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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함을 받으라
2011년 1월 5, 12일 / 삼일예배 / 마 11:28-30
■ 중국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니까 그렇게 알아들으십시오. 염라대왕 앞에 세 사람이 불려왔는데, 염라대왕이 생명록을 보니까 아직 죽을 사람이 아닌데 저승사자가 잘못 데려왔습니다. 염라대왕이 사과를 하고 “자네들은 세상에 돌아가서 몇 년 더 살다 와야겠네. 우리가 실수해서 잘못 데려온 것이니 그 값으로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주겠다. 그러니 각자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을 많이 가져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염라대왕은 그에게 돈을 듬뿍 주어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권세를 달라고 해서 권세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돈도 권세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 동안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걱정과 근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걱정 근심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예끼 놈”하고 호통을 치더니 말했답니다. “세상에 그런 데가 있으면 내가 가겠다.”
만약에 사람들에게 묻기를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한다면 ‘좋은 배우자를 원합니다.’ 혹은 ‘돈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좋은 직장을 원합니다.’ 혹은 ‘건강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할 분이 많을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이유야 있겠지만 이는 지혜로운 대답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배우자, 많은 재물, 건강이 있을지라도 평안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평안함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좋은 주택에,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평안할 줄 알지만 일시적인 평안은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어느 사람이 그 마을에 가장 팔자가 좋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벼를 3천 석 하는 부자였고, 자녀도 5남 3녀요, 손자만도 30명이나 되는 사람이니 누가 보더라도 부귀공명과 자녀의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에게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이 마을에서 가장 다복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나같이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하루도 걱정이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내가 볏섬이나 하는 탓으로 뜯어먹으려고 덤벼드는 놈뿐이요. 소작인까지 핑계를 만들어 돈을 안 내려고만 들고, 많은 자식들이 서로 돈만 타내려고 합니다. 또한 손자가 30명이나 되니 그저 만나는 놈마다 손을 내미는 녀석뿐입니다. 그러니 내 팔자가 너무 사나운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문제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제일 살고 싶은 나라가 어디입니까?”라고 하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미국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부자 나라일지라도 거기에 우리가 찾는 평안이 있습니까? 몇 년 전 한국인들은 조승희라는 한국 출신의 청년 때문에 너무나 큰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총을 들고 자기가 다니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 들어가서 교수를 포함하여 33명의 귀한 대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쏘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준비한 후에 저질렀기 때문에 더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이 총기 천국이라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뉴욕시만도 200만 정 이상의 불법 총기를 있다고 추정될 정도로 미국은 마음대로 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005년 미국에서 발생한 1만 5천여 건의 살인 사건 중 68%가 총기에 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미국 사회가 앞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마구 총질하는 가공할 참사가 벌어질 가능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근본적인 불안 때문인지 모르나, 미국에서 수면제가 1년에 700억 알이나 소비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 사람들이 먹는 수면제가 하루 1,900만 알이 됨을 의미합니다. 즉 하루에도 1,900만 명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살기 좋다는 미국도 결코 평안한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진정한 평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평안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코카콜라의 창업주인 아더 캔들러는 알콜중독자로 늘 술에 취하여 있으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나는 술 끊는다.”고 큰소리를 늘 했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해서 술 끊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죄의 본능을 이겨야 성공할 수 있느니라.”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바로 그때에 그 아내가 “주님, 우리 남편이 술중독에서 고침을 받게 하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희한하게 술맛이 딱 떨어지고 아예 술을 쳐다보기도 싫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코카콜라 회사를 세웠고 오늘날 코카콜라로써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안 된다고 소리만 지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불평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망만 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온갖 무거운 짐, 가난의 짐, 병고의 짐, 실패의 짐, 열등의식의 짐, 불안과 초조의 짐, 위태한 사업의 무거운 짐을 내게로 가지고 와서 맡기면 편히 쉬게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가 주시는 쉼, 그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요 14:27 / 나는 너희 마음에 평안을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그러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셋방 살던 사람은 좋은 주택만 구입하면 더없이 평안과 행복이 있을 줄 알지만 일 년만 지내도 또 다시 그 집에 대해서 불만이 싹틉니다. 셋방살이하다가 처음에 집을 사면 비록 13평짜리 집이라도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몇 달도 못 되어 집이 너무 좁아 보입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짜증이 생깁니다. 몇 년도 못 되어 집을 팔고 빚을 내서라도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합니다. 20평, 30평, 100평이 되어도 욕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나 취직시험을 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더 없이 평안과 행복이 있을 줄 알지만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서 한 달은 더 없이 행복한 것 같더니 다시 불만이 속에 차오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나 여자는 결혼하고 헛간에 살아도 행복할 줄 알았지만 결혼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후회하는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는 허다합니다. 높은 자리, 인기 있는 자리에 오르면 원이 없을 것 같더니 그 자리에 서니까, 더 불안하고 초조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 최고로 좋을 것 같지요. 아닙니다. 가장 불안한 자리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전용차는 55만 달러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거의 50억 짜리 입니다. 그 차는 외피 무게만 2톤으로 장갑차에 가깝습니다. 유리들도 모두 전투기용으로 총알이 관통하지 못합니다. 타이어도 특수 설계가 된 것으로 네 개가 전부 터져도 50마일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차를 타고도 대통령은 늘 불안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 숙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칙다사(富則多事) : 부한 자는 일이 너무 많아 고통이라고 했고, 고목질풍(高木疾風) : 지위 높은 사람은 바람이 더 거세어 흔들리는 위치 때문에 불안에 매여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 무엇으로도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은 근심, 걱정, 슬픔, 탄식, 우수, 사려, 우환, 질고, 고통, 번민. 불안, 공포를 끝없이 가져다주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무슨 환경이나 무슨 물질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 속사람과 내 영에서 솟구치는 샘물처럼 계속되는 평안과 기쁨입니다. 그런 기쁨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감옥이나 사자 굴에서도 솟아나는 것입니다.
■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세계를 제패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됩니다. 기자들이 그를 만나려고 했지만 거부합니다. 그런데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나온 생애 가운데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습니다.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당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바다 속에 살았던 어부들도 두려워하는 죽음의 큰 풍랑 중에도 깊이 잠드실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평안을 가지셨기 때문이요, 바울과 실라가 피투성이가 된 채 갇힌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평안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데 그 방법은 예수님께 모든 무거운 짐을 맡겨 버리는 데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무거운 인생 짐을 가져만 오면 맡으시겠다고 하시는 데 맡기지 못하고 혼자 지고 낑낑거리면서 고통의 짐을 지고 사는 자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그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인생의 짐을 맡기면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많습니다.
시 37:5 / 네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걱정하느냐? 오직 여호와께 맡겨라. 주께서 그 모든 것 다 이루어 주시리라.
시 55:22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 주께서 붙들어 주시리라. 주께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 망하도록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시리라.
잠 16:3 / 일을 성사시키는 분은 여호와이시니 하려는 모든 일을 여호와께 맡겨라.
벧전 5:7 /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학교에 갔다 오더니 밥도 안 먹습니다. 놀러 나가지도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습니다. 그 좋아하던 텔레비전도 보지를 않습니다. 엄마를 슬슬 피합니다. 얼굴이 하얘지면서 점점 죽을상입니다. 아무리 물어 보아도 대답을 안 합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며 족치니까 말하기를 학교에서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다가 학교 유리창을 깼다는 것입니다. 내일까지 유리창을 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는 자식을 보니까, 목이 멥니다. “야, 이놈아, 그러면 진작 이야기하지. 왜 속으로 앓고 고민하느냐? 염려하지 마라. 내가 다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제야 배고픈지 밥도 잘 먹고 밤에도 자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무거운 짐을 엄마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을 갖고 계십니까?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 맡기십시오.
■ 수염난 할아버지가 식당 앞에 서있는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업주인 커넬 샌도슨은 캔사스에 하나님의 성회 교회 성도였습니다. 60세에 사업에 실패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혼동상태에 빠져서 고통 속에 자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까 예배당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라. 주 날개 아래 피하라 주 너를 지키리.” 그래서 정신없이 일어나 잠옷 입은 그대로 그 성당을 찾아가서 보니까 똑같이 미친 여자가 하나 꿇어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미쳤는데 미친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지 그 여자 옆에 꿇어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60평생을 살다가 이 꼬라지가 되었으니 주님 날 살려주십시오.” 얼마를 울면서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상쾌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지고 그는 정신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서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고통당할 때 그는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닭 몇 마리를 사가지고서 들판에 나가서 구이를 만들었습니다. 몇 번이나 만들어서 자기가 먹어보고 실패하고 또 먹어보고 실패하고 그러다가 캔터키 치킨을 개발해서 세웠는데 엄청나게 개발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는 자가용 비행기로 온 미국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내어 맡기지 못하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2. 세상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이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마음속에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왔으니 하나님을 배워야지’ 하나님 배우러 신학교에 갔으니까요. 그런데 교수님들을 보니까 자기들이 배운 신학을 가르치는데 열중하지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근본적인 목적이 없어요.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마태복음 11장 29절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멍에’란 밭이나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에 소와 같은 동물에게 지우는 나무로 만든 틀입니다. 이 기구는 짐승의 목을 꽉 조이게 하여 고통스럽게 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포로들에게 이러한 멍에를 씌워 압송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마다 이러한 멍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멍에를 벗으려고 하지만 안 됩니다. 그 고역만 없으면 평안할 것 같은데 또 다시 다른 멍에가 자신을 짓누릅니다.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평안하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께 그 멍에를 벗어드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멍에를 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멍에를 벗고 주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적과 가치관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자녀 양육 등, 모든 일을 자기를 목적으로 수고하여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욕심과 세상, 더 나가서는 사탄에 매여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이 없습니다. 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던 목적에서 이제는 예수님을 위한 목적으로 삽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가치관의 척도는 내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에 두었지만 이제부터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유익을 위해 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초점을 맞출 때에 예수님의 평안, 능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율법을 위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자기의 의를 들어내기 위한 자기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초대 교회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처 죽이는 현장을 지휘하였습니다. 피를 보고 난 후에 더 악에 바쳐서인지 그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는 중 어느 날은 다메섹 도상을 지나가다가 찬란한 빛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꼬꾸라졌습니다. 그 자리가 바울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위해서 살던 삶에서 180도 바뀌어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위해 사는 목적과 가치관이 바뀌어서 예수님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예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에 있었습니다.
고후 5:9 / 우리는 이 육체를 가지고 여기서 살든지 육체를 떠나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살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율법을 위해서 전심전력 살 때에 마음의 평안은커녕 점점 율법처럼 굳어진 마음으로 가득 찼으나 예수님을 위해서 사니까, 점점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이상하게 고난 받을수록 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 찬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인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엡 6:23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의 형제들인 여러분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더불어 충만한 사랑도 함께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빌 4:4 /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골 3:17 /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주 예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비한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 때문에 일하면 일할수록 점점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 미국 30여 병원에 동상으로 서 있는 여인이 있는데, 도로디어 딕스라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뉴잉글랜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너무나 쇠약해서 35세에 사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학교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을 통해서 교도소 병원에서 자원 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몸이 약한 관계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씩 해볼 결심을 가지고 시작한 노릇이 40년 동안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예수님 때문에 많은 환자 죄수들을 돌보고 상담하는 등, 봉사하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넘칠 뿐 아니라, 비관적인 습성도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봉급을 받고 일할 때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많은 일을 해도 피곤치 않음으로 40년 동안 엄청난 봉사를 하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다보면 평안만이 아니라 환란과 고통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이해가 힘든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하여 감옥문이 열리고 간수장과 그의 식구들이 믿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지만 매를 맞았을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평범한 우리로서는 과연 이러한 와중에서라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하며 복음 전파를 포기하려고 합니다.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일도 있어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 일제 때 주남선 목사님이라고 있었는데, 장로 교단의 설립자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잡혀서 많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다고 합니다.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은 기본이요, 엄지손가락 두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다는가 하면,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무릎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악형을 한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보고 마음을 돌이켜!” 라고 말합니다. 목사님 대답합니다. “백 번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요. 참 신은 하나님 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는데 사방은 조용합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이 시련을 이기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그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온돌방처럼 뜨뜻하더랍니다. 온 몸이 포근한 담요에 따뜻하게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깊은 잠에 잠겼습니다. 목사님은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포근한 담요는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비록 감방에서 고문을 당했지만 주님과 함께 있었기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었더니 그 극한 고통도 아프지가 않고 가볍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짐이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도와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주님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3.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삶을 배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 11:29-30 /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안 됩니다.
마16:24 /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자기가 깨어질 때에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야 예수님이 주시는 자기의 멍에, 자기의 십자가를 바로 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멍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섬기는 삶을 따를 때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일합니다. 즉, 섬김을 받는 위치를 차지하려고 일하기 때문에 평안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는 자세로 일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하지요, 점점 주님의 평안이 우리 삶 속에 충만해지는 것을 체험케 됩니다. 또한 섬기는 자세로 일하니까 성경의 말씀대로 점점 섬김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 20:27 / 만일 너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반드시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빌 2:6-8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 지나간 역사 속에서 아주 공통적인 두 사람의 일생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생을 바쳤던 세기의 성자 슈바이처이고 한 사람은 이단 교주로서 아프리카 가나에서 발생한 수백 명의 집단 자살의 장본인인 짐 존스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똑같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요, 모두 음악광이었고, 또 적도 부근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차이는 슈바이처는 섬김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남을 섬기면서 사는 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짐 존스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온 재산과 몸을 바치어 자기를 전적으로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슈바이처는 하나님과 모든 세계인들이 추앙하는 성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짐 존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던 가장 추악한 인간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삶 중에 어떠한 삶을 사는 자입니까? 자기만 위해 삽니까? 그런 자에게는 하늘이 주는 평안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이 높이는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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