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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8년 무진(1808) 8월 2일(을미)
08-08-02[07] 경상우도 암행 어사(慶尙右道暗行御史) 여동식(呂東植)이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올렸다.
1. 교남(嶠南) 지방은 유사시에 가장 믿을 만한 곳이니,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이란 이미 지나간 일만 포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앞날의 일에 대해서도 격려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번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鄭希亮)이 변란을 일으켜 인심이 휩쓸려서 수습할 수 없었는데, 유독 함양(咸陽)의 정이운(鄭頤運), 정윤헌(鄭胤獻), 정찬헌(鄭纘獻), 정승헌(鄭承獻), 정소헌(鄭紹獻), 정중헌(鄭重獻), 정상헌(鄭尙獻), 정사헌(鄭師獻), 정진후(鄭鎭垕) 등 9인은 선정신(先正臣)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예로서 충정(忠貞)한 가문의 명성을 지켜 앞장서서 의(義)를 떨쳤습니다. 본군에 글을 올려 적을 토벌할 방책을 조목조목 아뢰고 고을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출정하려 하였는데, 다행히 적의 난리를 평정하게 되어 비록 공렬(功烈)이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씨를 살펴보면 난리에 나가 싸우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그 계책을 보면 승전보를 아뢴 신하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애초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에 본 고을 수령이 그 장계에 ‘제군들이 눈을 부릅뜨고 담대하게 한목소리로 항거하고 충심을 더욱 면려하여 함께 나라의 일을 구제하였습니다.……’라고 제사(題辭)하였습니다. 고(故) 중신(重臣) 박문수(朴文秀)는 암행 어사로서 본읍에 관문을 보내어 ‘함양의 정씨들만이 신하의 절의를 지켜 많은 선비들을 앞장서 인도하고 역적을 토벌하자고 정장(呈狀)하였으니, 여러 고을이 휩쓸리던 날에 우뚝이 빼어나서 만대(萬代)가 우러러보아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도신이 되어서는 또 장계로 아뢰기를 ‘정이운 등이 한목소리로 항거하여 홀로 신하의 절의를 보존하였으니, 이것은 한 도에서 찬탄하는 것일 뿐 아니라 백세의 본보기가 되기에도 충분합니다. 조정에서 별도로 포장(褒奬)을 한 다음이라야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신하들의 절의를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종성(李宗城) 역시 암행 어사로서 보고하기를 ‘정씨(鄭氏) 8가(家)는 선정(先正)의 후예로서 선조의 공렬을 계승하여 항거하고 정장하여 역적 정희량을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니, 우뚝이 빼어난 절의가 실로 후세의 본보기가 됩니다.’ 하였습니다. 기타 도신의 장계와 어사의 서계에서 연이어 포장하고 번갈아 아뢴 것이 몇 번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으되, 오직 정이운 한 사람만 정장한 우두머리라고 하여 두 번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또 추증되었습니다. 남은 여러 사람은 포장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1. 함양(咸陽)의 사인(士人) 고(故) 생원 우필인(禹弼寅)의 아우 우필량(禹弼良), 우필인의 아들 우완(禹琬), 우완의 아들 우홍부(禹洪傅), 우홍부의 아들 우정려(禹廷呂), 우정려의 조카 우의손(禹義孫)ㆍ우경손(禹敬孫) 등은 모두 향리(鄕里)에서 효행으로 알려졌으니, 사람들이 ‘5대(代)에 7효자’라고 칭송합니다. 우필인 형제는 모두 지극한 효행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실 적에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구해 드리는 예절을 지극하게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병들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이 병을 대신하기를 청하였고, 번갈아 들면서 서로 부모의 변을 맛보았습니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우필인이 손가락을 끊어 회생시켰고, 3년 후에 다시 병이 나자 우필량이 손가락을 끊어 회생시켜 또 2달을 더 살았습니다. 여묘(廬墓)살이 할 때에는 절하고 엎드렸던 곳에 풀이 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우완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어서 9세에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회생시켰습니다. 그 후에 어머니가 두역(痘疫)을 앓자 입으로 종기를 빨고 변을 맛보았으며 또 손가락을 끊어 회생시켰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다.’ 하였습니다. 우홍부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지성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자주 중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회생시킨 것이 두 번이었습니다. 선조(先朝) 갑진년(1784) 상언(上言)에 대한 판부(判付)에 ‘삼대에 네 효자가 있으니 족히 희귀하고 이채롭다고 말할 만하다.’라고 전교하시고, 특별히 명하여 급복(給復)하였습니다. 그 뒤에 우정려는 두 번 손가락을 끊어 어머니의 병을 회생시켰으며, 우의손은 겨우 10세에 두 번이나 손가락을 끊었고, 우경손은 9세에 아버지가 괴질(怪疾)에 걸리자 두 차례 넓적다리를 베어 먹이니 드디어 병이 나았습니다. 그동안의 실상이 한 도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니, 한 가문에 일곱 효자가 난 것은 예부터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안의(安義) 지역의 양인(良人) 김광대(金光大)와 그의 처 김 조이(金召史)는 어머니를 모시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습니다. 김광대의 어머니가 손자를 안고 다리 밑으로 떨어졌는데, 아이는 죽었고 어머니는 상해를 입었습니다. 김 조이가 급히 와서 주무르며 말하기를 ‘제가 나이가 젊으니 앞으로 자녀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하고는 전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김광대가 와서 보고는 또한 그 아이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오로지 어머니가 다친 것에 대해서만 크게 놀라고 근심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그 일로 곱사등이가 되었는데 김광대 부부가 밤낮으로 간호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않으니, 지금까지 9년 동안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혹 다리에서 떨어졌을 때의 일을 언급하면 그때마다 지목하고 저지하여 어머니의 귀에 들리지 않게 하니, 온 고을에서 서로 전하여 미담이 되었습니다. 향곡의 일개 서인(庶人)으로서 이러한 훌륭한 행실을 하였으니 진실로 감탄할 만합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