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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9 사순1주간 수 – 133위 083° 김홍범 요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133위 083° ‘하느님의 종’ 김홍범 요한
이름 : 김홍범(金弘範) 요한
출생 : 1822년, 서울
순교 : 1867년 4월 12일, 옥사, 서울 우포도청
김홍범(金弘範) 요한은 서울 문안에서 삼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모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실천하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착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데다가 착실했으므로 차츰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1] 17세 때 김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상처하고, 25세(1847년) 무렵에 김아기(金阿只) 마리아와 재혼하였다. 김아기 마리아의 모친은 김홍범 요한과 함께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고, 김아기 마리아도 1870년에 좌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2]
김홍범 요한은 언제부터인가 서울 장동(長洞, 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가 회현동)에서 살았는데, 이때 집 앞에는 잡철전(雜鐵廛, 조선시대 철물점)을 열었고, 자신은 대궐의 문기수(門旗手, 조선시대에 훈련도감에 딸려 문기를 들던 군사)로 일하였다. 이때에도 동료들이 그의 성실함에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형 김종운(金宗云)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김홍범 요한이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1849년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을 만나면서였다. 이후 그는 열심히 교리와 기도문을 공부하였고, 홍봉주(洪鳳周, 토마스)가 모셔 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았다. 또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많은 신자들이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게 했으며, 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3]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홍범 요한은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는 데 참여하였고, 교우들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방물장수 신자를 시켜 ‘양민을 잘못 체포하고 있다.’는 말을 사방에 퍼뜨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1867년에는 교우들이 도움을 청하려고 중국으로 배를 보낼 때, 700냥의 돈을 후원하기도 하였다.[4]
이와 같은 활동으로 김홍범 요한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1867년 2월에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친구로 지내던 포교와 문기수(門旗手)들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와 “배교하고 나가서 자식과 집안을 보존하라.”고 달랬지만, 그는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5] 또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 중에는 다음과 같이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오랫동안 천주교를 믿어 왔으니 배교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학을 버릴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6]
이후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자 김홍범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중국으로 배를 보낸 일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1867년 4월 12일(음력 3월 8일) 이후에 모진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간 뒤에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7][7.1]
[註]__________
[1]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번; 『우포도청등록』, 정묘(1867년) 3월 6일; 『박순집 증언록』, 1권, 30면. 증언록에는 김홍범 요한이 태중 교우라고 나오며, 포도청등록에는 10세 무렵에 모친에게서 교리를 배운 것으로 나온다. 또 증언록에는 그의 세례명이 ‘베드로’로 나오는데, 이는 오기인 것 같다.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번; 『좌포도청등록』, 경오(1870년) 8월 19일.
[3] 『병인치명사적』, 9권, 15면; 『박순집 증언록』, 1권, 30면; 『우포도청등록』, 1867년 3월 6일; 『좌포도청등록』, 1868년 8월 16.21일, 1869년 1월 30일, 1870년 10월 5일, 1871년 2월 4일.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번; 『좌포도청등록』, 1868년 3월 30일; 『우포도청등록』, 1867년 3월 6일; 『박순집 증언록』, 1권, 30면.
[5] 『박순집 증언록』, 1권, 31면; 『병인치명사적』, 9권, 16면.
[6] 『우포도청등록』, 1867년 3월 6일.
[7] 『우포도청등록』, 1867년 3월 8일. 이날 김홍범 요한을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한편 김홍범 요한이 1867년 5월 17일(음력 4월 14일)에 옥중 순교하여 이튿날 소경재[7.2]에 안장되었다는 기록도 있고(『치명일기』, 정리 번호 40번; 『박순집 증언록』, 1권, 31면), 1867년 4월(음력)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는 증언도 있다(『병인치명사적』, 9권, 17면).
[7.1]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의 포도청의 역할과 천주교 순교사 연구/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본 연구는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서울의 좌·우포도청이 한 역할을 살펴보고, 103위 성인과 ‘하느님의 종’ 257명을 중심으로 포도청 증거자와 순교자들을 박해 시기별로 조사해 본 것이다.
기록상의 규정과는 달리 포도청에서는 을묘박해(1795년)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기에 와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기찰·체포가 포도청의 금조(禁條)에 수록되었다.
신유박해 때까지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는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그 범위가 경기도까지 확대되었고, 1859∼1860년의 경신박해 때는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어 1866∼1874년의 병인박해 때는 강원도 일부와 경상도 북부 지역까지 경포(京捕)들이 파견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포교들에 대한 포상제는 그들이 경쟁적으로 천주교 신자 체포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신자들은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겪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하였다. 을묘박해에서 신유박해(1801년) 때까지 포도청에서는 ‘하느님의 종’ 순교자 5명과 증거자 31명이 탄생하였다. 이어 1819∼1838년에는 성인 1명과 ‘하느님의 종’ 5명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는 성인 15명과 ‘하느님의 종’ 6명이었고, 신앙 증거자는 성인 54명과 ‘하느님의 종’ 1명이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7명의 성인이 포도청에서 순교했으며, 2명의 성인이 신앙을 증거하였다. 1866∼1874년의 병인박해기와 1878∼1879년의 무인·기묘박해 때는 ‘하느님의 종’ 17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고, 성인 13명과 ‘하느님의 종’ 15명이 신앙을 증거하였다.
천주교회사에서 포도청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의 첫 번째 순교터이자 마지막 순교터라는 데 있다. 둘째, 포도청은 서울에서 서소문 밖 형장(성인 44명, 하느님의 종 26명 순교)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성인 22명, 하느님의 종 28명)가 탄생한 순교터였다. 셋째, 포도청은 성인 70명과 ‘하느님의 종’ 52명 등 122명의 증거자를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신앙 증거터였고, 신앙 증거자들을 통해 서울 및 각 지방의 형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넷째, 포도청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 서울의 최대 순교터가 되었다.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사, 그중에서도 박해기의 순교사에서는 서울의 좌·우포도청(즉 左·右邊)이 신자들의 체포와 투옥(구금), 형벌과 순교 과정에 깊이 개입해 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 수록된 순교자와 순교 행적에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있었을지라도1) 직접 박해 과정에서 이루어진 포도청의 역할이나 활동 결과, 포도청 순교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없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포도청’이란 항목 내용에 순교사 관련 내용이 소략하게만 언급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2) 조선의 포도청은 성종 때 설립된 포도장제(捕盜長制)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포도장제가 마지막으로 시행되는 성종 말년에서 중종 35년(1540) 이전에 설립되었고, 중종 36년에는 좌·우포도청 직제가 완비되었다고 한다. 당시 좌포도청은 중부 정선방의 파자교(把子橋) 북동쪽 인근(현 종로구 묘동 56번지의 옛 단성사 자리 : 돈화문로 26)에 있었으며, 우포도청은 중부 서린방의 혜정교(惠政橋) 남쪽 인근(현 종로구 서린동 154번지 중앙우체국 자리 : 종로 6)에 있었다.3) 이후 포도청은 형조 소속의 아문이면서도4) 병조에 인사권과 운영권이 예속된 이중적 기관으로,5) 삼법사(三法司)인 형조(전옥서)·한성부·사헌부를 비롯하여 의금부, 비변사, 승정원, 종부시, 장례원 등과 같이 직수아문(直囚衙門)이 되었다. 이후 포도청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혁파될 때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되었다. 동시에 경무청(1907년 경시청으로 개편됨)이 신설되어 옛 좌포도청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좌·우포도청의 조직은 시기마다 약간씩 변동이 있었지만, 좌·우 각각 1명의 포도대장(포장, 종2품 무관)과 종사관 3명(종6품), 부장 혹은 군관, 서원 4명, 사령 3명, 군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흔히 포교라 불리는 포도부장이나 포도군관은 설립 당시 각각 13명(군관 10명, 부장 3명)이었으나, 영조 이후 순조 초기까지는 부장만 각각 42명을 두었고, 순조 9년(1809) 이후에는 군관만 각각 70명으로 증원 배치되었다. 포졸 즉 포도군사는 설립 당시 각각 50명이었고 임란 이후에는 70여 명까지 증가한 적이 있었지만, 19세기에 와서는 각각 64명이 배정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찰·체포와 같은 포도의 실무는 군사(포졸)이 아니라 군관·부장(포교)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립 초기부터 좌포도청에서는 한성부의 동부·중부·남부와 경기좌도 지역을, 우포도청에서는 한성부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 지역을 나누어 맡아6) 포도패(捕盜牌)를 분견함으로써 포도와 순작(巡綽, 夜巡)·숙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중요 사건 때에는 양청이 합동으로 발패(즉 발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포교들은 통부(通符)를 발급받아 차고 다녔다. 동시에 포도청에서는 군사·의장(御駕 호위)의 임무도 있었고, 임란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 변화에 따라 포도청에서 다루는 금조(禁條) 내용이 많아지면서 포도청의 임무가 크게 확대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이 포도청 제도나 그 임무와 역할에 대한 내용들은 어느 정도 밝혀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18세기 후반 이후 포도청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 분명한 사학(邪學) 즉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이루어진 포도청의 천주교 신자 체포와 문초에 대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사학 단속이 포도청의 금조에 수록된 시기 즉 포도청이 천주교 박해에 관여한 시기와 배경, 박해 과정에서 드러나는 포도청의 기찰·체포 지역의 변모,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와 투옥, 문초와 형벌 과정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각박해 시기별로 구분하여 좌·우포도청에서 탄생한 천주교 순교자와 신앙 증거자들을 조사하였다. 아울러 포도청 순교자와 증거자들을 분석해 봄으로써 박해기의 교회사에서 포도청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 보고자 하였다.
다만, 본고에서 조사 대상으로 삼은 순교자와 증거자는 전체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과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257명(정식 명칭 :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및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국한하였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아울러 이들의 출신지, 신분이나 교회 안에서의 역할(지위), 성별, 직업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분석도 차후 과제로 미루었다.
Ⅱ. 천주교 박해와 포도청의 역할
1. 포도청의 박해 개입 시기와 배경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조선 후기에 들어와 포도청에서는 포도·순작(야순)·숙위·의장은 물론 갖가지 금란(禁亂) 즉 요언(유언비어)의 유포, 무기명 비방[掛書] 사건, 위조 인장이나 엽전 제조[私鑄錢], 도박 행위, 밀주 제조, 과거 범죄(좌포청), 상품 유통 범죄, 윤리 범죄, 사치품 단속까지 맡게 되었다. 이 중에서 포도청의 요언 유포 단속은 사학(천주교)의 전파와 연관되어 있었고, 실제로 고종 대에 와서는 사학이 포도청의 금조에 포함된 기록이 나타난다.7) 그러나 기록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에 대한 임무는 그 이전부터 수행되어 왔고, 이러한 임무가 포도청의 금조에 수록된 것도 그 이전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포도청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기찰·체포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세례식이 있은 이듬해 봄에 발생한 명례방사건(明禮坊事件) 때 형조의 금리들에게 체포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와 동료들은 형조로 이송되었고, 김범우만은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거나 형조 소속인 전옥서(典獄署)에서 옥살이를 한 뒤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다.8) 따라서 포도청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이어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체포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손경윤(孫景允, 제르바시오) 등 11명은 형조에서 문초를 받은 뒤 11월 11일에 석방되었다. 반면에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은 12일에야 석방되었고,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11월 3일에 체포되어 8일에 제주도 위리안치형을 받았다가 11월 16일 호서로 이배되어 떠나다가 순교하였다. 한편 평택현감으로 있던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은 11월 3일에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고 8일에 삭직되었다.9) 따라서 이때까지도 포도청은 천주교 옥사에 관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795년 5월 11일(양력 6월 27일)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북산사건(北山事件) 때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주 신부는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마련된 최인길의 집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알아내 이석(李晳)에게 알렸고, 이석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채제공이 정조에게 고변하면서 좌포장 조규진(趙奎鎭)에게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신자들은 이 소식을 미리 알고 주문모 신부를 창동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시켰고, 대신 집주인 최인길과 교회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지황(池璜, 사바) 등 세 명이 11일과 12일 사이에 체포되었다. 좌포장 조규진은 정조와 채제공의 명에 따라 체포된 3인을 12일 밤에 좌포도청에서 문초한 뒤, 그들이 주문모 신부의 종적과 그동안의 내력을 실토하지 않자 흔적을 없애기 위해 장살해 버렸다.10)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게 된 것은 1795년의 북산사건 때가 최초였다. 좌포장 조규진이 정조와 채제공의 명에 따라 주문모 신부의 체포를 직접 지휘하고, 이어 주 신부를 조선으로 인도하고 도와준 최인길·윤유일·지황을 체포하고 문초한 뒤 타살하도록 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을묘박해(乙卯迫害)라고 부른다.
그러나 위의 사건이 사학 단속을 포도청의 금조에 수록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주지하는 것과 같이 정조는 천주교 박해에 있어 온건한 정책을 펴고 있었고, 남인 출신 채제공 또한 천주교로 인해 남인 세력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 말까지 천주교 금압 상소가 계속되고, 1800년 봄에 여주와 양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까지도11) 포도청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사학을 단속하도록 하는 조치는 취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포도청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에 관여하게 된 것은 순조 원년(1801) 초부터였다. 이에 앞서 1800년 12월 17일과 19일 형조의 금리들에게 최필공(토마스)과 사촌 최필제(崔必悌, 베드로)가 체포되어 좌포도청에 투옥되었고,12) 다음 해 1월 9일에는 최창현(崔昌顯, 요한) 회장이 포도부장에게 체포되어 좌포도청에 투옥되었다.13) 이후 최필공과 최필제도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최창현과 같이 투옥된다. 1801년 1월 10일(양력 2월 22일) 대왕대비(大王大妃, 즉 貞純王后)의 명으로 내려진 사학 금령에 따라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면서 좌·우포도청에 천주교 신자 체포령이 하달되었다.14) 당시의 《일성록》에는 위의 금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왕대비전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학이) 점점 더 치성하여 서울 안에도 많은 (사학도가) 있다고 하니, 좌·우 포장들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만일 잦아드는 성과가 없다면 포장들을 죄에 따라 다스리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이러한 하교를 받들기 전에 이미 포청에서 틈틈이 기찰하였고, 유배를 보내거나 구금하는 형률에 있어 포장이 제멋대로 처리한다는 비난이 있으면 신 등이 마땅히 엄하게 신칙하였으니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15)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는 1801년 1월 초부터 천주교 신자 체포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에는 좌포장 이유경(李儒敬)이 체직되고, 신대현(申大顯)이 새 좌포장에 임명되었다.16) 그러나 이후에도 포도대장이 신자 문초에 느슨하다는 성토가 이어졌고, 그 결과 이유경과 신대현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17) 동시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사도 요한)·이승훈이 탄핵을 받고 2월 10일 의금부에 체포되어 추국을 받게 되었다. 포도청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고, 사학 단속이 포도청의 금조에 수록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2. 기찰·체포 지역의 확대 과정
신유박해 때까지 포도청에서는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18) 지역 안에서만 신자들을 기찰·체포하였다.19) 정조 15년(1791) 포장 조심태(趙心泰)의 요청에 따라 필요시에는 의정부의 허락을 받아 좌·우포도청의 포교 즉 경포(京捕)들이 한성부 밖까지 기찰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지만,20) 신유박해 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지도층 신자로 언급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과 같이 특별한 신자에 대한 기찰만은 예외였던 것 같다.21) 그에 대한 체포령은 1801년 2월 10일 정약용(丁若鏞, 사도 요한)의 국문 과정에서 황사영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된 직후에 내려졌고, 13일에는 그를 3일 안에 체포하지 못한다면 좌·우 포장과 추관들에게 죄를 묻겠다는 명령이 내려졌다.22) 이후 경포들은 한성부를 벗어나 그의 종적을 추적하기 시작했으며, 6월에는 옥천희(玉千禧, 요한)를 의주에서, 9월 15일에는 황심(黃沁, 토마스)을 춘천에서, 9월 29일에는 마침내 제천 배론에서 황사영을 체포하여 의금부로 압송하였다.23) 이처럼 예외의 경우는 있지만, 신유박해 당시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들은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서 체포된 경우였다.24)
좌·우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확대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였다. 즉 경포가 성저십리 지역을 넘어 경기도 지역까지 기찰하면서 신자들을 체포한 것이다. 정조 15년에 내려진 결정도 경포들의 이러한 활동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9동 1151-6)의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교우촌 신자들, 골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810)의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수원 양간(현 화성시 양감면) 인근의 정화경(안드레아)과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 등이 경포에게 체포되었다. 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는 수원 상귀(혹은 상괴, 현 화성시 우정읍 혹은 서신면에 있던 마을. ☞원재연,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남양방조제 부근으로 比定)에 은신하다가 돌담거리 주막(현 화성시 봉담읍 덕우리)으로 가서 경포에게 자수한 뒤 좌포청으로 압송되었다.25)
한편 앵베르 주교가 자수한 뒤 좌포청 포교 손계창(孫啓昌)과 황기륜(黃基崙)은 포졸들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충청도 홍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들은 보령에서 결성 방향으로 선교사들의 종적을 추적하던 중, 7월 29일 보령 금자동(현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에서 모방(P. Maubant, 나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J. Chastan, 정 야고보) 신부를 체포한 뒤 홍주에 도착하여 목에 행차칼을 채우고 대흥을 거쳐 서울 좌포청으로 압송하였다.26) 당시 모방과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에 따라 포교 손계창에게 자수하기 위해 함께 홍주 발게머리(鷄頭里)로 가던 중이었다.27) 이처럼 특수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기해박해 때까지 좌·우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는 경기도 지역까지였고, 이러한 지역적 범위는 1846년의 병오박해
(丙午迫害)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28)
좌·우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경기도 지역을 벗어나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된 것은 1859년 말부터 1860년 초까지 계속된 경신박해(庚申迫害) 때였다. 이 박해는 조정의 박해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울의 우포장 신명순(申命淳)과 좌포장 임태영(任泰瑛)이 사사로이 일으킨 것이었다.29) 당시 충청도 진천의 배티(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를 본당 중심지로 삼고 사목하던 중에 박해를 겪은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미카엘) 신부에 따르면, 1860년 5월 10일(양력 6월 28일) 좌·우포장이 각각 허계(許棨)와 신관호(申觀浩)로 변경되면서 박해가 종결되고, 9월 말에는 옥중에 있던 신자들도 석방되었다고 한다.30) 이때 경포들이 진천·음성 일대의 7∼8개 교우촌에서 20여 명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으며, 충주 광벌(현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과 제천의 배론 신학교(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까지 진출하였다.31)
1866년부터 1874년32) 무렵까지 지속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우포도청등록》에 보면, 1866년 1월 9일(양 2월 23일) 서울에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가, 경기도 광주에서 볼리외(B.L. Beaulieu, 徐 루도비코) 신부와 도리(P. H. Dorie, 金 베드로) 신부 등이 체포되자, 1월 11일 자로 충청도 제천의 남종삼(南鍾三, 요한)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는데,33) 이 체포령으로 인해 좌·우포도청의 기찰·체포 활동은 자연스럽게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경포들은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까지 기찰·체포 지역을 넓혀간 것으로 나타난다. 《포도청등록》과 교회 순교록들을 아울러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경기도의 개성부(송도)34)와 강원도의 평강현35) 지역까지 경포들이 파견되어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남쪽으로는 충청도 내포 지역은 물론 홍산현(현 부여군 홍산면),36) 남포현(현 보령시 남포면),37) 서천,38) 강경39) 지역의 신자들까지 경포에게 체포되었고, 동쪽으로는 충주·제천 지역은 물론 경상도의 풍기·순흥·대구 지역까지40) 경포들이 파견되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좌·우포도청의 기찰·체포 지역은 박해가 계속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까지는 성저십리 지역에 한정되었지만, 1839년의 기해박해에 이르면 기찰·체포 지역이 경기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범위는 1846년의 병오박해 때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859∼1860년의 경신박해 때에 이르면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충청도 일부 지역까지 다시 확대되고, 1866년 이후의 병인박해기에 이르면 그 지역적 범위가 더욱 넓어져 북쪽으로는 경기도의 개성과 강원도의 평강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충청도의 홍산·남포·서천·강경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경상도의 풍기·순흥·대구 지역까지 좌·우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3.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투옥과 형벌
포도청의 포교가 도적을 체포했을 때 상을 주는 관례는 성종 12년(1481)에 마련된 〈포도사목〉(捕盜事目)을 통해 이미 마련되었다.41) 이러한 관례는 이후 도적뿐만 아니라 특별한 정치·경제·사회범 체포에도 적용되었고, 천주교 신자 체포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1839년에 체포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의 경우에는 스스로 자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를 체포하기 위해 경기도 지역을 오가면서 활동한 포교 손계창과 이를 도운 포교 황계륜에게 특별히 좋은 자리의 변장(邊將)을 제수하는 상을 내렸다. 아울러 좌·우포청의 수교(首校)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을 체포한 포교들에게도 특별히 상을 내렸다.
비변사에서 아뢰었다.
“지난번 서양인 범가(范哥, 즉 앵베르 주교)를 체포해 온 포교를 상 주는 일을 아뢴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그 포교가 또 나(羅, 즉 모방 신부), 정(鄭, 즉 샤스탕 신부) 두 서양인을 체포했는데, 전후의 노고는 실로 장려할 만하여 특별히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포교 손계창을 우선 상으로 가자(加資)하여 좋은 곳의 임기가 거의 다 된 변장(邊將)으로 자리를 만들어 보내고, 나·정 두 서양인을 체포할 때 힘을 합쳐 거행한 포교 황기륜도 변장 자리가 나는 대로 보내며, 이번에 사학의 무리를 기찰 체포할 때 좌·우포청의 여러 포교들이 분주히 힘쓴 바가 아주 많으니 또한 마땅히 격려하고 권장해야 하겠습니다. 좌·우포청의 수교(首校) 및 유진길·정하상 등을 체포해 온 포교도 아울러 특별히 상을 가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42)
병인박해 때에도 프랑스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한 좌·우포도청의 군관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1·2·3등으로 구분하여 상을 내렸다.43) 이러한 가자와 포상은 좌·우포청의 포교들이 경쟁적으로 천주교 신자 체포에 집착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포교와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했을 때 우선 홍사(紅絲)라고도 하는 붉은색 명주실을 꼬아 만든 오라로 결박하는데, 도망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는 결박하지 않고 어깨에 오라를 걸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였다.44) 그런 다음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머리에 몽두(蒙頭)를 씌우고 목에는 행차칼(行枷, 일명 도리칼)을, 손에는 축(杻)이라 불리는 목수갑을 채웠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몽두를 씌우지 않고 행차칼과 수갑만 채웠던 것 같다.45) 몽두는 죄수의 도포 자락을 잘라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선교사들에게 씌운 몽두는 붉은색이나 누런색의 헝겊으로 만든 차양이 넓은 모자로, 머리에 씌우면 얼굴과 어깨까지 덮을 수 있었다고 한다.46) 체포된 신자들의 이송 때에는 때때로 마소 위에 얹은 짚둥우리에 앉혀 이송하였다.47) 훗날의 시복 재판 증언 기록에는 이송 당시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안 다블뤼 주교님이)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실 때 남문 밖에서 보니 말 위에 짚둥우리 타시고, 몽두 쓰시고, 행차칼 쓰시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오시는데, 민(위앵) 신부와 오(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張周基 요셉) 회장 등도 함께 같이 하고 왔습니다. 안 주교와 두 분 신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고서 오시고, 조선 교우는 몽두를 쓰지 않고 행차칼만 썼습니다.48)
포도청으로 이송된 신자들은 차꼬(着錮, 桎)라 불리는 족쇄를 차고 옥살이를 하면서 차례가 되면 포장 앞으로 나아가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하도록 강요당하면서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에게는 으레 형벌이 가해지기 마련이었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49)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곤형(棍刑), 장형(杖刑),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형(治盜棍刑),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주뢰형(주리형, 剪刀周牢刑), 붉은 몽둥이로 허벅지를 짓이기는 주장(朱杖)질(즉 朱杖撞問刑), 줄로 살점을 떼어내는 톱질 등이 가해졌고, 때로는 채찍처럼 내려치는 혁편(革鞭), 정강이를 비벼 뼈가 드러나게 하는 세모진 방망이인 삼모장(일명 三稜杖) 등도 사용되었다.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된 것으로 나온다.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좌포도청의 문초 때 주뢰형을 받고, 치도곤 110도를 맞았으며, 주장과 태장을 합해 모두 340도를 맞고 장사한 것으로 나온다.50) 포도청에서는 지방에서처럼 생매장이나 압슬과 같은 남형(濫刑)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의 형벌은 그 자체로 순교의 길이 되곤 하였다.
본래 조선의 형전에는 결옥일한(決獄日限)51) 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진 것 같지 않다. 앵베르 주교의 경우 1839년 7월 4일부터 8월 7일(양 9월 14일)까지 30여 일을 좌포도청에 투옥되었다가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경우 1846년 5월 28일 해주 감영에서 서울 우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7월 26일(양력 9월 16일) 새남터(즉 노량사장) 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까지 2개월가량 포도청에 투옥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52)
포도청은 비록 포도권·사법권·군사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공식적인 처형이 허락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사권과 재판권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기찰·체포 과정도 재판 과정의 일부가 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포도청의 임무가 다양해지면서 포도청에서 형조의 일부 사법 업무까지 분담하는 상황이었다. 영조 17년(1741)에 의금부와 형조에서 문초해야 할 죄수를 포도청에서 대신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53)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는 것이 상례였지만,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와서는 이러한 절차가 거의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포청옥은 아주 열악하여 어느 문초와 형벌 못지않게 신자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1878년 1월(양력)부터 5개월 동안 좌·우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포청옥은 포졸숙소, 감방(일반·채무 죄수와 도둑들의 감방이 구분되었다),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시체를 두는 방, 재래식 화장실, 부엌, 중앙의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은 다른 감옥들과 모양이 비슷하였다. 출입구라고는 밤이면 잠기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개구(開口) 형태의 나무 창살이 몇 줄 있어서 그 사이로 약간의 바깥 공기와 빛이 들어왔다. 튼튼한 사방 벽에는 참나무 판을 여러 장 이어 덧대어 놓았다. 바닥에는 짚인지 건초인지를 한 겹 깔아놓았는데, 내가 처음 들어올 때 나를 위해 새 짚을 한 겹 깔아 준 것을 걷어 내지 않아 그것이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54)
이러한 옥 안에서 죄수들은 포졸들의 구타와 열악한 식사로 고통을 겪었고, 특히 도둑들은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만 하였다.55) 다블뤼 주교도 1839년의 기해박해 당시 포도청에 투옥되어 있던 신자들의 옥살이 고통과 옥중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교우들은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없을 정도로 이런 감옥 속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문 때의 고문은 이 무서운 유치(留置)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은 오래지 않아 그들의 멍석을 썩여버렸습니다. 역한 냄새는 견딜 수 없게 되고, 페스트 성 질병으로 그들 중의 여럿이 며칠 사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굶주림과 특히 갈증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었으며. 다른 고문 중에는 신앙을 용감히 고백한 많은 사람도 갈증에는 지고 말았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 한 조밥 한 주발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깔고 누운 썩은 짚을 씹어 먹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마침내는 말하기도 끔찍스러운 일이지만, 감옥에 가득 차서 한 줌씩 잡히는 이를 잡아먹었습니다.56)
위의 내용은 박해기의 옥살이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어 온 구절이다. 포청옥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특히 전염병에 걸려 곤장과 칼날 아래 순교하기 전에 병사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한 고통이 순교의 용덕을 잊게 함으로써 배교자들이 탄생했다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실제로 포도청에서는 ‘옥사’ 혹은 ‘옥중 병사’로 순교한 신자들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포도청의 재판 과정에서 문초와 형벌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장살’로 순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795년의 을묘박해 때 3명의 순교자가 장살되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와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가 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한 사실에서 볼 때,57) 조정에서조차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로 인한 처형을 묵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나 행형상의 대시(待時) 혹은 부대시(不待時) 집행 규정이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 기관인 포도청이 신앙의 증거터였을 뿐만 아니라 순교터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Ⅲ. 박해 시기별 포도청 순교사
좌·우포도청은 체포 투옥된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장소요 형벌과 병으로 순교한 장소였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포도청에서는 신앙 증거자와 순교자가 연이어 탄생하였고, 그중에는 한국 103위 성인과 함께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 257위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순교자도 순교 이전에 신앙을 증거했으므로 정확하게는 포도청의 신앙 증거자요 순교자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들을 ‘포도청 순교자’라고 설명함으로써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형조에서 결안 정법(正法, 사형)되어 서소문 밖, 새남터(즉, 노량사장), 양화진(즉, 절두산) 등 서울의 각 형장 및 지방 형장에서 순교한 ‘포도청 신앙 증거자’와 구분하였다. 그리고 한국 성인과 하느님의 종을 중심으로 각 박해기에 탄생한 순교자와 증거자들을 통해 포도청 순교사를 설명해 보았다.
1. 을묘∼신유박해기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795년의 을묘박해로 윤유일·최인길·지황이 좌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한 이래 1801년의 신유박해 직전까지 포도청에 체포된 신자는 없었다. 그러다가 신유박해 때 ‘하느님의 종’ 심아기(바르바라)와 김이우(바르나바) 2명이 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 때의 첫 번째 포도청 증거자는 1801년 1월 9일 포도부장에게 체포되어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하느님의 종’ 최창현(요한)이다. 이에 앞서 체포된 최필공(토마스)은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신앙을 증거한 뒤 1801년 2월 11일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좌포도청의 최창현도 2월 11일 의금부로 이송되었으며, 최필제(베드로)와 2월 9일에 체포된 정인혁(鄭仁赫, 타데오)은 2월 12일 좌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었다.58) 최창현은 포도청에서 다음과 같이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
10여 일 후에 치도곤 13도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린 모양이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나열하자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59)
이후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에서는 많은 신자가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오는데, 《사학징의》에는 위에서 언급한 최필제, 정인혁을 비롯하여 ‘하느님의 종’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 김현우(金顯禹, 마태오), 이현(李鉉, 안토니오), 이국승(李國昇, 바오로),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강경복(姜景福, 수산나), 김연이(金連伊, 유리아나), 문영인(文榮仁, 비비아나),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김계완(金啓完, 시몬, 일명 百心),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 황일광(黃日光, 시몬),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홍인(洪鏔, 레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 김일호(金日浩),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등 24명의 포도청 진술이 수록되어 있다.60)
이와 함께 신유박해 때의 포도청 증거자에는 1801년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한 뒤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61) 포도청에 투옥되어 문초를 받은 것이 분명한 ‘하느님의 종’ 현계흠(玄啓欽, 플로로),62) 옥천희(요한),63) 황심(토마스),64)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65)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66) 등 5명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포도청은 새남터와 서소문 밖 형장은 물론 각 지방의 형장으로 이어지는 순교사의 한 과정이었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2. 1819년∼기해박해기
1801년 이후 오랫동안 포도청에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한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중 1817년 3월 말경 ‘하느님의 종’ 조숙(趙塾, 베드로)·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부부와 고동이(高同伊, 바르바라)가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신앙을 증거한 뒤 2년여 동안 투옥되었다가 1819년 5월 21일(양력 6월 2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67) 그러나 이들의 순교가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로 인한 것은 아니었고, 또 다른 박해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에는 서울에서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이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전주로 압송되었으며, 문초와 형벌로 인해 옥에서 병사하였다. 정해박해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였지만, 이경언은 전라도 신자들에게서 압수된 필사 서적과 모사 상본을 제작 배포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포도청에서 체포했던 것이다.68) 이경언은 정해박해의 유일한 포도청 증거자였다.
1833년에는 충청도 홍주 당산리(堂山里, 현 당진시 송산면) 출신 황석지(黃石之, 베드로)가 서울 아현의 조카 집에서 다른 신자 6명과 함께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중거하였고, 형조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옥에서 병사로 순교하였다.69)
1835년 1월에는 서울에서 이조이(李召史, 아가타)·이호영(베드로) 남매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여러 해 동안 전옥서에서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이호영은 1838년 10월 8일(양력 11월 24일)에 옥사하였고, 누나 이조이(아가타)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인 1839년 4월 12일(양력 5월 24일)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70) 이들 남매는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이조이를 다음의 기해박해 순교자로 설명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다시 많은 신자가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하였다. 이 중에서 순교자들의 순교 형태는 장살과 교수형, 옥사(병사)로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정국보(프로타시오), 장성집(요셉), 최경환(프란치스코), 허임(바오로) 등 4명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하였다.71) 그리고 기해박해 이후 포졸들의 추적을 받다가 체포된 ‘하느님의 종’ 최영수(崔榮受, 필립보)도 1841년 우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하였다.72)
13세의 어린 순교자 유대철(베드로),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 김 데레사, 이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정화경(안드레아),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등 6명은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73) 또 ‘하느님의 종’이 막달레나와 1841년에 최영수와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은 권성여(프란치스코), 허대복(안드레아) 등 3명도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74)
14세의 동정녀요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의 조카딸 이 바르바라(병사), 척추 장애인 김 루치아,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병사), 정하상(바오로)의 모친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등 5명과 같이 포도청의 형벌과 열악한 옥살이로 인해 옥사(병사)한 이들도 있었다. ‘하느님의 종’ 가운데서는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의 모친 조 바르바라가 포청 옥에서 병사하였고, 최경환 성인과 함께 체포되었던 이 에메렌시아도 포도청에서 옥사하였다.75)
기해박해 때에도 포도청은 새남터와 서소문 밖 형장으로 이어지는 순교사에서 의미 있는 신앙 증거터가 되었다. 우선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3명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정하상(바오로) 등 41명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이 중에서 1839년 5월 24일에 순교한 박아기(朴阿只, 안나)는 신앙 증거 장소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문초와 형벌을 받고 형조로 이송되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형조로 이송된 것으로 보았다.76) 마찬가지로 1839년 5월 27일 전옥서에서 옥사(병사)한 것이 분명한 김 바르바라의 신앙 증거 장소도 포도청과 형조로 보았다.77)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당고개에서 순교한 9명도 모두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기해박해기의 포도청 성인 증거자는 모두 54명이나 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프랑스 선교사 3명은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의금부로 이송되었다.78) 그리고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조신철(가롤로)은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다시 신앙을 증거하였고, 정하상(바오로)은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의금부로 이송되었다.79) 또 김효임(金孝任, 골룸바)과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자매,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과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자매, 이문우(李文祐, 요한) 회장,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 모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 전경협(全敬俠, 아가타),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와 박희순(朴喜順, 루치아) 자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병주(洪秉周, 베드로)와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형제 등 14명도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80) 당고개 순교자 9명은 이인덕·이문우·권진이·이경이의 예에서 볼 때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기해박해기의 유일한 ‘하느님의 종’ 포도청 증거자로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가 있다.81)
3. 병오박해기
1846년의 병오박해 때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임치백(林致百, 요셉, 일명 君執),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타),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 7명은 포도청에서 장살(혹 교수)로 순교하였다.82) 훗날의 증언에는 남경문과 임치백이 좌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오며,83) 우술임·김임이·이간난·정철염 등 4명은 좌포도청 혹은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온다.84) 관변 기록에도 남경문과 임치백은 좌포도청에 투옥되어 있다가 8월 1일에 물고된 것으로 나타나며,85) 한이형·우술임·김임이·이간난·정철염 5명은 우포도청에 투옥되어 있다가 8월 1일에 장폐된 것으로 나타난다.86) 따라서 후자의 5명은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좌·우포도청 합좌로 문초했고, 7월 26일에는 새남터 군문효수를 위해 포도청에서 어영청으로 이송하였다.87) 다만,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김대건 신부를 만나 기도문을 배우고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한 임치백(요셉)이88) 좌포도청에 투옥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가 신앙을 증거한 장소 또한 좌포도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현석문은 좌·우포도청 합좌로 문초를 받기는 했지만, 우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7월 29일 새남터 군문효수를 위해 어영청으로 이송되었다.89)
이와 같이 병오박해 때는 2명이 좌포도청에서, 5명이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 신부는 좌포도청에서, 현석문은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했음을 알 수 있다.
4. 병인∼기묘박해(己卯迫害)기90)
한국 103위 성인과 ‘하느님의 종’ 124명(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에서 병인∼기묘박해기의 포도청 순교자는 없다. 프랑스 선교사나 신자들 대부분이 포도청이나 의금부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판결 결과에 따라 정해진 형장으로 압송되어 순교한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 133명 즉 새로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에는 다음과 같이 박아기(朴阿只, 막달레나), 이문홍(바오로), 송백돌(宋百乭, 베드로), 김홍범(金弘範, 요한),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 김조이(金召史, 바르바라), 김성실(金成實, 베드로), 김입돌(金立乭, 베드로), 최사관(崔士寬, 예로니모), 한용호(韓用浩, 베네딕토), 이 요한,91)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등 13명이 병인박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878년의 무인박해(戊寅迫害) 때는 최지혁(崔智爀, 요한, 일명 善一)과 이아기(李阿只, 루치아) 부부, 피 가타리나 등 3명이, 1879년의 기묘박해 때는 이병교(李秉敎, 레오, 자는 德敬)92)가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때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성인 순교자는 13명으로 나타난다. 이후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J. Bretenieres, 백 유스토) 신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6명은 새남터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장주기는 5명은 보령 갈매못(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渴馬淵)에서, 최형(崔炯, 베드로)과 전장운(全長雲, 요한) 등 2명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남종삼(요한)은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뒤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으므로 포도청 증거자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 제천의 배론 신학교에서 체포된 푸르티에(C.A. Pourthie, 신 안토니오) 신부와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박 미카엘) 신부는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지만,93) 103위 성인에서 제외되었다.
‘하느님의 종’ 133명 중에는 다음과 같이 15명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김면호(金勉浩, 토마스)는 새남터에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박래호(사도 요한), 유 마오로,94) 김한여(베드로, 일명 重殷),95) 박성운(朴聖云, 바오로),96) 김진구(金鎭九, 안드레아), 김큰아기(金大阿只, 마리아),97) 이기주(李基柱, 바오로),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와 김이쁜(金旕, 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붕익(李鵬翼, 베드로), 이제현(李濟鉉, 마르티노), 원윤철(元允哲, 사도 요한), 이용래(李龍來, 아우구스티노) 등 13명은 양화진(절두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Ⅳ. 포도청 순교사의 교회사적 의미
박해기의 천주교회사에서 포도청이 차지하는 첫 번째 의미는,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하느님의 종 ’윤유일·최인길·지황 등 세 명이 순교한 즉 서울의 첫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터라는 데 있다. 그뿐만 아니라 포도청은 1879년의 기묘박해 때 ‘하느님의 종’ 이병교를 탄생시킨 서울의 마지막 순교터이기도 하였다.
다음의〈표 15〉에 정리한 것과 같이 천주교 박해기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은 22명이고, ‘하느님의 종’은 28명으로 도합 50명이었다. 한편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성인 44명, ‘하느님 종’ 26명 등 모두 70명이 순교하였다.98) 또 당고개에서는 성인 9명, ‘하느님의 종’ 1명 등 모두 10명이, 새남터 형장에서는 성인 11명, ‘하느님의 종’ 6명 등 모두 17명이,99) 절두산(양화진)에서는 ‘하느님의 종’ 14명이 순교하였다.100) 이렇게 볼 때, 포도청은 서소문 밖 형장 다음으로 많은 성인과 ‘하느님의 종’이 탄생한 서울의 의미 있는 순교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사에서 포도청 차지하는 두 번째 의미이다.
포도청의 세 번째 의미는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터가 된다는 점이다. 앞의 〈표 15〉에서 보는 것과 같이 포도청의 신앙 증거자는 성인 70명, ‘하느님의 종’ 52명으로 모두 122명에 이른다. 아울러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가 서울의 서소문 밖 형장은 물론 당고개·새남터·절두산, 그리고 갈매못과 같은 지방 형장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는 사실은 포도청과 각 형장이 순교사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기에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한 성인과 ‘하느님의 종’들은 모두 172명이 된다. 이 중에서 순교터와 신앙 증거터가 단지 포도청으로만 나타나는 경우는 110명이고, 좌포도청에서 순교하거나 신앙을 증거한 경우는 37명, 우포도청에서 순교하거나 신앙을 증거한 경우는 19명, 좌·우포도청 두 곳에서 신앙을 증거한 경우는 6명이었다. 우포도청보다는 좌포도청에 체포된 신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경기좌도(지금의 강화·인천·수원·양평·광주 이남 지역)가 좌포도청의 기찰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포도청 순교자 50명의 순교 형식을 살펴보면, 장살(물고)된 순교자가 25명, 교수로 순교한 경우가 12명, 옥사(병사, 아사)로 순교한 경우가 11명, 미상이 2명으로 나타난다. 옥사나 교수보다는 장살로 순교한 신자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병인박해 이후에는 이와 같은 순교 형식이 크게 변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에서 추가로 설명할 것이다.
천주교회사에서 갖는 포도청의 네 번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병인∼기묘박해기의 포도청 순교자 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포도청의 기찰·체포 지역이 크게 확대되는데, 이는 포도청에서 체포한 신자 비율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병인∼기묘박해기의 포도청 순교자는 ‘하느님의 종’ 15명뿐이고, 포도청 증거자는 성인 13명과 ‘하느님의 종’ 15명을 합해 28명뿐이다. 다른 박해에 비해 시성되거나 ‘하느님의 종’에 선정된 순교자 수가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만으로는 병인박해 이후의 포도청 순교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 10월경의 천주교 신자 수는 약 2만 3천 명이었고, 이 중에서 병인∼기묘박해기의 순교자 수는 8천 명 내외였다고 한다.101) 그러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교자 수는 이보다 훨씬 적으며, 그 숫자를 정확히 추산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교회 순교록인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는 ‘○○○ 외 ○명’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고, ‘○○○ 부부’ 혹은 ‘○○○와 아들’로 기록된 경우도 있으며, 순교 사실이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또한 관변 기록인 《포도청등록》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학죄인으로 체포된 비신자들이 수록되어 있고, 신자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필자가 교회 순교록과 《포도청등록》을 통해 파악한 병인∼기묘박해기의 전국 순교자 수는 대략 1,660명에 이른다.102) 그러나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고려하여 그 폭을 넓혀 본다면 기록에서 확인되는 전국 순교자 수는 1,600∼1,700명으로 추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병인박해 이후의 전국 순교자 수 8천 명 가운데 약 20∼21.3%가 기록에 나타나는 셈이 된다. 또 기록상의 순교자 수 1,600∼1,700명 중에서 서울 순교자 수는 36∼33.9%인 약 576명에 달한다.103)
서울 순교자 약 576명 중에서 순교 장소를 알 수 있는 경우는 다음의 〈표 16〉에 정리한 것과 같이 모두 149명이다. 이 중에서 양화진(절두산) 순교자는 24명(참수 7명, 효수 9명, 미상 8명),104) 서소문 순교자는 7명(참수 6명, 교수 1명),105) 전옥서 순교자는 1명(교수),106) 새남터 순교자는 11명(참수 1명, 효수 10명)107)으로 나온다. 그리고 좌포도청 순교자는 26명(교수 14명, 참수 3명, 아사 2명, 미상 7명), 우포도청 순교자는 22명(교수 2명, 미상 20명), 좌·우 구분 없이 포도청 순교자로 나오는 경우는 58명(교수 8명, 참수 1명, 백지사 5명, 아사 3명, 병사 2명, 미상 39명)이었다. 149명 중에서 71%에 해당하는 106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이다. 비록 표본 숫자가 많지는 않을지라도 이러한 통계를 통해 포도청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병인∼기묘박해기에 와서 포도청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최대의 순교터가 되었으니, 이것이 박해기의 교회사에서 갖는 포도청의 네 번째 의미라 할 수 있다.
병인∼기묘박해기의 포도청 순교자 106명 중에서 순교 형식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다음의〈표 17〉에 정리한 것과 같이 모두 40명이었다. 이 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 수는 24명이었고, 참수 순교자는 4명(잘못된 증언일 가능성이 높다), 백지사 순교자는 5명, 옥사(병사 혹은 아사) 순교자는 7명이었다. 한편 순교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 서울 순교자 중에서도 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 수는 54명이나 된다.
이와 달리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과 ‘하느님의 종’ 50명의 순교 형식에서는 장살(물고)이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 교수와 옥사 순이었다. 다시 말해 병인박해 이전에는 문초 과정에서 형벌로 인해 순교한 경우가 많았으나, 병인박해 이후에는 신자들을 옥중 교수형에 처하는 손쉬운 방법이 자주 사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체포된 신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재판 과정이 단순화되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당시에 시행되던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108)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Ⅴ. 맺음말
기록상으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기찰·체포가 포도청의 금조에 포함된 것은 고종 때였다. 그러나 실제 규정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에 대한 임무는 그 이전부터 수행되어 왔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게 된 것은 1795년의 북산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기에 와서는 사학 단속 즉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이러한 임무가 포도청의 금조에 수록되었다. 이때까지 포도청에서는 황사영(알렉시오)의 체포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성부의 성저십리 지역 안에서만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신유박해 당시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들도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서 체포된 신자들이었다.
좌·우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확대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즉 경포가 성저십리 지역을 넘어 경기도 지역까지 파견되어 신자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다만 기해박해 때도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할 때는 경기도 지역을 넘어 충청도 지역까지 경포가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초까지 계속된 경신박해 때에 와서는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어 1866∼1874년의 병인박해 때는 포도청의 기찰·체포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까지 경포들이 파견되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성종 12년(1481)에 마련된 〈포도사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포교들이 특별한 범죄자를 체포할 경우에는 가자나 포상하는 관례가 있었고, 이는 천주교 신자를 체포한 경우에도 적용되었다.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한 좌·우포도청의 군관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1·2·3등으로 구분하여 상을 내렸는데, 이러한 포상제는 포교들이 경쟁적으로 천주교 신자 체포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체포된 신자들은 오라로 결박당하고 행차칼과 축(목수갑)을 찬 뒤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선교사들에게는 머리에 몽두, 목에는 행차칼을, 손에는 축(목수갑)을 채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로는 마소 위에 얹은 짚둥우리가 이송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포도청으로 이송된 신자들은 차꼬(족쇄)를 차고 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차례가 되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신자들이 받은 형벌로는 곤형·장형·치도곤형, 그리고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주뢰형(주리형) 등이 있었고, 때로는 혁편, 주장, 톱질, 삼모장, 학춤 등이 적용되었다. 비록 지방에서처럼 생매장은 없었고, 압슬과 같은 남형(濫刑)은 없었지만,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그 자체로 죽음 즉 순교의 길이나 진배없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형전에 기록되어 있는 결옥일한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들은 형벌보다 무섭다는 옥살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포청 옥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사한 경우도 많았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해 배교하는 신자들도 발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끝까지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형벌 가운데 순교(즉 장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 기관인 포도청이 신앙의 증거터가 되고 순교터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을묘∼신유박해기에 포도청에서는 ‘하느님의 종’ 순교자 5명이 탄생하였고, 신유박해 때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하느님의 종’ 증거자 31명이 탄생하였다.
이어 1819년에서 1838년까지는 성 이호영(베드로)과 5명의 ‘하느님의 종’ 증거자가 포도청에서 탄생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다시 많은 신자가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하였다. 이 박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은 어린 유대철(베드로)과 최경환(프란치스코) 회장 등 모두 15명이었고, ‘하느님의 종’ 순교자는 6명이었다. 또한 성인 증거자는 프랑스 선교사 3명과 정하상(바오로) 회장 등 모두 54명에 이른다. 이성례(마리아)는 기해박해 때의 유일한 ‘하느님의 종’ 증거자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남경문(베드로)과 임치백(요셉) 등 2명의 성인이 좌포도청에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 5명의 성인이 우포도청에서 장살(혹 교수)로 순교하였다. 또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좌포도청에 투옥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현석문(가롤로) 회장은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103위 성인과 ‘하느님의 종’ 124명 중에서 병인박해기의 포도청 순교자는 없다. 그러나 새로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33명 중에는 박아기(막달레나) 등 13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878년의 무인박해 때는 ‘하느님의 종’ 최지혁(요한) 등 3명이 좌포도청에서, 1879년의 기묘박해 때는 ‘하느님의 종’ 이병교(레오)가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또 병인박해기에는 베르뇌 주교 등 13명의 성인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했으며, 홍봉주(토마스) 등 15명의 ‘하느님의 종’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천주교회사에서 포도청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1795년의 을묘박해 때 첫 순교자를 탄생시킨 서울의 첫 번째 순교터요 1879년의 기묘박해 때 마지막 순교자를 탄생시킨 서울의 마지막 순교터라는 데 있다.
두 번째 의미는, 서울에서 서소문 밖 형장(성인 44명, 하느님의 종 26명 등 70명 순교자 탄생) 다음으로 많은 성인(22명)과 ‘하느님의 종’(28명) 등 모두 5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순교터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세 번째로,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터요, 신앙 증거자들을 통해 서울의 서소문 밖·당고개·새남터·절두산 형장은 물론 각 지방의 형장과 연결되는 순교사의 한 과정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포도청의 성인 증거자는 70명이고, ‘하느님의 종’ 증거자는 52명으로, 모두 122명의 증거자가 포도청에서 탄생하였다.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병인∼기묘박해기의 전국 순교자 수는 대략 1,600∼1,700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에서 서울 순교자 수는 약 576명에 이른다. 또 576명 중에서 순교 장소를 알 수 있는 경우는 모두 149명인데, 그중에서 71%에 해당하는 106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병인∼기묘박해기에 와서 포도청이 서울의 최대 순교터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 점이 교회사에 갖는 포도청의 네 번째 의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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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배, 〈조선후기 포도청 치안 활동의 특성 연구 : 공간 배치와 기찰 구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00호, 2010.
부록
포도청 순교자와 증거자 일람표
1. 순교자(50명)
2. 증거자(122명)
① 성인 증거자(70명)
② ‘하느님의 종’ 증거자(52명)
<주>___________________
1) 《포도청등록》의 내용은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 순교사 연구에서 많이 인용되거나 분석 연구되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연구를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石井壽夫, 〈李太王朝の天主敎とその迫害 : 特に捕盜廳謄錄お素材にして〉, 《사학잡지》 52권 5호, 1941(〈고종조의 조선 천주교회와 그 박해 : 특히 《포도청등록》을 소재로 하여〉,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 수난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2 ; 고흥식, 〈병인교난기 신도들의 신앙 : 《포도청등록》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제6집, 1988 ; 서종태, 〈병인박해기 신자들의 사회적 배경과 신앙 : 양반 신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 다음에 정리한 내용들은 아래의 연구, 특히 가장 최근에 발표된 차인배의 연구를 토대로 하였다.
· 김승무, 〈포도청에 대하여 : 조선 경찰 제도의 기원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26, 1966.
· 이상식, 〈포도청의 설치에 대한 고찰〉, 《역사학연구》 7, 1977.
· 차인배, 《조선 후기 포도청 연구 : 기능 변천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 차인배, 《조선 시대 포도청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3) 좌·우포도청은 상호 협력을 위해 종로를 중심으로 약 1.3km의 거리를 두고 좌우로 배치되었으며, 다른 사법·군사 기구와도 연계 업무의 효율성 때문에 도보로 약 6∼7분에서 약 23분가량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했다고 한다(차인배, 〈조선후기 포도청 치안 활동의 특성 연구 : 공간 배치와 기찰 구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00호, 2010, 605∼636쪽).
4) 《典錄通考》, 형전 ; 《秋官志》, 屬司.
5) 포도청은 형조의 소속 아문이면서도 포도·사법적 기능은 형조 소속이고, 군사적 기능은 병조 소속으로 병조에서 포도청의 인사와 녹봉 지급을 담당했으며, 국왕에게 직접 명령을 받고 보고하는 공권력을 부여받았다고 한다(차인배, 《조선 시대 포도청 연구》, 34∼35쪽).
6) 《성종실록》, 12년 3월 24일, 捕盜事目.
7) 《좌포도청등록》, 병인(고종 3년) 11월, 揭板定式 ; 《우포도청등록》, 무진(고종 5년) 윤5월 12일, 禁條 ; 차인배,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 범죄와 포도청의 활동〉, 《한국 사상과 문화》 41, 2008, 180쪽. 《좌포도청등록》에는 포도청의 금조 내용에 逆獄私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포도청등록》에는 邪學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자의 私學은 邪學의 오식인 것 같다.
8) 이만채 편, 《벽위편》 권2, 乙巳秋曹摘發 ; A. Daveluy,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1860년 필사 정리),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p. 24∼25. 이하 후자의 자료는 발굴 입수자인 최석우 신부가 명명한 이름을 따라 《조선 순교사 비망기》로 표기함.
9) 《정조실록》 권33, 15년 11월 3·8·11·12·16일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42∼47.
10) 차기진, 《조선 후기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66∼167쪽, 305∼309쪽. 주문모 신부의 체포 실패와 최인길·윤유일·지황의 장살로 인한 정국의 변화에 대해서는 위의 책을 참조.
11) 《정조실록》 권54, 24년 윤4월 29일, 5월 22일 ; 《일성록》, 정조 24년 5월 2·5일.
12) 황사영, 〈백서〉, 22∼23행, 34행 ; 《사학징의》 권1, 移文秩, 1801년 2월 12일. 후자의 기록에는 최필제가 좌포도청 옥에 구금된 것으로 나타나며, 전자의 기록에는 최필제가 최필공과 함께 구금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최필공도 좌포도청 옥에 구금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13) 《사학징의》 권1, 來關秩, 1801년 2월 6일 및 이문질, 1801년 2월 20일.
14) 《순조실록》 권2, 원년 1월 10일.
15) 《일성록》, 원년 1월 10일 : 大王大妃殿敎曰 今則漸益熾盛 京城內亦多有之云 左右捕將處 各別申飭 若無寢息之效 則捕將重勘之意分付 可也 煥之曰 承此下敎之前 閒自捕廳已爲 察 而至於竄 之典 有非捕將擅斷者 臣等當自下嚴飭 期有實效矣.
16) 《순조실록》 권2, 원년 2월 2일.
17) 《순조실록》 권2, 원년 2월 9일. 이에 앞서 1월 19일에는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책롱(冊籠)을 옮기던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이 한성부 금란에 체포된 뒤 곧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는데(정약종의 책롱 사건), 이에 대한 처리를 제멋대로 하거나 느슨하게 한 한성부 판윤 이집두(李集斗), 좌윤 윤동만(尹東晩), 우윤 윤장렬(尹長烈)과 전 좌포장 이유경(李儒敬)이 감죄(勘罪)되기도 하였다(황사영, 〈백서〉, 26∼27행 ; 《순조실록》 권2, 원년 2월 14일).
18) ‘성저십리’의 범위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京都漢城府 및 《속대전》, 형전, 禁制 참조.
19) 성저십리 밖의 기찰은 각 읍의 討捕使(진영장)가 주관하였고, 필요시에는 포도청에서 각 읍에 공문을 보내[移關] 죄인을 잡아 올리도록 하였다(《승정원일기》, 숙종 26년 9월 30일). 포도청에서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창과 나누어 순라를 담당했는데, 포도청의 포도패 발패와 기찰 범위는 다음과 같았다. 좌포청에서는 군관 8명과 군사 22명으로 1패는 숭례문 남쪽에서 타락동(낙동)까지, 2패(上2패)는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 서쪽 담 밖까지, 3패(下2패)는 주자동에서 생민동까지, 4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광희문)까지, 5패는 파자교 동쪽에서 홍인문까지, 6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까지, 7패는 종각 및 구리개(銅峴)에서 오간수문까지, 8패는 홍인문에서 관왕묘까지(성외) 기찰하였다. 우포청에서는 군관 8명과 군사 16명으로 1패는 6조 동쪽에서 삼청동까지, 2패는 6조 서쪽에서 창의문 밖까지, 3패는 공조 후동의 남쪽에서 소의문까지, 4패는 소의문에서 종각·숭례문까지, 5패는 돈의문 밖 북쪽 모화관에서 대현(아현∼신촌의 큰고개)까지(성외), 6패는 돈의문과 약재에서 숭례문까지(성외), 7패는 숭례문 밖에서 만리재와 돌모루(石隅, 원효로 입구)까지(성외), 8패는 이문동에서 남산까지(성외) 기찰하였다(《만기요람》, 포도 ; 차인배, 〈조선시대 포도청 연구〉, 131쪽).
20) 《정조실록》 권33권, 15년 12월 10일.
21) 주문모 신부는 1801년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으므로 기찰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경포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한성부 밖까지 기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10·13일 ; 《순조실록》, 원년 2월 26일, 5월 20일.
23) 《사학징의》 권2, 移還送秩, 옥천희 ; 《추안 및 국안》, 신유 10월 3일, 10월 10일, 황심. 이때 김한빈(金漢彬, 베드로)도 제천 장터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어 원주 안창까지 압송되었다가 도망했다고 한다(《추안 및 국안》, 신유 10월 10일, 황사영·김한빈).
24)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25) 차기진, 〈앵베르·모방·샤스탕 성인의 순교 이장과 삼성산 성지〉,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 문화》,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276∼278.
26) 《추안 및 국안》, 헌종 기해 8월 7일 ; 《일성록》, 헌종 기해 8월 3일 ; 차기진, 위의 글, 279∼280.
27) Ch. Dallet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분도출판사, 1980, 453쪽. 이하 본 자료는 《한국천주교회사》 상·중·하(1979∼1980)로 표기함.
28) 병오박해 때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회장이 경기도 은이(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하, 129쪽. 이에 앞서 경포들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해주 감영으로 파송된 적이 있었다(《우포도청등록》, 병오 5월 21·25일).
29) 〈푸르티에(J.A. Pourthie, 신 요한) 신부가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1860년 11월 15일자 서한〉, A-MEP(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15, pp.18∼19 ; 〈송 아가다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천주교 청주교구, 1996, 45쪽.
30) 《일성록》, 철종 11년 5월 9일 ; 《철종실록》 권12, 11년 5월 10일 ; 〈프티니콜라 신부가 대부 프티니콜라 신부에게 보낸 1860년 9월 18일자 서한〉, A-MEP, Vol. 14, pp.1∼12 ; 〈프티니콜라 신부가 삼촌 브느와(Benoit) 프티니콜라 신부에게 보낸 1860년 11월 서한〉, A-MEP, Vol. 14, pp. 385∼386.
31) 청주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양업교회사연구소, 《청주교구 50년사》, 천주교 청주교구, 2013, 147∼148쪽.
32) 《우포도청등록》(갑술 2월 25일 및 3월 11일)을 보면, 갑술년(1874년) 초까지 체포된 신자들의 문초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33) 《우포도청등록》, 병인(1866년) 정월 11일 ; 《좌포도청등록》 및 《추안 및 국안》, 병인 1월. 남종삼은 이때 제천을 떠나 상경하다가 1월 15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되어 이튿날 사형수들을 수감하는 의금부 옥 남간(南間)에 투옥되었고, 제천으로 내려간 경포들은 1월 16일 남종삼 대신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추안 및 국안》, 병인 1월 15·16일 ; 《한국천주교회사》 하, 404쪽, 413∼414쪽).
34) 1868년 3월에 김일돌(金一乭, 시몬), 김쾌령(金快齡, 안나) 등이, 9월에 김도여(金道汝, 요한), 박흥길(朴興吉, 타데오) 등이 송도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고(《우포도청등록》, 무진 3월 3일 ; 《좌포도청등록》, 무진 9월 3일), 송도 회장 이문홍(李文弘, 바오로)도 황해도 토산 장개 근처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337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5).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김윤석(시몬)이 포청등록에 수록되어 있는 김일돌로 추정된다(《병인치명사적》 권1, 150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334).
35) 1869년에는 이효신(요한)이, 1871년에는 이완재(李琓在, 약득), 전주경(全周卿, 베드로)가 강원도 평강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다(《좌포도청등록》, 신미 4월 19일 ; 《병인치명사적》 권5, 21·23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58·59).
36) 1866년 양화진에서 순교한 이용래(李龍來, 아우구스티노)는 홍산 부덕리(富德里)에서, 포도청에서 순교한 강순오(姜順五, 안드레아)와 최이경(안토니오) 등은 홍산에서 체포되었다(《좌포도청등록》, 병인 10월 7일, 12월 8일 ; 《병인치명사적》 권3, 66쪽, 권4, 41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74).
37)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박중문(朴仲文, 토마스), 최순옥(崔順玉, 토마스), 김제원(金濟元, 필립보), 전춘서(田春西, 안드레아) 등이 1866∼1867년 남포 습의면과 심전면 자라곡 등지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다(《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8일, 12월 24일, 정묘 2월 15일 ; 《병인치명사적》권1, 44쪽, 권6, 72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93).
38)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혹은 요한), 김성태(金成泰, 베드로), 김필선(金必先, 요셉), 김 가브리엘 회장, 박 시몬, 이 암브로시오 등이 서천 산막골과 독뫼 등지에서(《좌·우포도청등록》, 병인 10월 7일, 정묘 1월 12일 ; 《병인치명사적》 권1, 73쪽, 권2, 44·152·156쪽, 권3, 20쪽, 권6, 44쪽, 권8, 26쪽, 권23, 41쪽, 권24, 84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97·128·144·145).
39)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이사심(李士心, 바오로)와 이삼철(李三哲, 요한 크리소스토모) 부자, 구준오(具俊五) 등이 1866년 강경에서 경포에게 체포되었다(《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8일 ; 《병인치명사적》 권2, 43쪽, 권11, 62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35·141).
40) 1866년에 진치영(秦致永, 안드레아), 김낙선(金樂宣, 토마스), 이객우(李客瑀, 자는 而學, 베드로), 김종한(金鍾漢, 요한),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등이 경포에게 체포되었다(《좌포도청등록》, 병인 11월 7일 ; 《병인치명사적》 권3, 34쪽, 권4, 8쪽, 권23, 101·106·124·169·150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56·157).
41) 《성종실록》 권127, 12년 3월 24일. 여기에는“좌포도청의 기찰 지역에 사는 도둑이 우포도청에 체포되면 우포도청에 상을 주도록 하라. 이는 좌포도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라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42) 《비변사등록》, 헌종 5년(1839년) 8월 16일 ; 《일성록》헌종 기해 8월 17일.
43) 《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18일.
44) 《한국천주교회사》 하, 399·414·431쪽.
45)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절두산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필사본), 회차 9, 이덕인 시몬의 증언 및 회차 1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1866년 홍주 거더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와 오메트르(P. Aumaitre, 吳 베드로) 신부, 위앵(M.L. Huin, 閔 루카) 신부에게는 몽두와 행차칼을 씌웠지만, 황석두(黃錫斗, 루카) 회장에게는 행차칼만 채웠다고 한다.
46) 《한국천주교회사》 하, 399·414·431쪽. 1846년 김대건 신부를 해주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압송할 때는 홍사로 팔을 묶고, 머리와 얼굴에는 검은 천을 씌웠다(같은 책, 106쪽).
47)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9·11, 이덕인 시몬의 증언 및 회차 1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 《병인 순교자 교회 재판록》, 절두산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필사본), 회차9, 손진도 바오로의 증언. 선교사들의 머리에 몽두를 씌우고 짚둥우리에 태워 이송하는 모습은 김대건 신부의 스케치에 잘 나타나 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동 연구소, 1996, 257쪽).
48)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1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49) 최양업 신부 역, 배티 사적지 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천주교 청주교구, 37∼43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271∼293쪽. 흔히 알려진 압슬형(壓膝刑)은 교회 측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조 이후로 꾸준히 추진되어 온 낙형(烙刑), 자자형(刺字刑), 전가사변형(全家徙邊刑)과 같은 남형이나 부가형의 금지 결과인 것 같다(심재우, 〈조선시대 능지처사형 집행의 실상과 그 특징〉, 《사회와역사》 90호, 2011, 153쪽). 그러나 여기에 금지된 주리형이나 주장당문형은 여전히 사용되었다.
50) 《기해일기》, 109쪽.
51) 조선 시대의 결옥일한은 대사(大事)인 사죄(死罪)가 한 달(30일), 중사(中事)인 유죄(流罪)나 도죄(徒罪)가 20일, 소사(小事)인 장죄(杖罪)가 10일이었다(《大典會通》권5, 형전, 결옥일한).
52) 《한국천주교회사》 중, 438·461쪽 ; 하, 106·119쪽.
53) 《영조실록》 권53, 17년 4월 7일 ; 차인배, 앞의 글, 188쪽.
54)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살림, 2008, 118쪽.
55) 위의 책, 113∼118쪽.
56) 《한국천주교회사》 상, 111쪽.
57)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부록 포청에서 장살된 죄인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 124·146.
58) 《사학징의》 권1, 내관질·正法罪人秩 ;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11일.
59) 황사영, 〈백서〉, 34행.
60)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61) 《순조실록》 권2, 원년 3월 15일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257∼258.
62) 《사학징의》 권1, 내관질, 1801년 10월 11일.
63) 《사학징의》 권1, 내관질, 1801년 9월 11·18·19일 ; 《추안 및 국안》, 신유 10월 10일.
64) 《추안 및 국안》, 신유 10월 10일.
65) 《순조실록》 권2, 원년 4월 26일 ; 《사학징의》 권1, 傳敎奏啓 및 내관질, 1801년 8월 5일.
66) 《사학징의》 권2, 移還送秩, 持憲.
67)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257∼258.
68)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308∼309 ;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정해년 이 바오로 일기〉(전사본).
69) 《일성록》, 순조 33년 10월 27일, 11월 8·9일 ; 《승정원일기》, 순조 33년 10월 27일, 11월 8일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354∼356.
70) 《기해일기》, 22∼23쪽, 93∼95쪽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 369 ; 《승정원일기》, 헌종 5년 4월 12일.
71) 《기해일기》, 46쪽, 97∼99쪽, 107∼109쪽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385∼386, 405∼407, 420, 494 : 청주교구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빅벨출판사, 2009, 102∼111쪽. 최경환 성인이 순교한 장소는 좌포도청이었다(《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순교자 증언록)》, 절두산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필사본), 회차 101, 최선정 베드로의 증언).
72)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510∼514 ; 《우포도청등록》, 신축(1841) 4월 25일.
73) 《기해일기》, 17∼18쪽, 111∼112쪽, 114∼118쪽, 120∼121쪽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452∼454, 486∼487, 489∼491, 509. 민극가 성인과 허임 성인이 순교한 장소는 좌포도청이고, 유대철 성인이 순교한 장소는 우포도청이었다(《기해·병오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41, 유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97, 이 베드로의 증언 ; 회차 100, 최선정 베드로의 증언).
74) 《기해일기》, 118∼120쪽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487∼488, 511∼514.
75) 《기해일기》, 80쪽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408∼409, 436.
76) 《기해일기》, 25쪽.
77) 《기해일기》, 101∼102쪽.
78) 《추안 및 국안》, 기해 8월 7일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25, 이 클라라의 증언 ; 회차 38, 유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90, 박 클라라의 증언.
79) 《승정원일기》, 헌종 5년 6월 7∼9일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40, 유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99, 최 베드로의 증언.
80)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23, 김 루치아의 증언 ; 회차 25, 이 클라라의 증언 ; 회차 37·41, 유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59, 한 바울라의 증언 ; 회차 83,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 회차 90, 박 클라라의 증언 ; 회차 99, 최선정 베드로의 증언.
81) 《일성록》, 헌종 5년 12월 27일 ; 《조선 순교사 비망기》, p. 493.
82)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교회 기록에는 교수로(《한국천주교회사》 하, 123쪽 ; 최양업 신부 역, 배티 사적지 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천주교 청주교구, 1997, 243∼249쪽), 관변 기록에는 장살로 나온다(《일성록》, 병오 8월 1일).
83)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57, 남 데레사의 증언 ; 회차 8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84)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회차 9, 김 가타리나의 증언 ; 회차 81,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85) 《좌포도청등록》, 병오 8월 1일 ; 《일성록》, 동일조.
86) 《우포도청등록》, 병오 8월 1일 ; 《일성록》, 동일조.
87) 《승정원일기》, 병오 7월 26일 ; 《일성록》, 동일조.
88) 《한국천주교회사》 하, 131쪽.
89) 《승정원일기》, 병오 7월 29일 ; 《우포도청등록》, 동일조. 훗날의 증언에도 현석문 성인은 우포도청에 투옥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81,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90)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병인박해는 1874년경에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다가 정축년(1877년) 이후에는 포교들이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그들의 종적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28일(음력 1877년 12월 26일)에 체포되어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되었고(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앞의 책), 드게트 신부는 1879년 5월 16일(음력 윤 3월 26일) 충청도 공주의 공수원(公須院) 새터(新垈, 공주군 우성면 龍鳳里)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 투옥되었다가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55번 ; 《우포도청등록》 기묘 4월 1일, 李學景 ; 《우포도청등록》, 기묘 4월 9일, 金善元). 그리고 리델 주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최지혁(요한) 등이 무인년(1878년)에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고, 드게트 신부를 모셨던 이병교(레오) 등이 기묘년(1879년)에 체포되어 서울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다. 본고에서는 전자를 ‘무인박해’(戊寅迫害)로, 후자를 마지막 박해인 ‘기묘박해’로 설명하였다.
91) 이 요한은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 등 3대가 함께 순교했으나, 이 요한만 ‘하느님의 종’에 선정되었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164·165·166 ; 《병인치명사적》 권1, 46쪽, 권23, 182쪽.
92) 기묘박해 순교자 이병교(레오)는 김덕빈(金德彬, 바오로), 이용헌(李容憲, 이시도르)과 함께 순교했으나, 이병교만 ‘하느님의 종’에 선정되었다(《우포도청등록》, 기묘 4월 1일 ; 《병인치명사적》권2, 19∼20쪽).
93) 《우포도청등록》, 병인 1월 24·25일 ; 《일성록》, 병인 1월 25일.
94) 유 마오로의 세례명은 마오로(《병인치명사적》 권2, 35쪽)와 바오로(《치명일기》, 정리 번호 93) 두 가지로 나온다. 그의 아들 유 안드레아는 배론 성요셉신학교 신학생이었고, 1868년에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94 ; 《병인치면사적》, 권1, 110쪽, 권2, 36쪽).
95) 김한여는 순교록에 나타나는 이름이고(《치명일기》, 정리 번호 202 ; 《명인치명사적》 권9, 5쪽), 김중은은 관변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이다(《좌포도청등록》, 병인 9월 14일).
96) 박성운의 세례명은 순교록에 나온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16).
97) 김큰아기의 남편인 김진(金振, 베드로)도 아내와 같이 양화진(절두산)에서 효수되었으나(《포도청등록》, 병인 9월 22일 ; 《일성록》, 1866년 10월 4일) 순교 여부가 확실치 않아 ‘하느님의 종’에서 제외되었다. 교회 순교록에는 순교자로 나온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204 ; 《병인치명사적》 권9, 7쪽).
98) 서울의 각 형장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숫자는, 차기진, 〈조선 시대 서울의 형장과 서소문 밖 순교터〉 《서울문화》 14·15합본, 서울문화사학회, 2011)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위 본문에 있는 서소문 밖(‘하느님의 종’ 순교자 26명에는 새로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133명)이 포함된 것이다. 이들 133명 중 서소문 밖 형장의 순교자들은 이승훈(베드로, 참수), 황심(토마스, 능지처사), 옥천희(요한, 참수), 황사영(알렉시오, 능지처사), 홍봉주(토마스, 참수) 등 5명이다.
99) ‘하느님의 종’ 133명 중에는 김면호(토마스)가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00) 절두산 순교자 14명은 모두 ‘하느님의 종’ 133명 가운데 들어 있는데, 이 중에서 13명은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했지만, 강 요한만은 충청도 신창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절두산으로 압송된 것 같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95 ; 《병인치명사적》 권1, 73·106쪽, 권2, 39쪽).
101) 〈베르뇌 주교의 1865년 10월 6일자 서한〉, A-MEP(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579, p. 782 ; 《한국천주교회사》 하, 480쪽.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수를 1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102) 병인박해 직전의 총 신자수 2만 3천 명 중에서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병인박해 이후의 신자수는 순교자와 배교자를 포함하여 3,475명(남자 72.55%, 2,521명 / 여자 27.45%, 954명)이고, 이는 총 신자수의 15.11%에 이른다고 한다. 또 이 중에서 출신지를 알 수 있는 신자수는 27%인 937명이며, 체포 시기를 알 수 있는 신자수는 1,935명이 된다고 한다(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8·135·149쪽). 다만, 이 연구에는 자료화된 통계 수치나 구체적인 명단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필자가 추정한 순교자수 1,660명의 두 배에 이르는 3,475명이란 신자수가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03) 기록에 나타나는 숫자만으로 전국 순교자수 중에서 서울 순교자수가 점유하는 비율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포도청등록》에는 서울 순교자만 수록되어 있으며, 교회 순교록에도 서울 순교자들이 더 많이 수록되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로 《치명일기》에 수록된 순교자수 877명 가운데 서울 순교자수는 약 41%인 359명으로 나온다.
104) 원재연, 〈조선시대 대외 관계와 양화진·잠두봉 연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발표문, 1998, 31쪽 ; 윤선자, 《한국 가톨릭 문화 유산과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절두산순교기념관, 1999, 28~43쪽 ; 서종태, 〈병인박해와 절두산 순교자들〉, 《교회사연구》 20, 2003, 86~105쪽. 양화진 참수 순교자는 효수 순교자의 잘못된 증언으로 생각된다.
105) 남종삼(요한),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 등 3명의 성인 외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은 순교자는 권복(權複, 프란치스코, 순교록의 권복초), 이신규(李身逵, 마티아),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이고 (《승정원일기》, 고종 5년 윤4월 2·4·5·6·7일 ; 《일성록》, 《추안 및 국안》, 《諫議謄錄》, 동일조), 교수형을 받은 순교자는 이객우(李客瑀, 베드로, 포청등록의 李而學)이다(《병인치명사적》 권23, 101·106·124쪽 ; 《좌포도청등록》병인 11월 7일). 권복 일행과 함께 순교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의 참수 사실은 관변 기록에만 나온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윤4월 7일).
106) 1866년에 순교한 김 골룸바이다(《병인치명사적》 권1, 57쪽).
107)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 주교,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정의배, 우세영 등 8명 외에 1866년의 순교자 김계호(토마스), 김원익(바오로), 이 서방 등 세 명이 포함된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13·14·15번 ; 《병인치명사적》권7, 12·46쪽, 권10, 30쪽, 권17, 1쪽).
108) 《고종실록》 권3, 3년 1월 24일 ; 《승정원일기》 고종 3년 11월 29일 : 《일성록》, 동일조.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7,2] ‘소경재’와 유사한 서울 자연지명이 여럿 있다. ‘하느님의 종’ 김입돌 베드로가 묻힌 ‘소경재’는 아래 ①이나 ②로 보인다.
①쇠경재 :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마을로서, 당시 도동에서 동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선조 때 한음 이덕행(漢陰 李德馨, 1561~1613)이 현재 남대문로5가 526 대우재단빌딩 자리에 살면서 살면서 경전을 낭송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송경재’라 하던 음이 변하여 ‘쇠경재’가 되었다.
②맹인당골짜기 :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골짜기로서, 옛날 소경이 떨어져 죽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맹긴당골짜기라고도 하였다. → 맹간당골짜기, 맹긴당골짜기.
③소경다릿골 : 중구 주교동과・종로구 예지동・종로4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주교동과 예지동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 주변에 소경이 많이 살았으므로 소경다리라 하고 그 인근을 부르던 이름이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음이 변하여 새경다릿골・효경다리골이 되었으며, 한자명으로 효경다리의 음을 뜻으로 풀어 효교(孝橋)・효교동(孝橋洞)이라고 하였다.
④쇠귀고개 : 도봉구 쌍문동에서 강북구 우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인근 도봉산 쪽에 쇠귀(우이)바위가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소귀바위, 우이령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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