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3.9월 8.18 정변, 1864.2월 산요회의 성립 2개월만에 해산. 1864.4월 이치카이소 정권 성립
일련의 정치 격변을 겪으며 지방의 양이지사 무리들이 소규모 무장 소요를 일으키다
- 1863. 9, 10월 야마토에서 천주조의 난
- 1864.5월 미토에서 텐구당의 난
보통 간단하게 진압됨
* 신센구미가 체포한 양이지사 후루타카 슌타로가 가혹한 고문 끝에 쿠데타 음모를 실토
- 이치카이소 정권 실세들을 모두 암살, 납치하고 황궁에 불지른 후 천황을 납차하여 조슈로 간다는 계획
* 1864.7.8 밤 10시 교토 신조 가야마치, 조슈 및 기타 번의 양이지사들이 거사 모의를 위해 집결해 있던 여관 이케다야에 신센구미가 습격, 격전이 벌어짐
- 이후 아이즈, 구와나 번병 등이 추포 작전에 가세
- 다음날 날이 샐때까지 양이지사 7명 사살, 24명 검거 (기도 다카요시는 자리를 피해 있던 덕분에 도주 성공)
- 이 일로 신센구미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키다
* 이케다야 사건에 조슈 번정은 분기탱천 강경 대응론이 대세가 된다
- 1864.8월 조슈는 2천 병력으로 교토 상경 거병
- 다카스키 신사쿠는 끝까지 거병을 반대하다 체포되어 가택 연금
- 조슈 병력의 교토 입경을 앞두고 교토에서는 다카요시가 어소 경비를 맡은 각 번 번저들을 돌며 로비전을 벌이다
- 조정에선 다루히토 친황이 조슈의 입장을 변호
* 조정은 조슈병의 상경을 불허하고 귀향을 명했지만 조슈병력은 육로와 뱃길로 계속 교토를 향했다
- 박부가 교토 방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병력은 3만이상이라 했지만 교토 현지의 제 번 병력은 3-4천 정도, 그중 확실하게 전투에 나설 병력은 어느정도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특히 사쓰마 병력- 사쓰마의 평판이 안 좋은지라 유배에서 펼려났고 재야에 인망이 있는 사이고에게 중임을 맡기다)
* 1864.8.20 0시 세갈래로 진격해 온 조슈 병력이 쿄토 인근에 포진
- 가장 먼저 후시미 가도로 진격중인 병력 800(후쿠하라 모토베 지휘)
- 텐류사 방면 병력 600명 (구니시 치카스케, 기지마 마타베)
- 가장 멀리 텐노산 방면 600명 (마스다 치카노부와 구사카 겐즈이)
* 새벽 2시 후쿠하라 모토베 병력과 후시미 가도를 지키고 있던 오가키 번 병력과 조우
- 교전 중 후쿠하라가 얼굴에 총상을 입고 진입 실패.
- 교토의 조슈 번저도 히코네 번병의 총포에 의해 봉쇄되어 거점화 실패
- 기지마 마타베의 병력이 나카다치우리문을 깨고 히마구리고문 돌파를 위해 아이즈 번병과 격돌
- 사쓰마 병력이 조슈 병력의 측면에 등장하여 공격을 개시, 마타베가 가슴에 총격을 받고 후송후 할복하다, 사이고도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 결국 하마구리고문의 조슈 병력은 아이즈와 사쓰마에 의해 궤멸
- 구사키 겐즈이는 점심 무렵 교토 시내에 도착, 대부분 사카이마치고문에서 저지 되었으나 구사카 겐즈이와 소수 인원이 어찌어찌 다카스카사 스케이로 저택으로 진입(조수에서 관백자리에 올려주었으니 탄원서를 천황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
- 스케이로는 도망가고 아이즈와 에치젠 번병의 포탄이 다카쓰카사 저택에 쏟아지자 구사카 겐즈이는 조슈 학생 데라지마 주사부로(요시다 쇼인의 제자 24세)와 서로 칼을 찔러 자결
- 살아남은 병력은 조슈로 퇴각, 잔존 낙오병은 센센구미 등에 의해 사냥 당하다
* 조슈측 전사 265명, 교토수비측 전사 아이즈 60명 포함 97명
- 다카스카사 저택과 조슈 번저 등을 태운 불길이 교토 시내 전체로 번져 교토 대화재. 3일 밤낮 불이 이어져 가옥 2만 8천호 소실
- 천하 여론은 황궁을 포격하고 교토를 불태운 조슈에 대해 부정적이 될 것으로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