해서 편액(扁額) 및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 여덟 글자를 크게 써서 그 절의를 표장하였다.” 하였다. 화양의 노선생은 우암 송시열을 가리키며, 신만은 송시열의 제자이다.[주-D074] 만력(萬曆)의 …… 것이다 : 명나라 만력제 신종의 글씨 옥조빙호(玉藻氷壺)는 《한수재집》 권22 〈화양동 절벽에 새겨진 어필에 발함[華陽崖刻御筆跋]〉에 의하면, 숭정 90년(1717) 정유년 8월에 권상하(權尙夏)와 이선직(李先稷) 등이 이 글자를 의종의 어필 좌측에 새겼다고 한다.[주-D075] 오운대(五雲臺) : 능운대(凌雲臺)를 가리키는 것 같다. 화양구곡의 제6곡으로 첨성대의 건너편 방향에 있다.[주-D076] 환장암(煥章菴) : 의종의 어서를 운한각에 보관하던 암자였는데, 1907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운한각과 함께 불태워 없앴다. 지금은 이곳에 채운사(彩雲寺)가 있다. 《송자대전》 부록 제7권 연보의 〈숭정 47년(1674) 갑인, 선생 68세〉에 의하면, “노봉(老峯) 민공(閔公) 정중(鼎重)이 연경(燕京)에 가서 의종황제(毅宗皇帝)의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자를 쓴 수필(手筆)을 얻어 와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드디어 시냇가 벼랑의 돌에 모각하고 그 곁에 암자(庵子)를 세워 승도(僧徒)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환장암(煥章庵)이라 이름하여 그 진본을 암자 속에 간직하게 하였다.”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의 《강한집(江漢集)》 권10의 〈운한각기(雲漢閣記)〉에서, 환장암의 옆 거대한 바위 위에 집을 지어 운한각(雲漢閣)이라 하고 어서(御書)를 보관하였다고 하였다.[주-D077] 서원 :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말한다. 1695년(숙종21),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ㆍ정호(鄭澔) 등 노론 인사가 주도해 설립한 서원으로 이듬해 사액을 받았다. 1716년에 숙종이 편액을 친히 써서 다시 내렸다. 《肅宗實錄 42年 10月 14日》[주-D078] 우옹(尤翁)이 살던 집 : 암서재(巖棲齋)를 말한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화양구곡의 제4곡 금사담(金沙潭)에 있다.[주-D079] 선왕 : 숙종(肅宗)을 가리킨다.[주-D080] 만동묘(萬東廟) :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1689년(숙종15) 송시열이 사사되기 전에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유언하였고,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민정중(閔鼎重)ㆍ정호(鄭澔)ㆍ이선직(李先稷)과 함께 1703년(숙종29)에 화양동에 건립하였다. 《도암집》 권30 〈만동묘비〉에 낙양산(洛陽山) 아래 화양동의 만동묘는 “숭정 76년 가을에 비로소 이루어져서 우리 신종황제와 의종황제를 제사 지냈다.[崇禎七十六年秋始成, 以祀我神宗顯皇帝、毅宗烈皇帝.]“라고 하였다.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처음과 끝 글자를 따서 권상하가 만동묘라고 이름하였다. 만절필동은 중국의 강물이 만 굽이를 돌더라도 동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주-D081] 星拱院(성공원) : 성공문(星拱門)인 것 같다. 성공(星拱)은 《논어》 〈위정(爲政)〉에서 취하였다. 《華陽洞志》[주-D082] 泣弓巖(읍궁암) : 화양구곡의 제3곡에 있다. 운영담(雲影潭)의 남쪽이며, 시냇가에 있는 희고 둥글넓적한 바위이다. 《한수재집》 권22 〈읍궁암에 새긴 시의 뒤에 제함[題刻泣弓巖詩後]〉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일찍이 효묘(孝廟)의 휘일(諱日)을 만나 새벽에 일어나서 바위 위에 올라가 통곡을 하고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후인들이 그 바위를 읍궁(泣弓)이라 호칭하였으니 대체로 형호(荊湖)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에 방백(方伯) 윤헌주(尹憲柱)가 ‘읍궁암’ 세 글자를 대서(大書)하여 돌에 새겨 후인들이 보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형호(荊湖)의 고사는 임금의 죽음을 슬퍼함을 의미하는데, 형호는 형산(荊山) 아래의 정호(鼎湖)를 말한다. 황제(皇帝)가 여기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황제의 활[弓]만 땅에 떨어지므로 신하들이 그 활을 안고 통곡을 했다는 고사가 있다.[주-D083] 소양재(昭陽齋) : 소양(昭陽)은 주자(朱子)의 〈감흥시(感興詩)〉 구절인 “양의 덕이 깊은 샘 속에서 밝아온다.[陽德昭窮泉]”에서 취하였다. 서원의 임원이 거처하던 곳이다. 《華陽洞志》[주-D084] 정축년 황력(皇曆) : 정축년(1637, 인조15)에 중국 황제가 내린 책력(冊曆)을 말한다. 《한수재집》 권22 〈숭정의 대통력에 발함[崇禎大統曆跋]〉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숭정 정축년에 우리나라에 반포되었던 황력을 인조가 김상헌(金尙憲)에게 하사하였고, 김상헌이 이를 간수해오다가 만년에 서손(庶孫) 김수징(金壽徵)에게 주면서 당부하기를, “후일 이 책을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에게 주어라.” 하였다. 그 후 화양동에 송시열의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우자 김수징이 이 책을 가져와 권상하(權尙夏)에게 주었다. 권상하가 이를 화양동으로 들여와서 의종황제의 어묵(御墨)과 함께 진중히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정축년은 병자호란 이듬해로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항복한 해이다. 《영조실록》 38년 5월 10일에, 명 태조 고황제(高皇帝)의 기일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말하기를, 정축년 남한산성에서 우리나라가 항복하자 의종이 우리나라 사신을 불러 황력을 반사(頒赦)하여 위로하였다고 하였다.[주-D085] 암서재(巖棲齋) : 우암 송시열이 서재 겸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화양구곡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바위 위에 있다.[주-D086] 華陽水石大明乾坤(화양수석 대명건곤) : 심정진(沈定鎭)의 《제헌집(霽軒集)》 권2 〈화양구곡기(華陽九曲記)〉에, “시냇가 바위에 ‘화양수석 대명건곤’ 여덟 자를 새겼으니 윤헌주의 글씨이다.[溪邊卧石, 刻華陽水石大明乾坤八字, 尹憲柱之書也.]” 하였다. 윤헌주(尹憲柱, 1661~1729)는 숙종 43년(1717)에 충청 감사를 지냈다.[주-D087] 열천재(冽泉齋) : 화양서원 내의 당우로,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휴식하던 곳이라 한다. 《霽軒集 卷二 華陽書院記》[주-D088] 경천벽(擎天壁) : 화양구곡의 제1곡이다. 같은 이름의 절벽이 단양팔경의 상선암에도 있다.[주-D089] 후영정(後穎亭) :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의 《벽오유고(碧梧遺稿)》 권1에 시 〈후영정에서 익지의 운을 따라 짓다[後穎亭, 次益之韻]〉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발 때부터 있었던 정자인 것 같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9에는 후영정에 대해 “이군미 경휘의 별장이다.[李君美慶徽別莊.]”라고 하였다. 이경휘(李慶徽, 1617~1669)는 이경억(李慶億)의 형으로 두 사람은 이시발의 아들이다.[주-D090] 고(故) 이상국(李相國) 경억(慶億) : 이경억(李慶億, 1620~1673)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이(錫爾), 호는 화곡(華谷)이다. 판서 이시발(李時發)의 아들이다.[주-D091] 만경대(萬景臺) : 화양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거리에 있는 곳으로, 화양서원이 처음에 이곳에 세워졌다가 나중에 황묘(皇廟) 앞으로 옮겨졌다. 《고종실록》 11년 4월 15일에 의하면, 숙종 때 화양의 만경대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을 하였는데 그 뒤 경인년에 황묘(皇廟)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였다.[주-D092] 사담(沙潭) : 화양구곡의 남쪽에 있다.[주-D093] 이 부솔(李副率) 하곤(夏坤) :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부솔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른 것이다. 이하곤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ㆍ계림(鷄林)이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문형(文衡)이었던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이다. 1708년(숙종34) 진사가 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와 세자익위사 부솔(世子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인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주-D094] 공림사(空林寺) : 충북 괴산 낙영산에 있는 절이다. 화양계곡의 남쪽이며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주-D095] 문 : 천왕문(天王門)을 말한다.[주-D096] 구리 돛대 : 구리 당간(幢竿)을 가리킨 것이다. 당간은 찰주(刹柱), 찰간(刹竿)이라고도 하며 사찰에 의식이 있을 때 기(旗)의 종류인 불당(佛幢)을 걸어놓는 것이다. 법주사의 구리 당간은 고려 목종 9년(1006)인 통화(統和) 24년에 조성된 것으로 16미터가 되었다고 하는데, 고종 3년(1866)에 경복궁 복원을 위해 징발되어 사라졌다. 그 후 순종 때 22미터로 다시 조성되었다.[주-D097] 통화(統和) 24년 : 고려 목종 9년이다. 통화는 요나라 성종의 연호로 그 기간은 983~1012년이다. 고려는 거란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서 국왕 책봉과 연호 사용을 하였다. 제6대 임금 성종 13년(994) 2월부터 거란의 연호인 통화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동연 6월에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高麗史 卷2, 卷3》[주-D098] 팔상전(捌相殿) : 5층의 목탑으로 법주사의 전각들 중에서 가장 높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8개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 속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의신대사(義信大師)가 초창하였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2년부터 중창이 시작되어 인조 2년(1624)에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복원되었다.[주-D099] 장륙금불(丈六金佛) : 큰 불상은 주로 장륙불상으로 1장 6자이다. 용화전(龍華殿)은 미래불인 미륵불을 안치한 전각을 말한다. 미륵불이 출현하는 곳이 용화세계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이므로 이른 말이다. 법주사는 법상종이어서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신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보은현〉에는, “법주사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륙상(金身丈六像)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를 부어 만든 당간[幢]이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1006)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寺中有珊瑚殿, 金身丈六像, 門前有鑄銅幢樣甚高, 其一面刻云”統和二十四年“.]”라고 하였다. 법주사의 용화전은 산호전(珊瑚殿)으로도 불렸는데, 전각 뒤쪽에 암벽 산호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의 미륵장륙존상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 법주사 중창 시에 금동미륵장륙상이 재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 때 징발되어 사라졌다. 지금의 청동미륵대불은 1990년에 조성한 것으로 33미터에 이른다.[주-D100] 석옹(石甕) : 속리산의 삼천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땅에 묻혀 있다.[주-D101] 철곽(鐵钁) :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미터 직경 2.87미터, 두께 10.8센티미터의 거대한 솥이다.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 전해온다.[주-D102] 석조(石槽) :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720년(성덕왕19)에 조성되어 법주사에 3천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주-D103] 복천사(福泉寺) : 충북 보은 속리산에 위치한 사찰로, 법주사 동쪽 7리쯤 되는 곳에 있다. 절 동쪽에 샘물이 있어 돌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식수로 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주-D104] 세조 대에 창건되었는데 : 세조 대에 중건된 것이다. 복천사는 신라 시대의 암자로 720년(성덕왕19)에 창건된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조선 시대에 세조가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의 두 고승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암자에 이르는 길목의 목욕소(沐浴沼)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으므로 절을 중수하였고, 또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 옥판(四角玉板)을 하사하였다. 《문종실록》 즉위년 경오(1450) 6월 22일 기사에 의하면, 왕이 충청 감사 권극화(權克和)에게 유시하기를 “중[僧] 신미(信眉)가 보은현(報恩縣) 땅에 복천사(福泉寺)를 고쳐 지으니, 단청(丹靑)의 제구를 적당히 갖추어 주어라.” 하였다.[주-D105] 신미(信眉) : 조선 전기의 승려로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며 본관은 영동(永同)이다. 세조 때의 승려로 김수온(金守溫)의 형이다. 법주사에 출가하여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불사를 중흥시켰다. 세종을 도와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문종은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세조 때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자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1458년(세조4)에 나라에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고자 했을 때 이를 감독하였고, 1461년에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불전(佛典)을 번역하고 간행했을 때도 이를 주관하였다. 그의 주관 아래 《법화경》ㆍ《반야심경》ㆍ《영가집(永嘉集)》 등이 언해되었으며,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도 교정하여 간행하는 등 불전의 국역과 유통을 위한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세조는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렸다.[주-D106] 김괴애(金乖崖) : 김수온(金守溫, 1410~1481)으로,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ㆍ식우(拭疣)이다. 세종 때 등과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세조 대에 한성 부윤, 공조 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성종 때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ㆍ육경(六經)에 해박하여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써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 알려졌다. 불교 관련 글을 많이 남겼다. 문집 《식우집(拭疣集)》 권2에 〈복천사기(福泉寺記)〉가 실려 있다.[주-D107] 임행시사(臨幸時事) : 거둥했을 때의 일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보은현〉의 ‘복천사’에서 “천순(天順) 갑신년에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때 병풍연(屛風淵)에 잠시 들렸다가, 이튿날 법주사에서 이 절까지 두루 경치를 구경한 다음 호종(扈從)하는 문신(文臣)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해서 이 일을 기록하게 했다.” 하였다.[주-D108] 구암(龜巖)이 …… 있다 : 소갈(小碣)은 속리산 사실기비를 가리킨다. 이는 1666년(현종7)에 세운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는데 속리산의 내력과 관련 사실을 기록하였다. 특히 수정봉 정상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말하기를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이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봉의 돌 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정기를 눌렀다고 하였다. 1653년(효종4)에 옥천 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 병마절도사 민진익이 탑을 헐어버렸다고 한다.[주-D109] 산호전(珊瑚殿) :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보은현〉에는, “법주사 안 산호전에는 금신장륙상(金身丈六像)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당간[幢]이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1006)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寺中有珊瑚殿, 金身丈六像, 門前有鑄銅幢樣甚高, 其一面刻云”統和二十四年“.]”라고 하였다. 법주사의 용화전은 산호전으로도 불렸는데, 전각 뒤쪽에 암벽 산호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의 미륵장륙존상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 법주사 중창 시에 금동미륵장륙상이 재건되었으나 대원군 때 징발되어 사라졌다. 지금의 청동미륵대불은 1990년에 조성한 것으로 33미터에 이른다.[주-D110] 벼랑을 …… 넣었는데 :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가리킨다. 비는 자연 암반을 파내고 몸체를 박아 넣은 특이한 형태로 길쭉한 직사각형 모습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고려 말의 승려로 법호는 자안(子安)이고, 자은종(慈恩宗) 종사(宗師)로서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라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정(僧政)을 도맡았다. 웅신사(熊神寺)ㆍ법주사 등을 거쳐 대구 동화사(桐華寺) 주지였을 때 국존의 칭호를 받았고, 말년에 법주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비는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명을 받아 이숙기(李叔琪)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글씨를 썼다. 시호는 자정(慈淨), 탑명(塔銘)은 보명(普明)이다.[주-D111] 이숙기(李叔琪) : 고려의 문신. 밀직사 좌부대언 판할공시사 진현관제학(密直司左副代言判轄工寺事進賢館提學)을 지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남아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慈淨國尊菩明塔碑)의 비문을 지었다. 이 탑비는 1314년에 건립되었다.[주-D112] 전원발(全元發) : ?~1421.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1315년(충숙왕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개국 후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법주사 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의 글씨를 썼다. 용궁은 경상북도 예천이다.[주-D113] 양성(陽城)의 묘 : 양성은 경기도 안성시 서부 지역의 옛 이름이다. 오원의 조부인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고향이며 그를 제향하는 덕봉서원(德峰書院)이 있다. 덕봉서원 가까이 해주 오씨의 묘역이 있는데, 이곳에 오두인의 묘가 있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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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易東) 우탁(偶倬, 1263~1342)이->禹倬 126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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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삭제
*박지겸(朴知謙) : 1549~1623.
宋時烈 1607~1689
박지겸 58세 때 태어난 송시열이 박지겸의 스승이다. 송시열 16세 때 74세로 죽은 박지겸이 송시열의 문인이다.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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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유고(龍溪遺稿) 김지남(金止男)생년1559년(명종 14)몰년1631년(인조 9)자자정(子定)호용계(龍溪)본관광산(光山)
龍溪遺稿卷之三 / [詩] / 愛閑亭八詠次韻 主人朴知謙
山頂乍霏微。彌漫罥下土。淡淡受朝暉。濃濃帶宿雨。
右松岳晴嵐
淸香與素華。兩美荷間月。皎皎絶緇塵。亭亭無屈曲。
右荷塘夜月
出屋一條靑。絙空千丈白。歸雲與合勢。暮山藏半腹。
右孤村暮烟
夕陽忽東斜。峭壁生丹碧。幽人看未闌。行客歸何急。
右蒼壁落照
半空石磴危。草樹羅生逬。隱映彼何人。依依帶日影。
右石磴行人
長風海門來。遠近參差舶。喧呼齊落帆。太半魚塩客。
右江浦商船
雲深遠公居。石路苔侵屨。橫斜水邊筇。歷亂山中樹。
右佛寺尋僧
風亂魚深藏。日暄魚盡出。相對慣相窺。沙頭有屬玉。
右槐灘釣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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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겸(朴知謙)
자(字) 맹경(孟卿)
호(號) 애한정(愛閑亭)
생년 1549(명종 5)
졸년 1623(인조 1)
시대 조선중기
본관 함양(咸陽)
활동분야 기타 > 처사
[상세내용]
박지겸(朴知謙)
1549년(명종 5)∼1623년(인조 1).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경(孟卿), 호는 애한정(愛閑亭).
조부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은 박세무(朴世茂)이고, 부친은 군수(郡守) 박응립(朴應立)이다. 문목공(文穆公)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가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로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위한 공으로 별좌(別坐)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 때 낙향하여 충북(忠北) 괴산(槐山)에 애한정(愛閑亭)을 짓고 살았다.
「애한정 팔경시(愛閑亭八景詩)」, 「제 애한정기첩후(題愛閑亭記帖後)」를 비롯하여 시고(詩稿) 약간이 있다. 묘는 충북(忠北) 괴산면(槐山面) 대덕리(大德里) 갈전동(葛田洞)에 있으며,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槐山郡) 화암서원(花巖書院)에 할아버지 박세무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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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서원 (花巖書院)
유적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이황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22년(광해군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이문건(李文楗)·노수신(盧守愼)·김제갑(金悌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38년(영조 14)허후(許詡)·전유형(全有亨)·박세무(朴世茂)·이신의(李愼儀)를 추가배향하였으며, 그 뒤 박지겸(朴知謙)·허조(許慥)·유근(柳根)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6년 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사우(祠宇), 4칸의 재실(齋室), 정문(正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황을 주벽(主壁)으로 10현의 위패가 좌우에 배향되어 있으며, 정문 밖에 있는 재실은 유생들의 학문토론장소 및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대지 500평, 논 2,000평, 임야 7정보 등이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
『괴산군지』(괴산군지편찬위원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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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선집 > 조천기 > 조천기 상 > 갑술년 > 최종정보
조천기 상 /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5월
18일(신묘)
맑음.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를 보고서 아침은 검수역(劍水驛)에서 들었다. 조여식과 더불어 서헌(西軒)에 앉았는데, 조여식이 홍주인(洪州人) 서치무(徐致武)의 행적을 이야기하였다. 서치무는 본래 사천(私賤)이었으나 천성이 개결(介潔)하여 늠름함이 가을 서리 같아서 일호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고 사람됨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므로,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주의 목사[州牧]가 그 행적을 적어서 조정에 올렸더니 포백(布帛)을 내려 이를 격려하였으나 서치무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찌 실행이 없는데 헛되이 크나큰 은혜를 받겠는가?”
하고 굳게 거절하여 받지 않았으므로, 주목(州牧)이 억지로 이를 주었더니 서치무는 부득이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는 이를 대들보 위에 얹어 놓았다는데, 지금껏 봉해 놓은 것이 완연(宛然)하다고 하였다. 또한 서치무는 자식이 없었는데 그 주인이 극히 사나워서 친히 그 집에 이르러 재산을 빼앗아 싣고 갔으므로 서치무는 돌아갈 곳이 없어 그 아내와 같이 사방으로 걸식할 지경에 이르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듣고서 사람을 시켜 이를 불러 가지고 그의 재산을 관리하게 하여 유산(流散)하지 않게 하였다. 대개 서치무는 토정이 아끼는 바가 되어 서로 허여하는 사이가 되었고 일찍이 함께 바다로 나가서 한라산(漢拏山)을 감상한 자였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몇 대[間世]가 되어도 얻기 어려운 자라고 할 만하다. 학력(學力)이 없이도 이와 같으니, 자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일을 들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점심 때에 봉산군(鳳山郡)에 들어갔는데 갈증이 심하였으므로 또한 빚은 술을 얻어 찬 것을 두서너 잔 마셨더니 이로 인하여 피곤해서 누워 있는데, 상사가 서봉정(棲鳳亭)에서 불렀으나 갈 수가 없었다. 송화(松禾) 박 현감(朴縣監)의 아들 박지겸(朴知謙)이 와서 보았는데 현감의 이름은 응립(應立)이며 가군(家君)과는 동방급제였다.
[주-C001] 만력(萬曆) : 명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며 2년은 선조 7년(1574)에 해당한다. 이 사행 기록은 《선조실록》 7년 5월 11일 조와 11월 3일 조에 실려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윤남한 (역)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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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계 (朴知誡)
출생 연도
1573년(선조 6)
사망 연도
1635년(인조 13)
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아버지는 군수 박응립(朴應立)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논어』를 탐독해 장차 대유(大儒)가 될 이상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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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으로 피난했고, 정유재란 때는 괴산에 우거하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606년(선조 39)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그를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옥당(玉堂: 부제학 이하 부수찬 등 홍문관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원의 총칭)의 최현(崔晛)이 좌세마 겸 서연관(左洗馬兼書筵官)으로 천거했지만, 사양하였다.
그 뒤 정신(廷臣) 가운데 광해군의 생모에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주장이 있자 호서(湖西)로 거처를 옮기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흥(權興)·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왕의 부름으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았다. 박지계는 당시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해, 주자(朱子)의 덕행과(德行科),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 이이(李珥)의 선사법(選士法) 등이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훌륭한 제도라고 진언하였다.
박지계는 예론에 관한 의견에서 조정의 중신들과 대립되자 잠시 남양(南陽)에 우거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수복 후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서울로 돌아와서 양민치병(養民治兵)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또한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수창(首唱: 두목이 되어 주창함)하기도 하였다. 이방숙(李芳淑)·조광선(趙光善)·김극형(金克亨)·권시(權諰)·원두추(元斗樞)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저서로는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및 『잠야집(潛冶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