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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2025년 6월 7일 요한복음 17장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요한복음 14-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교이고,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드린 마지막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린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이다.
1. 요한복음 17:1-5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첫 기도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성찬식을 마치시고, 제자들의 발을 순수 씻겨주시면서 여러 훈계를 하신 후(요 14-16장)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기도를 하셨다.
요 17:1-5 / …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꼭 감고 기도한다. 집중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도는 자기 머리를 짜서 어떤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기도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눈을 감는 게 아니다. 기도의 시작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리나 죄인처럼 자신의 약함만을 보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놓여 있는 나쁜 상황들로 인해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반면 기도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장점만을 보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연약함을 아뢰는 것이 기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든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것이 다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구한 것들은 다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예수님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한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인가?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다.
고전 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싶어도 안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도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마 6:9-10, 13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3)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자식 잘 둬서 부모가 영광을 누리기도 하지만 자식이 잘못해서 부모가 욕을 먹기도 한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부모님을 영광되게 해 드릴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을 욕되게 할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제자들이라면 아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를 욕되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섭리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고 싶은 분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요 17:3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3절은 영생(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말하는 게 아니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영생은 하나님이 온 세상 가운데 유일하신 참 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안다’는 단어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부부가 사랑을 나누면서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만나서 서로 사랑해야만 서로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으셨으며,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4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나온다.
요 17:4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순종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유혹들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의 몸을 낮추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고난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한다. 죽기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신 모습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잡으셨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결과 아들도 영광을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우리도 영광을 받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가 되길 바란다. 우리의 기도가 삶으로 연결되고,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2. 요한복음 17:6-19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다.
요 17:6-19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5)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상당히 길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는 5절인데 반해,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14절이나 된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내용이 자신을 위한 기도 내용과 비교할 때 거의 3배쯤 많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그만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지?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제자들, 이웃들, 성도들, 가족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면, 자신보다 남을 위한 기도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드린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가지이다(11, 17). ❶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해달라. ❷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뒤에 자세하게 살펴본다. 17절에서는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요 17:14).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기도하셨다. 대부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면 하루라도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바로 16절이다. 14절에서 한 번 언급한 내용으로 예수님도,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도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뜻하는 한자 성어가 논어에 있는 和而不同(화이부동)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 /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면 안 된다.
논어 <자로> 편에서 공자는 군자를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사람, 소인을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화(和)는 남의 의견을 잘 조화하는 것이고, 동(同)은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이다. 공자는 조화를 제대로 실현하는 사람을 군자로 보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으로 보았다. 이 한자 고사성어를 기독교인에게 적용하면 이런 의미가 된다.
和而不同(화이부동)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법에 따라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제 생각대로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요, 속을 들여다보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옛날이나 현재나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바로 당신의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17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무엇이 진리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변한다. 사람도, 자연도, 생각도, 역사도 변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시 119:9).
날마다 和而不同,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능력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자꾸 질린다.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만 하면 잠이 막 쏟아진다.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 성경책이 다른 책들보다 크고 무거워서 교회에 들고 다니기가 힘든다. 그러나 지금은 핸드폰에 찬송, 성경이 있어 편리하기는 하지만 예배 시간에 핸드폰을 보면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또는 오해받을 짓도 하기에 …….
교회에 나온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분들이 이런 증상을 호소하면 이해를 하지만 직분도 받고, 교회를 아주 오래 다니고, 봉사도 웬만큼 했는데 여전히 하나님 말씀이 어렵고, 지겹다면 영적으로 심각한 병에 걸린 것으로 봐야 한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 문답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로 선포하고 듣는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창세 전에 계셨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미한다.
요 17:18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 세상을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제자들을 통해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거룩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이다.
지도자의 삶은 이래야 한다. 목사의 삶이 이래야 한다.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의 삶이 이래야 한다. 집사의 삶이 이래야 하고, 교인의 삶이 이래야 한다. 지도자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거룩해야 한다. 지도자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만남으로 날마다 거룩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입으로만 가르치지 말고 삶으로 가르쳐주라. 자녀들이 부모와 어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모두 먼저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요한복음 17:20-24절은 예수님께서 장차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성도를(제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다.
요 17:20-24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이제 세상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세상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이요,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기도하신 것이다.
딤전 2:4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먼저 믿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하지 않고서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없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우리도 누군가가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우리들까지 불러 사용하고 싶어 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소원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먼저 믿는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예수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모든 믿는 자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 밖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된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하나 되지 못한다. 세상에는 분열과 다툼의 영들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나 되는 게 힘든 것은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하나 되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숙제였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 ‘우리와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겠는가?
요 17:11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 기도는 당시 제자들의 상황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12제자는 각기 다른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존감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고집도 대단했다. 그래서 하나 되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가 됨의 모델을 제시하셨다. 그 모델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하나가 됨이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분열과 다툼에 자유롭지 못한 교회가 이제는 하나 되어야 한다. 이념 갈등으로 골이 깊이 파인 사회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노사도 하나 되어야 하고, 여당과 야당도 하나 되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엡 1:10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나)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단지 사형틀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는 액세서리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 일치, 하나 됨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다. 죄로 인해 원수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가볍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자기의 희생이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하나 됨이다. 하나 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고 하나 된 제자들을 통해 이 세상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가 기도할 제목도 가정, 사회, 교회, 나라, 세상의 하나 됨이다.
요 17:25-26 /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5-26절 말씀은 기도라기보다는 결론적인 보고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한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❶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 아버지를 알게 했다는 것이요, ❷ 주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의 목표는 삼위 하나님과 성도가 사랑으로 교통하며 하나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부, 성자, 성령, 성도가 사랑으로 하나 된 천국, 그리고 하나 된 교회!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요 예수님의 목표였다. 이 모든 것을 이제 이루게 되었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적을 보고해야 한다. 무엇을 보고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보고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의 일치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보고하실 수 있겠는가?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위대한 보고를 마쳤다. 마지막 날에,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 앞에서 세상 삶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참고로 보충하면 유익한 자료들
■ 동역자를 위한 기도와 배려가 필요하다. 무디와 토리의 관계는 복음 사역자의 선후배 관계의 본이 된다. 무디는 학력도 없고 성격도 거칠고 출신도 볼 것이 없으나 토리는 명문 예일대 출신에다 귀족적인 풍모, 논리적이고 세련된 사고방식, 테니스, 수영, 권투, 레슬링 선수 등 무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토리는 무디를 존경하고 복종했다. 무디의 영성을 토리는 인정했고 충성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의 전도자 윌버 채프먼은 ‘무디의 신임을 그처럼 받은 사람은 토리밖에 없다.’라고 했다.
■ 깊은 산속에 고요한 연못에 아침 햇살이 내려올 때 많은 짐승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왔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그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다.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다. 잘생긴 사슴뿔을 딱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참 불쌍하다’라고 생각하고, ‘봐라! 내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그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다. 그때 숲에서 사자가 나왔다. ‘으르렁!’할 때에 모든 짐승은 숲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이 사슴도 도망하다가 그 뿔이 수풀에 걸려서 더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사슴은 자랑하던 그 뿔 때문에 죽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자랑하던 그것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 라파엘로는 ‘그리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건축하려고 나는 태어났다’라고 했다. 시저와 알렉산더는 ‘정복하고 지배하는 삶’을 추구했다. 여러분은 무엇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지? 평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학문, 부, 명예, 행복, 건강, 권력인지?
16세기 성자로 불리는 필립 디 네리가 하루는 당시 최고의 대학이었던 콘티넨털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었다. 그때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에게 왜 이 학교에 왔느냐고 물어보니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네리는 청년에게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했더니 청년은 ‘박사 학위를 얻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네리는 계속 질문을 하였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는가?’,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처리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습니다.’ 다시 물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그 후에는 많은 돈을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 중구청 환경미화원 김영백 집사님을 사람들은 성자가 된 청소부라고 부른다. 그분은 돈도 없고, 시간도 많지 않은 분이다. 자신과 가족 챙기기도 버거우신 분이었다. 16평짜리 시유지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장남은 기계를 청소하다 손가락 두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촉망받던 실업 축구 선수였던 차남은 연습 도중에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고 계속 투병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 같았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집사님은 환경미화원으로서의 공적인 업무가 비는 아침저녁 하루 두 차례 산꼭대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손수레를 끌고 나와 그 일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지와 병, 빈 깡통 등 재활용품들을 수집한다. 어려운 가계를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실로암 병원을 통해 매월 한 사람의 개안수술비를 후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8년 동안 80명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2002.01.28. 8시 뉴스리포트). 지역 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매년 50만 원씩 4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무의탁 노인들에게 매년 겨울 내의 50벌을 드렸다.
왜 그렇게 했을까? 제2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86년 중동에서 3년간의 근로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허리의 통증으로 시름시름 앓다 모아 두었던 모든 돈을 날리고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6만 원의 사글셋방을 살았다. 거동조차 못 하는 자신을 아내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우유배달과 파출부로 자녀를 길렀다고 한다. 부인은 남편을 위해 40일 작정 새벽 기도회를 다녔는데 새벽마다 아내를 바라보고 ‘소용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런데 40일 작정기도 마지막 날인 주일 아침 아내가 꼼짝 못 하겠다고 교회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목발을 짚고 아내를 부추기며 거의 기어가다시피 교회에 갔는데, 그날 예배를 드리면서 한없이 울고 회개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병이 고쳐져서 90년 7월부터 환경미화원 일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여 이렇게 산다고 한다. 1998년 중구청으로부터 최우수공무원상을 받았다. 2008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 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을 실은 나귀가 동네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조각상을 보고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 나귀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절하는 줄 알고 교만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다. ‘모두 나를 이렇게 존경하여 절을 하고 있는데 나는 여태껏 내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인 줄 몰랐구나.’,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나를 존경하는데 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때 주인이 회초리로 나귀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다. 꾸물거리고 있는 나귀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매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나귀는 앞발을 들고 벌떡 곤두서면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뻗대었다. 나귀를 때리려던 주인은 왜 나귀가 꼼짝도 하지 않고 주인의 약을 올리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주인은 더 굵은 몽둥이로 나귀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바보 같은 나귀 새끼야, 사람들이 너를 보고 절을 하는 줄 아느냐? 만약 네가 지금 싣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이처럼 잘난 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들어둬라. 너는 지금 훌륭하신 분의 상을 등에 싣고 있단 말이다!’ / 예수님 때문에 얻은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 때문에 주어진 일을 내일이라고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일꾼으로도 부르셨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 기러기 떼의 질서와 협력 / 기러기들은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데, 혼자 날 때보다 71% 더 멀리 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의 역할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러기의 대열에서는 앞장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은 일도 없다. 순환하는 협력의 질서에 의해서 그들은 멀리 날 수 있는 것이다.
또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준다. 같이 간 두 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다. 그런 다음에야 두 마리의 기러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잡는다. 탈락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평소의 기러기들은 서로의 힘을 북돋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낸다. 뒤에서 나는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 큰 소리를 낸다.
이렇게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었더라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백km를 날면서 해마다 수천km를 이동하는 그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크리스천 작가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유머가 넘치는 사람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를 풍자한 글을 썼다. 【 어느 날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게 넣었다. 사실 둘은 서로 원수인데 시간이 지나자 곧 친해져서 잘 지내더라. 그 다음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넣었다. 처음에는 서로 당황한 눈치였는데, 조금 지나니까 그들도 역시 잘 지내더라. 그래서 그 다음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천주교인을 섞어서 한 우리에다가 집어넣어 봤다. 그러니까 그들은 곧바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더 격렬해졌다. 물론 풍자이지만, 그만큼 교인들은 하나 되기가 어렵더라는 것이다. 】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특히 제자들이 자리다툼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분을 내며 분열된 모습을 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는데도 그러했는데 안 계신다면 … . 한국 교회는 교파 간의 장벽이 너무 높다. 어떤 분은 남북통일은 되어도 한국 교회가 통일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까지 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탁받은 자들에게 분열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각개전투식의 활약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조와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생명력은 하나 됨에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함께(Together)’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는 나누어졌던 성도들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나나 너’가 아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내 뜻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바로 여기에 하나됨의 비결이 있다. 구체적인 사안(事案)을 다룰 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면서 모두가 자기 뜻을 접으려고 서로 노력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가 됨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에베소서 4:1-4 /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 어떤 거지가 길을 가다가 몸이 가려운 나머지, 부자이며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의 집 앞에 서서 대문 기둥에 등을 대고 긁고 있었다. 정원을 거닐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본 랍비는 거지를 불쌍하게 여겼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에 먹을 것을 주어보냈다. 다음날,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에 찾아와 그 거지처럼 대문 기둥에 등을 비비고 있었다. 잠시 후 그 광경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쫓아내었다고 한다. 쫓겨난 거지 부부는 왜 그 거지처럼 대우해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자 랍비가 말했다. ‘그 거지는 혼자였기에 기둥에다 등을 비벼 긁을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는 둘이니 서로 등을 긁어줄 수 있지 않느냐?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지 못하고 얕은 꾀로 살아가려는 너희는 이런 대접을 받음이 마땅하다.’
■ 새는 두 날개가 같은 방향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며 날갯짓하기에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한쪽 날개가 다른 한쪽 날개를 이해하며 보조를 맞추어 날갯짓하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도 더 높이 날아오르도록 하나 되어야 한다.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혼자 마음대로 날갯짓하다가 결국 추락하고 마는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 중세교회가 부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진리를 지키려고 일어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왈덴스(Waldenses)인들이다. 당시 천주교 교황 무오설, 마리아 숭배설, 고해성사, 연옥설 그리고 면죄부 등 성경에 없는 교리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순교의 길을 각오하고 진리 수호의 길을 택했다. 진리로 하나를 이루며 끝까지 교황청과 싸웠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다. 왈덴스인의 지도자는 피터 왈도(Peter Waldo)였다.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전도하였다. 가장 성서적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맞는 진리를 설교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설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왈도는 “나는 사람보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핍박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왈덴스인들은 흔들리지 않고 스위스의 산속에서 진리로 하나가 되어 살았다.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교황청은 십자군을 만들어 이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로 더욱 하나가 되어 순교하며 믿음을 지켰다. 산의 동굴 안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영향으로 종교 개혁자들이 생겨났다.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프랑스의 장 칼뱅(Jean Calvin), 독일의 루터(M.Luther)에게 개혁의 불이 붙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왈덴스인을 찾고 계신다. 진리로 하나가 된 왈덴스인의 모습을 말이다.
■ 어느 외국 목사님이 토요일 저녁에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같이 놀아 달라고 자꾸 떼를 쓰자 헌 잡지 속에 있는 세계지도 한 장을 뜯어내서는 여러 겹으로 찢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세계지도를 맞추어 가져오면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마’라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희색이 되어 설교 준비를 하는데, 10분도 안 되어 아들이 노크했다. 목사님은 화를 내면서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다. ‘아빠! 전 세계지도는 뭐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세계지도 뒤엔 사람 그림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 그림을 맞춘 다음 뒤집으니까, 세계지도가 되더라고요.’ 목사님은 준비하던 설교 원고를 당장에 찢어버리고 자신이 영혼의 소리를 설교하지 않았나를 반성하며 아이와 실컷 놀았다고 한다. 이튿날 주일 설교는 빈손이었지만 그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였고 그로부터 그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Knowledge of Jesus Christ)이다. 세계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안다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고 하셨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교회 성도가 몇 명이 되든가 그 모든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모습은 오직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사야 11:4-9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에는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이 서로 해함도 없이 하나가 되어 그야말로 낙원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 존 노에는 ‘연합의 진리란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도록 해준다.’라고 했다. 그는 어릴 때 자신이 친구들과 뜨거운 여름날의 철길 위를 걷던 추억을 떠올렸다. 철길을 걷는 방법은 침목 위로 걷거나 침목을 피해서 걷거나. 철길 위로 걷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철길 위로 걸어갈 때는 중심을 잘 잡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제대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존과 친구는 철길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1킬로미터 이상 걸어가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존은 이쪽 철길 위에 서고 친구는 저쪽 철길 위에 섰다. 그들은 의지하며 서로의 팔을 굳게 잡았다. 그러자 그들은 철길 위를 오래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팀워크를 이룬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분명히 입증해주었다. ‘자신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애쓸 때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다. 연합은 교만을 물리치고 자신을 낮출 때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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