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길에 대한 끊임없는 궁구의 노래
이정환
1.
할 일도 많고 볼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 한다면 굳이 문학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문학이 쓸모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꼭 읽어야 할까. 좁혀서 생각해보자. 시조를 꼭 읽어야할까. 아니 속 시원히 이야기해보자. 늘 쫓기듯 바쁘게 사는 세상에 왜 시조를 쓰는가? 어찌하여 목숨을 바칠 듯이 시조 쓰기에 몰두하는 이들이 적지 않는가? 일반인들이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문학은 쓸모 있는 과업이다. 은유와 같은 문학적 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는 은유와 함께 진화한 것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온당하다.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소설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쉽게 공명하게 되고, 이기를 넘어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형률을 가진 간명한 시조는 더욱 이 시대에 필요하다. SNS시대에 소통하기에 가장 알맞은 도구인 시조는 한 편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그 의미와 가치를 안다. 가끔 왜 시조인가, 하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형식을 익혀 시조를 써보라고 적극 권한다. 몸으로 체험해 보면 그 답이 곧 나올 테니까.
여기 또 한 사람, 시조와 동행하는 이가 있다. 허남호 시인이다. 예전에 선산군 이라 불리던 경북 구미시 고아면에서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농대에서 농화학을 전공했다, 시조가 좋아서 독학으로 공부한 끝에 2011년《대구문학》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이번에 상재하는『평형』은 그의 첫 시조집이다.
2.
그의 작품 세계는 진솔하고 소박하면서 내면의 문제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자아와 세계에 대한 부단한 탐색을 통해 생태학적이자 철학적 사유를 체화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부단한 내면 성찰을 통한 공존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올곧은 인간의 길에 대한 끊임없는 궁구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을 보자.
육각형 벤젠환의
전자운이 그러하듯
인력과 척력이
함께하는 이 세상
공명은
서로를 울려
각이 없는 원이 된다
-「공명 구조」, 전문
도마뱀 꼬리 끊어 팽개쳐진 돈 봉투
파다한 입소문 속 출처불명 미스터리
버려진 꼬리 비늘만 형광 빛에 비리다
샅샅이 세상 훑는 폐쇄 회로 감지화면
꼬리 없는 도마뱀은 보이지를 않았고
퇴화된 내 꼬리뼈가 비칠까봐 가렸다
-「꼬리 자르기」, 전문
「공명 구조」는 특이한 소재의 단시조다. “공명”은 진동계의 진폭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현상, 어떤 화학 결합이나 분자 결합 구조가 두 가지 이상의 구조식으로 혼합되어 있는 상태다. 여기까지는 과학적 해석이다. 남의 행동이나 사상 등에 깊이 동감하여 함께 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뜻을 함유하는 말이 “공명”이다. “벤젠환”은 벤젠의 구조를 탄소 원자 여섯 개가 이어져서 이루어지는 육각형의 고리로 나타낸 구조식을 말한다. “전자운”은 원자핵 둘레를 돌고 있는 전자의 공간적 분포상태를 구름에 빗댄 말이다. “인력”은 물리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고, “척력”은 같은 종류의 전기나 자기를 가진 두 물체가 서로 밀어내는 힘이다. 굳이 이러한 과학 용어를 동원하여 한 편의 시조를 쓰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시의 화자는 「공명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국 사람살이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공간적 분포 상태가 그러하듯 인력과 척력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서로를 울려 각이 없는 원이 되는 공명의 삶을 함께 구현하자는 상생의 길을 제시한다.
「꼬리 자르기」도 새롭다. 흔히 알고 있는 도마뱀이 등장한다. “도마뱀 꼬리 끊어 팽개쳐진 돈 봉투”에서 서로 결합할 수 없는 전구와 후구가 한 자리에 놓여 새로운 의미형성, 이미지 구현을 이룬다. 도마뱀이나 도마뱀의 꼬리에 돈 봉투가 놓여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죄의 원천인 몸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꼬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파다한 입소문 속 출처불명 미스터리”여서 “버려진 꼬리 비늘만 형광 빛에 비”린 것이다. 시의 화자는 “샅샅이 세상 훑는 폐쇄 회로 감지화면”을 추적한다. 그러나 영영“꼬리 없는 도마뱀은 보이지를 않았고/퇴화된 내 꼬리뼈가 비칠까봐”가리는 일만 하고 말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화자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꼬리뼈를 별안간 감추려고 한 것이다. 「꼬리 자르기」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어떤 일이 터지기만 하면 꼬리 자르기에만 급급하여 결국 근원적인 해결의 길을 막아버리는 일을 우리는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다. 그 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진솔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형상화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시조가 나아가야할 한 방향을 조심스레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시편이다.
눈꽃도 승화하는 하늘 닿은 능선길
인적 드문 그곳에 서릿바람 받으며
거뭇한 천년의 침묵
겨울 주목 군락지
스스로 비워서 시간을 잉태하는
형극의 하 세월 바늘잎을 토한다
나이테 삭혀 뭉갠 속
어머니의 빈 가슴
온 등치 썩어도 눕지 못한 까닭은
가지마다 매달린 눈꽃송이 놓을까
이 땅에 어머니 마음
속이 꽉 찬 부후목
-「겨울 주목」, 전문
고흐는 가서도 서녘 하늘 머무는가
삼백 예순 다섯 날 한 폭뿐인 화선지
덧칠한 핏빛 그리움 붉디붉은 저녁놀
이승의 물감을 다 풀어도 넘지 못할
가난한 광기에만 허락된 하늘 화폭
붉은 피 쏟아 부으며 불구덩이 몰아간다
가늠키 어려운 소진의 순간까지
빈자에게 열려진 화가의 타는 심상
내 영혼 삼킬 것 같은 미치광이 불놀이
-「노을」, 전문
「겨울 주목」에서 화자는 결국 “어머니 마음”을 읽는다. “눈꽃도 승화하는 하늘 닿은 능선길”에 이르러 “인적 드문 그곳에 서릿바람 받으며/거뭇한 천년의 침묵”을 견디고 있는 “겨울 주목 군락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일컫는 주목은 주목과에 속한 상록 침엽교목으로 남다른 기개로 말미암아 “주목처럼 살아라”는 말을 흔히 한다. 주목은 또한 “스스로 비워서 시간을 잉태하는/형극의 하 세월 바늘잎을 토”하는 나무이고, 화자가 보기에는 “나이테 삭혀 뭉갠 속/어머니의 빈 가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 등치 썩어도 눕지 못한 까닭은/가지마다 매달린 눈꽃송이 놓을까”하고 저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겨울 주목」은“속이 꽉 찬 부후목”으로서 “이 땅에 어머니 마음”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노을」에서 고흐를 떠올리는 일은 예견할 수 있는 발상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유달리 고흐에 관심과 사랑을 쏟는다.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일이다. 하여 화자는 “고흐는 가서도 서녘 하늘 머무는가”라고 질문하면서 그 이미지에서“삼백 예순 다섯 날 한 폭뿐인 화선지/덧칠한 핏빛 그리움 붉디붉은 저녁놀”을 읽는다. 이어서 “이승의 물감을 다 풀어도 넘지 못할/가난한 광기에만 허락된 하늘 화폭”을 통해 “붉은 피 쏟아 부으며 불구덩이 몰아”가는 것을 본다. 그 순간 고흐는 다시 살아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흐의 뛰어난 예술혼, 열정적으로 불태운 화업의 길이 생생히 클로즈업 된다. “가늠키 어려운 소진의 순간까지/빈자에게 열려진 화가의 타는 심상”은 급기야 “내 영혼 삼킬 것 같은 미치광이 불놀이”로 화자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노을」은 서녘 하늘과 고흐와 화자의 행복한 일치, 일체화가 이루어진 시편이다.
육백 년 한 자리에
이어 온 역사의 터
도도히 흐르는
조상의 얼 예 있어
세상을
여는 봇들에
통도 하나 열릴지니
-「봇들」, 전문
게으른 천성 탓에 잡초를 이기지 못해
텃밭농사 삼년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한 삼년 그냥 뒀더니 묵정밭이 되었네
매실농사 하려고 매실나무 심었는데
열매는 떨어지고 나뭇잎만 무성타
그래도 지나간 봄에 매화꽃은 실컷 봤다
-「농사일기」, 전문
국수라고 발음하면 둥글고 긴 여운
입속 혀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면발이
머리칼 쓸어 올리듯 구강에서 찰랑댄다
꼬이고 풀기 힘든 난제를 만났을 때
무시로 찾아가 더디 먹는 누른국수
매듭이 풀릴 것 같은 서문시장 국수 가락
-「서문시장 누른국수」, 중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고향이나 오래 살아온 곳에 대한 향수를 시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봇들」에서 봇들은 경북 구미시 고아읍 파산리의 옛 지명이다. 그곳은 “육백 년 한 자리에/이어 온 역사의 터”다. “도도히 흐르는/조상의 얼”이 서려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화자에게는 “세상을/여는 봇들”이다. 세상을 향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부터 “통도 하나 열릴”것을 크게 기대하는 것이다. 어쩌면 화자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 정겨운 마을 봇들은 근원적인 생명력과 다함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꿈의 영역이다.
「농사일기」는 소박한 영농일기다. “게으른 천성 탓에 잡초를 이기지 못해//텃밭농사 삼년 만에 손을 들고 말았”는데 “한 삼년 그냥 뒀더니 묵정밭이 되”고 말았다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다. 그 후 “매실농사 하려고 매실나무 심었는데/열매는 떨어지고 나뭇잎만 무성”해 버렸다. 제대로 된 농사가 못된 것이다. 농경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사실 농사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화자는 결구에서 수확은 별무였지만 “그래도 지나간 봄에 매화꽃은 실컷 봤다”라고 말함으로써 눈앞의 결실 못지않은 눈의 호사를 통해 삶의 다른 면을 환기시킨다. 일견 평범한 이야기인 듯한「농사일기」가 마지막 이 한 줄로 말미암아 시적 효과를 얻고 있다. 그 점이 이 시의 매력이다.
국수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다. 더구나 서문시장 국수라면 더욱 그렇다. 화자는 “국수라고 발음하면 둥글고 긴 여운”이라면서 국수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낸다. 실로 길고 둥근 여운을 가진 것이어서 입맛을 돋우는데는 제격이다. 그렇기에 “입속 혀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면발이/머리칼 쓸어 올리듯 구강에서 찰랑”댄다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식감을 실감실정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수에서 “꼬이고 풀기 힘든 난제를 만났을 때/무시로 찾아가 더디 먹는 누른국수”로 말미암아 “매듭이 풀릴 것 같은”느낌을 받는다. 실로 “서문시장 국수 가락”은 그러한 동기부여를 할만하다. 소시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새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을 테니까. “누른국수”에서 “누른”은 눌렀다는 뜻일까? 아니면 “누런”의 비표준어일까? 아무튼 맛깔스러운 “누른국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핸 줄 알았는데
노을빛 그윽한 바다로만 여겼는데
이 길이 바다 함정의 물길인 줄 몰랐네
그래도 그렇지 어찌 꽃을 삼키나
울돌목 형님의 무용담도 못 들었나
그것도 못다 핀 꽃들 꽃봉오리 접다니
탁한 바다 한가운데 사람들 불러놓고
야단법석 난장판에 무리지어 다 떠난 후
너 혼자 역사에 남아 무슨 증언하려고
무심한 바다여 우리 모두 회개하마
우리 몫 지워주고 꽃봉오리 놓아다오
먼 날에 꽃배가 오면 네 잘못도 잊어 줄게
-「맹골 수도」, 전문
달의 힘이 이끄는
짙푸른 순환의 길
바다 속을 흐르는 물의 길 열리면
물고기
유선형 몸을
그 물길에 맡긴다
잔잔한 남해바다
물살 센 맹골수도
누구를 살리고 또 해치는 양면성
한 마리
어류가 되어
그 민낯을 보고 싶다
-「조류」, 전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고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심히 경악스러운 사건과 사고를 눈으로 적잖게 보아왔다. “세월호 사고”가 곧 그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충격이 심히 컸다. 그 통절함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여진으로 남아 있다. 「맹골 수도」는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핸 줄 알았는데/노을빛 그윽한 바다로만 여겼는데”는 그 “길이 바다 함정의 물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래도 그렇지 어찌 꽃을 삼키나/울돌목 형님의 무용담도 못 들었나”하고 안타까이 반문하면서 “그것도 못다 핀 꽃들 꽃봉오리 접다니”라고 탄식을 금하지 못한다. “탁한 바다 한가운데 사람들 불러놓고/야단법석 난장판에 무리지어 다 떠난 후/너 혼자 역사에 남아 무슨 증언하려고”하는지 화자는 “맹골 수도”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무심한 바다여 우리 모두 회개하마/우리 몫 지워주고 꽃봉오리 놓아다오”라고 안타까이 외치면서 “먼 날에 꽃배가 오면 네 잘못도 잊어 줄게”라고 속삭인다. “맹골 수도”는 어떤 답을 하고 있을까?
「조류」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달의 힘이 이끄는/짙푸른 순환의 길” 끝에 “바다 속을 흐르는 물의 길 열리”게 되면 “물고기/유선형 몸을/그 물길에 맡”기게 된다. 이렇듯 모든 물고기들은 자신의 본능을 따라 바다 속의 삶을 자유로이 구가한다. 그런데 “잔잔한 남해바다/물살 센 맹골 수도”는 “누구를 살리고 또 해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왜 그런가 하고 “한 마리/어류가 되어/그 민낯을 보고 싶”어한다. 꽃봉오리들의 목숨을 앗아간 까닭을 세세히 알고 싶은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 라는 심정이 이면에 깔려 있다..
느낄 듯 스쳐가는 그 몸짓 바라본다
망막엔 하늘빛, 산란하는 시계의 끝
정지된 나의 오감은 투명함에 묻히고
가없는 우주와 빛을 담는 내 그릇엔
주름 잡힌 시간에 아스라한 기억들
뭇 생각 깊은 날이면 나마저도 빛이다
-「빛」, 전문
물을 떠나 뭍으로 가지의 맨 꼭대기
연꽃이 발을 잊고 나무에 핀 목련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쯤은 아니다
-「순교」, 전문
내 안에 부처가 죽고
절마저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
말씀도 잠드는데
탁발승, 나를 찾아와
부처님을 원하네
-「시주」, 전문
팔동산 갓바위 부처님이 하도 용해
너나없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대서
기도차 작심을 하고 관봉에 올랐다
시루같이 빼곡한 인파에 뒤 떠밀려
부처님은 연등 뒤로 숨어서 뵈질 않고
절하는 보살님네들 꽁무니만 보고 왔다
-「신년기도」, 전문
「빛」은 사유의 깊이가 엿보이는 개성적인 시편이다. “느낄 듯 스쳐가는 그 몸짓 바라본다”라는 첫줄은 의미심장하다. 뒤이어 “망막엔 하늘빛, 산란하는 시계의 끝”이 의미하는 바도 모호한 가운데 적지 않은 울림을 안긴다. “정지된 나의 오감은 투명함에 묻히고”라는 종장도 생각을 오랫동안 하게 만든다. 둘째 수 “가없는 우주와 빛을 담는 내 그릇엔//주름 잡힌 시간에 아스라한 기억들”이 고여 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우주와 자아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소우주인 자아가 우주와의 소통과 교감을 통해 “아스라한 기억들”을 어떤 삶의 곳간에 쟁여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뭇 생각 깊은 날이면 나마저도 빛”이 된다고 노래했음직하다. 「빛」은 자아와 우주를 잇는 빛에 대한 성찰과 탐색을 통해 실존적 자아를 향한 모색을 꿈꾸는 시편으로 읽힌다.
「순교」는 이색적이다. “물을 떠나 뭍으로 가지의 맨 꼭대기”에 도달한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연꽃이 발을 잊”은 후에 “나무에 핀 목련”으로 변신한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발을 잊은 후의 목련을 두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쯤은 아니다”라고 단정 짓는 화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흡사 선문답 같아서 애매하다. 그러나 곱씹게 만든다. 제목은 「순교」다. 제목을 통해 천천히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시주」를 보자. “내 안에 부처가 죽고/절마저 허물어져//주춧돌만 남은 폐사지/말씀도 잠드는데”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의 화자 안에 부처가 죽었다는 말은 그동안 부처를 모시고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떻게 부처와 더불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부처가 죽은 후 절은 허물어지고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 같은 곳이 되었기에 말씀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탁발승, 나를 찾아와/부처님을 원하”고 있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이 곧 “시주”다. 화자의 곤혹스러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신년기도」는 기도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하도 용해/너나없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대서/기도차 작심을 하고 관봉에 올랐”다. 갓바위까지 오르는 길이 만만찮다. 한번이라도 오른 적이 있는 이는 그것을 안다. 부처님께 기원하지 않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오르는 동안 기도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아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화자가 관봉에 닿자 “시루같이 빼곡한 인파에 뒤 떠밀려/부처님은 연등 뒤로 숨어서 뵈질 않고/절하는 보살님네들 꽁무니만 보고 왔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볼 것이지 왜 손가락 끝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말처럼 “꽁무니만 보고 왔다”라는 표현이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때로 이처럼 소소한 정경 묘사만으로도 시 읽는 맛을 느끼게 된다. 화자의 재치를 엿본다.
끝으로 표제작을 보자.
가만히 앉아 있는
나비를 바라본다
대칭으로 펼쳐진
나비의 날개 한 쌍
한낮의 고요한 평형,
양팔 벌린 천칭인 듯
세속에 갇힌 마음
두 날개에 얹으면
한결같은 그 균형
내 심사로 기울라
내 안에 세상의 평형
나비 되어 살핀다
-「평형」, 전문
평형은 사물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은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평형에는 생태계 평형, 열평형, 힘의 평형 등이 있다. 작품에서 보다시피 사람의 마음을 두고 평형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마음이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므로 고르다는 뜻의 균형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이다.
평형과 더불어 떠오르는 말로 중정이 있다. 중정 역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일일 것이다. 「평형」은 그런 관점에서 의미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한 편의 시조가 상처를 치유하고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빛을 비추고 소망을 말하면서 절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속삭임이 될 때 다시금 새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 시대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그러고 보면 현재 겪고 있는 이 사태도 생태계 평형과 관련이 깊다. 눈앞에 닥쳐온 기후나 환경 문제 등은 모두 인간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비를 바라”보다가 “대칭으로 펼쳐진 나비의 날개 한 쌍”을 유심히 살핀다. 일상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일이다. 때는 낮이어서 “한낮의 고요한 평형”을 생각한다. 그 정황은 “양팔 벌린 천칭”의 상태와 다름이 없다. 그 순간 화자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서 “세속에 갇힌 마음을 두 날개”에 가만히 얹어본다. 아주 신중한 자세다. 마음이 세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만으로도 시의 화자가 얼마나 진중한 성품인지 알아챌 수가 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함을 알고, 실행하는 일에 힘쓰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화자는 “한결같은 그 균형이 내 잘못된 심사”로 혹여 기울까봐 늘 조심조심한다. “내 안에 세상의 평형”을 꿈꾸며 한참동안 나비가 되어 살핌으로써 중정의 태도를 견지하는 힘을 얻는다.
‘평형’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두 수 한 편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떠한 글을 쓰든지 어떠한 삶을 추구하든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시조를 쓰는 시인은 시조로 우리를 둘러싼 이 광막한 세계와 다 헤아릴 길 없는 내밀한 내면이나 영혼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면서 순기능적인 시대담론 생산에 이바지해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평형’은 간결하고도 간명한 형상화를 통해 독자의 뇌리에 그 메시지가 깊이 각인되는 치유의 시편이다. 여러 번 읽는 동안 화자가 이끄는 대로 눈길이 따라가면서 함께 그 정서와 사유에 공감하게 된다.
이처럼 「평형」은 쫓기듯 사는 현대인들에게진중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직이 일깨운다. 올곧은 삶의 길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시조는 적잖은 의미를 가진다. 거기에다가 시의 효용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우쳐주고 있는 점은 덤의 수확이다.
3.
그는 「거미집을 짓다」에서 “발바닥 닿을 데 없는 거미집 밑, 빈 허공”을 바라볼 줄 안다. 또한 「침식」에서 “우리가 사는 땅 어디엔가 침식 된 곳/캄캄한 사면에 매달린 불안한 삶”을 지켜보면서 “어둠이 지나간 자리”에 “둥근 만월”이 떠오르리라는 소망을 품는다. 「세상의 경사」를 통해서는 “둥근 지구 어느 곳 비스듬히 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세울수록 날카롭게 내미는 사이 각”에서 “수평선 굽어 이우는 세상의 경사도”를 읽는다. 그리고 “날갯죽지 퍼떡이다 주저앉는 젊은 백수”가 “유년의 기억 속 붉게 녹슨 미끄럼틀”을 떠올리며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인 “아득한 내리막 경사 흔들리는 착지점”에 아픈 시각을 대입한다. 「무명의 부재」에서는 자아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즉 “내 목숨이 아직 남아 느끼는 부재는/증발 혹은 소실의 뒤풀이 여음쯤”이 됨을 자각하고 “시간이 숱하게 흘러 흔적으로 남는 것”임을 증언한다.
허남호 시인, 그는 2011년 등단 이후 각고의 정진 끝에 “인간의 길에 대한 끊임없는 궁구의 노래”인 첫 시조집 『평형』을 펴낸다. 그로서는 소중한 결실이다. 고향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와 생명의식, 생태적 상상력, 광대무변 우주 속의 존재인 자아에 관한 내밀한 성찰, 역사의식에 입각한 시대정신 구현 등을 통해 그는 시조 세계 확장에 힘쓰고 있다. 정신적인 수맥을 잘 짚어간다면 그만의 세계를 축조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그의 시업의 길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봐도 좋겠다.
그가 걸어갈 시조의 길에 무한한 광영이 있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