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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해설 (에스겔)
묵상을 위한 에스겔 개관
1.에스겔 – 읽기 어려운 책?
에스겔은 여러 면에서 읽기 어려운 책으로, 오늘의 독자들이 에스겔 앞에서 거북스러움을 느끼거나 당혹감에 사로잡히거나 더 나아가 거부감을 내보이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에스겔의 언어와 표현은 매우 거칠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노골적이며 자극적인 그의 성적 묘사(16,20,23장)는 구약성서에서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다. 특히 그의 환상체험과 표적 행위는 생경(生硬)함과 기이함을 넘어 비정상적 처신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다른 예언자들도 환상을 보고 표적을 행했지만 에스겔처럼 그렇게 기이하거나 파격적이지 않았다. 에스겔에서 만나게 되는 경험과 행위의 돌충성과 기이성(奇異性) 앞에서 독자들이 당혹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언과 에스겔의 형편에 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우리는 에스겔의 경험과 행동과 언어가 기이하지만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의 메시지가 처음 청자였던 바벨론 유배민들에게도 얼마간 자극적이고 도발적이겠지만 분명 에스겔이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어려운 작업이기는 하지만, 말씀이 선포됐던 주전 6세기 전후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에스겔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에스겔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행동의 파격(파격)은 “제사장 에스겔이 부정한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압도당했다”는 역사적-심리적 배경으로부터 얼마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으 부정한 땅에서 예루살렘의 죄악과 멸망을 지켜보며 절망했을 에스겔에게 기존의 신학적 언어는 그의 감정을 제대로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도발적인 방식으로 조상의 신학적 전통에 맞서 하나님 백성의 멸망과 유배를 선포했다. 또 환상을 통해 알게 된 예루살렘 제의의 완전한 부패는 제사장 집안에서 자라난 에스겔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기이하고도 도발적인 언어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타협 없이 고발했다. 기존의 틀과 전통을 벗어나는 파격적인 언어와 행동은 뼛속까지 썩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에스겔의 강력한 무기였다.
2.전체적 소개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1:3), 주전597년의 제1차 유배 때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바벨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Nippur) 부근에 있는, 유브라데 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인 그발 강 근처의 델아빕에 정착했다(3:15).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묻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 왔던 것을 보아(8;1; 14:1; 20:1) 에스겔 집안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것 같다. 에스겔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24:14 이하). 에스겔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건하게 해주시옵소서!” 또는 “하나님께서는 강하시다”란 뜻이다.
에스겔은 주전 593년에 그발 강가에서 환상 중에 예언자로 부름 받아(1:1-3:15) 주전 571년까지(29:17) 20년 넘게 유배민 가운데 활동했다 주전 571년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에스겔 1;1의 ‘서른째 해’가 에스겔의 나이를 가리킨다면, 에스겔은 이미 유배 전에 예루살렘 성전과 그 전통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에스겔으 유배민에게 인정받는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점령당하기까지 주로 심판 예언자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2:10)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그 이후에 ‘파수꾼 예언자’로 (3:17 이하; 33;1 이하 호9:8 합2:1)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에스겔은 주어진 말씀의 전달자에 머물지 않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의 역할을 담당했다(4;3; 12:6,11; 24:24). 에스겔의 삶 전체, 그의 존재가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예언자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 의지에 그대로 흡수됐다. 한 선로 위를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기차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절박한 시기에 말씀을 선포했던 에스겔에게 개인적 삶은 전혀 허락될 수 없었다.
3.배경과 기록목적
개혁 군주였던 요시야 왕(주전639-609년)의 뒤를 이어 보좌에 오른 그의 아들 여호야김(주전609-598년)은 아버지와 너무 달랐다. 애굽의 바로 느고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그는 폭력과 불법으로 유다를 통치했다(렘22:13-19). 그는 무모하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다가 예루살렘이 포워당하는 위기를 초래했다. 바벨론의 침공 직후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왕이 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신속하게 항복했기에 멸망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다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주전597년에 여호야김을 비롯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유력자들, 수공업자들이 대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다(왕하24:13-16).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에스겔의 집안도 이때 유배를 당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주전597-587년)와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에스겔이 유배지에서 임박한 멸망을 선포하며 긴급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선포했지만 이미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자들의 귀에는 마치 이방인의 언어와 같았다. 시드기야가 애굽의 조종을 받는 자들의 압력에 굴복해 바벨론에 반기를 든 후,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다. 주전587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성전이 화염에 휩싸였다. 하나님 백성이 정치적으로 죽음을 맞았다.
하나님 백성의 위기와 멸망은 겉보기와 달리, 적어도 예언자들의 눈에는 신학적 사건이었다. 다윗 왕조 400년 동안 형성된 예루살렘 성전신학은 예루살렘의 불가침(不可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만들어내었다. 영원한 통치권이 보장된 다윗 왕조에 관한 신학, 여호와의 거주지 또는 현현 장소로서의 이스라엘의 성전신학,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신학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안전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을 조장했다. 전통과 교리화된 신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 주전597년의 예루살렘 항복과 제1차 유배는 파국의 시작이었지만, 종교지도자들이나 백성에게는 감춰진 실체를 볼 수 있는 신학적 시각이나 들을 귀가 없었다. 첫 유배로부터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읽을 수 없었던 유다와 예루살렘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에 떨어졌다.
위기와 멸망의 궁극적 성격이 신학적이었다면, 멸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도 비교적 분명했다면, 마찬가지로 에스겔이 선포한 대로 하나님 백성이 다시 회복될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멸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에스겔에서 과거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찾아야 한다. 멸망으로 오도한 조상의 죄악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순종을 원하시는지를 바로 깨닫고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4.구조
전체적으로 에스겔은 다른 예언서들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다양한 방식으로 각 단락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먼저 주제와 내용에 따라 크게 1-24장(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 25-32장(열방의 신탁), 33-48장(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와 셋째 단락의 연결은 두 번 등장하는 소명기사에 의해서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의 구조에 따르면 주전 593년부터 587년까지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부름 받을 때 여호와의 명에 따라 먹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2:8-3:3)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였고,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후에는 파수꾼 예언자였다. 1:1-3:15의 첫 소명기사에서 에스겔이 전체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자로 부름받는다면, 두 번째 부름인 33:1-20에서는 주로 유배미들을 상대로 회개를 외치는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받는다. 33:1-20이 33:21-22 앞에 놓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신다. 33:1 이하의 ‘파수꾼으로의 부름’은 첫 번째 부름 바로 다음에 놓인 3:16-21에서 미리 예비된다
에스겔의 전체 구조에 통일성을 제공해주는 연대기적 정보는 다른 예언자들과 비교해 볼 때 주목할 만하다. 에스겔은 말씀이 주어진 시점을 날짜까지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는데, 학개와 스가랴의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예가 없다. 적어도 열네 개의 연대기적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데(1:12; 8:1; 20:1; 26:1; 29:1,17; 30:20; 31:1,17; 33:21; 40:1), 26:1; 29:17을 제외하고는 시간적 순서를 따른다. 연대기적 자료들은 에스겔에 전기적, 자서전적 성격을 부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과 말씀이 주어지는 시대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5.핵심 메시지와 현대적 적용
에스겔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그분의 영광을 선포했다. 그분의 영광 앞에서는 예언자도 ‘인자’에 불과하다. 하늘을 열고 계시하시는 그분의 영광은 지상의 어떤 권력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 바벨론의 권력도 그분의 영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던 생물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운반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상의 통치자는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지, 바벨론의 왕이나 마르둑이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다른 권력은 없다.
영광의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분이기도 하다. 에스겔은 구원의 이데롤로기로 무장한 성전신학에 맞서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주장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사실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성전과 하나님은 일치될 수 없다. 성전과 제사가 하나님께 의존적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성전과 제사로부터 독립된 분이시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의지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할 때 그분은 자기 성전을 버리실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머무실 수 있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리적 주장도 하나님을 강제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라면 그분만 섬기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피택은 분명 특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책임이 수반된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교회를 선택하셨지만, 교회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세상과 타협할 때 주님은 교회를 버리고 심판하실 수 있다. 전통과 교리도 귀중하지만 교회는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해야 한다.
에스겔은 책임을 강조하는 파수꾼 예언자로 선포했다. 포로기 이전에 활동한 수많은 예언자들은 영적 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무조건적인 구원을 선포하다가 백성을 멸망에 빠뜨렸다. 이들은 제 유익에 따라 움직이는 ‘황무지의 여우’와 같은 자들이요(13:4), 내부의 균열로 무너져가는 성벽에 회칠하는 자들이었다(13:1-9,10:6). 이제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그 시대에 주어지는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것을 요구하신다. 예언자들은 공동체의 영적 형편을 분별해서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성경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임무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도덕적 형편을 살펴보게 해주는 것이다. 공동체의 귀에 달콤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의 외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성도를 생명의 길로 이끄는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성도의 영적-도덕적 해이(解弛) 또는 부패에 대한 단호하게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 파수꾼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에스겔은, 아마도 처음으로 개인의 책임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예언자다. 에스겔은 소망 없는 이방 땅에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나갈 수 있는 길을 이중적으로열어준다. 먼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각 개인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중심에 놓인다. 이스라엘 없어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지키는 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죈다. 다른 한편으로 에스겔은 조상의 죄와 개인의 책임에 따른 논쟁의 초점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꿔준다. 개인은 조상의 죄로부터 자유롭기에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기에 현재의 삶이 그 사람의 미래적 심판과 구원을 결정한다. 따라서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짓눌린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소망의 삶이다.
김필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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