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추석과 중국의 중추절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고대 중국의 8월 민속(?)과 그들이 본 신라 추석
6세기 중엽 종름(宗懍)이 고대 중국인의 세시풍속을 적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보면 8월 민속은 아래 기사가 전부다.
8월. 8월에 내리는 비를 두화우(荳花雨)라고 한다. 8월 14일에 민간에서 모두 붉은 먹으로 어린 아이의 이마 위에 점을 찍으니 이를 천구(天灸)라고 하며 역질을 막는다고 여긴다. 또 비단으로 안명낭(眼明囊)을 만들어 서로 주고받는다.
수나라 두대경(杜臺卿)이 지은 『옥촉보전(玉燭寶典)』에는 “풍속에 8월 초하루에는 붉은 먹을 어린이 이마에 찍는데 이것을 천구라고 부른다.”라고 적었다. 당나라 서견(徐堅) 등이 쓴 『초학기(初學記)』의 세시풍속을 보면 7월 보름 우란분절에 대하여 기록한 뒤에 8월 기사는 아예 없고, 9월의 중양절로 넘어간다. 맹원로(孟元老)의 북송시대 궁궐문물 및 세시풍속 기록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비로소 누대에 올라 달을 감상하는 ‘중추(中秋)’ 기사가 나온다.
『수서』(636년)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책에는 신라의 8월 보름 풍속을 반드시 소개했다. 궁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활쏘기 따위를 시켜 옷감이나 말을 상으로 주었다 하니 경기(game)를 하고 여흥이 뒤따르는 온 나라 볼거리로서 설날에 버금가는 명절이다. 『수서』 신라전은 진평왕 때의 사정이 실시간으로 반영된 동이전(東夷傳)이다. 그 이전에 신라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유학 갔고(596), 몇 년 뒤 원광스님이 귀국했으며,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는 진평왕 35년(613)에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강회를 참관했다. 당나라에 들어와서는 진평왕 48년에 해동 3국을 두루 다니면서 외교에 대해 조언한 주자사(朱子奢)의 예에서 보듯이 더욱 이웃나라 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수, 당나라 사람이 보기에 추석은 가장 신라다운 명절이었다. 이 명절에 대하여 약 300년 뒤에 나온 『구당서』 편찬자는 ‘또 8월 15일을 중히 여겨’라고 하여 연회와 무술경연을 베푼 까닭을 덧붙이고 있다.
2. 일본승 엔닌(圓仁)이 본 당나라 신라유민들의 추석
당나라에 불교를 배우러 간 일본승 엔닌(圓仁)은 지금의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있는 적산(赤山)에서신라인들의 추석을 보고 『입당구법순례행기』 839년 8월 15일의 일기에이렇게 써놓았다.
법화원(法華院)에서는 박돈병식(餺飩餅食) 같은 음식을 진설하여 8월 15일 명절을 쇤다. 이 명절은 다른 나라에는 아직 없으며 오직 신라에만 있다. 노승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라가 예전에 발해와 전쟁을 했는데 이 날 승리하여 명절이 되었다. 노래하고 흥겹게 춤추기를 대(代)를 이어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갖은 음식을 진설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관현악 연주는 밤까지 이어지는데 사흘이 지나서야 그친다. 이 산(법화)원에서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쇤다.
추석의 기원에 대한 고구려 승전설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어떻든 신라 추석의 고유성에 대한 제3자의 언설은 천금의 무게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안목은 현대에 와서도 확인된다. 일본의 민속학자 요다 치호코(依田千百子)는 추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경우는 나라의 축제로서 궁정에서부터 庶人에 이르기까지 이 명절을 즐기는 점이 이웃나라와 확연히 구분된다. 활쏘기, 길쌈내기는 모두 축제의 종목에 불과한데 특히 활쏘기를 보고 발해와의 전투에서 승전(勝戰) 기념으로까지 연결시킨 듯하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특징적인 추석을 기록해놓은 것은 한국-신라뿐이다. 이 기록이 얼마나 믿음직한가는 그 원전 연구를 통해야 한다.” 이후 그는 다른 논문에서 “한국 추석이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것은 없다”고 재차 확인했다.
추석 음식 박돈은 ‘박탁(餺飥)’으로도 읽혀지는데 수제비를 뜻하기도 하나 당나라 때 와서는 칼국수를 일컫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문제는, 여기에다 병식 즉 떡이 붙어 나온다. 이 네 글자에 대한 해석은 한국•미국•일본•중국의 학자들마다 제각각이다. 수제비+떡, noodle+cake에다 만두까지 지목되어 그들 끼리의 짝짓기[組合]는 눈이 부시다. 일본 스님이 오직 신라에만 있는 8월 보름 명절이라 했고, 그 가운데서도 굳이 특이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당나라나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보는 메뉴라면 애초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즈음에서 우리나라 학자만이 풀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이 있다. 비로소 추석 절식(節食) 송편이 박돈의 후보에 들어갔다. 중국 음식에는 재료는 다르지만 송편과 흡사한 훈툰(餛飩. 한자도 절반이 같음)이란 것도 있으니 일본승 엔닌의 고심과 기지(機智)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어떤이는 송편이 1970년대에 일반화되었다고 하여 추석의 중국 기원설에 손을 들어주기도 한다. 방법론에서부터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송편에 대한 신문 기사를 찾아 시기를 소급해보거나, 송편이 유행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사회변동을 든다.
그러면, ‘박돈병식’을 반드시 두 가지 음식으로 봐야 하는가? 필자는 박돈이 만두 모양이라는 데는 찬동하지만 그 내용/실제는 쌀로 만든 떡 즉 송편 한 가지였다고 본다. 신라인들만이 즐기는 추석과 이때 처음 본 음식을 기록하면서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나열함은 어딘지 절박감이 떨어진다. 필자는 박돈-병식을 동격/등식으로 보아 ‘훈툰식(만두같이 생긴) 떡’ 즉 송편이며 그 밖의 음식 모두를 일러 ‘따위[等]’라고 썼다고 해석한다.
3. 신라의 추석 풍속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신라 추석의 광경을 볼 차례다.
유리왕 9년(기원 32)에 신라 왕경의 6부를 둘로 나누어 7월 보름부터 한 달간 길쌈내기를 하여 그 많고적음에 따라 승패를 가린다. 진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낸 다음 ‘회소곡’이라는 노래를 슬피 부르고 춤춘 것이 가배의 유래다. ‘가배’가 변하여 ‘(한)가위’가 되었다. 이 가배 기사에 앞서 신라 6부 각각에 성(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을 내리고 17관등(官等)을 정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 성씨는 신라가 648년 나당동맹을 맺은(648) 이후에 적극 수용된 문화다.17관등은 법흥왕 7년(520)에 완비되었다. 그러니까 풍속 면에서 본다면 가배는 상고시대 이래의 축제이겠지만 체제를 갖추게 됨은 6세기즈음이 된다.
추석날 밤에 김유신은 고구려 첩자를 잡았다고 한다. 구경꾼이 붐빌 때는 날치기나 불량배가 활개 치기 마련인데 하물며 첩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간첩을 찾아내는 김유신의 비범한 능력에다 너그러이 타일러 보내는 아량 역시 전설 풍의 <김유신 열전>이다.
한가윗날 성덕왕이월성 언덕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보필하는 관리들과 술자리를 벌여놓고 즐기다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을 불러오라고 명하였다.성덕왕이윤중만 총애함에 대해 고관들이불만을 토로하자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 무사한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 덕분이오. 만약 공의 말과 같이 하여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착한 이를 잘 대우하여 자손들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가 아닐 것이오.”라 하여 무마했다. 이렇게 신라 추석은 위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하나 되는 잔칫날이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왕들이 추석날 달놀이하고 신하들을 격려하기는 마찬가지다.
추석이 인간에게 좋은 날[吉日]이라면 귀신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날은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고승들 비문에 빗돌을 추석에 세웠다는 기록은 네 군데나 보인다.
경덕왕(742~765)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가 지은 음악 가운데 ‘추석곡’이 있다. 동서고금에 추석 자체가 음악의 대상이 된 예는 신라뿐이다. ‘추석’이란 제목으로 쓴 당나라 두목(杜牧)(803~853)의 7언 절구도 있지만 단지 8월 보름에 둥근달이 떠 있는 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대 중국에서 중추절이 명절로서 존재한 적은 없다.
4. 중국 중•근세의 중추절과 추석 기원 논쟁
중추절이 중국에서 형태를 갖추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때는 송대이며 명•청대에 이르러 비로소 3대 명절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들의 8월 보름 달구경은 단순한 문인(文人) 풍류에 지나지 않던 것이 성당기(盛唐期)에 도교가 유행하면서 급속히 유행하였고, 드디어 서민에까지 미치게 되자 수확제의 뜻도 포함되어 명절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자신들의 중추절을 연구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양대 진영의 논문 중에서 초창기 두 편을 소개한다.
중국에서 자신들 중추절의 기원에 대해 처음 논급한 학자는 슝페이(熊飞, 1996)다. 그는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실린 신라유민의 추석 기사를 인용하여, 중당(中唐) 이래 중국 시문(詩文)에 ‘8월 15일’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몇 년 뒤 양린(楊琳, 2000)은 슝페이를 조목별로 반박했다. 첫째, 정치•문화적으로 우세한 민족이 열세한 민족에게 영향 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당나라 같이 세계적 강국이 소국 신라의 명절을 수용했을 리가 없다. 둘째, 적산 법화원에서 신라유민들이 8월 보름에 큰 잔치/놀이를 하는 것은 이 날 신라가 발해국과 전쟁하여 이긴 날이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런 사실은 역사상에 보이지 않는다. 셋째, 월병을 중추절 음식이라 하여 신라 추석과 연관시키는 데 찬동하지 않으며, 월병과 중추절은 관계가 없다. 넷째, ‘추분 달제사(秋分 祭月)’는 옛부터 중국의 전통으로서 고전에 씌어 있는 대로다. 다만 추분에 보름달을 못 보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날짜를 8월 15일로 고정시켜 발전한 모양이 후대의 중추절 의례다. 앞 장에서 살펴본 중국 정사 신라전이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추석 내용만이라도 제대로 해석/이해한다면 네 가지 반박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두기로 한다. 우세•열세론으로 말하면,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한 접이부채(摺扇)는 머지않아 송대(宋代)에 들어왔고, 명•청나라 때 크게 선호하였으며 결국 유럽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그들의 국무원(國務院)은 2006년 5월 20일에 중추절을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2008년에는 <전국 명절과 기념일 휴가 방안>을 통과시켜 중추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다.
5. 신라/한국 추석에 대한 허망한 도전
‘명절’이라면 일반적으로 다음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해마다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다. 둘째, 신분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한다. 셋째, 그 내용 중에는 승패를 겨루는 경기(game)가 있다. 넷째, 이날에 즐겨 먹는 음식이 있다. 다섯째, 이날을 부르는/가리키는 고유한 이름이 있다. 신라 추석 이래 우리 민족의 추석은 위의 요건에 어김없이 부합된다. 이에 비해, 왜 명나라 때 와서야 월병이 나타났으며, 4대 명절에도 못 들던 중추절이 어떤 계기로 3대 → 2대 명절로 격상되었는지를 돌이켜볼 일이다. 그 변화의 원인으로는 이웃에 있는 신라(고려, 조선)의 영향을 빼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발명권(發明權)’이란 어느 개인이나 기관 또는 국가(국민)가 창조한 중대한 과학기술 또는 문화적 성취에 대하여 누리는 물질적·정신적 인센티브로서 법률적으로는 소유권이나 재산권을 이른다고 한다. 그들이 중추절에 대한 발명권을 말하려면 첫째, 발명권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무엇보다 수나라 때 이래 자신들의 선조들이 눈여겨보고 찬탄했던 신라/한국의 추석을 현대의 후손들이 부정하는 난센스를 보여서는 주변국까지 곤란해진다.
(이 글은 글쓴이의 「추석 명절의 정체성 – 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학보』84, 고려사학회, 2021을 요약한 것임)
첫댓글 - [뉴스초점] 민족 대명절 추석, 유래와 전통은?
https://www.youtube.com/watch?v=v0_XyzYEUq8
PLAY
- [임쌤티비]테마 수업_
중국의 전통명절_중추절(with 클로바 더빙)
https://www.youtube.com/watch?v=IegFcphwpD4
PLAY
- 鮮肉餛飩學會這樣調餡,家庭配方,出鍋鮮香嫩滑,比飯店的還好吃【夏媽廚房】
https://www.youtube.com/watch?v=tU8f6KDEgY0
PLAY
- 와~~이건 정말 대박인데요❓
옷걸이에 옷 말고 오이를 걸었더니 가족들이 다른건 안 먹고 이것만 찾아요👍👍
여름 내내 무르지 않는 할머니들의 비법💯
https://www.youtube.com/watch?v=ojvyY2bwWPQ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