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비진 곡곡曲曲을 따라 흐르던 물길이 큰 숭대崇臺(큰바위)를 만나면 필경 징담澄潭을 만들고
그 소沼가 넘치면 이윽고 천탄淺灘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강물이 산천을 굽이돌아 협峽을 만들고 다시 대지를 만나면 무성한 적수積水가 되고 넘치면 여울을 만드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리라.
도산구곡陶山九曲은 이런 산과 강과 바위들의 지세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수려한 지형이다. 도산구곡을 역순으로 들어가면 청량ㆍ고산ㆍ단사곡ㆍ천사곡ㆍ탁영담ㆍ분천(부내, 분강촌)ㆍ오담ㆍ월천ㆍ운암 등으로 현시되는데 그 내력은 죄다 자연의 형상을 따라 붙어진 지명이라 볼 수 있다.
도산사곡에 위치한 분천은 큰 물이 맑게 흘러 "부내"라고도 부르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분천汾川"이 된다. 분천은 "클 분汾"자와 "내 천川"으로 형성되며 이는 곧 "분강汾江"이 된다. 옛날 청고개 너머 주변 동네인 "다래" 또한 "달月"과 "내川"가 합쳐진 것이며 한문은 "월천月川"이 된다. 이는 다래에서 태어난 조목 선생[趙穆(1524~ 1606),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이며 본관은 횡성(橫城), 호는 월천(月川)]의 자호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분천은 "무성한 강물"이라는 훈을 담고 있다. 이 분강의 끝자락에 구여울이 자리했다. 부내에서 보았을 때 구여울은 낙동강(낙강)이 부포마을 동남향을 비스듬히 지나 다래로 흘러가기 전에 통소 아래 분강에서 넘쳐나 좁고도 완만한 경사진 천탄을 길게 만들었는데 옛날 분강촌 사람들은 이 여울진 일대를 "구여울"이라고 불렀다. 구여울은 분강촌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한 전설의 지명이자 이 동네를 살다간 수몰민들에게 향수와 애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명소였다. 부내의 명물은 많은 숭대들과 함께 농암의 또 다른 분신인 분강과 얽켜 있으며 방구들은 대부분 강물 속이나 강가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농암바위(귀먹바위聾巖 혹은 이색암耳塞巖) 애일당愛日堂 강각江閣 자리바위簟石 사자바위獅子石 코끼리바위象巖 분천汾川바위 감퇴減退바위 통소 구여울 등이 그러하며 현대사에 생겨났다가 사라진 물레방앗간과 양수장 또한 분강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 및 그림 종합 설명(caption) : 구여울의 역사는 분강촌 입향시조入鄕始祖인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李軒 공 때부터 시작된다. 분강이 넘쳐나면 여울을 만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있는 그림은 분천동 아랫마을에 살았던 조각 예술가 종친 재필이 아재가 2020년에 그린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이다. 그림 우편 하단에 보이는 무성한 강물은 분강 아래 지역이고 하얀 물살이 보이는 곳이 구여울 일대이다. 세번째 사진은 1970년대 의인에서부터 분천동까지를 담고 있는 사진이다. 낙동강이 의촌리와 도산서원陶山書院 앞을 지나 사진 왼쪽 상단 분강촌까지 흘러드는 모습이다. 사진 왼쪽 상단에 새로 닦고 있는 길 아래로 낙동강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온다. 분강촌 수몰을 눈 앞에 두고 동네 뒷산 중턱을 깎아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진입로를 내는 광경이 하얀 띠 모양으로 가로로 걸쳐져 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의촌리 일부만 남기고 이 사진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지역은 수몰되었다(사진 출처: 1970년대 의촌리에 살았던 도산국민학교 58회 이영순 동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여울은 결코 신여울에 대비하여 생성된 말은 아니었다. 말그대로 옛날부터 존재해왔던 오래된 여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옛날 고려 말엽 이전에 도산서원[고려가 폐망(1392)한 뒤 182년 후에 도산서원이 건립(1574) 되었다] 강 건너에 있던 마을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 강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면서 이 마을이 마치 섬촌(섬마 혹은 섬마을)처럼 보였다고 하여 "섬마"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실제 고려 말엽 공민왕(31대 왕ㆍ재위 기간 1351~1374) 때 섬마ㆍ섬촌이 의인현에 속했었다는 사료가 나오는 것은 이미 이전 시대부터 이 지역이 "섬" 지역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하게 만드는 단서가 되며 또한 실제 "섬"으로 되기 위해 지형상 두 개의 강줄기가 갈라진 것은 이 보다 훨씬 더 이전 시대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한국의 지명은 지형과 지세와 전설을 쫓아 작명된 경우가 태반이다. 섬마 또한 이런 곡절로 생겨난 지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뜬금없이 이 마을을 이칭異稱하는 다양한 이름에 "섬"이라는 말이 모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두 갈래 강줄기 가운데 하나는 태곳적부터 원천(原川)인 수몰 전 우리가 보았던 분강 쪽으로 흘러드는 강물이었을 테고 또 하나는 큰 홍수로 인해 생긴 또 하나의 물길이 섬마를 사이에 두고 부포와 경계 짓는 야산 아래로 완만히 흘러내리다가 구여울 밑에서 자연스럽게 합강合江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의인 앞에서 섬마를 두고 두 줄기로 갈라진 강물은 지형적으로 오목하고도 경사지고 낮은 위치인 구여울 아래 지대에서 필연적으로 합류했을 것이다. 특히 이 지역 왼쪽에는 부포로 넘어가는 작은 야산 고개 길이 있었고 또 야트막한 산이 강과 조금 거리를 둔 채 평행하게 길게 누워 있었기 때문에 물길이 구여울 아래에서 합강될 수밖에 없는 지세였다.
옛날이나 수몰 전이나 낙동강이 원래 도산서원과 삼밭골(일명 삼바꼬)과 서취병산 아래로 흘렀다고 단정짓는 근거는 자연의 섭리로 볼 때 강물은 지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섬마보다는 지대가 낮은 삼밭골 밑으로 물길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섬마를 사이에 두고 도산서원 맞은편 강건너 먼 산 밑으로 흐르던 강물은 큰 홍수나 혹은 오랜 세월을 거쳐 지형이 낮은 물길을 쫓아 흐르다가 마침내 샅골 아래로 흐르던 원래의 낙동강과 구여울 주변 지역에서 자연히 합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섬마 뒷쪽으로 흐르던 이 강물은 구여울 아래에서 합류되기 전에 또 하나의 경사진 여울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때 생겨난 여울과 이름을 달리 부르기 위해 본디 분강 아래로 흐르던 오래된 여울을 구여울이라 지칭했을 것이다. 말그대로 오래된 여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말해 구여울은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여울과 대비되어 생겨난 지명이라기 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옛날 여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어느 사료에도 분강촌 혹은 섬마와 관련하여 신여울이라는 지명이 나온 적이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샅골 앞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 아래에 있던 여울에도 구여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지형상 높낮이로 보았을 때 분명 부내의 여울보다는 먼저 생겨난 것이 자명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여울의 접근성 때문일 것이다. 어떤 지명에 이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 곳에는 지명도 붙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탁영담濯纓潭 바로 아래의 여울은 너무 급하고 너무 세고 넓어서 사람들이 놀고 건너 다니고 헤엄치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또 섬마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이 여울보다는 탁영담이 훨씬 더 접근성이 수월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년시절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섬마 사람들이 멱을 감는 지역은 거의 대부분 시사단 앞 강나루터 주변의 탁영담이었다.
이에 비해 통소 아래 여울목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여울이었다. 고기들도
많았고 여울목이 비교적 좁고 얕아서 섬마로 건너가기에도 좋았고 왼편 통소에는 강물 속에 섬처럼 여러 개의 바윗돌이 숨어 있어서 놀이터 역할도 해주었고 여울목 아래 또한 물살은 세었지만 폭이 좁아서 헤엄쳐 건너가고 오는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수몰 전 구여울에는 사시사철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물레방간 빨래터 아래와 양수장 앞은 너무 깊어서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여울은 지리적으로도 완전하게 분강촌 품안에 자리잡았으며 부내 사람들과 한 몸을 이루는 마실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지명이 생겨나거나 붙을 수밖에 없는 연유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농암바위 자리바위 분천바위 감퇴바위 통소 등과 같이 친근감이 넘치는 하나의 지명이자 이름으로 불리워져 내려왔던 것이다. 현대사에 조성된 부내 윗마 물레방간도 "물레방앗간 정미소"가 없어진 뒤에도 그냥 그 주변 일대를 물레방간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분강촌 사람들과 도타이 지낸 명물들은 모두 구여울과 같이 분강 속에 있거나 강가에 있는 것이 태반이었다. 이는 앞서 시대를 살다간 선인들의 발걸음 또한 잦은 곳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에 걸맞는 많은 이름들이 지형에 맞게 생겨났으리라. 구여울이란 지명 또한 이런 곡절을 안고 태생했을 것이다.
분강촌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엽 입향시조 때부터 존재했다. 분강촌 사람들은 마실 앞을 흐르던 낙동강을 분강이라고 불렀다. 낙동강은 알다시피 고대 가야국와 삼국시대 신라국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강이다. 다시말해 낙동강이기도 한 분강촌의 분강은 태곳적부터 존재하던 강물의 지형이었다. 부내 동네 앞에서 특히 무성했던 그 분강이 넘쳐나서 만든 지세가 구여울의 내력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여울의 역사 또한 분강과 함께 하는 먼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분강촌 주변 전경을 그린 진경산수화 속에는 분강 하나만 보일 뿐 강줄기가 두 개로 나타난 것은 없다. 이는 최소한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분강 한 줄기만 도산서원 아래로 흘렀다는 반증이 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섬촌 뒤로 흘렀다는 강줄기는 이미 이전 시대에 출몰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그린 산수화들이 도산서원부터 분강촌까지를 정밀하게 그린 실경산수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산서원 앞 탁영담과 부내 앞 분강에만 강물이 무성할 뿐이지 어느 산수화에도 강물이 두 줄기로 흘러가는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산수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섬마를 만든 강줄기가 나타나고 사라진 시기는 최소한 조선 중기 이전이라는 추론이 산수화에서도 가능하다. 농암은 조선 중기 인물이다. 농암 시대에도 도산서원 앞 강줄기는 하나였고 이때도 구여울은 이미 고적히 존재했었다.
낙동강은 가야국 때부터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고려 말엽에는 분강촌도 생겨나게 만들었고 분강이라는 이름도 지어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섬촌을 만든 강줄기는 조선 중기 이후에 그려진 진경산수화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섬촌을 만든 강줄기는 이미 훨씬 이전 시대에 출몰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이미 고려 공민왕 때도 섬마ㆍ섬촌이라는 지형이 존재했고 의인현에 속했다는 사료도 있다.
구여울에 대한 내력을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분강촌 산천 주변의 지세를 지형적으로 면밀히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분강촌의 입향시조는 1350년경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을 지낸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었다. 그는 선대의 고향이었던 영천(지금의 영주)을 떠나 분천에 새로운 터전을 잡을 때부터 지명을 분강촌이라 명명했다. 분강촌 부내 분천 등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이는 농암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전설적인 동네 이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세 개의 같은 명칭에 나오는 "부" 또는 "분"은 클 "분" 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클 분의 훈은 크고 넓고 많고 성하다는 뜻이다. 즉, 강이 크고 넓고 물이 많고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동네 명칭 뒤에 붙은 음도 한번 분석해보자. "내"이고 "천"이고 "강"으로 돼 있다. 지형적으로 봤을 때 이 동네는 낙동강 상류에 형성된 마을이지만 실제 형상을 보면 국어학적인 단순한 "내"나 "천"이 아닌 비교적 큰 강물이 고여 있는 말그대로 분강이었다. 단지 한문으로 표기 하니 내와 천이 된 것이다. 실제로는 큰 강물이 고여서 흥건한 분강을 형성시켰다고 보면 된다. 수몰 전이나 수몰 후를 보아도 분강은 작은 내나 천이 아닌 큰 강물이 적수된 지형이었다.
태백 황지연못에서 낙동강이 발원하여 구비구비 도산구곡의 반을 역행하여 분강촌에 이르러 비로서 크고 넓고 깊은 분강이 형성된 것이다. 수많은 곡과 협 사이를 가파르게 흐르던 물이 단애로 둘러쌓인 산천을 빠져 나오면서 그나마 내와 천이 되었고 다시 넓은 대지를 만나면서 비로서 무성한 분강을 형성한 것이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1691~1756)ㆍ조선 후기의 실학자]도 낙동강이 도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강이 되었다고 했다. 낙동강은 알다시피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낙동강 1300리 가운데 그제야 강다운 강이 형성된 곳이 바로 이곳 도산골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비경들도 이곳 도산구곡 속에 죄다 펼쳐져 있다. 분강촌은 도산사곡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림 설명(caption) : 분강촌 부내 분천 등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이는 농암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전설적인 동네 이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세 개 명칭에서 나오는 "부" 또는 "분"은 클 "분" 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클 분의 훈은 크고 넓고 많고 성하다는 뜻이다. 즉, 강이 크고 넓고 물이 많고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강이 되었다. 그림은 1992년 종친 화가 이택 선생이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이다. 이택 선생은 농암 17대 종손인 이성원 박사의 사촌 형님이 된다. 농암종택과 긍구당肯構堂 분강서원 애일당 농암바위 일대를 그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강촌은 농암으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후에는 분강서원내 숭덕사에서 불천위로 배향되었다. 농암이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네 번의 사화가 일어났지만 농암은 정도의 길을 걸으며 지방직을 고수했기에 고관대작이었지만 어두운 굴곡의 시대를 초연하게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효孝"와 "적선積善" 그리고 염퇴지사(恬退之士ㆍ염퇴지사 : 염퇴란 벼슬을 내려 놓고 물러난다는 의미이다)로 이어지는 감퇴(減退ㆍ벼슬을 내려 놓고 물러난다는 말이다. 감퇴바위와 직결된 용어이다)의 길을 걸으며 강호의 삶을 즐겼다. 분강촌 감퇴바위에 서려 있는 것처럼 다 덜어놓고 물러난 뒤에야 비로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귀거래歸去來의 진정한 강호지락江湖之樂을 얻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사료를 통해 좀더 사적史的으로 분강과 구여울을 들여다보자. 1710년경 월탄 김창석의 "분강촌도"와 1746년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정선鄭歚(1676~ 1759)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문신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이며 인왕제색도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의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를 보면 분강촌 구여울의 자취를 쉽게 쫓을 수 있다. 월탄의 산수화에는 부내 왼편 구여울부터 오른편 도산서원 초입까지를 그렸다. 산수화 속에는 분강촌 분천서원 애일당 서취병 병암屛庵이 아름다운 산세 속에 선경처럼 그려져 있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전경을 조망한 계상정거도에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과 함께 구여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지형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림 전반에 걸쳐 중앙에 탁영담과 더불어 왼편에 흥건히 적수되어 있는 분강이 보이고 또한 넘친 강물이 경사를 지어 완만히 빠져나가는 듯한 구여울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월탄이나 겸재의 산수화 속에는 도산서원 앞에 있어야할 시사단試士壇도 없고 낙동강 원줄기 이외 또 다른 강줄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월탄만 강건너 솔밭 속에 있던 작은 강사江寺를 그렸다. 이는 퇴계의 유덕을 기리고자 시행한 과거시험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시사단의 건립시기가 1796년이기 때문에 이 산수화를 그릴 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 때 명재상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ㆍ정치인이자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호는 번암(樊巖)]이 비문을 새긴 시사단은 퇴계의 유업과 얼이 배여 있는 도산골을 대표하는 기품있는 소각 정자 가운데 하나이다. 농암 사후 선생의 행장과 비 전면은 이황이 썼으며 1791년 10월 도산 운곡에 있던 산소를 신남 정자골로 이장한 후 개갈시 묘비 전면은 번암이 했을 정도로 영의정 채제공은 도산골과도 인연이 깊은 재상이었다.
현대사에 분강촌을 실물처럼 옮겨 놓은 진경산수화로는 2014년 유산 김영환의 "분천마을도"와 "애일당별서도"이다. 두 개의 산수화 모두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분강촌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애일당별서도에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에 나룻배처럼 가득히 강물을 담고 있는 분강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분천마을도는 수몰 전 우리가 살던 분천동을 정밀하게 그려 놓은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실물화이다. 매우 흡사한 마실 전경과 여러 숭대들 그리고 도산서원 앞 탁영담에서 삼밭골 앞을 지나 애일당 아래 농암바위 곁으로 비스듬히 흘러드는 완만한 여울과 더불어 무성한 분강이 넘쳐나서 급한 여울목을 형성하며 가파르게 꺾여지는 구여울의 정확한 묘사는 수몰 전 우리와 수타 함께 했던 구여울의 모양새와 명확히 닮았다.
실제 수몰직 후 1980년대 이성원 박사(농암 17대 종손)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분강 속 이곳저곳 숭대들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오른편 통소 끝에서 왼편으로 급히 굽어져서 부포와 다래 쪽으로 흘러가는 낙강이 보인다. 안동댐으로 수심이 차올라서 유년시절처럼 구여울 지대가 가파르게 경사진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전경 속에서 구여울을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림 및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산수화는 1710년경 월탄 김창석의 "분강촌도"이다. 월탄의 산수화는 부내 왼편 구여울부터 오른편 도산서원 초입까지를 그렸다. 산수화 속에는 분강촌 분천서원 애일당 서취병 병암이 아름다운 산세 속에 선경처럼 그려져 있다. 두번째 및 세번째 산수화는 표암(강세황 1713~1791)이 농암 선생의 고향 마을인 분천동(분강촌)을 그린 "도산도(1751)"이다. 같은 그림이며 세번째 그림은 두번째 그림의 왼쪽 지역인 분강촌 부분만 확대한 것이다. 특히 두번째 그림 속에서 흥건히 고인 분강과 강 끝자락에 구여울로 흘러드는 낙강의 모습이 보인다.
네번째는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전경을 조망했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과 함께 구여울의 흔적까지도 더듬을 수 있게 그렸다. 그림 전반에 걸쳐 중앙에 탁영담과 더불어 왼편에 무성하게 적수되어 있는 분강이 보이고 또한 넘친 강물이 경사를 지어 완만히 빠져나가는 듯한 구여울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고스란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애일당과 그리고 다시 그 옆쪽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이지만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시절의 산천과 진배없다.
다섯번째 및 여섯번째 그림은 분강촌을 실물처럼 옮겨 놓은 산수화로 2014년 유산 김영환의 "분천마을도"와 "애일당별서도"이다. 두 개의 산수화 모두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분강촌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여섯번째 그림인 애일당별서도에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에 나룻배처럼 가득히 강물을 담고 있는 분강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분천마을도는 수몰 전 우리가 살던 분천동을 정밀하게 그려 놓은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실물화이다. 특히 왼편 상단에 분강 아래로 여울져서 흘러가는 구여울의 전경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마지막 사진은 1980년대 이성원 박사(농암 17대 종손)가 촬영한 사진이다. 분강 속 커다란 농암바위를 기준으로 오른쪽 앞에 사자바위 코끼리바위 등의 숭대들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오른편 통소 끝에서 왼편으로 급히 굽어져서 부포와 다래 쪽으로 흘러가는 낙강이 보인다. 안동댐으로 수심이 차올라서 유년시절처럼 구여울 지대가 가파르게 경사진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전경 속에서 구여울을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을 만날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흐른다. 지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성하면 넘치고 부족하면 고이기 마련이다. 전자는 물길의 이치를 따랐고 후자는 여울의 순리를 만들었다. 옛날 분강촌과 도산서원 주변을 그린 실경산수화들을 보면 한결같이 탁영담(도산서원 앞 적수돼 있는 넓은 강물ㆍ도산5곡 지대)에서 넘쳐난 강물이 여울을 만들며 샅골(전골, 석간대 및 취병산 입구)과 삼밭골 그리고 병암골을 치고 나가 애일당 앞을 휘감아 돈 다음 농암바위에서부터 거대한 돛단배 같은 우묵하고도 널찍한 분강을 형성한 후 통소 밑에서 다시 강물이 넘쳐나서 여울을 만들며 다래로 바삐 흘러가는 형상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샅골 위 석간대에서 애일당까지 병풍처럼 둘러싼 뒷산을 옛사람들은 서취병산이라고 불렀다. 그 서취병산 속에는 우리가 토째비골 혹은 배암이골이라고 부르던 병암골이 있었다.
병암은 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 공이 지은 작은 정자이다. 매암은 선성삼필宣城三筆[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 매헌梅軒 금보琴輔(1521~1584),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1521~1606)을 뜻한다. 선성삼필은 도산골이 낳은 동방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 가운데 문필이 뛰어난 세 사람을 의미하며 예안의 옛날 지명을 선성이라 했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농암과 퇴계는 이곳을 소회하며 강호지락을 함께 하기도 했다. 부내 동네의 뒷산인 영지산과 서취병산이 배산 역할을 했으며 서취병산 뿌리를 적시며 구여울까지 구비쳐서 흘러가는 분강이 임수가 되었다. 분강촌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었다.
도산서원 앞 탁영담에서부터 애일당 앞까지를 지형적으로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유년시절 섬마 앞에는 강물이 넓다랗고 그득해서 나룻배가 사람들을 양 쪽 강변으로 실어날랐다. 다시말해 도산서원 앞 강나루터에서 강 건너 시사단 아래 강가를 쉼없이 배가 오고 갔다. 우리가 유년시절 삼밭골 앞과 샅골 삽지껄 아래에서 보았던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 밑으로 세차게 흐르던 여울은 바로 도산서원과 섬마 사이에 있던 탁영담이 넘쳐나서 만든 것이다. 탁영담을 빠져나온 강물은 삼밭골 앞에서 여울을 만든 후 애일당까지 가는 중간에 깊고 길게 박혀 있는 서취병산 뿌리를 뱀같이 휘감으며 농암바위부터는 풍성한 분강을 만들었다.
♤부내 종친 재술이 아재가 도산서원 정문 아래 신작로에서 촬영한 사진이다(1974.12).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출품작이다.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부내 동네 또래 친구들이다. 50여 미터 뒤로 올라가면 왼쪽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큰 정문 입구가 있었다. 섬마 앞에 탁영담을 가득 채운 낙동강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섬마 위에 있던 양수장도 눈에 들어온다.
♤사진1 설명: 남익찬 선생이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1972.5).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출품작이다. 강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이 보인다. 솔밭 속에는 시사단이 있었다. 가득한 탁영담이 넘쳐나서 삼밭골과 샅골 입구 앞에서 여울을 만들었다. 먼 옛날에 또 하나의 강줄기가 섬마 뒤로 나서 분강촌 아래 구여울목 밑에서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년시절 도산서원 앞 강나룻터에서 시사단 아래 강섶으로 나룻배가 수시로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하지만 샅골 입구(현재 도산서원 주차창 아래 선착장 지역)에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가 놓이고 부터는 나룻배도 멈췄다. 그렇지만 섶다리는 완전하지 못했다. 드물지만 홍수로 다리가 파괴되면 다시 나룻배를 사용했다. 유년시절 도산서원 아래에 있던 이 다리 옆을 매일 지나 도산국민학교에 다녔는데 다리가 없었을 때의 기억도 희미하게 떠오른다.
♤사진2 설명: 사진1의 강건너 보이는 솔밭을 수몰 전인 1975년에 촬영한 희귀한 사진이다. 솔밭 속에 작은 누각인 시사단도 보인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시사단이 수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75년에 20여 미터 높이로 단을 만들고 그 위로 이 소각을 옮겼다(사진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바로 아래 사진을 보면 도산서원 건너편 섬마는 완전히 수몰이 되었지만 옛날 솔밭에 있던 시사단은 높은 단을 만들어서 그 위로 옮겨 놓아 이렇게 지금까지 그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두 개의 사진은 같은 위치에서 촬영했다. 윗 사진은 올해(2023) 7월 장마기 때 물에 완전히 잠긴 섬마(섬촌) 전경이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시사단의 모습이 경이로와 보인다. 도산서원 앞에서부터 분강촌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다. 이 사진은 부내 윗마을에 살았던 영월 할매 자제분인 오연이 할배(64ㆍ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가 지난 장마기간 중에 보내왔다(2023.7.15). 아래 사진은 필자가 2020년 봄에 촬영한 전경이다. 윗사진에 강물이 줄어들면 분강촌으로 흘러가는 낙강의 모습이 이런 형상이 된다. 저 멀리 산과 강이 길게 접한 지대가 수몰 전인 1970년대 분강촌 동네였다. 정선의 <계상정거도>를 도산서원만 빠진 요즘 전경으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사진 및 그림 종합(caption)설명 : 첫번째 사진은 샅골 앞에서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이다. 조선 중기 때는 샅골을 살골 혹은 전곡이라고 불렀다. 유년시절 우리는 샅골이라고 했다. 샅골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강가에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전체를 말한다. 선착장에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의 왼편에 있는 바위 언덕을 석간대라고 했다. 옛날 수몰 전 마을 어르신들은 주차장 왼편의 뒷산도 석간대라고 불렀다. 첫번째 사진과 두번째 사진(1974)은 같은 장소이지만 두번째 것이 훨씬 더 옛날 사진인 듯 싶다. 갓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어르신의 모습이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여울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낙동강물이 고여서 만든 탁영담이 넘쳐 흘러 만든 것이다. 지금 도산서원 앞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도산서원은 다행히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두번째 사진출처: 미상(일제강점기?~1960?)].
두번째 사진 또한 서취병산 입구 샅골 맞은편에서 섬마로 건너가는 추억의 청소깝 외나무다리이다. 첫번째 사진과 같은 장소이지만 시대만 다르다. 가파른 여울 위로 일렁이는 하얀 포말들이 시원해 보인다. 뒤에는 소나무 가로수가 청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 소나무 가로수 길로 100여 미터만 더 올라가면 도산서원 삽지껄이 나온다[사진출처: 경북기록문화연구원(1974) ].
세번째 그림은 분강촌 분강 속에 위치한 자리바위(점석) 위에서 농암과 퇴계가 강호를 벗삼아 함게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리바위에서부터 넓고 깊은 분강이 형성된다. 농암[聾巖ㆍ李賢輔(1467~1555) 조선 중기 문신ㆍ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다.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필자의 수필 "분강촌" 참조)]은 점석 위에서 퇴계[退溪ㆍ李滉(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ㆍ유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1574년에 건립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와 나이 차이(34년 차이)를 잊은 채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농암이 지은 농암가와 어부가는 한문과 한글이 함께 쓰인 강호시가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이러한 강호가도江湖歌道를 노래한 시가문학은 이후 퇴계의 '도산십이곡'과 기촌 송순(1493~1583)의 면앙정가, 정철(1536~1593)의 3대 가사(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그리고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1587~1671)에 이르러서는 가사문학의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어부가는 국한문 가사로 된 강호가도의 효시이다[삽화출처: 때때옷의 선비(농암 이현보), 국립중앙박물관, 200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농암가에서 보면 농암 선생이 농암에 올라서서 흐르는 분강을 보며 시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모수모구某水某丘"라는 싯구에서 '모수'는 농암바위 앞에 있는 분강을 뜻하는 말이다. 선생이 옛날에 노닐고 보았던 여전히 변함이 없는 그 분강을 가리킨다. 그리고 실제로 황혼기에 농암이 부내로 귀거래 하여 퇴계와 함께 분강 속에 있는 자리바위 위에서 어부가를 짓고 조각배를 타고 주위를 유영했다고 하니 그 당시나 수몰 전이나 지형과 주변 전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1549년 농암은 온계ㆍ퇴계 두 형제와 귀먹바위 아래에 있는 비단자리 주변을 조각배를 타고 영지산 달빛을 등불 삼아 강호를 유영하며 분강촌 역사에서 전설로 남을 명장면들을 만들기도 했다. 이 분강의 뱃놀이가 후대들이 이름 붙인 바로 그 선상음악회가 된다.
실제로 농암과 퇴계가 강호를 벗삼아 함께 자리했던 분강 위쪽(애일당 맞은편)에 있던 널찍한 큰 숭대인 점석(자리바위의 다른 명칭)에서 우리 또한 유년시절 헤엄쳐 가서 노닐기도 했다. 그러니 지형적으로는 430여 년 전 그때나 1976년 수몰 전 당시에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사료에도 조선 중기부터 지금까지 안동지역에 큰 화산이 일어나서 지반이 크게 융기하거나 침강했다는 천재지변도 없었다. 다만 농암 후대에 큰 홍수로 애일당 아래 강가에 있던 소각인 강각이 부서져서 애일당 위로 재건했다는 사료는 있다. 강각은 1544년 농암이 농암바위 조금 위에 강가에 지은 소각 명칭이다. 강각은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누각이다. 영남가단은 시를 쓰는 모임이었다. 이 가단의 심지 속에서 농암가, 어부가 등이 탄생하였으니 강각은 필경 영남가단과 농암의 대표적인 시작을 탄생시키는 단초 역할을 한 시상의 요람이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강각은 퇴계와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의 당대 걸출한 유학자들이 함께 한 명소이기도 하다.
이후 우리들이 살았던 유년시절에는 다시 애일당 위로 이건해서 지은 강각 위치에 농퇴시비聾退是非로 인해 욕기정과 강각 간판이 넘나드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470여 년 전의 그 형체로 이전한 가송리 농암종택 동남쪽 끝자락에 고적히 재현되어 옛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강각이라는 간판과 원상을 다시 복구시키는데 무려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사실 강각 정도를 쉽게 파손할 수 있는 홍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형상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어디나 홍수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1959년에 있었던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애일당 앞 신작로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의인 앤떼이[보(洑)막이 조형물 혹은 "둑", 일본어로는 앤떼(堰堤 えんてい)라고 한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부내 앞들 수로미까지 강물을 흘러보냈던 수로가 이곳에서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가 유년시절 애일당 앞에서 보았던 끊겨진 유(U)자형 시멘트 수로가 바로 그 잔해였다. 이로 인해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농수를 공급받았던 분강촌 수로의 역사는 사실상 단절되었으며 또한 이 농수로 운영했던 물레방앗간 정미소도 더 이상 작동시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 물론 물레방앗간을 멈춘 것은 방앗간 자체의 인명사고도 있었지만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필수적인 강물의 단수 또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인해 분강촌은 한단계 발전된 농수장치인 양수장이 건립되는 계기를 맞기도 했다. 의인 앤떼이에서 시작하여 분강촌까지 공급된 농수로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감행한 조선수리조합령(1927)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어졌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더 많은 농산물을 강탈하기 위한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조형물이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사진(안동 대륙사진관ㆍ월파 윤수암 선생이 1960년대 촬영)은 애일당과 강각의 전경이다. 수려한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 밑에 1959년 태풍 사라호로 파손된 시멘트 물길이 선명하게 보인다(첫번째 두번째 사진에서 수로가 파손되면서 "U"자 형 모양으로 변했다). 두번째 사진은 출처와 시대가 미상이다. 애일당과 강각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옛날에도 여전하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의인앞 앤떼이에서부터 부내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완공한 후 관할 관서(도산면사무소)에서 관련 사진을 남기기 위해 섬마 쪽에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더 많은 식량확보를 위한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 정비차원에서 1927년 조선수리조합령(조선총독부제령 제18호)을 발표하여 전국 지역에 수리시설 정비와 개량사업을 실시했다. 의인 번남 앞 낙동강 여울목에 앤떼이(보)를 설치해서 부내까지 십리 길 수로를 만들어 마을 앞들과 신작로 주변 밭에 농수를 공급한 것도 알고보면 일제의 이런 내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의인 앤떼이의 정확한 위치는 이황의 퇴계구곡(退溪九曲)이 시작되는 일곡 지점이었던 마치 고무신 형상에 가득히 낙강이 고여 있었던 사련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즉, 여울목 바로 위가 사련진이다. 이곳에 고였던 강물이 넘쳐나서 번남 앞에서 넓다란 여울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곳 여울목에 보를 설치했다. 그 당시 도산골 사람들은 이 조형물이 있던 일대를 "의인 앤떼이(보)"라고 불렀다. 일본 말인 앤떼이를 붙인 이유는 그 시대가 일제강점기였고 또 그것을 계획한 사람들도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앤떼이 왼쪽 강변에는 잔디밭이 있었는데 이곳에 이따금씩 가설극장이 설치되어 도산골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번째 사진은 2019년 농암 선생 불천위 제사 때 강각 앞에서 아내와 함께 했다. 네번째 사진은 수몰 후 2002년 도산 가송리로 이건한 농암종택 건너편 낙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강각 전경이다(출처: 농암종택 사진). 다섯번째 사진은 2019년 농암 선생 불천위 제사(음 6.13)때 종택에 있는 농암선조 영정 앞에서 아내와 함께 한 기념 사진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년시절 여름 장마기가 시작되면 낙동강 상류에서 흘러오는 엄청난 황토물이 분강을 산더미처럼 부풀게 했다. 물레방간 언덕 위에서 세찬 황토물에 맞서 끄레이질을 하던 선노 할배의 신선 같은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60~1970년대 이러한 홍수 피해는 사실 이전 시대에도 빈번히 일어났을 것이다. 홍수만 나면 애일당 앞에 물이 넘쳐 신작로가 잠겨서 학교 가는 길이 막혔다. 철없는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만큼 오히려 비가 그칠까 봐 걱정을 하곤 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아예 뒷전이고 불어나는 물구경이 몇 갑절 더 재미나는 일이었다. 장맛비가 멈추고 나면 파괴된 신작로를 복구하기 위해 안동 송현동에 있었던 36사단인 5797부대가 와서 그 많은 뒷일을 다 감당했다. 흙과 돌을 가득 싣고 무너진 신작로를 복구할 때 트럭 뒤에 새겨진 부대 이름이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 잊지 못할 숫자가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이 부대의 이름을 잊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성년이 된 후 군대 생활을 했던 사단의 한 예하 부대가 고향 안동인 송현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료와 내력은 구여울을 좀 더 알기 위한 지형적ㆍ지리적 고찰이었다. 애일당 아래로 흐르던 분강은 이 두 개의 앞 뒤 여울 속에 적수되어 있는 강물이다. 하나는 탁영담에서 넘쳐나온 병암 아래 여울이며 또 하나는 분강촌 통소 밑에 있던 그 구여울이다. 옛날의 지세가 우리 시대까지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은 이헌 공이 분강촌에 입향할 때부터 유년시절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될 때까지 670여 년 동안 강산을 크게 변화시킨 대지진과 같은 커다란 천재지변은 없었다는 얘기다. 물론 장마기에 큰 홍수로 인해 조선 중기 분강 머리맡 강가에 있었던 강각과 유년시절 애일당 아래에 있던 신작로는 파손되었지만 분강촌 지형 자체가 변하거나 낙강 물길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분강 앞과 뒤에 있던 두 개의 여울이 없어지는 지리적인 지형변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크고 작은 홍수는 숱하게 있었지만 이로 인해 산천을 갈아엎거나 탈바꿈 시키거나 벽해상전으로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분강의 모양새 또한 돛단배처럼 오목했다는 것에는 옛날이나 수몰 전이나 변한게 없다. 돛단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큰 종손(이용구ㆍ농암 16대 종손) 살아 생전에 "부내는 고무신 같이 생긴 지형 때문에 펌프를 박으면 안된다"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는 아마 분강이 지형상 나룻배처럼 생긴 탓에 마실에 펌프를 박으면 배에 물이 차서 액운이 따른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말인듯 싶다.
이렇게 보았을 때 구여울의 역사는 추정이 아닌 사료로만 추적해도 최소한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엽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 부내로 입향(1350년 경)했을 시점과 그리고 사료에 섬마ㆍ섬촌이 의인현에 속했었다는 공민왕(재위기간 1351~1374)때부터 산정해도 가볍게 600여 년을 넘어간다. 낙동강은 분강촌 입향시조인 이헌 공이 정착했던 이전부터 흘러와서 이곳 부내에서 큰 강물을 적수했을 것이다. 낙동강은 고대 가야국부터 존재했던 전설적인 강이다. 물론 조선시대 문헌에도 낙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분강촌의 지형을 보면 이 곳 동네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돛단배 같은 땅의 형상을 생성한 이후부터 구여울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천탄이었다. 분강촌과 분강은 입향조부터 사용한 지명이지만 나룻배 같은 우묵한 지형은 태곳적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이 분강이 넘쳐나서 여울목이 된 그 지형 일대를 보고 오래된 여울이라고 해서 구여울이라고 명명했을 테고 우리 또한 옛날부터 불러온 그 이름을 그대로 전수받아서 구여울이라고 했다. 구여울은 분강 가운데 가장 물이 많이 고인 통소의 바로 아래에 물이 넘치면서 완만히 경사진 지역을 말한다. 분천바위와 감퇴바위 좌측 100여 미터 지점에 구여울이 있었다. 즉, 마실 앞 분강에 물이 넘쳐나서 여울이 생겨났는데 그 역사가 하도 오래 되어서 구여울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옛말에 "천 년 가는 소 없고 만 년 가는 여울이 없다"고 했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분강촌에서 천 여 년 동안 부내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해 온 구여울이 당대에서 자연재해도 아닌 정부의 시책에 의해 마을과 함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애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요즘 같기만 해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세상이 요즘 같지 않았던 시대였던지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인재지변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수몰민의 관점에서는 한평생 애수와 한을 달고 살게 만드는 잃어버린 전설 속의 고향으로만 남아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사진은 애일당 아래(물레방간 바로 위 지역) 푸른 잔디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던 물레방간 강변의 겨울 전경이다. 물레방간 강변은 여름이면 강가에 왕버들과 수양버들이 무성했다. 주변지역에 있던 학교들과 타지에 사는 사람들이 봄소풍을 자주 오는 장소였다. 이곳 앞강에서부터 강물이 깊어지며 구여울까지 큰 분강을 만들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둘째 누님(오른쪽 두번째 분자ㆍ1974년 겨울) 친구들이다. 모두가 분강촌 종친들이다. 사진 오른쪽 강가에서 반도로 고기를 잡고 있는 승철이 할배의 뒷모습도 보인다.
왼편 우거진 소나무 숲속에 애일당과 강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신작로 아래에 전설적인 숭대인 농암바위가 강가에 고즈넉이 위치해 있었다. 그립고 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분강 강변이다. 나는 이 두 곳의 고향 언덕을 잊지 못해 평생 마음 둘 곳을 잃고 살았다. 지난 60여 년 세월 동안 잠의 길목에서 이곳을 서성거리며 숱한 향수와 애수에 얼마나 애탄해 하였던가. 내가 분강촌과 도산골 수필을 쓴 곡절도 이 아름다운 분강 강변에 볼모로 사로 잡혀 있는 듯한 애처로운 영혼 때문이었으리라. 농암 할배가 만년에 한양에서 그토록 귀거래를 읊은 연유도 농암가에서 나오는 이 아름다운 "모수모구(분강과 분강촌 강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두번째 사진은 분강 언덕에 있던 양수장 아래 푸른 솔밭(일명 "쑤"라고 불렀는데 소나무 숲이라는 뜻이다)이다. 쑤는 옛 선조들이 마을에 강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일종의 방풍림이었다. 그것이 옛날에 마실 중간 강가 언덕에 있던 양수장 아래부터 실거랑을 넘어 천방둑 안까지 이어졌었다. 우리는 한여름 달빛이 좋으면 이 솔밭 속 소나무 가지에 여러 개의 남포등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마을 4H 활동을 하는 형님들과 누님들이 가르쳐주는 율동에 맞춰 동요와 무용을 배우고 글도 배우며 문명의 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마치 "상록수" 정신을 전개하는 듯한 4H 클럽은 그시절 어느 동네에나 있었던 향촌민들을 일깨우는 아름다운 계몽활동이었다.
푸른 소나무 숲 속에서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는 전경은 최고의 미학이자 풍경화였다. 아이들이 소담스레 부르는 노래소리 옆으로 고요히 분강이 흐르는 가운데 황금빛 달빛이 강물에 비쳐 일렁거리면 그 전경이 너무나도 고와서 농암바위도 애일당도 물레방간도 통소도 구여울도 감퇴방구도 밀양대도 청고개도 구당나무도 새당나무도 실거랑도 그리고 강섶에 놀고 있던 하얀 물새와 황새들도 예주륵 이 광경을 구경하려고 아름다운 이곳 솔밭으로 마구 몰려들었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강물이 분강이고 바로 그 아래에 통소와 구여울이 있었다. 사진 속에 아이들은 재술이 아재(왼쪽 첫번째)와 동생들이다. 1970년 8윌 통소 바로 옆 강변 잔디밭에 앉아서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다. 솔밭 오른쪽으로 넓고 깊은 분강이 고적히 흘러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분강촌 사람들이 이름하여 "통소"라고 불렀던 바로 위에 있던 지대이다. 강물이 항아리 통같이 깊고 우묵하게 생긴 곳에 "소"를 만들어서 통소라는 지형 이름이 붙여졌다.
세번째 사진은 분강촌 실거랑 건너 천방둑 안에 있던 넓은 솔밭이다. 구여울에서 실거랑 쪽으로 200여 미터 올라가면 홍수가 났을 때 마을에 강물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천방둑이 있었다. 그 천방둑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동네 안쪽에 앞들로 가는 길과 평행하게 솔밭이 형성돼 있었다. 시원한 그늘과 풍광이 아름다워서 소풍놀이 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서 소풍을 온 예안중학교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선생님 뒷편 오른쪽 학생이 재술이 아재(1971년 봄. 당시 예안중학교 2학년)이다. 위 세 개의 사진 모두 분강촌에 살았던 종친 재술이 아재가 소장하고 있다. 필자의 분강촌 수필을 애독하는 아재가 수몰 전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옛 부내 사진 대부분을 보내주었다. 수필과 옛 사진들이 어우러지니 사실감과 더불어 옛 추억들이 생동감 있게 되살아났다. 사진은 모두 1970~1974년 사이에 촬영한 것이고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도 출품돼 있는 작품이다.
위 세 개 사진은 분천동 윗마을 동네 삽지껄에서부터 마을 끄트머리까지 순서대로 있던 명소를 차례대로 배열한 전경이다. 공통점은 사진에서 보이는 장소가 모두 분강 강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즉, 도산서원에서 신작로를 따라 1km 정도 내려가면 처음 만나는 지역이 분강촌 애일당과 농암바위 그리고 물레방간이 있던 첫번째 사진 주변이고 두번째 사진은 마을 중앙 신작로 바깥에 있는 분강 강변 쑤 아래 지역이고 세번째 사진은 마을이 끝나고 앞들로 들어가는 동구밖길이 시작되는 초입 왼쪽에 있던 솔밭 지대이다. 이 솔밭 앞에 있는 길 건너에 구당나무와 서낭당(당집)이 있었다. 솔밭 앞 동구밖길로 내려가면 양쪽으로 앞들이 펼쳐지고 앞들이 끝나면 청고개가 나온다. 동구밖길 왼편 200여 미터 아래 밭 속에는 새당나무가 있었고 거기에서 다시 200여 미터 강쪽으로 내려가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옆으로 울창한 미류나무 숲이 펼쳐진 밀양대(민왕대)가 나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강촌 구여울에 깃든 추억과 민담은 차고 넘친다. 구여울은 사계절 모두 깊은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전설처럼 만들어 냈다. 잃어버린 구여울의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얽힌 정취를 그리워하며 소회하는 이내 가슴은 실로 아리고 서글프다.
한겨울의 분강은 한 폭의 수묵화다. 그 수묵화 속에 서 분강촌 사람들은 분강과 더불어 도타운 흥취를 만들어 냈다. 양수장 앞 통소 위에서 잘 익은 얼음판을 돌과 쇠창으로 둥그렇게 도려낸 다음 어름배 가장자리를 따라 모래를 뿌린 후 이를 밟고 아카시아 장대로 만든 긴 노를 저어 양수장 위나 아래로 몰고 가면 강태공의 풍치가 가히 농암 할배의 강호지락에 버금갈만 했다. 우리 농암 할배도 이렇게까지 어름배로 강호를 헤삼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때는 물살이 세어 어름배가 점점 구여울 쪽으로 떠내려가서 급기야 여울목을 들이받아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 분천방구 옆으로 몰려가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나이론 윗도리와 추리닝 홑바지를 태우다시피 하며 말리곤 했다.
정월 초하루가 지나고 입춘이 가까워지면 얼어붙은 강물이 점차 녹으면서 분강이 넘쳐나며 구여울목에서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여울의 비명 소리가 절정에 달하는 정월 대보름날에는 새당나무 아래 당집에 어른들이 모여 서낭제를 지내며 한 해의 무사태평을 기복했다. 이러한 당집 제사는 동네의 평안을 앙망하는 부적 역할을 하는 한편 사나운 구여울 소리의 기를 꺾는 제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실 안의 성황당과 새당나무 그리고 앞들의 구당나무는 동네의 안녕과 풍요를 굽어살피는 수호신이었다. 어른들은 구여울 소리가 드세지면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긴다며 수근거렸다.
1964년 5월 구여울로 은어가 올라오던 중하순경 어느 일요일이었다. 전날밤 구여울 소리가 유난히도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가 싶더니 이튼날 아니나 다를까 큰 변고가 터지고 말았다. 안동에 있던 36사단 부대원들이 도산서원 주변에 대민지원을 나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분천동 고수빠 바로 위 급경사진 모랭이 고바이에서 기어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20여 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강중백이 쳐서 트럭 뒤에 타고 있던 많은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동승했던 일부 민간인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분강촌 윗마에 살았던 종친 승철이 할배(사고 당시 도산국민학교 1학년 8세, 현 68세)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본다. "새당나무 옆에 있는 밭에서 아부지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군대 트럭이 마을 사이로 난 신작로를 지나가면서 군대 노래를 크게 불러대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어. 조용한 농사철이라 동네에 큰 소리가 나면 다 들렸거든. 그런데 송티재로 올라가던 트럭이 어찌된 탓인지 고수빠 공굴 아래로 떨어지는 엄청난 큰 소리가 벼락치듯 들리는거야. 일하다가 말고 재봉이 움막집이 있던 실거랑 옆으로 정신없이 마구 뛰어 올라가는데 벌써 도랑으로 핏덩이가 섞인 핏물이 흥건히 흘러내려오는거야. 어른들이 아이라고 가지말라며 손을 저어 말렸지만 하도 궁금해서 어른들을 피해 재흠이네 집 뒤로 올라가는데 아이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내빼다시피 뛰어 내려오고 있는거야. 올라가 보니 수몰 후 잠시 이건했던 바로 그 애일당 아래 공글 위 도로에 가마니를 짜개서 덮어 놓은 시신들이 즐비했어.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참상이었어. 트럭은 선돌 어른 논둑과 도랑 사이에 거꾸로 곤두박질해 있고 깔린 사람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부내 사람들은 온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마니를 찾느라 야단이고 사고 현장에 어른들이 마구 몰려와서 논두렁에 가마니를 펴놓고 그 위에 시신들을 올려놓기도 하고... 또 여러 개 사다리에 가마니를 싸매서 그 위에 시신들을 실어 공글 오른편 산비탈로 억지로 올라가서 도로 위에 가마니를 펴놓고 그 위에 눕히고...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었어..."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였다. 사고 전날 밤 유난히 울음 소리가 컸던 구여울이 장차 일어날 사고의 전조를 미리 알려준 복선이었는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 또한 여느 때와는 달랐던 구여울 소리를 변고의 징조로 여기는데 큰 이견을 달지 않은 분위기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담모 할매와 효잠 할매는 "그게 다 구여울 소리가 벼락치듯 째지듯이 크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라며 마치 천탄을 원망하듯 일갈하셨다. 또 녹도(녹동댁) 할매는 "구여울의 큰 울음 소리와 함께 양수장 강변 잔디밭에 염소를 많이 매겨서 오는 해악"이라고 단언하시기도 했다. 분분한 소문으로 동네가 어수선할 때면 어김없이 서낭대를 높이 든 건립패들이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지신을 달래는 "서낭대 놀이(지신밟기)"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마실의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는 본체를 밤이면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였지만 낮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몸이 되어 하루종일 철벅거리며 어른들의 얘기를 비웃기라도 하는 양 천년지기 친구를 외면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여울이 주는 풍요는 뭐니뭐니 해도 오뉴월 한 철에 풍성하게 넘쳐났다. 구여울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풍경은 마치 수천마리의 은어떼가 여울목에 다리를 놓듯이 은빛깔로 반짝거리는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울에서 하늘로 튀는 하얀 물방울이 구슬처럼 공중에서 송송히 사라지는 물보라 광경은 낭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호시절의 구여울은 아이들이 강가에서 감자꾸지를 해서 배를 채웠으며 물섶에는 서리해온 수박과 참외로 넘쳐났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었다. 구여울 옆에 편평하게 누워 있는 분천방구 앞에서 동네를 주름잡는 청년들이 예주륵 모여서 솥뚜껑을 걸어놓고는 전을 쳐서 먹는 모습도 수타 눈에 띄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찌짐을 해서 먹고는 이윽고 서리해온 수박을 손날로 내리쳐서 되는대로 쪼갠 다음 마구 걸신 들린 듯이 속구배기를 파먹었다. 그리고는 고요한 정적을 벼개 삼아 하루종일 분강촌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피곤해진 심신으로 겨우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구여울을 또 마구 깨워 재끼며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행악을 부렸다. 한밤 중에 창졸간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구여울은 나 죽는다고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물살을 헤저으며 마구 몸태를 출렁거렸다. 다만 뒷동산에 높이 떠 있는 보름달만 이 광경을 정겨이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분강촌의 한여름은 언제나 수박과 참외로 풍성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수박걷이에 마구 동원됐다. 수박골을 따라서 인간 줄을 만들어 수박을 한통한통 건내주면 삼륜차에 짚을 깔고 오단육단 쌓아 올리는 모습은 가히 예술작품처럼 놀라울 뿐만 아니라 아구 또한 빈틈없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은 분강촌 영천이씨들을 아예 수박이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박에 관한 한 통달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는 차고 넘쳤다.
우리는 수박을 차에 싣다가 깨어지면 마치 맛사지를 하듯이 시원한 수박 세수를 하기도 했다. 정말 수박 하나만큼은 흥건한 동네였다. 얼굴에 온통 수박씨가 엉겨 붙어도 희희낙락 하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버드나무에 앉아서 놀고 있는 물새들도 물섶을 날아다니는 황새들도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함께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또 구여울로 풍덩 뛰어 들어가서 이리저리 헤살질하면 천탄에서 놀고 있는 피래미와 수루메기들도 덩달아 좋아서 함께 설치고 날뛰는 흥에 겨운 장면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났다. 오뉴월 한 때 구여울의 밤은 휘영청한 달밤에 철벅거리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 언제나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물레방간에서는 하얀 베적삼과 모시 저고리가 강가에 희멀겋게 나딩굴어진 가운데 떼 지어 멱을 감는 아낙네들의 왁자지껄하고도 자지러지는 소리가 천방과 쑤(솔밭)를 넘어 구여울과 신작로까지 파다하게 들려왔다.
♤분강촌의 한여름은 언제나 수박과 참외로 풍성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수박걷이에 마구 동원됐다. 수박에 관한 한 통달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은 분강촌 영천이씨들을 아예 수박이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수박을 삼륜차에 싣다가 깨어지면 마치 맛사지를 하듯이 시원한 수박 세수를 하기도 했다. 정말 수박 하나만큼은 풍성한 동네였다.(♤사진출처 : 옛도산향우회 카페. 작자는 미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강촌의 한여름밤은 달빛도 고왔다. 고요한 강물에 금빛으로 부서지는 보름달빛의 운치는 장관이었다. 농암의 어부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곡절을 유추할 수 있는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분강에 달빛이 황금빛으로 부서지니 낙강이 금방 취해 출렁이자 통소에서 놀던 구여울이 마구 넘쳐나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부포와 다래로 춤을 추며 흘러내려 갔다. 물새와 황새들은 철벅거리는 강물 소리에 놀라 천방둑과 실거랑 언저리에 있는 갈대 숲으로 황급히 날아갔다. 영지산 뒷동산에 훤히 떠 있는 보름달만 빙그레 웃으며 하늘 높이서 이 황홀한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운 전원일기를 썼다. 강호에서나 볼 수 있는 서정적이고도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곡식과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분강촌 구여울도 점점 여물어가며 작고도 긴 신음소리를 심심찮게 냈다. 가늘고도 길게 이어지는 야심한 가을밤의 구여울 소리는 흡사 귀신이 곡을 하는 소리 같아서 한껏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끊어질듯하면서도 긴 여운을 내며 한동안 울어대는 구여울 소리는 마치 풍요를 빼앗긴 뒤 떠나는 한에 맺힌 여자의 비탄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뉴월 성하 때 내는 소리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모양새였다.
겨울의 구여울 소리는 얼어붙은 통소 밑을 간신히 빠져나온 강물이 발악하는 앙칼지고도 매몰찬 소리였다. 숨이 가뻐서인지 마디마디 내지르는 단말마 같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가 반복하기를 달과 별이 빛을 잃어가는 새벽 인시까지 들리기도 했다. 이럴 때면 마실 사람들이 고수빠에 있는 곳집을 찾아가는 발길이 잦아지면서 윗대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초상이 일어나곤 했다.
구여울 소리는 이렇듯 입향조 이래로 마을의 애환과 더불어 장구한 세월을 함께 해왔다. 선대와 후대들이 분강에서 느끼는 감회는 달랐으리라. 하지만 목가적이고 강호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그 운치와 정취는 마냥 같았으리라. 이는 뒷동산에 천년지기 훤한 보름달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그대로 있었을 테고 묵화 같은 돛단배 형상을 한 분강이 태초부터 끊임없이 흘렀을 테고 농암바위와 자리바위와 감퇴바위와 분천바위가 천 년 동안 매냥 그 자리에 있었을 테고 애일당과 강각과 병암이 시대를 넘나들며 시가를 읊는 사람들의 요람이 되었을 테고 태곳적부터 분강에서 멀어져 가는 구여울 소리가 마치 대동강에서 이별하는 "송인送人" 처럼 사시사철 분강촌 사람들에게 구슬프게 울려 퍼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수몰 전 한 시대를 분강촌에서 살다가 흩어진 마실 족친들이 기억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추억담에 깃든 옛 얘기를 찾아서 떠나 보자.
1970년대초 부내 윗마(신작로 윗쪽에 있는 마을)에 살았던 덕개 할매 자제인 강후 할배(73)가 기억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은 이렇다. 강후 할배는 수몰 전 부내에 살 때 "4H 활동"을 무던히 했던 계몽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실제 양수장 아래 쑤(수풀 수ㆍ소나무 숲)에서 우리들에게 노래와 글을 가르쳐 주던 추억도 고스란히 생각난다. 그리고 부내 실거랑 다리 아래에 만든 배구장에서 청고개 마을 청년들과 부내 동네 청년들 간에 배구 시합을 주도하던 모습도 가물거리긴 하지만 또렷한 모습으로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뉴월이면 구여울에서 은어낚시를 하던 희옥 선생(우릉골 할배)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네. 하얀 물보라 위로 반짝이는 은어를 낚아올리던 전경이 참 잘 어울렸던 어른이셨지. 그리고 구여울 옆에 있는 감퇴바위 아래에서 한여름 밤에 동네 친구들과 지짐을 붙여 먹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네."
조각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랫마(신작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 비밑 옆에 살았던 새벽 할매 손자인 재필(74)이 아재가 추억하는 구여울 기억은 더욱 생생하다. 아마 아랫마 사람들이 위치상으로 구여울과 더욱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구여울과 밀양대(민왕대)에 가서 참 많이도 놀았지. 동네에 사는 또래 친구들과 한여름이면 홀딱 벗고 구여울에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고 마구 놀았어. 그러다가 벗은 채로 섬마로 건너가서 남의 땅콩을 서리해서 후다닥 건너오면 땅콩밭 주인이 어이 알고 구여울 건너까지 쫓아와서 옷을 가지고 섬마로 가버리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도로 건너가서 울고불고 빌며 난리를 치면서 옷을 겨우 찾아왔지 뭐야... 구여울 밑으로 내려가면 강폭이 좁아지며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에서 헤엄치고 섬마로 건너가서 우와기 소매 부분과 그리고 쓰봉 아래를 묶어서 만든 옷 자루에 되는대로 땅콩과 감자를 마구 캐 담아서 다시 구여울 쪽으로 줄행랑 치듯이 건너왔지... 그 짓을 숱하게 했어... 그 시절은 어느 세대나 다 그렇게 해... 그게 놀이이자 큰 재미야... 한여름 밤에 막대기에 천을 여러 번 감아서 석유를 뿌린 후 환하게 불을 밝히면 구여울 물가에 나와 있던 고기들이 불빛을 보고 마구 달려드는 거야. 그러면 그냥 바게스로 막 퍼담다시피 잡았지 뭐야... 이런 것을 불치기 혹은 천렵이라고 해... 잡은 고기들을 감퇴방구나 분천방구 옆으로 가져가서 매운탕도 해먹고 구워도 먹고... 또 집에서 가져온 밀가루로 전도 붙여 먹고 감자꾸지도 해먹고... 그러다가 더우면 또 구여울로 몰려 가서 멱감고 와서는 분천방구 주변에서 홑이불 덮고 자기도 하고~"
아랫마 실거랑 옆에 살던 중수 아재(62)는 구여울 하면 우리가 보통 가늠할 수 있는 기존 관념과는 다른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구여울은 늘 우리들의 놀이터였지. 큰 물이 줄어들고 강물이 좁아지면 구여울 아래 중간쯤에서 출발하여 섬마쪽으로 세찬 물결을 헤치며 왔다갔다 왕복을 하면 힘이 쭉 빠지곤 했지. 그런데 나는 이런 것도 봤다네. 엄마가 구여울 물을 떠와서 정안수(정화수)로 떠놓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것 같기도 해... 당시의 계절적인 시기는 확실히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구여울이 크게 우는 소리에 새벽에 잠이 깼는데 물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던지 그때에는 신기하다는 느낌도 들었어..."
여울목에서는 고기들이 떼지어 몰려 있기 마련이다. 개구장이 시절의 재미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을 승철이 할배(68)가 전해주었다.
"구여울에 고기들을 잡으려고 이따금씩 타지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몰려 와서 바게스에 청산가리를 타서 여울목에서 뿌리면 큰 고기들이 마구 장가졌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서는 안되지만 60년대 그 시절은 그랬어. 그래서 죽은 큰 고기들을 수거해가면 나머지 작은 고기들은 동네 아이들이 마구 주워 담았지... 또 날이 가물어서 여울에 물이 줄어들면 뱀장어들이 여울가 동그란 돌 아래로 들어가 숨어 있으면 우리는 강가에 널려져 있는 여꾸풀을 뜯어와서 돌로 진이겨 물에 풀면 뱀장어도 나오고 다른 고기들도 기절해서 나오면 마구 건져 담았지... 구여울에서 자전거 밧데리에 전기줄을 길다랗게 이어서 전기로 고기를 잡기도 했어. 누군가가 계속해서 페탈을 밟아주어야만 전기가 생겨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한번은 큰 고기가 전기에 혼이 나가서 얼이 빠진 거야. 그래서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큰 고기 봐라!' 하고 고함을 질렀더니 페달을 밟던 놈이 글쎄 너무 좋았던지 페달을 멈추고는 '어디!' 하며 구경을 하는 바람에 큰 고기가 제 정신을 차리고 도망을 가버리는 거야. 큰 고기가 전기에 감전되어 혼절할 때마다 모두가 너무 좋아서 '큰 고기 봐라!' 하고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치면 페달을 밟던 놈들 가운데 열에 열이면 죄다 페달을 멈추고 '어디?' 하며 구경하는 바람에 큰 고기들이 그 사이에 제 정신을 차리고 다 도망을 가는 일이 수타였제... 자전거 페달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밟아야만 전기가 일어나거든..."
구여울 물을 정화수로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구여울 물을 신성시 했다는 얘기가 된다. 알다시피 정화수는 이른 새벽에 길러오는 물로 가족의 안녕과 평안를 기원하는데 쓰이거나 혹은 정성을 담아 약을 달이는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우리 선대들은 구여울 물을 조왕에게 바치는 정안수로 사용할 만큼 신성시 했다는 얘기가 된다. 농암 할배 이전부터 존재하며 장구한 세월 동안 부내 동네와 함께 해 온 구여울에 대한 마실 사람들의 일종의 숭배가 담긴 기복 신앙이 아닐까 싶다. 수목들도 100여 년이 지나면 "고시레~"를 받으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향민들의 정서인데 하물며 천년지기 구여울에 어찌 정령이 깃들어 있지 아니 할까.
선대 어른들이 구여울 소리의 크기에 따라 애환을 달리 추정하는가 하며 또 정안수로 조왕에게 바치며 가족의 평안과 안녕을 빌었다는 것은 결코 구여울을 단순히 흘러가는 평이한 물로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하나의 단서가 될 법도 하다. 이렇듯 구여울 소리는 분강촌에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이 제각기 안고 있는 곡절과 사연에 따라 느끼는 감흥과 정취 또한 각색으로 다가왔으리라. 자연의 이치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인간들에 의해 각양각색으로 흩어져서 들리는 연유는 마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일야구도하기一夜 九 渡河記'에 담긴 '존재의 본체는 변하지 아니 한데 오직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즉, 낮에는 눈으로만 보고 밤에는 귀로만 들어야 하는 인식기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상이한 감상과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즉, 선인들은 강호를 초연히 천연지기처럼 여겼기에 구여울 소리는 언제나 낙랑하게 들렸으리라. 하지만 후대들은 속세에 맞닿고 있는 삶의 무게로 인하여 희노애락의 처지에 따라 각색으로 받아들였으리라. 유년시절 함께 했던 구여울 소리는 크게 외경(畏敬ㆍ두려움과 공경)과 지락(至樂ㆍ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양분되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동네에 병환이 있거나 초상이 났을 때 들려오는 시름 섞인 애절한 구여울의 울음 소리와 한여름 신나게 멱을 감을 때 내는 철벅대는 천탄의 소리는 현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가 가슴 속에 이미 달리 존재하고 있는 만큼 그 소리 또한 확연히 다른 빛깔로 다가오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리라.
ㆍㆍ ㆍ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분강촌 실향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구여울을 망실한지 어느덧 50여 년이 되어간다. 유년시절 양수장 아래 쑤(소나무 숲)에서 잔디씨를 훑거나 혹은 통소 위 강가에서 고적히 낚시질을 하며 구여울을 바라보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득하게 흘러가는 구여울 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로 흘러가는 구여울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저 구여울 강물이 보이지 않는 산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저 구여울은 언제까지 소리를 낼까. 그리고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소년의 끝없는 생각이 어느 날은 반나절을 훌쩍 넘기며 이어지는 가운데 상념도 함께 깊어져 가던 모습이 적이 떠오른다. 그럴때면 구여울은 언제나 자애롭고도 관대한 목소리로 다가오며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소년의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곤 했었다. 잃어버린 분강촌 천년지기 구여울의 시원한 노래 소리가 한없이 그리운 팔월대보름 밤이 깊어만 가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여울 소리ㆍ이종구(2023.7.21)
분강에 구여울 소리 멎은지 몇 해 이던가
부초 같은 이내 인생 무상히도 흘러 갔네
강물은 통소 여울목 넘어 부포로 가는데
갈곳 잃은 나그네 신세 어디로 가야 하나
농암바위 구당나무 이별한지 어엿 반세기
낙강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전설의 구여울 소리와 함께 한 시대를 분강촌에서 살았던 정겨운 주인공들이다. 위에 사진을 순서대로 언급하면 첫번째는 필자가 외지에서 여울 전경을 찍은 사진이고 두번째 사진부터 네번째 사진까지는 분강촌에 있었던 농암바위ㆍ분천바위ㆍ감퇴바위 순이다. 분천바위 위에서 한껏 포즈를 잡은 동네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도 보인다(왼쪽부터 종친 재수ㆍ재술이 아재, 유서ㆍ승철이 할배의 유년시절 모습이다. 현재는 모두 일흔을 눈 앞에 두고 있다. 1973년 겨울이고 재술이 아재가 안동농림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네번째 사진은 감퇴바위인데 비슷한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초서로 "쌍암雙巖"이라고 새겨져 있다. 바위 뒷면에 글씨가 있어서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섯번째 사진은 네번째 사진인 감퇴바위에 새겨져 있는 초서체 한자인 "바위 암" 자이다. 일곱번째 사진은 종친 재술이 아재가 수몰 후 2000년대 초반에 강물이 얼어붙은 한겨울에 분천바위(위 세번째 사진이 수몰 전 분천바위 모습이다) 일대를 촬영한 사진이다. 반세기가 지나서인지 어린시절 익숙했던 주변 공간의 위치 조차 흐릿하기만 하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반가운 바위 얼굴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유년시절 저 커다란 숭대 어른과 함께 했던 세월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덟번째 사진은 수몰되어 사라진 옛날 통소와 구여울 일대를 뒷배경으로 담은 전경이다. 사진 속 인물은 재술이 아재이다. 분천바위 왼쪽 100여 미터 지점에 통소와 구여울이 있었다. 여섯번째~여덟번째 사진은 모두 재술이 아재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재술이 아재는 그 시절 촬영한 상당수의 사진을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시켜 보전하고 있다. 필자가 수필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옛날 분강촌 사진은 재술이 아재가 필자에게 직접 보내준 사진들이다. 참 소중한 옛 사진들이다. 두번째(농암바위)와 다섯번째(감퇴바위) 사진은 농암 종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다.
마지막 단체 사진은 필자의 가족인 분자 누님이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목전에 두고 분강촌 수몰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정부에서 마련한 단체 위로 여행을 가서 찍은 애틋한 사진이다. 당시 여행 분위기는 시종일관 매우 숙연했다고 한다. 여행의 의미를 알고 간 것인 만큼 즐거운 대화가 어찌 오갈 수 있는 분위기였을까!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이 서글픈 사진은 고려 말엽 입향조 이헌 공 이래 분강촌 사람들이 620여 년 동안 터전으로 삼았던 이 동네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단체 사진이 되고 말았다. 안동댐 준공을 눈앞에 두고 상당수 부내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1975년 봄이었으며 장소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옆 마당에서 촬영했다. 세월이 유수처럼 반 백 년이 흘러 이제 사진 속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과 택호만 남긴 채 별이 되었다. 사진 속 제일 어렸던 분자 누님의 나이도 어느덧 일흔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두가 그저 다 그리운 옛사람들이다♧.
첫댓글 분천에 얽힌 많은 사연들 생생하게 들려 주네
옛사람들이 지명을 붙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