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 진우스님 2018.1.14~1.31
1월 14일 – . . . [오늘의 명상] . . “100. 백일간의 불교적 관점의 해답을 마치며.. “ . . [덧붙임] . . 지난 백일간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쉬운 예를 들어 불교적 관점에서 해답을 내놓는다고는 했으나, 속시원하고 명쾌한 설명이 되지 못한점에 대해 깊이 참회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되기보다는, 하나를 알면 백을 알고 하나의 공식을 알면 모든 문제에 적용되리라는 기대 때문에 원리적인 설명에만 치중하다 보니, 때로는 난해하고 어려운 설명으로 오히려 의문만 더하게 되는 우(愚)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백일간 불교적인 해법에 대해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역시 인과(因果)로 시작하여 인과(因果)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인과(因果)의 원리만 잘 알면, 적어도 걱정 근심과 고민, 불안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억울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많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잘되는 것에 너무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말지며, 설사 마음에 들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과거에 내가 그만큼 즐기고 기뻐했던, 그리고 행복하고 만족했던 인과(因果)요, 과보(果報)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과(因果)는 한치의 오차도 없으므로 이를 믿지 않는다면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하는 대상이 일이 되었건, 자연, 또는 사람이 되었건, 인연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연기(緣起)하여 나타날 뿐인데, 그 대상에 대해서 좋다 싫다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苦樂) 인과업(因果業)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대할 때는, 나의 감정과는 절대적으로 분리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하거나, 해하거나, 억울한 짓을 하거나, 욕을 한다면, 일단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따라 인과(因果)의 모습이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그냥 참고 견디고 지나가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같이 맞서서 격렬히 대항을 하는 등, 얼마든지 시비하고 싸움을 해도 됩니다. 다만,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정을 일으키면 그 인과(因果)로서 다음에 유사한 일이 계속 또 벌어질 것이고,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고락시비(苦樂是非)를 분별하지 않으면, 인과(因果)가 생기지 않음으로 다음에 이런 일은 재발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좋고 싫은 감정이 계속 반복 윤회(輪廻)하면 중생이 되는 고로, 고통과 괴로운 일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좋고 싫은 감정을 분별하지 않고 애초에 원인을 짓지 않는다면, 인과(因果) 자체가 생기지 않아서 아라한(阿羅漢) 보살(菩薩)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인연(因緣) 연기(緣起)로만 보게 된다면, 탐욕과 성냄, 그리고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일으킬 필요가 없을 것이니, 어쨌거나 가타부타, 따따부따, 고락시비(苦樂是非) 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하느니, 이제는 세상을 보는 눈의 관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아직도 인과(因果)의 법칙과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우선 기도부터 해보세요. 그리고 보시(布施)를 통해 복(福)을 지은 다음, 그 힘으로 정진력(精進力)으로서 인과(因果)를 바로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는 금강경 강의와 해설을 시작 하겠아오니, 많은 관심과 정독(精讀)을 부탁드립니다. - 진우스님 -
1월 15일 – . . . [오늘의 명상] . .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강의를 시작하며..“ . . [덧붙임] .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49년간 설법(說法)을 하셨다. 처음 화엄경(華嚴經)을 21일간 설법하시고, 아함경(阿含經) 12년, 방등경(方等經)(유마경, 승만경, 금광명경, 능가경, 무량수경 등) 8년, 금강경(金剛經, 반야부(般若部) 600권의 대반야경) 21년, 법화경(法華經) 8년, 열반경(涅槃經) 하루다. 설법5시(時)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무려 21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네 곳의 장소를 옮기면서 열 여섯 회의 장광설(長廣舌)로 600부 반야경을 설하셨다. 그 가운데 금강경은 제 557권째 경으로서, 둘째 장소, 9회째 법회에서 말씀하신 내용이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그만큼 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 설법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반야경인 금강경을 강의한다는 것은 매우 주제넘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조금이나마 부합하기 위해 서투른 강의를 시작하고자 하오니, 많은 양해와 함께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금강경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적 사실과 변천과정 등은 많은 자료가 두루 알려져 있으니 각자가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 금강경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아, 강의하는 중이라도 빠진 점이 있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지체하지 마시고 댓글을 통해 문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금강경은 가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가르는 관문(關門)과 같은 경이다. 금강경을 제대로만 알게 된다면 세간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래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도탄(塗炭)을 완전히 빠져나와서, 환희롭고 이상적인 출세간의 피안(彼岸)에 흔연스러이 도달할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금강경은 소납이 어릴 때 너무나 감명을 받고 진정한 출가(出家)의 기반이 되었던, 1930년대 소천선사(韶天禪師)의 "금강경 강의"를 대부분 참고하여 ‘붙임’을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현대인들의 사고(思考)에 맞도록 "덧붙임"이라는 형식으로 부언 설명하였다. 다만, 부탁드릴 것은 금강경 강의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한번 허투루 읽지 않으시길 간절히 바란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그 속에 신비한 기운이 청량(淸凉)하게 서려 있기 때문이니, 성심껏 공부하여 크나큰 영험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진우스님 -
1월 16일 – . . [오늘의 명상] . [금강경 강의] <제 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법회가 열린 이유)> .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러히 내가 들었다.”} . . “이러히” 라 함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 즉, 살아있는 본체(本體)와 심체(心體), 골격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무량한 법(法)이 포함되어 있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그대로 비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누가 들었는가? 부처님의 10대 제자인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와의 대화를, 역시 10대 제자인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그대로 들어서 전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경머리에 “내가 ‘이러히’ 들었던 것을 고스란히 전함이요, 내가 지어낸 말이 절대 아니”라고 함이다. 그러함에 “이러히” 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 전체의 뜻을 제일구(第一句)의 한마디로서 드러냄이다. 또 “이러히” 라 함은 금강반야바라밀의 진리를 하나의 대명사로서, 말 밖의 말, 생각 밖의 생각을 이끌어 냄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히 내가 들었다’ 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보이시려는 삼공처(三空處-1아공我空 2법공法空 3공공空空)인 청정본성(淸淨本性)을 내가 들었다는 표현이다. 또 삼공처(三空處)의 동작을 형용하여 말이 아닌 말을 들었다는 것이고, 본체 아닌 본체로서, 작용 아닌 작용으로 내가 즉 소식이요, 들은 바가 소식이라는 것이다. 즉, 진아(청정본성)인 내가, 진아(眞我)의 성품이 일어나서 들었다는 것이 아난존자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러히”의 뜻을 안 자이면 금강경의 본뜻을 아는 사람이니, 즉, 청정본성으로서 청정한 말 밖의 말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부처님의 반야바라밀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을 처음 듣는 이들은 그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간단히 덧붙이자면, “이렇게 내가 들었다” 고 하는 이 한마디 속에도, 엄청난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들었다” 의 이렇게(이러히) 라 함은, 아난존자 자신이 마음을 깨닫지 않고 들었다면 무슨 말씀이 오고 가는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아난존자는 이미 깨달은 마음으로 들었으므로 이렇게 즉, 한치 오차없이 정확하게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한다고 해서 옮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히” 속에 이미 금강경의 본체가 스며져 있고, 그 본체 자체가 이미 삼공처(三空處-1아공我空 2법공法空 3공공空空)에 속하는 것이므로, 즉 공(空) 또한 공이므로 이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나, 그러함에 금강경의 공도리(空道理)가 더욱 빛을 발하여 작용 함일 것이다. 그래서 공(空)을 말하는데 이 또한 공이고, 이 또한 공이 다시 공(空)이 되므로, 공이라고 하는 즉시, 또 공이 되는 것을, 이름하여 본체(本體)의 체(體)라 하는 것이고, 이 본체인 공(空)이 부처님과 수보리, 그리고 이를 깨친 마음으로 들은 아난존자, 이 셋이 말하고 듣는 것을 작용 즉 용(用)이라 한다. 이를 합쳐 체용(體用)이라 하는데, 체(體)를 모르면 혼령이요, 용(用)을 모르면 송장과 같아서 체용(體用)을 모르면 혼미와 망각(妄覺)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러히” 또는 “이렇게” 라는 대명사 속에는, 금강경의 요체인 공(空)의 도리와, 이 공의 도리를 말하고 듣는 작용을 하는 것이니, 이러한 체(體)와 용(用)을 통하여 부처님의 본자성(本自性)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 더 쉽게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모든 것은 본래 공(空)이어서 집착할 이유가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을 엄연히 보고 듣고 감응하는 고로, 여기에 감성(感性)과 정(情)을 붙이게 되면 인과(因果)를 면치 못할 것이나, 움직이는 작용 즉, 용(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게 되면, 체용(體用)만 살아 움직일 뿐, 괴로움의 과보(果報)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진우스님 -
1월 17일 [오늘의 명상] . . {금강경 강의} <제 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법회가 열린 이유)> . “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스님 천 이백 오십 대중과 함께 계시었다.”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붙임] 한 때 라는 것은, 이 경(經)을 설하시고자 한 때이고, 불(佛)은 석가세존(釋迦世尊)이시며, 또, 불(佛)이란 마음을 깨쳤다는 뜻이다. 기수(祇樹)는, 사위국(舍衛國)태자의 이름이 기타이고, 기타태자가 심은 나무라는 의미이며, 사위국은 이 경을 설법하실 때의 나라 이름이다. 급고독(給孤獨)은, 사위국의 노재상(老宰相)으로서 돈이 많은 자선가인 ‘수달다’ 라는 이의 별칭이 급고독이다. 이 별명은 고독한 사람을 잘 구해 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園)을 붙인 것은, 급고독 수달다 재상이 기타태자로부터 동산을 빌려 설법전을 세웠으므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한다. 비구(比丘)는 지금의 스님으로서 구걸 즉, 탁발을 하면서 수행하는 이를 가리킨다. 왜 꼭 구걸하며 수행을 할까? 부처님께 법을 구걸하여 깨달음을 얻을 량이고, 시주자(施主者)에게 의식을 구걸하여 식량으로 삼는 동시에, 시주하는 중생에게 복(福)을 짓게 함이다. [덧붙임] 왜 일시(一時), 한 때라고 했을까? 부처님의 말씀인 법경(法經)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지금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 한가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모두 다름이다. 시방무량국토(十方無量國土)의 무량중생을 향한 법이기 때문이다. 사천왕천(四天王天)의 하루는 인간의 50년이고, 도리천(忉利天)의 하루는 인간의 100년에 해당한다. 그러니 모두에게 한 때인 것이다. 불(佛)은 마음을 깨쳤다는 뜻인데 마음의 무엇을 깨쳤을가? 부처도 중생도 없음을 깨쳤다. 부처는 중생을 낳고 중생은 부처를 낳으니 이러한 분별(分別) 인과(因果)를 완전히 멸했다는 뜻이다. 그러함에 생사(生死)도 없고, 시비(是非)도 없으며, 고락(苦樂)도 없고, 극락과 지옥도 없으니, 영원 불멸하여 항상 일체의 장애없이 깨어 있음이다. 그런데, 마음 깨침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다. 불(佛)은 대각과 정각을 이룬 상태이다. 성문(聲聞)연각(緣覺)은 깨치기는 깨쳤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 완전히 깨친 것은 아니다. 본래 깨침에는 크고 작거나, 올바르다 그르다 하는 것이 전혀 없으니, 만약 깨쳤다 함은 못 깨쳤다는 인과(因果)에 걸리고, 크게 깨쳤다 하면 이미 작게 깨침이 되며, 작게 깨쳤다 해도 작은 깨침이 되고, 깨침 없음을 깨쳤다 해도 작은 깨침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침이 무엇인가는 앞으로 적나라하게 설명할 것이다. 끝. - 질문에 대한 답변 - 어제 글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기간에 대해 물으신 분이 계셨다. 예리한 질문을 해주신분께 먼저 감사를 드린다. 본래 49년 설법설은 천태지자대사의 오시교판(五時敎判)에서 주장을 했으나, 근래에는 45년 설법설이 정설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방등시 8년과 반야시 21년 도합 29년이지만, 사실은 방등시와 반야시가 25년으로서 4년의 차이가 나는 것은, 방등시와 반야시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석가세존 나이 48살~72살까지 25년간, 방등8년과 반야21년을 설했으므로, 오시교판상으로 보면 49년이 되고, 실질적인 년 수는 45년이 된다. - 또하나 낭독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질문하셨는데, 올리는 분이 말해 주지 않아서 밝힐 수가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진우스님 -
1월 18일 [오늘의 명상] . {금강경 강의} <제 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법회가 열린 이유)> . “그때 마침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셔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 걸식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 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 [붙임] 세존(世尊)은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가운데 하나이다. 세간(世間)의 모든 중생들이 함께 우러르며 존경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공양(供養)하실 때라 함은, 하루에 한끼를 드시는 시간 즉, 사시(巳時9시-11시)때이다. 가사(袈裟)는 부처님께서 입으신 법의(法衣)를 말하고, 발우(鉢盂)는 밥그릇이다. 바리때라고도 한다. [덧붙임] 부처님께서는 본래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가리지 않고 한끼에 일곱 집의 공양을 나누어 받으시는 것이 당시의 법칙이었다. 또 그 시절에는 맨발로 다니는 것이 관행이었으니 발을 씻으시고 고요히 앉으신 것은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기 위함이다. 부처님께서 다른 대중과 똑 같이 법의를 입으시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乞食)을 하시고, 발을 씻으시고, 진지를 균등히 나누시고, 발우(鉢盂)를 펴시고, 고요히 앉으심에 있어서 평범과 예사로움이 떠나지 않으셨으니, 이러한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에게 말없이 큰 교훈을 보이신 것이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밥을 비시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박복한 중생에게 복(福) 심을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빈자(貧者)에게 밥을 빌어 복을 심어 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자에게도 복을 심을 기회를 주는 것은 왜 일까? 지금 잠시 복이 있어 부자로 사는 기회를 가졌으나, 그 인과(因果)에 의해 얼마 후 다시 가난함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므로, 있을 때 잘하라는 말과 같이 나중을 위해서 복을 심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높고 낮은 곳과 더럽고 깨끗한 곳을 가리지 않고 빛의 혜택을 베풂과 같이, 복을 심어주는 자비심도 그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행하는 행동모습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대개 마음을 깨친 이가 깨치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주는 네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입으로 전하고 입으로 받게 하는 법이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을 따라하게 하는 것과 같다. 둘째,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게 하는 것이니 강의와 설법 법문 등이 그것이다. 셋째,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그 행동을 따라하게 하는 것이다. 훈련과 실습을 통하는 것과 같다. 넷째, 마음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게 하는 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그것이다. 이로써 부처님께서 움직이시는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법(法)이요, 가르침이시다. 부처님께서 행하는 법이 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백천다라니주(百千陀羅尼呪)를 친히 소리내셔서 받아 외우게 함으로 필경에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심이니, 입으로 전하고 입으로 받게 하심이다. 둘째,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친히 설하시어 미혹한 중생이 귀로 들어서 마음을 깨치게 하심이니, 입으로 전하시고 마음으로 받게 하심이다. 셋째, 부처님께서 중생의 몸으로 직접 태어나셔서 사문(四門)을 유관(遊觀)하시고 출가(出家)하시어 성불(成佛)하시고 열반(涅槃)까지 보여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부처님을 본떠서 배우게 하심이니, 몸으로 전하고 몸으로 받게 하심이다. 넷째, ,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첫번째는, 중인도 비사리성(毘舍離城) 북서쪽에 있는 다보탑 앞에서 부처님은 앉아 있던 자리 절반을 가섭(迦葉)에게 양보하여 앉도록 하셨다. 이것이 첫 번째 마음을 전한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이다. 두번째는,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꽃 비가 내렸는데, 부처님께서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자 다른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몰랐으나,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 묘한 법을 가섭에게 전한다 고 선포하셨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이다. 염화시중(拈華示衆) 또는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도 한다. 세번째는,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성(拘尸羅城)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열반하실 때, 가섭존자가 너무 슬픈 나머지 관 주위를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관 속에 있던 두 발을 밖으로 내밀어 보이셨다. 이를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라 한다. 이렇게 세번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셨다. 계속... - 진우스님 -
1월 19일 [오늘의 명상] . . {이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가사를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 합장하며 공손히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염려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당부하시고 부촉하십니다.”} 시 장로 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희유 세존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時 長老 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 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금강경 강의} <제 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수보리가 법을 청함)> [붙임] 장로(長老)는 덕(德)을 갖춘 나이 많은 부처님 제자를 일컫는 말이다. 수보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십대 제자로서 십육나한(十六羅漢)의 중의 한 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을 받아 반야(般若) 공(空)의 이치를 잘 교설(敎說)하여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린다. 부처님께 법을 물을 때는 무릎을 땅에 꿇어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행한다. 여래(如來)는 부처님 명호 가운데 하나로서, 여(如)는 여여(如如)하여 변함이 없다는 뜻이요, 래(來)는 중생을 위하여 오셨으나 결코 오신적이 없다는 뜻이다. 보살(菩薩)은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사(音寫)로서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보(菩)는 지혜를 닦음이요, 살(薩)은 복(福)을 닦는다는 의미다. 지혜를 닦음은 자성(自性)을 밝혀 부처를 이루기 위함이요, 복(福)을 닦음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호념(護念)이란 중생이 부처나 보살을 마음에 잊지 않고 염송(念誦)하며, 잘못된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복을 닦는 중생이나 간절히 깨달음을 기원하는 이들을 옹호하고 보살피며 깊이 사랑해주는 것이다. 부촉(咐囑)은 부탁하여 이르심이니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잘 부탁하여 이르시며, 불법이 후세에 잘 전달되어 영원토록 하심이다. [덧붙임]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고요히 앉아 계시기만 하셨는데, 수보리 존자가 왜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감탄을 하며 물으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수보리(須菩提) 존자(尊者)는 이미 해공(解空) 즉, 모든 것이 공(空)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다. 그러함에 부처님의 32상 80종호가 이미 공(空)하여 없었다. 무슨 말이냐? 부처님의 모습 즉, 32상 80종호는 더 이상 붙일 것이 없는 완전한 모습을 뜻한다. 모두가 철저히 공(空)하고 공하면 이것이 완전한 본공(本空)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모습인 상(相)은 공(空)의 근본처라 할 것이고 만법의 근원지가 된다. 상(相)이 없고 만법이 없으면 공(空) 또한 없을 것이니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하여 색(色,상相))이 즉 공이고 공(空)이 즉 색(色)이다. 따라서 수보리 존자의 공(空)한 눈에 비친 공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므로, 이게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이때 수보리가 본공(本空)의 입장에서 보니, 부처님은 이곳에서 1250인의 대중들을 이시(以時)의 이때에 넣어 놓으시고, 그들의 허망한 생각과 감정, 번뇌와 소승(小乘작은깨침)을 녹여서 없애려 하심을 본 것이다. 곧 본공(本空)의 체(體)가 움직여 작용하는 용(用)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다. 즉, ‘이러히’ 하심을 본 것이다. 금강경과 같이 세존께서 잘 호념(護念)하시며 부촉(咐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수보리 존자로서는 “희유하시다 세존이시여” 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세존께서는 금강처(金剛處)를 말씀하시려 자리에 앉으셨고 이를 들을 1250인 대중들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 여기서 한번쯤 살펴보고 가야 할 것은, 세존과 수보리 존자는 이미 본공(本空)에 들어 계심으로 어떠한 상(相)에도 걸림이 없으시다. 즉, 분별(分別)을 떠나 계시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상상이나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시다. 그야말로 상상불허이다. 다만, 부처님이나 수보리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하거나 어떤 감정을 갖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보는 이의 업상(業相)이라 할 것이므로, 적어도 공(空)과 색(色)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즈음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때 그 당시의 세존과 그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거룩한 경(經)의 내용을 음미하고 호념(護念)하면서, 적어도 척박한 현실에 있어서의 첨예한 대립과 조급함, 시시비비 등의 거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를 조금이나마 녹여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 진우스님 -
1월 20일 [오늘의 명상] . .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니 마땅히 그 마음을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오리까?"}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금강경 강의} <제 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수보리가 법을 청함 2.)> [붙임]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은 사부대중(四部大衆) 즉, 남녀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남녀 우바새 우바이 를 말한다. 아뇩다라삼맥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는 범어(梵語)인 산스크리트 의 말로써 “아(阿)”는 없다는 뜻이요, “뇩다라(縟多羅)”는 위 상(上)이라는 뜻이며, “삼(三)”은 바르다는 뜻이다. “보리(菩提)”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니, 합하면 “위 없는 바른 평등이요, 바른 깨달음의 마음” 이라는 뜻으로써 곧, 모든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참 성품을 말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형용할 수 없는 뜻으로써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할 뿐더러, 사량(思量) 즉, 생각까지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뜻을 지니고 있음이다. 이 거룩한 뜻을 내 마음 스스로 인 줄 알고 이를 깨치게 되면 곧 부처를 이룸이다. [덧붙임] 이 구절에서는 세존(世尊)께서 중생이 부처나 보살을 마음에 잊지 않고 염송(念誦)하며, 잘못된 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하시고, 복을 닦는 중생이나 간절히 깨달음을 기원하는 이들을 옹호하고 보살피며 깊이 사랑해 주시는 호념(護念)과, 더불어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잘 부탁하여 이르시며, 불법(佛法)이 후세에 잘 전달되어 영원하도록 부촉(咐囑)해 주신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수보리 존자가 이어서 여쭙는 광경이다. 또,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해 주신 결과로서, “깨달음이 없던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고, 부처님의 호념(護念) 부촉(咐囑)하심이 이제 발효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수보리 존자는, 대중이 이렇게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게 할 것이며, 안과 밖 장애로부터의 유혹을 어떻게 항복 받을 것인가를 겸하여 여쭈어 본 것이다.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알게 되었다고 하여 아직 마음을 깨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소승(小乘)의 마음에 만족했던 사부대중들이, 부처님의 호념부촉(護念咐囑)하신 은덕으로 소승의 마음을 버리고 대승(大乘)의 마음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아직까지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을 안팎의 장애로부터 항복 받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안으로 항복을 받는다는 의미는, 이 대승심(大乘心)을 놓치지 않고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요, 밖으로 항복을 받는다는 것은 대승심을 놓치게 하려는 무수한 망상(妄想)과 온갖 경계를 영원히 굴복시키는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내가 무엇을 꼭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보통의 마음일 진데,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지 하는 마음은 곧 분별심(分別心)으로서, 설사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기쁨과 즐거움, 만족한 마음이 드는 순간, 곧바로 인과(因果)가 생기게 되어 슬픔과 괴로움, 불만족이라는 과보(果報)가 남아 곧 다가올 것이니, 이는 결코 대승심이 아니다. 따라서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서 분별심을 항복 받아야 대승심(大乘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대승심(大乘心)을 놓치지 않고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는 곧, 수 억겁(億劫)에 걸쳐 좋고 싫은 분별심으로 쌓이고 쌓인 업장을 완전하게 멸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승이란 바로 이를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분별하지 말자고 결심한다 하여 분별심(分別心)의 업(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니, 업장(業障)이 완전히 소멸되어 분별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까지도 하지 않고 곧 바로 무분별심의 행동으로 옮겨지는 경지를 대승심(大乘心)이라 한다. 따라서 밖으로 온갖 망상과 경계의 유혹을 항복 받는다는 의미는, 어떤 상황과 인연을 만나더라도,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신구의(身口意-행동,말,생각) 삼업(三業)을 겪더라도,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의 고락시비(苦樂是非) 분별을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으며, 여여(如如)하고 평안한 마음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분별심(分別心)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이 된다. 수보리 존자가 바로 이 구절을 질문하는 까닭이니, 부처님은 이미 말없는 말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를 호념부촉(護念咐囑)하고 계신다. - 진우스님 -
1월 21일 [오늘의 명상] . .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염려하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당부하고 부촉하느니라.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면 마땅히 이러히 머물지 말며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 시킬지니라." "예, 세존이시여 자세히 듣고자 원하옵니다."}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 세존 원요욕문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금강경 강의} <제 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수보리가 법을 청함 3.)> [덧붙임] 세존(世尊)께서 수보리의 물음을 들으시고 수보리의 마음 씀씀이를 잘 파악하시니 부처님의 뜻과 같은지라 착하고 착하다고 칭찬을 하신 것이다. 그럼 무엇이 부처님의 뜻과 같다고 하시는 것일까? 이미 설명한대로,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닫게 하였고,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길이길이 보리심을 갖게 하였으며, 앞으로 오는 중생들에게 길이길이 잘 전승되도록 하신 것이다.” 라고 한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써 “과연 내가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고 부촉(咐囑)하느니라”, 고 하시어 수보리의 말을 완전히 인가(印可)하신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말씀하시되 “네가 물은 바에 있어서는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할 것이니, “너희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깨끗이 하여 자세히 들으라” 하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시었다. 다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을 불러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을 진댄 곧, 망령된 집착과 삿된 지견(知見)을 여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참된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니, 너희의 경계가 나의 경계와 둘이 아니요, 또 그렇다고 집착하지도 않을 터이니,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에 주(住) 머문다느니 항복 받는다느니 하는 생각조차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면 이미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것이생기면저것이생긴다)한다. 즉, 이와 반대되는 인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가 아닌 것이 생기게 되고, 또 머문다 하는 즉시 머물지 않는 것이 생기는 까닭에 머무는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머무는 것이 없으면 또한 항복 받을 것조차도 없을 것이니, 항복이라는 것도 없게 된다. 따라서 만약 머문다고 말할 것 같으면, 머무는 것이 없음에 머물러야 할지니, “마땅히 머물지 않는 것에 머무르라” 고 하신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누구든지 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곧 주인이면서 손님 노릇을 자처하는 꼴이 된다. 그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정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신 것이고, 이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고, 곧 금강삼매(金剛三昧) 라 하며, 즉,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한다. 이렇듯 주(住-머뭄)함이 없어야 진짜 주(住)함이 되는 것이고, 항복 받을 것이 없어야 진정 항복을 받는 것이 된다는 것을 일러 주심이다. 이를 제일의제법문(第一義諦法門) 이라 하는 것이니, 경머리에 “이러히 내가 들었다” 고 한 대목에서 최상승(最上乘)의 근기(根器)를 가진 사람은, ‘이러히’ 에서 벌써 제일구(第一句)를 깨닫게 되고, 다음 “이러히 머물고 이러히 항복받으라” 고 한 ‘이러히’ 에서는 대승근기(大乘根器)가 제일구(第一句)를 깨달을 것이며, 다음 “보살마하살은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 한 문장에서는 중근기(中根器)가 제일구(第一句) 를 깨달을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라’ 고 한 것 이외의 허다한 말을 덧붙이는 것은’ 달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이 달인 줄 알고 보는 격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이고,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 라고 하는 것이 진짜 달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이러한 뜻을 안 수보리 존자가 유연세존(唯然世尊)(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원요욕문(願樂欲聞-원하옵건데 즐겨듣고자 하옵니다) 라고 하신 것이고, ‘이러히’ 라고 하는 최상승의 제일의제법문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수보리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손가락만 보는 사람을 위해서 부처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진정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이다. - 진우스님 -
1월 22일 [오늘의 명상] . . 어제 “제 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수보리가 법을 청함 3.” 에 대한 설명에서 조금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 오늘은 해설을 좀더 덧붙이고, 다음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을 나가고자 한다. 금강경의 첫 경문에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인 즉, 여시(如是-이러히) 라고 한 대목을 그대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소유자라고 했다. 바로 수보리 존자와 같이 마음을 깨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히’ 라는 의미 속에는 이미 공(空)의 진리와 반야(般若) 지혜의 제일의제법문(第一義諦法門)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러히 머물고 이러히 항복받으라” 고 한 대목에서 이를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 다음으로 대승의 큰 근기(大乘根器)를 가진 사람이다. “머물지 않으면서 마음을 써라” 라고 하는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다음 “보살마하살은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 고 한 대목에서, 머물지 않으니, 항복 받을 대상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항복을 받는 것이라는 뜻을 여실히 잘 아는 사람을 중근기(中根器)라고도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못마땅한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또, 무슨 말을 하던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더라도 마음이 절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좋고 싫은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니 청정하다는 까닭이다. 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촉감을 느끼거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좋다 싫다는 분별(分別)에 걸리지 않는다.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냄새, 맛, 촉감,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를 육근(六根)에 마음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에 대한 욕심이 끊어지고,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끊어지고, 무엇을 가져야 하겠다는 욕심이 끊어지고, 이성에 대한 색욕이 끊어지고, 자존심이나 권력욕, 지배욕, 등의 명예욕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그 어느 하나라도 마음이 그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오욕락(五慾樂)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는 마음 가운데 업(業)이 하나도 없으니, 그 무엇에 다다르더라도 저절로 마음이 머물지 않는데 비해, 대승근기(大乘根器)는 마음이 머물지 않아야 마음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뜻을 알고 행하기 때문에,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저절로 행동이 나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즉, 대승근기(大乘根器)는 삼업(三業)과 육근(六根)과 오욕락(五慾樂)에 있어서 여기에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생각을 거쳐서 마음을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와는 백지장 같은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생각을 할 때의 삼업(三業)에 있어서, 마음을 끄달리지 않게 하려는 마음의 노력이 따르게 되니, 최상승근기(最上乘根器)의 저절로 완전하게 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겠다. 또 중근기(中根器)는, 삼업(三業)과 육근(六根)과 오욕락(五慾樂)에 빠지는 마음에 대해, 즉시 항복을 받아서 다시는 끄달리지 않게 하는 마음을 말한다. 만약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면, ‘내가 괜한 것에 대해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통해 욕심에 대한 항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또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욕심과 성냄,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잡생각의 탐진치(貪嗔痴-탐심,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을 즉시 멈추고, 그러한 마음에 대해 항복을 받는 것을 중근기(中根器)라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통해 말씀한 내용에 대해, 그 자체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실생활에 있어서 나의 문제로 보고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 또한 금강경 속의 1250인의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행동과 말과 생각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 강의를 듣는 동안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함께 해 나간다면 업장(業障) 소멸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진우스님 -
1월 23일 [오늘의 명상] . {금강경 강의}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 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 "무릇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으로서 알로 태어나는 것, 태로 태어나는 것, 습기로 태어나는 것, 화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들을 내가 모두 무여 열반에 들도록 제도하리라."}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佛告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덧붙임] 마하(摩訶)는 범어(산스크리트어)이다. 심체(心體) 즉, 마음의 전체 모습은, 광대(廣大)하기가 말로서 형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심체(心體)가 청정하면 쓰는 마음이 또한 자연히 광대(廣大)해 진다. 혹 ‘알로 생기는 것으로부터 혹 생각이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요,’ 까지는 태어나는 중생의 종류별 이름이다. 이를 크게 나누면 세가지의 세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욕계천(欲界天)이다. 사천왕천(四天王天), (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여섯 개 하늘이 포개져 있다. 그 다음 색계 18천(色界十八天)이 있는데, 1범중천(梵衆天), 2범보천(梵輔天), 3대범천(大梵天), 4소광천(少光天), 5무량광천(無量光天), 6광음천(光音天), 7소정천(少淨天), 8무량정천(無量淨天), 9 변정천(遍淨天), 10무운천(無雲天), 11복생천(福生天), 12광과천(廣果天), 13무상천(無想天), 14무번천(無煩天), 15무열천(無熱天), 16선견천(善見天), 17선현천(善現天), 18색구경천(色究竟天) 의 하늘이 포개져 있고, 다음은 무색계 4천(無色界四天)이다. 1공처천(空處天) 2식처천(識處天) 3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4비비상천(非非想天) 이 포개져 있다. 이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라 하고, 합하여 이십팔천(二十八天)이다. 또 이십팔천 속에도 가로와 세로로 무수한 하늘과 무수한 세계가 겹겹이 겹쳐져 있다. 곧 우주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세계의 중생을 종류별로 나누면, 태(胎) 란(卵) 습(濕) 화(化)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9류 중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인간 등의 동물들과 아수라(阿修羅)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사생(四生)의 중생이 있고, 모든 하늘신과 지옥중(地獄衆) 그리고 중음신(中陰身)들은 오직 화생(化生)으로 있으며, 귀신은 태생(胎生)과 화생(化生)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일부 하늘신과 사람, 지옥중과 귀신, 아수라(阿修羅), 축생(丑生), 중음신(中陰身) 등은 욕계(欲界)에 속해 있고,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무색계(無色界)에 속해 있다. 이와 같이 각각의 차별로 태어남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의 차이도 있을 것이니, 이는 각자의 성품(마음씀씀이)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성품 가운데서도 가지가지 구류중생(九類衆生)의 근성이 모두 베어 있다. 즉 나의 성품 가운데서도 9류 중생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숙망심(宿望心)은 태생(胎生)의 중생에서, 부허(浮虛)심은 난생(卵生), 감화(感化)심은 화생(化生), 침울(沈鬱)심은 습생(濕生), 주의주장과 집착심은 유색(有色) 중생에서,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있는 마음(외도에서 수행하고 있는 완공(頑空-공에집착) 등)은 無色 중생에서, 이상과 사상, 지장(智障-지혜의장애)은 유상(有想) 중생에서, 외도의 적정(寂靜)은 무상 중생에게서, 외도의 낙공(落空)은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에게서 나오는 마음이다.(차후에 자세히 설명할것임) 이와 같이 면밀하게 찾아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무량무수(無量無數)의 구류중생의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어지럽게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류중생의 어지러운 마음을 완전히 떠난 경지를 열반(涅槃)이라 하는데, 이를 불생불멸의 구경무위지(究竟無爲地)라 하고, 청정하여 흔들림이 없는 것이 무위(無爲)요, 필경에는 반드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을 구경(究竟)이라 한다. 이러한 구류중생(九類衆生)이 지니고 있는 마음이 각각의 사람 마음속에 들어 있는데, 실제로 오만가지 즐겁고 괴로운 감정이 나타나는 그 속에는, 구류중생의 마음 모습이 모두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마음을 쓰는데 있어서 구류중생의 마음 가운데 가장 비슷한 마음을 많이 쓰는 사람이, 다음 세상에는 구류중생 가운데 한 몸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계속.. - 진우스님 -
1월 24일 [오늘의 명상] . . 이 소절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대목이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셨는데, 왜 갑자기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이가 없다’ 라고 하신 것일까? . {금강경 강의}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 2.) .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도록 제도하리라. 이렇게 한량 없고 셀 수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도 사실은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다" 하라." .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 . [덧붙임] 이 대목을 설명하기 이전에 어제의 문장을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일체중생의 종류에서 욕계육천(欲界六天)에는 하늘, 사람, 아수라, 귀신, 축생(짐승) 지옥, 중음신 등이 있는데, 모두가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으로 태어난다. 즉, 모든 중생은 물리적인 태란습화(胎卵濕化)의 모습을 가진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탯줄로 태어나고, 알로 태어나고, 습한 몸으로 태어나고, 저절로 화하여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음 상태인 성품으로 보면 숙망심(宿望心)을 가진 중생은 태생(胎生)으로, 부허(浮虛)심은 난생(卵生)으로, 감화(感化)심은 화생(化生)으로, 침울(沈鬱)심은 습생(濕生)으로 태어난다. 또 색계천(色界天) 이상에는 천신(天神), 신선(神仙), 천마(天魔), 허공신(虛空神) 등이 있는데,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 등 다섯종류의 하늘신이 있다. 하늘 신들이라 해도 주의주장과 집착심이 있으면 유색(有色)의 하늘신으로 태어나고,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공의 도리를 통달했다 하더라도 완공(頑空) 즉, 공에 집착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으면, 무색(無色)의 하늘신으로 태어난다, 이상과 사상, 지장(智障-지혜의장애)의 생각이 많은 중생은 유상(有想)의 하늘신으로 태어나고, 외도의 적정(寂靜) 즉, 고요한 것만 찾는 하늘신은 무상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외도의 낙공(落空) 즉, 이것도 공이요, 저것도 공이요, 이 생각도 공이요, 저 생각도 공이라는 공에만 떨어진 생각을 가진 하늘신은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으로 태어나는데, 이를 모두 합쳐 구류중생이라 한다. 그러나 9류중생이 아무리 많다 해도 三千大千世界 안에 있고, 삼천대천세계가 아무리 넓고 크다 해도 허공안에 있는 것이며, 허공이 아무리 한 없다 해도 마음속에서는 큰 대양(大洋)의 바다에 튀는 한방울의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이 나의 광대한 마음속에서는 괘의(掛意)할 것이 못되는 바,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에 있는 중생 또한 대양의 큰 바다의 한 방울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심체(心體) 즉 광대한 마음을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9류중생이며 삼천대천세계며, 한량없는 허공인들 항복 받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는 구류중생의 성품들로 치면, 마음으로부터 출가하기 이전에는 희(喜) 로(怒) 애(哀) 락(樂) 우(憂) 수(愁) 사(思) 려(慮) 등의 팔만사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가득 차 있으나, 이는 부(浮), 침(沈), 산(散), 난(亂)의 네가지 종류의 중생이고, 이러한 성질의 업(業)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죽어서 부(浮-마음이 뜬)는 난생(卵生)으로, 침(沈-마음이 가라앉음)은 태생(胎生)으로, 산(散-마음이 흐트러짐)은 습생(濕生)으로 난(亂-마음이 어지러움)은 화생(化生)으로 태어나게 된다. 심출가(心出家-마음이출가) 이후에는, 智解 분별(分別) 寂靜 주착(住着) 법만(法慢) 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출가 중생들이 많으나, 환각(幻覺), 착각(錯覺), 완공(頑空), 지장(智障), 탐적(貪寂), 무기(無記) 등의 마음으로 다섯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아홉가지 自心중생이 삼천대천세계에 널려져 있다 하더라도, 한 마음 가운데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또 한 마음이 아무리 크고 광대하다 하더라도, 본래가 허망하여 나라고 할 곳이 없는 것이므로, 항상이라 할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한 마음도 한 마음이라 할 것이 없는 것이니, 하물며 이 속에서 어지러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번뇌망상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하니 천지허공이 어디에 있으며, 구류중생이 어디메 있으며, 또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어떠 하단 말인가. 말하자면 번뇌와 깨달음, 선심과 악심, 부처와 중생이 모두가 마가본심(摩訶本心)에서는 하잘 것 없는 중생이 되어 이 같은 생각을 깨닫는 마음조차도 중생의 마음인 것이다. 이같이 외계(外界)의 진세(塵世) 9류중생이나, 내계(內界)의 자심(自心) 구류중생이나, 또는 심량(心量)이 광대하다고 하는 마음이나, 대각(大覺), 정각(正覺)하는 것까지도 다 남음이 없이 하잘 것 없는 열반에 모두 집어넣어 완전히 소멸하여 없애고 제도하여 건넬 것을 말씀하심이다. - 진우스님 -
1월 25일 [오늘의 명상] . 올 한해는 부처님 품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정법제자가 되어 모든 장애와 번뇌가 사라지는 경자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금강경 강의}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 3.) . 번뇌와 깨달음, 선심(善心)과 악심(惡心), 부처와 중생이 모두가 마하본심(摩訶本心)에서는 하잘것없는 중생에 지나지 않으니, 이 같은 생각을 깨닫는 마음조차도 중생의 마음이라고 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면밀히 생각해보면 마하본심(摩訶本心)이라는 것은 크고 광대한 마음이라는 뜻으로서,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조차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으니, 하등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씀이다. 즉, 마음을 우주에 비한다면 지구가 아무리 크다해도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다볼 때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마하본심(摩訶本心)이란 우주보다도 더 크고 광대한 것이니만큼, 본래의 크고 넓은 열반의 마음 즉, 마하본심으로 돌아간다면, 내심(內心)중생이니 외계(外界)중생이니 구별할 필요도 없고 깨달음을 이루고 못이루고 하는 것조차도 부질 없다는 뜻이다. 성품의 바다 즉, 마하본심에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환(幻)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 멀리 우주 넘어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별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굳이 애 태우면서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별들이 생겨나든 사라져가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다. 마음안에 있는 내계(內界)중생을 인(因)이라 한다면, 마음 밖의 외계중생은 과(果)에 해당한다. 마음안에 9류중생이 있으면 마음밖에 9류중생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즉, 내 마음이 9류중생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마음밖의 세계에도 9류중생들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태란습화(胎卵濕化)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 의 9류중생이 모두 내 마음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9류중생의 성품들은 곧 희로애락(喜怒哀樂)우(憂)수(愁)사(思)려(慮) 즉,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나의 마음속에도 들어 있다는 뜻이니, 그러한 나의 생각과 감정 가운데 어느것에 더 집착하느냐에 따라 9류중생 가운데 하나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욕심이 많으면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 가운데 육욕천(六欲天)과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날 것이고, 생각과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크기에 따라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중에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마음안에 있는 내계중생의 마음을 제도하면 실제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마음밖에 있는 외계의 중생들도 모두 제도가 되니, 이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고 정토(淨土)라고 한다. 실상(實相)적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마음중생마저 멸도(滅度)한다면 외계중생은 따라서 열반이 되는 것이다. 원각경에 이르기를 “한 마음이 청정하면 많은 마음이 청정해지고 내지 시방세계가 청정하다”고 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부처면 일체법계가 모두 부처이다. 그렇다면 안과 밖으로 무량(無量) 무수(無數) 무변(無邊)중생을 멸도하였을 지라도, 만일 한 중생이라도 멸도함이 있거나 멸도한 생각이 있다면, 이 멸도한 생각이 다시 중생이 되어 실상(實相)에서는 하나 꺼지고 다른 하나가 일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는 샘이 된다. 그러므로 한 중생도 멸도한 생각이 없이 일체중생을 멸도하여야 하느니, 그런 다음에야 남음이 없는 열반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반야법(般若法)으로서 일체중생을 멸도(滅度)한 것이 된다. 그래서 본 경에 무량 무수 무변중생을 제도했지만, 실상에서는 ‘한낱 중생도 제도를 얻은 자가 없다’ 고 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본래 마음은 마하본심(摩訶本心)으로서 무량 무수 무변하여 한량이 없으므로, 아무리 큰 생각이나 감정도 모두 한낱 대양바다의 한방울 물방울에 지나지 않으니, 잠깐 생겨났다 사라지는 환(幻)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이라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집착하거나 번뇌로울 것이 하등에 없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이 있으므로, 이를 멸도하려면 한 생각마져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 왜냐하면 깨닫는다느니, 멸도를 한다느니, 제도가 된다느니, 되었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이 다시 원인과 씨앗이 되어 인과(因果)를 일으키게 되므로, 다시 또 중생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니, 궁극에는 함없는 함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계속… - 진우스님 -
1월 26일 [오늘의 명상] .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라.} .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 {금강경 강의}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 4.) [붙임]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즉, 사상을 지니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사상(四相)이란 과연 무엇이며, 왜 사상을 버리지 못하면 보살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일까? 우선 상(相)이라 함은 마음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잘난체 아는체 으스대는 소위 자존심의 행태를 말함이니, 이는 생각을 하거나, 업력(業力)과 습력(習力) 즉, 본능적으로 나오는 습성이다. 사상(四相)이란 나의 내면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네 가지의 욕망 즉, 집착을 의미한다. 이는 서로 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나누었지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살아가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네 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첫째, 아상(我相)이란 나의 몸을 ‘나’(ego)라고 생각하는 관념이다. 사상의 근본 바탕이 된다. 몸이 ‘나’이므로, 몸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몸의 욕망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내가 있으므로 너가 있고 또 모든 것이 있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그러함에 이기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아상(我相)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고, 아상의 크기에 의해 각자의 생각이나 성품, 그리고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아상(我相)은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된다. 내가 생각한다고 원한다고 하여 모든 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 즉, 나를 나라고 하여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즉, 나에게 닥치는 모든 운명에 대해 아무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운명조차 비켜간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진이야말로 운명을 극복하는 최고 지혜의 소유자이다. 둘째, 인상(人相)이란, 나는 너와 따로 분리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고, 너를 비롯하여 나 밖의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인식의 대상이다. 상대적인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본래 마가본심(摩訶本心)의 자성(自性)이 나와 너, 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가 있다는 증거이고, 만약 내가 없다면 내가보는 세계도 없다고 본다. 나와 세계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서 하나의 몸이다. 다만, 각각의 형상이 모두 다를 뿐이다. 연기적(緣起的)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와 우주는 삼라만상(森羅萬象)으로서 인드라 망(網)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몸일 수 밖에 없다. 나의 몸은 우주 삼라만상이 인드라 망으로 연결되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연기적 입장에 있으므로, 나의 의지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주체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연기적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고 받는 하나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된다. 따라서 나의 주체는 내 몸이 아니라 불만과 괴로움이 없는 순수한 의식이고, 나 밖의 세상 모든 것 또한 순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므로 그 속에서 서로 한 몸으로 용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몸을 나라고 인식하면서 나와 너로 분리하게 된 것이니, 이 같은 분별과 차별된 생각이 온 몸과 마음에 똘똘 뭉쳐져 있으므로 서로 시비고락(是非苦樂)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은 나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매우 이기적인 인식을 하는 경향까지 있으니,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계속~~ - 진우스님 -
1월 27일 [오늘의 명상] . . {금강경 강의} 제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대승을 바르게 따라서 5.) . [붙임] . 셋째, 중생상(衆生相) 이란, 육체와 영혼이 함께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말한다. 부처님은 각각의 모든 중생이 평등하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고 하신 것은, 각각의 중생이 살아가는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자신이 짓는 업(業)은 각기 다르면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추구하는 만큼, 그 인과(因果)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슬픔, 불행한 마음의 무게가 똑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 그리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업(業)을 짓는 분별(分別)의 마음을 완전히 없애기만 한다면, 곧 부처가 되어 근심 걱정, 번뇌 망상,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모든 고통이 사라져서 생사(生死)가 없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중생이 각각의 차별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각자가 지은 업(業) 때문이다. 각자 스스로가 지은 업(業)의 크기에 따라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중생상(衆生相)은 아상(我相)과 같이 자기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는 관념(觀念)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이 없는 순수한 의식만이 진정한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고락시비(苦樂是非)의 분별된 의식이 곧 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상(衆生相)이란 우리 모두를 일컫는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없는 영원한 자성(自性)을 찾는 노력을 하는 대신, 살아가는 속에서 기분이라고 하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찾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나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을 일삼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업성(業性)에만 도취되어 있으니, 계속적으로 인과(因果)가 나타나서 괴로움과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음은 물론, 영원히 육도(六道-천상,인간,수라,지옥,아귀,축생)를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을 믿는다 해도 진리를 찾을 생각은 멀리하고, 기복(祈福)에만 매달리는 우수운 형태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중생상(衆生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나와 별개인 상대로 볼 것이 아니라, 나의 업연(業緣)에 의해 나타난 나의 업상(業相)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중생을 보고 좋고 싫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그 중생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나의 고락업(苦樂業)을 없애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만약 다른 중생을 나와 경쟁하거나, 적으로 보거나, 좋고 싫은 분별(分別)의 대상으로 보는 업습(業習)을 절대적으로 고쳐야 한다. 나의 고락업(苦樂業)이 다하게 되면 다른 중생들이 모두 중생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넷째, 수자상(壽者相) 이란, 곧 살아가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내가 오래오래 살아야만 한다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귀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몸을 소중히 여기며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화가 나고 괴로워지게 된다. 이러한 수자상(壽者相)을 갖게 되는 것은 인과(因果)를 모르는 탓이다. 다른 존재들 보다 우월하려는 생각 즉, 수자상을 갖는 것은 자기 스스로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채워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을 만끽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무게만큼의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과보(果報)를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수자상(苦樂業)을 비우기가 가장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각각의 상은 내가 다른 것으로부터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결코 독립될 수가 없음이니, 그래서 남보다 더욱 존귀하다거나 뛰어나게 좋은 것을 이룰 수가 없음이다. 더 좋은 것을 얻으려 하고 더 많은 욕심을 부릴수록 그에 따른 인과(因果)가 생겨서 얻은 만큼의 과보(果報)로 인하여 잃고 사라지는 고통과 괴로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니, 사상(四相)이란 참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비워야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져서 부처를 이룸이니, 근심 걱정, 우비고뇌(憂悲苦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상(四相)을 비우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음이니, 그 어떤 것보다 사상(四相)을 비우는데 총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곧 사상(四相)을 비우는 실천행(實踐行)이다. - 진우스님 -
1월 28일 [오늘의 명상] . {금강경 강의} 제 4.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1.) . {또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법에 머무른 바없이 보시해야 행할지니,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빛과 소리, 냄새, 맛, 접촉, 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러히 보시해야 하느니 모양에 머물지 말 것이니라.} .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 . [붙임] ‘법(法)에 머무는 바 없이’ 라고 할 때의 법(法)이라 함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씀하심이다.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가지의 바라밀이다. 첫째 지혜(智慧)란, 일체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장애를 벗어나는 법을 잘 아는 마음이다. 선정(禪定)이란, 나의 본래 마음의 자성(自性)은 걱정 근심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없었는데, 수 억겁(億劫)에 걸쳐서 욕심을 부린 탓에 그 인과로 인하여 괴로움과 고통이 끊이질 않아 왔으니, 이제 업(業)으로 똘똘 뭉쳐진 번뇌를 고요히 쉬게 함으로서, 점차적으로 숙업(宿業-오래된업)을 멸하여 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진(精進)이란, 하루 한시도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꾸준히 선정(禪定)을 닦기 위해 기도 염불 참선 보시 인욕 등을 행하는 실천이다. 인욕(忍辱)은 욕먹음에 원한의 마음을 갖지 않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억울하고 분하고 성내지 아니함을 이름함이다. 사바세계는 참아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참지 않으면 인과(因果)를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천상과 지옥을 계속 오고 갈 뿐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을 참고 또 참는 것이 인욕행(忍辱行)의 핵심이다. 지계(持戒)라 함은, 몸으로 짓고 말로 짓고 생각으로 짓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못된 버릇의 업(業)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니, 곧 욕심과 탐심, 욕망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는 인과(因果)가 붙으므로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아야 할 것이니, 계를 지킨다는 것은 곧 인과(因果)를 낳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음이다. 보시(布施)란, 몸과 마음에 있는 일체의 것을 희사하여 곧,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을 이름함이다. 무슨 말이냐? 내 것이라는 아상(我相)을 버리기 위함이다. 아상(我相)은 인과(因果)를 낳고, 인과는 고통을 수반하므로 즉, 보시는 결국 나의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이 된다. 때문에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가장 우선으로 치는 것이다. 색(色)에 머물지 않는다 함에서부터, 빛과 소리, 냄새와 맛, 닿음(접촉)과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6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니, 6진 또는 6경이라 함은 6근의 상대되는 세상을 말한다. 첫째 색진(色塵)은 일체의 색과 일체의 형상 모양이니, 5방색과 방(方), 원(圓), 장(長), 단(短)을 이름함이다. 둘째, 성진(聲塵)은, 귀에 들리는 일체의 소리를 이름이니, 오음육율(五音六律)과 희로애락의 소리와, 공포 등을 말한다. 그리고 셋째, 향진(香塵)은 코로 맡아지는 일체의 냄새를 말함이다. 넷째, 미진(味塵)은 혀에 알리는 일체의 맛이니, 짜고 달고 시고 쓰고 맵고 등의 맛을 의미한다. 다섯째, 촉진(觸塵)은, 몸에 부딪치고 닿는 일체의 촉감을 말하는데, 곧 부드럽고 깔깔하고 연하고 단단하고 차고 덥고 등을 말한다. 여섯째, 법진(法塵)은 위의 다섯가지 5진을 상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좋고 싫은 분별(分別)을 이름 함이니, 일체의 선악법(善惡法)을 지어내게 된다. 이로써 지금부터 부처님께서는 제 3단 법문을 시작하시는데, 이 금강경을 설하시기 이전에도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것이 곧 6바라밀법이니, 먼저 6바라밀에 대해 사전 지식이 필요하여 설명하였다. - 진우스님 -
1월 29일 [오늘의 명상] . {금강경 강의} 제 4.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2.) . 어제의 설명에 이어~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수보리(須菩提)를 불러 바라밀법(波羅蜜法)에 머물지 말고 보시(布施)를 하라 말씀하신 것일까?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으로는 일체중생을 멸도(滅度)함을 말씀하셨고, 이어 자취를 없게 하기 위하여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머무름이 있으면 보살(菩薩)이 아니라고 하셨다. 즉, 한점의 괴로움과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을 말씀하신 것이니, 그 법이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또다시 꺼내시어 대중들이 궁금해 하는 점을 밝히려 하셨다. 대중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넣어 멸도(滅度)하되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말씀하시는 것에 또 머무름이 생기는 것이 되므로, 머무르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과 배치되는 않는가 하는 점이다. 왜 그럴까?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머리에 있는 보시(布施)로만 보더라도, 주고 받는 사람이 있어야 보시(布施)가 되는 것이니, 나와 남이 없을 수 없는 것이고, 나와 남이 있다는 것은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벌써 생겨버리게 되므로, 사상(四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다음 지계(持戒)와 인욕(忍辱), 정진(精進)과 선정(禪定), 지혜(智慧)가 모두 그러할지니, 이를테면 계(戒)와 계(戒)를 가지는 자가 있을 것이고, 인욕과 인욕자가 있을 것이며, 정진과 정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선정과 선정자가 있을 것이며, 지혜와 지혜자가 있을 것이니, 곧 상대적이요, 상대가 있으면 사상(四相)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을 빼놓고는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행한다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말이 되는 것이니, 전에 말씀하신 육바라밀과 이 경에서 사상(四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부처님께서는 대중의 이러한 의심을 이미 아시고, 이 뜻을 밝히시려고 수보리를 불러서 즉시 말씀하신 것이니, 즉, “보살이라면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에도 마땅히 머무는 바없이 보시(布施)를 행할 것이니”, 라고 하시고, 다음 말씀으로 육바라밀법에도 머무름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머무름 없이 행하는 보시(布施)가 되는가? 먼저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아상(我相)은 본디부터 잘못된 생각으로서,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벌써 남이 생기는 것이고, 남이 생긴다는 것은 곧, 분별(分別)하려는 생각을 낳게 되고, 이어 육근(六根-안이비설신의)에 집착하게 되는 고로, 육근(六根)에 집착하게 되면 일체 모두가 나와 남으로 나뉘게 되니, 나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온갖 욕심을 부리게 될 수밖에 없음이다. 육근(六根)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에 보이는 색(色-물질,대상)에 머물지 말아야 함이니, 색(色)에 머물지 않게 되면 곱고 추한 것이 없어지고, 친하고 멀어지는 것이 없어지며, 따라서 나와 남이 없어지게 된다. 이어서 귀에도 코에도 혀에도 몸에도 뜻에도 머물지 않게 된다면, 결코 이것과 저것이 없어지는 동시에, 좋고 싫은 것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게 되면,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어지게 됨은 물론, 곧 사상(四相)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말지니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실에 있어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물론 어렵고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변하고 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니,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우선 뼈져리게 체득하여야 한다. 공(空)을 터득해야 한다. 다음으로 인과(因果)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얻은 것만큼 잃게 되고 사라진다는 것.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만큼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과보(果報)를 받는다는 인과법(因果法)을 철저히 알고 믿음으로서, 좋아하는 욕심을 없애고, 매사에 초연한 마음으로 항상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벗어나야 주어도 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주는 물건에 머물지 않고, 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시비가 생기지 않고, 질투와 투쟁심이 생기지 않고,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으므로 매사에 있어서 거친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계속 ~~ - 진우스님 -
1월 30일 [오늘의 명상] . .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 {금강경 강의} 제 4.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3.) . . [붙임] 세존(世尊)께서 수보리에게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행하되, 육바라밀법에 머물지 말고 행하라 하셨다.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의 첫머리에 나오는 보시만을 두고 말하더라도, 보시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머문다면, 곧바로 보시하는 이와 보시를 받는 이의 두 분별이 생기는 것이므로, 그 즉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나타나게 된다. 또 보시를 할 때 보시물에 마음이 머무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한다. 또 보시를 하는 것에 대해 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이는 곧 수자상(壽者相)이 된다. 때문에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마음이 머무른다면 설사 복을 받는다 하더라도 사상(四相)에 주착(住着-집착하여머뭄)하는 복이 될 뿐이다. 이러한 보시는 범부의 보시에 지나지 않으니 즉, 유위(有爲-한계가있음)의 보시가 되어 복덕을 받는 것 또한 유위(有爲)의 복에 떨어지게 된다. 이를 즉,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인데, 이러한 복은 아무리 큰 복을 짓는다 하더라도 필경에는 새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새지 않는 큰 법을 닦는 보살의 입장에서는 할 바가 못된다. 보살의 보시는 마음이 허공 같아서 청정한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지니고 있을 지니, 육근육진(六根六塵)에 머뭄이 없고, 육진에 머물지 않음으로 보시를 하는 행위도 청정하여 보시를 하는 이나, 보시를 받는 이가 따로 있지 않으니, 허공(虛空) 같은 보시가 된다. 허공이 우리에게 찰나를 쉬지 않고 공기를 보시하는 것과 같이, 보시하는 상(相)이 없으며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과 같다. 즉, 주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가 따로 없다. 이것이 바로 머뭄이 없는 보시이고 다함이 없는 보시이며, 일어남이 없는 보시일 지니 진정한 보살의 보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머뭄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의 복덕도 허공과 같이 아무런 제한이 없이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이요, 허공과 같이 무너짐이 없는 복덕이 될지니, 이를 무루법(無漏法)이라 한다. 또한 허공과 같이 항상 보시하면서도 보시가 아닌 것이 되니, 이를 함이 없는 법 즉, 무위법(無爲法)이라 한다. 이것이 곧 색(色-대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소리, 향기, 맛, 촉감, 기억 등,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는 보시요, 사상(四相)을 떠난 보시이고,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에 머물지 않는 보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마땅히 이러히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말지니라” 고 끝을 맺으신 것이니, 이어서 “이 어찌한 연고이냐?” 고 물으신 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광대한 복덕을 밝혀 주시려 하심이다. 보살의 보시(布施)는 상(相)을 여읜 보시며, 머뭄이 없는 보시이며, 공(空)한 보시이니, 과보(果報)도 공(空)할까 염려하는 대중을 위하여 주는 이(施者)와 받는 이(受者)가 공(空)했으므로 보시와 복덕이 공(空)한 단멸법(斷滅法)으로 알까 염려하심에서다. 즉, “보살은 마음이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한 것을, “어찌한 연고인줄 아느냐?” 다시 물으신 것은, 만약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할 때, 상(相)에 머물지 않는 인(因-씨앗)을 진정으로 허공같이 심었다고 한다면, 그 받는 복덕 또한 허공같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복덕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 함이다. 보시(布施) 즉, 남에게 내 것을 준다고 할 때, 소위 생색을 내는 것이 보통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緣起法)에 따르면, 아무리 들고 뛰어봐야 결국에는 득실(得失)과 가감(加減)이 없을진댄, 바람이라는 욕심이 불어서 바다의 파도가 출렁이는 것과 같을 뿐이다. 욕심의 바람을 그치게만 한다면 잔잔한 바다 와도 같이 평온한 마음이 될 것이다. 계속 ~~ - 진우스님 -
1월 31일 [오늘의 명상] . . “수보리야,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의 네 간방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 . {금강경 강의} 제 4.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4.) . . [붙임] 세존께서는 상(相)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布施)의 복덕(福德)을 그냥 그 복덕이 불가사량(不可思量) 이라고만 해 두시고는 부정하시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복덕은 단순히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는 말로도 헤아릴 수 없는 한도 끝도 없는 까닭이다. 듣는 대중이 자기가 아는 정도에서만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고 짐작할 뿐,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고 하는 깊은 뜻을 모를까 봐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수보리를 불러 물으시고, 수보리가 대답하게 하는 형식을 취하시어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布施)의 무량한 복덕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 주시려 말씀을 꺼내시되,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 동방(東方) 허공(虛空)에 방(方), 원(圓), 장(長), 단(短)과 크고 작은 색깔과 모양을 가히 생각하여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고 말씀하심이다. 수보리는 세존께서 물으신 말씀을 듣고 속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동방(東方) 허공(虛空)을 헤아려보니 어떠한 것이 동방 인줄부터 몰랐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동방은 남쪽에서 보면 북방이요, 북쪽에서 보면 남방이요, 동쪽에서 보면 서방이요, 서쪽에서 보면 동방이 된다. 사실 동방이라는 것도 없고 사방이라는 것도 없고 그저 허공일 뿐이다. 또 위에서 보면 하방(下方)이요, 아래서 보면 상방(上方)이니, 동방부터가 정법(正法)이 없어서 제한될 수 없을 뿐더러, 제한이 된다 하더라도 방(方), 원(圓), 장(長), 단(短)을 무슨 수로 헤아릴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부처님께서 물으신 것에 대해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임] 부처님께서 머무름 없는 보시 즉,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의 복덕이라고 말씀 하시고, 동방허공에 비유하신 것에 대해 좀더 현대적인 시각으로 해석해 보자. 우선 복덕(福德)의 정의부터 해석하자면, 보통 복덕을 생각하는 것은, 복(福)을 지으면 나에게 이익이 크게 되돌아 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보시를 하면 보시를 한 만큼은 물론, 보시한 것보다 훨씬 큰 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생각한다. 만약 이런 보시(布施)를 생각한 것이라면,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익이 생기는 즉시 그 인과(因果)로 말미암아 손해라고 하는 과보(果報)가 뒤따르게 됨이니, 결코 이익이 이익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손해의 과보(果報)를 통해 불편해지고 괴로워지는 마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시(布施)를 할 때, 마음이 머물지 않게 되면 인과(因果)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애초에 그 흔적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므로, 원인에 의한 결과도 없다. 그러니 이익에 따른 손해라는 인과(因果)가 생기지 않게 되니, 결국 그 어디에도 손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나, 괴로운 마음의 과보(果報)가 생기지 않게 된다. 그러함에 흔적 없는 것에 대해 무엇을 측정할 것이며,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한량(限量)이 없고,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흔적 조차 없어서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이것이 진정한 복덕이요, 그래서 생각을 할 수 없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 한 것이다. 한마디로 보시(布施)를 한다는 생각이 머무른다면 그 즉시 인과(因果)가 생겨서 때가 되면 불편한 마음의 한계를 일으키게 되니, 괴로운 마음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고,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인과(因果)도 없고 과보(果報)고 없고 한량(限量)도 없고, 크고 작은 분별(分別)도 없고, 잴 수도 없으므로, 이를 진정한 복덕(福德)이라 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 한 것이다. 계속~~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