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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연구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최 원 배
【국문요약】입증의 역설에 관한 기존의 논의는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사실에 대체로 집중되어 왔다. 나는 이 글에 서 까마귀가 아니지만 검은 대상이 입증의 역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우선 헴펠이 입증의 역설을 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지를 검토해 입증의 역설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부분적이었음을 밝힌 다. 이어 까마귀가 아니지만 검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을 헴펠 이 정확히 어떻게 정당화 하는지를 살펴보고, 헴펠이 이 과정에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라고 부르는 원리를 가정하고 있음을 보인다. 끝으로 입증의 역설에 대 한 이런 새로운 이해가 헴펠과 베이즈주의의 역설 해결책에 어떤 영향을 미치 는지를 살펴본다.
【주요어】입증의 역설, 까마귀 역설, 헴펠, 베이즈주의 투고일: 2017. 9. 20 심사 및 수정 완료일: 2017. 10. 12 게재확정일: 2017. 10. 06 * 이 논문은 한양대학교 교내연구지원사업으로 연구되었음(HY-2014년도). ** 이 문제를 같이 논의해준 ‘입증’ 연구 모임의 이영의, 여영서, 박일호 선 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입증의 역설에 대한 베이즈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 는 특히 박일호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울러 익명의 심사위원 선 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최원배
1. 머리말
‘헴펠의 역설’ 또는 ‘까마귀 역설’이라고도 불리는 입증의 역설은 그간 많이 논의되었고, 역설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진단과 해결책이 제안되었다.1) 하지만 나는 입증의 역설과 관련해 여태껏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거나 혹은 적어도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까마귀가 아니지만 ‘검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사실과 관련한 문제이다. 역설에 관한 기존의 논의는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사실에 대체로 집중되어 왔다. 나는 이 글에서 까마귀가 아니지만 검은 대상이 입증의 역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논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2절에서 헴펠이 입증의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인다. 이를 통해 입증의 역설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제한적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3절에서는 까마귀가 아니지만 검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을 헴펠이 정확히 어떻게 정당화 하는지를 검토하고 거기에 어떤 가정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밝힐 것이다. 4절에서는 입증의 역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헴펠이 내린 역설의 진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5절에서는 헴펠의 견해와 베이즈주의의 견해가 얼마나 다른지를 논의할 것이다. 1) 입증의 역설을 다룬 그 동안의 논의를 개괄하려면 Swinburne (1971)과 Fitelson (2006)을 참조. 하지만 국내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국내 문헌 으로는 박제철 (2014), 이영의 (2015), 이영의 등 (근간), 전영삼 (2003), 조 인래 등 (1999) 정도가 나와 있다.
2. 헴펠이 이해하는 입증의 역설 입증의 역설을 야기하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 두 가지는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이다. 이들을 각각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기로 하자. 니코드 기준 보편 조건문의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할 경우 입증 사례이고, 전건을 만족하지만 후건을 만족하지 않을 경우 반입증 사례이며, 전건을 만족하지 않는 대상은 후건을 만족하든 그렇지 않든 무관한 사례이다. 동치 조건 어떤 사례가 가설 H를 입증한다면, 그 사례는 H와 동치인 가설도 모두 입증한다. 그리고 까마귀 가설 H1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기로 하자. H1: 까마귀는 모두 검다(x)(Rx → Bx). 이제 헴펠을 따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의 증거 사례 a, b, c, d를 생각해 보자. a: 까마귀이고 검은 대상 b: 까마귀이고 검지 않은 대상 c: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 d: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 370 최원배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 d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H1과 동치인 또 하나의 가설 H2만 있으면 된다. H2: 검지 않은 것은 모두 까마귀가 아니다(x)(∼Bx → ∼Rx). 니코드 기준에 따를 때 d는 H2의 입증 사례이고, 동치조건에 따라 그것은 H1을 입증한다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 결과를 두고 헴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검은색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닌 대상이 모두 [H1] 을 입증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결과 빨간 연필, 녹색 나뭇잎, 노란 소 등도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 가 된다.2) 검은색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닌 대상이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결과’(surprising consequence)로 생각된다. 입증의 역설에 대한 많은 논의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입증의 역설을 다룰 때 ‘역설적 결론’(the paradoxical conclusion)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3) 역설적 결론: 까마귀도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이 까마귀 가설 (x)(Rx → Bx)을 입증한다. 2) Hempel (1945), p. 38. 3) 이런 정식화는 특히 최근의 베이즈주의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만 든다면 Fitelson (2006), p. 96, Fitelson and Hawthorne (2010a), p. 248, Fitelson and Hawthorne (2010b), p. 208, Maher (1999), p. 50, Maher (2004), p. 78, Rinard (2014), p. 82, Vranas (2004), p. 547 등이 있다.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71 하지만 헴펠이 사례 d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사실만을 역설적 결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헴펠은 위에서 얻은 “놀라운 결과를 좀 더 확장할 수 있다”4)고 말하면서 또 다른 가설 H3을 고려한다. H3: 까마귀이거나 까마귀가 아닌 것은 모두 까마귀가 아니거나 검다(x)((Rx ∨ ∼Rx) → (∼Rx ∨ Bx)). 까마귀 가설 H1과 동치인 이 가설에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을 적용한 결과를 헴펠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러므로 ... 네 대상 중에서 a, c, d는 [H1]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반면, b는 [H1]을 반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은 까마귀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any non-raven) 까마귀는 모두 검다 는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점을 함축한다. 우리는 동치 조건과 더불어 위에서 제시한 입증의 충분조건[즉 니코드 기준]이 지니는 이러한 함축(these implications)을 가리켜 ‘입증의 역설’(the paradoxes of confirmation)이라고 부르겠다(글 쓴이의 강조).5) 이 대목은 헴펠이 입증의 역설이라는 말을 했을 때, 역설적 결과로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 d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는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인 c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가 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더구나 인용문에 나와 있는 헴펠의 표현 ‘이러한 함축’(these implications)에 주목해 볼 때, 입증의 역설이란 하나의 역설적 결과만을 뜻한다기보다는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으로4) Hempel (1945), p. 38. 5) Hempel (1945), pp. 38-39. 372 최원배 부터 따라나오는 역설적 결과 전체를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역설적 결과 전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다음 절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d만을 역설적 결과라고 말하는 것과 c와 d가 모두 역설적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d만을 역설적 결과라고 한다면 이는 까마귀가 아닌 대상들 가운데 일부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비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까마귀 가설을 입증하는 것 가운데는 까마귀가 아닌 것도 있다는 점을 역설적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한편 c와 d가 모두 역설적 결과라고 한다면 이는 까마귀가 아닌 대상은 모두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비친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달리 말해, 이는 까마귀가 아니기만 하면 그 대상은 무엇이든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점을 역설적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강한 의미의 역설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 결론을 단순히 d의 문제로 정식화해 입증의 역설을 논의하는 최근의 시도들은 헴펠에 충실한 견해라고 할 수 없다.
3. 증거의 역귀결 조건
입증의 역설을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으로부터 따라나오는 ‘놀라운 결과’ 전체를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면, 그런 결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런 결과에는 d뿐만 아니라 c도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이 우선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까마귀가 아닌 대상 e는 무엇이나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도 그런 결과 가운데 하나라고 헴펠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이것도 포함해야 할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73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검은 대상 f는 무엇이나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도 그런 결과 가운데 하나로 포함해야 한다.6) 왜냐하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으로부터 따라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헴펠이 말하는 입증의 역설이란 다음 표에서 c, d, e, f라는 역설적 결과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a 까마귀이고 검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b 까마귀이고 검지 않은 대상 Ra & ∼Ba 반입증 사례 c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d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 않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e 까마귀가 아닌 대상 ∼Ra 입증 사례 f 검은 대상 Ba 입증 사례 헴펠이 정확히 어떤 논거에서 이런 역설적 결과가 생겨난다고 보는지를 따져보기로 하자. 이를 살펴봄으로써 헴펠이 어떤 가정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d가 입증 사례가 된다는 점은 간단하다. 그것은 니코드 기준에 따를 때 가설 H2의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시키므로 H2의 입증 사례이고, H2는 H1과 동치이므로 동치 조건에 따라 H1의 입증 사례가 되는 것이다. c는 왜 입증 사례인가? 헴펠은 그 점을 H3를 이용해서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의 충분조건[즉 니코드 기준]에 따르면 [H3]는 분명히 다음을 6) f가 입증 사례라는 점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다음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 주로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다’라는 가설에 대해 검 은색이 아니고 까마귀가 아닌 것은 모두 입증 사례가 된다는 주장에서 나타 나는 역설적 사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방금 간단하게 요약한 일반적 생각 은 더 극단적인 경우들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검은색의 대상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아닌 대상은 모두 문제의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Hempel (1945), p. 46. 374 최원배 만족하는 모든 대상 [k]에 의해 입증된다. 즉 (1) [k]는 까마귀이 거나 까마귀가 아니고, 나아가 (2) [k]는 까마귀가 아니거나 또는 검은색이다. (1)은 분석적이므로, 이 조건은 (2)로 환원된다. 따라 서 우리는 동치 조건에 의해서 까마귀가 아니거나 검은색인 대상 은 무엇이든 ... [H1]을 입증한다고 생각해야 한다.7) 여기 나와 있는 헴펠의 견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H3의 전건은 자동으로 만족되므로 후건 ‘∼Rx ∨ Bx’만 만족하면 니코드 기준을 만족하게 되는데, 까마귀가 아니거나 검은 대상은 무엇이든 후건을 만족하므로 입증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헴펠은 이어서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인 c도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가 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 생각에, 이 과정에는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가정이 하나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증거의 역귀결 조건 E가 H를 입증하고 E’ ⊨ E이면, E’은 H를 입증한다. 이는 헴펠이 입증의 적합성 조건 가운데 하나로 고려했던 역귀결 조건(the converse consequence condition)8)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것과 다르다. 헴펠이 논의한 역귀결 조건은 가설 사이에 역귀결 관계가 성립할 때 증거와 가설이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인 반면, 이 조건은 증거 사이에 역귀결 관계가 성립할 때 증거와 가설이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하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 7) Hempel (1945), p. 38. 8) 헴펠의 역귀결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된다. 가설의 역귀결 조건 E가 H를 입증하고 H’ ⊨ H이면, E는 H’을 입증한다.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75 역귀결 조건을 직관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증거가 가설을 입증하면 그보다 강한 증거도 원래의 가설을 입증한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헴펠이 말한 역귀결 조건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 정식화한 역귀결 조건을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라 부르고, 헴펠이 제시한 역귀결 조건을 ‘가설의 역귀결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9)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가정할 경우 우리는 c, e, f가 왜 입증 사례가 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H3에 니코드 기준과 동치 조건을 적용하면 우리는 먼저 다음을 얻는다. ∼Ra ∨ Ba는 까마귀 가설 H1을 입증한다. 그런데 다음이 모두 성립한다. ∼Ra & Ba ⊨ ∼Ra ∨ Ba ∼Ra ⊨ ∼Ra ∨ Ba Ba ⊨ ∼Ra ∨ Ba 따라서 여기에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적용하면, 우리는 c, e, f에 각각 해당하는 다음을 얻게 된다.10) 9) Fitelson and Hawthorne (2010b), pp. 208-209에서 파이텔슨 등은 증거의 역귀 결 조건과 비슷한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들에 따르면 헴펠은 다음과 같은 ‘증거의 단조성’(the evidential monotonicity) 원리를 가정하고 있다. ‘Fa’가 가설 H를 입증하면, ‘Fa & Ga’도 H를 입증한다. (여기서 G는 F와 일관적인 임의의 술어이다.) 하지만 내가 제시한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 좀 더 정확하고 일반적인 것으 로 생각된다. 더 강한 증거가 꼭 연언 형태의 증거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376 최원배 ∼Ra & Ba는 까마귀 가설 H1을 입증한다. ∼Ra는 까마귀 가설 H1을 입증한다. Ba는 까마귀 가설 H1을 입증한다. 이것이 c, e, f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안은 아니다. 나는 헴펠의 글에 e와 f가 입증 사례임을 보이는 방안으로 두 가지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방안부터 살펴보자. 이 방안은 헴펠이 입증을 증거와 가설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는 맥락과 관련이 있다.11) 우선 d뿐만 아니라 c도 입증 사례라는 점을 일단 확보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e나 f도 입증 사례가 된다는 점은 비교적 쉽게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하는 것이다. 까마귀가 아닌 대상은 무엇이든 검거나 검지 않을 것 이다. 만약 검다면 그것은 c에 해당하는 사례이므로 입증 사례이고, 만약 검지 않다면 그것은 d에 해당하 는 사례이므로 역시 입증 사례이다. 따라서 까마귀가 아닌 대상, 즉 e는 모두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이 다. 같은 사고방식을 통해 우리는 검은 대상, 즉 f는 모두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헴펠 자신도 이런 10) 나아가 헴펠은 까마귀도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 d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사실로부터 가령 ‘빨간 연필’이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고 말 하는데, 이 과정에도 엄밀하게 말하면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 가정되어 있다 고 보아야 한다. 빨간 연필인 대상은, 숨은 전제를 적절히 보충할 경우, 까 마귀도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임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 헴펠은 Hempel (1945)에서 입증의 역설을 소개할 때는 입증을 대상과 가설 사이의 관계로 보고 논의를 전개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할 때는 입증을 증거 문장과 가설 문장 사이의 관계로 보고 논의를 전개한다.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77 추론을 한다고 생각되는 구절이 있다.12) 우리가 입증을 증거가 되는 대상과 가설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는 틀 안에서 본다면, a, b, c, d라는 네 가지 분류는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모든 대상을 망라하는 분할(partition)이 된다. 이때는 어느 대상이든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이거나 반입증 사례일 뿐 중립적 사례는 없다는 결론이 쉽게 따라나온다고 할 수도 있다.13) 그런데 첫 번째 방안은 c가 입증 사례라는 점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애초에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는 아직 제시되지 않은 셈이다. 만약 e와 f가 입증 사례라는 사실로부터 c가 입증 사례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한다면, 이때는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가정해야 한다. e나 f가 입증 사례임을 보이는 두 번째 방안도 헴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방안은 헴펠이 입증을 문장들 사이의 관계로, 즉 증거 문장과 가설 문장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헴펠은 f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점을 보이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다.14) 검은 대상 Ba는 “모든 대상은 검다”(x)Bx는 가설을 입증한다. 12) 앞서 인용한 헴펠의 글에 이 점이 나와 있다. 아래 밑줄 친 부분은 이런 해 석을 뒷받침해준다. “네 대상 중에서 a, c, d는 [H1]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반면, b는 [H1]을 반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은 까마귀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any non-raven) 까마귀는 모두 검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점을 함축한 다.” 13) 헴펠로부터 이런 결론이 따라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Fetzer (2017) 참조. 나아가 우리는 헴펠이 이 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Hempel (1945), pp. 43-44 참조. 14) Hempel (1945), p. 46 참조. 378 최원배 그런데 “모든 대상은 검다”는 가설은 “까마귀는 모두 검다”는 까마귀 가설을 함축한다. 따라서 검은 대상 Ba는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 쉽게 알 수 있듯이, 헴펠은 여기서 자신이 나중에 내세우는 특수 귀결 조건(the special consequence condition)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15) 특수 귀결 조건 E가 H를 입증하고, H ⊨ H’이면, E는 H’를 입증한다. 이는 어떤 증거가 가설을 입증한다면 그 증거는 그보다 약한 가설도 입증한다고 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실제로 (x)Bx ⊨ (x)(Rx →Bx)이 성립하므로 특수 귀결 조건을 받아들일 경우 검은 대상 Ba, 즉 f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x)∼Rx ⊨ (x)(Rx → Bx)도 성립하므로 같은 방식을 통해 우리는 까마귀가 아닌 대상 ∼Ra, 즉 e는 까마귀 가설을 입증한다는 결론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특수 귀결 조건을 전제한다면, e와 f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는 점을 비교적 쉽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첫 번째 방안과 마찬가지로 c가 왜 입증 사례인지는 아직 대답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 여전히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e와 f가 입증 사례라는 사실로부터 c 가 입증 사례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우리는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가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e, f를 입증 사례로 여길 수 있는 다른 두 방안을 살펴보았다. 두 방안 모두 c가 입증 사례라는 점을 보이려면 별15) 귀결 조건은 나중에(p. 63 이후) 정식으로 제시된다.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79 도의 설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헴펠이 애초에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체계적이고 간단한 방안으로 보인다. 아마 이런 견해에 맞서,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알듯이 헴펠은 가설의 역귀결 조건을 적합성 조건 가운데 하나로 고려하다가 최종적으로 버린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함축 조건과 특수 귀결 조건에 더해 역귀결 조건까지 받아들일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헴펠이 증거의 역귀결 조건을 암암리에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헴펠의 입증 이론에서는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 그대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헴펠은 자신의 입증 이론에서 입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E가 H를 입증한다. = 어떤 S에 대해, E가 S의 전개를 함축하고 S는 H를 함축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 정의에 나오는 ‘S’와 ‘전개’(development)의 구체적 성격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16)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헴펠이 ‘함축’ 개념을 이용해서 입증을 정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가령 E 가 S의 ‘전개’를 함축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E를 함축하는 E’도 당연히 S의 전개를 함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증거의 역귀결 조건이 언제나 성립하도록 헴펠의 입증 정의가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앞의 표에 나온 여섯 가지 증거 문장에 대한 분류는 헴펠의 입증 이론에서도 정확히 동일하게 유지된다. 16)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영의 등(근간), 3장 참조. 380 최원배 4. 헴펠의 역설 진단에 미치는 영향 우리는 지금까지 d뿐만 아니라 c도 입증 사례가 되며, 나아가 e, f도 모두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입증의 역설을 이런 역설적 결과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고 할 때, 우선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입증의 역설에 대한 헴펠의 진단과 해결책은 부분적인 성격만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는 이 점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알듯이, 헴펠은 d가 역설적 결과라는 인상은 ‘잘못된 직관’에 근거한 심리적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d는 실제로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이다. 그는 “나트륨 염은 모두 노란색을 내며 탄다”는 가설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한다. 실험실에서 우리가 나트륨 염이라고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얼음 조각을 태워보았더니 노란색을 내며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찰했다고 해보자. 이 증거는 앞의 가설을 입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헴펠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이 상황을 다음 상황과 대비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나트륨 염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를 모르는 어떤 물질을 태워 보았는데 그것은 노란색을 내며 타지 않았으며, 그 물질의 성분을 분석해 보았더니 나트륨 염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이 드러났다. 헴펠에 따르면, 이 경우 실험 결과는 원래의 가설을 지지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둘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태워본 물질이 나트륨 염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부이다. 헴펠은 입증 사례인지 여부를 정할 때는 그런 ‘부가적 정보’를 끌어들이지 말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와 관련해서 볼 때, 헴펠의 이런 설명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d에 대해 했던 이런 설명을 c의 경우에는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81 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c가 실제로는 입증 사례인데 왜 입증 사례가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되는지를 d 와 같은 방식으로는 해명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d는 ‘노란색을 내며 타지 않는’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c는 ‘노란색을 내며 타는’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지 않은 대상인데 실제로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까마귀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면, 그 대상 d는 헴펠의 주장대로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고 인정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c는 검은 대상인데 실제로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까마귀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 대상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라고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며, 이때 어떤 ‘부가적 정보’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d와 c가 헴펠 이론에서 모두 입증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 둘이 동질적이거나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도 새로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17) 아마도 d와 c 사이에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d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로 들어오게 된 경로와 c가 까마귀 가설의 입증 사례로 들어오게 된 경로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d는 가설 H2를 통해 입증 사례로 분류되게 된 것인 반면, c 는 가설 H3를 통해 입증 사례로 분류되게 된 것이다. 두 가설 모두 보편 조건문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상당히 달라 보인다. 원래의 까마귀 가설인 H1이 H2와 동치라는 점은 우리가 대우 추론(contraposition)을 인정하는 이상 부인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H1과 H3가 동치라는 점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고 꽤 인위적으로 비친다. 특히 보편 조건문 형태인 가설 H3는 간단히 표현한다면 다음 보편 문장과 동치이다. 17) 이 점을 깨닫게 해준 2015년 2학기 한양대 정책학과 ‘과학기술철학’ 수강생 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382 최원배 H3’: (x)(∼Rx ∨ Bx). 이는 원래의 까마귀 가설인 H1과 H3가 동치인 이유가 조건문이 질료적 조건문(material conditional)으로 여겨진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때문에 입증의 역설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조건문을 질료적 조건문으로 여기는 데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18) 하지만 이런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를 여기서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며, 여기서는 d가 실상은 역설적 결과가 아니라는 헴펠의 해명 방식을 c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5. 헴펠과 베이즈주의 이 절에서는 입증의 역설에 대한 베이즈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고, 이것이 헴펠의 견해와 얼마나 다른지를 논의하기로 한다. 먼저 베이즈주의에서는 헴펠이 역설적 결과로 인정한 입증 사례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베이즈주의자들에 따를 때 다음이 성립할 경우 증거 E는 가설 H를 입증한다고 말하게 된다. P(H/E) > P(H) 그런데 베이즈 정리 덕분에 우리는 다음을 확인해서 입증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19) 18) 이런 시도로는 Pollock (1973) 및 Sylvan and Nola (1991)을 참조. 19) 이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베이즈 정리 P(H/E) = P(H)P(E/H)/P(E) P(H/E) > P(H) P(H)P(E/H)/P(E) > P(H)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83 P(E/H) > P(E) 그리고 이를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다.20) 우선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 가운데 까마귀이면서 검은 대상, 까마귀가 아니면서 검은 대상, 까마귀이면서 검지 않은 대상, 까마귀가 아니면서 검지도 않은 대상의 비율을 각각 q, r, s, t라고 하고 이들은 0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가 임의로 고른 대상 a가 각각 Ra & Ba, ∼Ra & Ba, Ra & ∼Ba, ∼Ra & ∼Ba일 주관적 확률은 다음 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P(E) Ra ~Ra Ba q r ~Ba s t 이때 “까마귀는 모두 검다”는 까마귀 가설 H가 참이라는 조건 아래 각각의 증거가 참일 주관적 확률 P(E/H)는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될 것이다. P(E/H) Ra ~Ra Ba q + s r - s ~Ba 0 s + t 두 표에 나온 값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P(E/H)/P(E) > 1 P(E/H) > P(E) 20) 이는 Mackie (1963)에 처음 제시된 것으로, 여기 나온 것은 Horwich (1982), pp. 55-58를 수정한 것이다. 384 최원배 a: 까마귀이고 검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b: 까마귀이고 검지 않은 대상 Ra & ~Ba: 반입증 사례 c: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 ~Ra & Ba: 반입증 사례 d: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우선 헴펠의 견해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c이다. c는 헴펠의 견해에서 입증 사례이었던데 반해 베이즈주의에서는 반입증 사례로 분류된다. 둘의 입장 차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헴펠은 e와 f도 모두 입증 사례로 분류한다. 베이즈주의에서는 어떨까? 베이즈주의에서는 이들을 모두 중립적 사례로 분류하게 된다. 그 점은 우리가 P(E)의 표를 바탕으로 P(E/H)의 표를 작성할 때 가정되어 있던 사실이다. 두 번째 표를 작성할 때 우리는 베이즈주의자들이 ‘독립성’ 가정이라고 부르는 다음 두 가지21)를 받아들인 것이다. (가) P(∼Ra/H) = P(∼Ra) (나) P(Ba/H) = P(Ba) 가령 두 번째 표에서 P(Ra & Ba/H) = q + s라고 보는 이유는 까21) (가)와 (나) 대신 이를 각각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마찬가지이다. (가’) P(Ra/H) = P(Ra) (나’) P(∼Ba/H) = P(∼Ba) 이는 베이즈주의에서는 까마귀 가설과 관련해 까마귀인 대상 Ra이나 까마 귀가 아닌 대상 ∼Ra 모두 중립적 사례임을 의미한다. 검은 대상 Ba와 검 지 않은 대상 ∼Ba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헴펠 이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거기에서는 ∼Ra는 입증 사례이지만 Ra는 중립적 사례이다. 이런 차이는 두 이론의 배경 이론이 달라서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배경 이론이 연역 이론인 반면 다른 하나는 확률 이론이다.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85 마귀 가설이 참일 경우 P(Ra & ~Ba/H)은 0이 되므로 첫 번째 표의 P(Ra & ~Ba)의 값 s를 P(Ra & Ba/H)의 값으로 그대로 넘기게 되는데, 이는 곧 P(Ra)의 값이 P(Ra/H)인 경우에도 그대로 유지된다(즉 P(Ra/H) = P(Ra))는 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표에서 P(~Ra & ~Ba/H) = s + t라고 보는 이유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이때 우리는 P(~Ba/H) = P(~Ba)를 가정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헴펠과 베이즈주의에서 까마귀 가설과 관련한 증거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를 정리해 본다면 우리는 다음 표를 얻게 된다. 증거 헴펠 베이즈주의a 까마귀이고 검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입증 사례 b 까마귀이고 검지 않은 대상 Ra & ∼Ba 반입증 사례 반입증 사례 c 까마귀가 아니고 검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반입증 사례 d 까마귀가 아니고 검지 않은 대상 ∼Ra & ∼Ba 입증 사례 입증 사례 e 까마귀가 아닌 대상 ∼Ra 입증 사례 중립적 사례 f 검은 대상 Ba 입증 사례 중립적 사례 굵은 글씨로 나타낸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헴펠과 베이즈주의자들은 역설적 결과와 관련해 부분적으로는 서로 다른 판정을 내리고 있다. 두 견해의 이런 결과 차이도 주목할 만하지만, 이런 차이를 낳게 된 연원을 따져보는 일도 아주 흥미롭다. 헴펠의 경우 e와 f 가 입증 사례라는 것은 헴펠 이론의 산물이었다. 반면에 베이즈주의에서는 이들을 중립적 사례로 분류하게 되고, 이는 단순히 가정의 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베이즈주의에서는 이런 두 가정이 근거가 되어 c를, 헴펠과 달리, 반입증 사례로 분류하게 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헴펠과 베이즈주의가 역설적 결과를 꽤 다르게 파악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두 입장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386 최원배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최근의 베이즈주의자들은 입증의 역설에 대해 자신들이 제시하는 ‘베이즈주의의 해결책’이 헴펠의 입장과 비슷하면서도 더 나은 견해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베이즈주의의 기본 전략을 잠깐 살펴보고 논의를 마치기로 하겠다. 우선 역설적 결과 d와 관련한 베이즈주의의 해결책을 살펴보자. 베이즈주의자들은 다음 두 가지 가정을 추가로 한다. (다) P(∼B) >> P(R) (라) P(∼R∼B) ≒ 1 (다)는 이 세계에는 까마귀인 대상보다 검지 않은 대상이 훨씬 많다는 경험적인 가정에 해당하고, (라)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까마귀도 아니고 검지도 않은 대상이 무수히 많다는 경험적 가정에 해당한다. 이 두 가정을 덧붙이게 되면, (1) d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주 미미하며, (2) d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하는 정도는 a가 까마귀 가설을 입증하는 정도보다 작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베이즈주의자들은 이 점이 바로 헴펠의 정성적 입증 이론에 비해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량적 입증 이론의 큰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c에 대해서도 베이즈주의자들은 비슷한 대응을 한다. c가 반입증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주 미미하다는 것을 보이려면 다음과 같은 가정을 추가하면 된다. (마) P(B) >> P(R)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검은 대상의 수가 까마귀인 대상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 가정이다. 이처럼 베이즈주의자들은 경험적 가 입증의 역설 다시 보기 387 정에 의존해 d와 c가 갖는 역설적 성격을 해명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입증의 역설에 대한 베이즈주의의 이런 해결책은 어떤 면에서 베이즈주의가 헴펠 이론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량적 입증 이론인 베이즈주의는 정성적 이론인 헴펠의 이론보다 좀 더 풍부한 이론적 장치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베이즈주의에서는 역설적 결과처럼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일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이 과정에 도입된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에만 성립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드러났듯이, (다), (라), (마)라는 경험적 가정을 자꾸 덧붙여 d나 c가 지닌 역설적 성격을 해명한다는 것은 그것이 임시방편적 해결책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불러올 수 있다. 나아가 (가)와 (나)라는 언뜻 보기에 직관적으로 분명한 가정마저도 사실 논란의 대상임을 깨닫는다면 베이즈주의의 설득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최근 베이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독립성 가정을 두고 다양한 흐름이 있다.22) 독립성 가정 가운데 (가)는 받아들이지만 (나)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23)이 있는가 하면, (가)가 없어도 d의 역설적 성격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24)도 있다. 나아가 (가)와 (나) 같은 부담스러운 독립성 가정을 하지 않고, d의 역설적 성격을 해명하려는 시도도 있다.25) 흥미롭게도 이들은 대체로 입증의 역설을 곧 역설적 결과 d의 문제로 좁혀서 이해하는 사람들이22) 이와 관련한 논의로는 대표적으로 Vranas (2004)를 참조. 23) Rinard (2014)가 그런 입장이다. 24) Vranas (2004)가 그렇다. 그럼에도 브라나스는 가정 (나)를 ‘논란의 소지가 있는 가정’(the disputed assumption)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 하다고 주장한다. 25) Fitelson and Hawthorne (2010a)가 이런 예이다. 388 최원배 다. 따라서 이들의 시도가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입증의 역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헴펠이 말하는 입증의 역설에는 d뿐만 아니라 c나 e, f가 입증 사례가 된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나가는 말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보자. 우리는 입증의 역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d가 입증 사례라는 역설적 결과뿐만 아니라 c, e, f가 모두 입증 사례라는 역설적 결과까지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입증의 역설을 이렇게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이것이 헴펠과 베이즈주의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d와 달리 c, e, f가 입증 사례라는 점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여전히 미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까마귀 가설과 관련해 우리의 직관은 때로 불분명한 것으로 보이고, 이는 입증의 역설과 관련해 아직도 논의거리가 많이 남아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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