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담은 마을
최명애
하루에 버스가 2번만 들어오고 나가는 오지다. 영천 읍내 정류장에서 비포장 길을 20분 정도 달려간다. 비포장도로의 버스는 놀이동산의 방방처럼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버스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하고 좌우로 몰아붙이기까지 온몸을 흔들어 댄다. 창문까지 열어두면 머리카락은 바람에 엉망이 되고 누런 흙먼지까지 덮어쓴다. 지금은 그리운 추억이 된 곳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눈발이 흩날리던 날, 어머니와 함께 첫 부임지로 향해 가던 일이 떠올랐다. 개울을 건너 좁은 도로를 걸어가니 아담한 학교가 보였다. 한 학년에 한 학급, 전교생이 백 명도 안 되는 시골 학교다. 나지막한 교실 건물과 반듯하고 널찍한 운동장, 앞쪽으로 멀리 산이 둘리어 있어 아늑했다. 손수건은 가슴에 달고 있었지만, 누런 콧물을 연신 들이마시던 아이들, 손등은 다 터지고 갈라져 있었다. 또록또록한 눈망울이 순수해서 나를 설레게 했던 아이들이 있었다.
학교 건물 뒤에 있는 사택은 허름한 일자형의 방 네 칸이 나란히 있는 시멘트 집이다. 방문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문의 위쪽, 아래쪽 모두 고리를 걸어야 했다. 방음이 안 되어 옆방에서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시골 생활도 처음이고 집을 떠나 혼자서 있는 것이 처음이라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머니도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교통이 불편하여 매일 출. 퇴근을 할 수도 없었다. 학교로 오는 길목에 있는 개울은 양말을 벗고 건너야 했다. 그때는 번거롭고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름답고 소박한 추억의 길이었다.
퇴근 후에도 갈 곳이 없었다. 도시에서 환한 불빛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기억이 있어 밖을 나가보면, 옆에 지나가는 사람도 모를 만큼 암흑 같은 어두움뿐이었다. 저녁만 되면 나가지도 못하고 갈 곳도 없어 방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에 부리나케 나왔다가 월요일 새벽에 들어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잘 견뎌 나 왔다. 그나마 무료한 시골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내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일요일 당직이 배정되어 집에 나가지 못할 때는 꼬맹이들이 사택으로 놀러 왔다. 들에 나가서 나물을 뜯으며 “선생님, 이게 달래예요. 이거는 냉이고요.” 하며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학교 주변에는 사과 농사를 많이 짓는다. 오가는 길에 사과밭을 지나다 보면 학부모의 손에 이끌려 가서 맛있는 사과를 한 소쿠리씩 얻어 오기도 하였다. 어찌나 푸짐하게 담아주시던지…. 시골의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시골 생활이 처음에는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즐거움을 찾아가며 잘 참고 견딘 것 같다. 학부모 초대로 함께 저녁을 먹고 놀다가 오기도 하였다. 여름날 저녁에 여자 학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개울물 목욕을 하자고 했다. 머뭇거리던 나는 아이들 성화에 따라나섰다. 깜깜한 밤에 랜턴을 들고 개울에 가서 옷을 입은 채로 첨벙거리고 놀았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2년 뒤 다른 학교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의 일들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지금도 그때 제자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 순수한 사랑으로 이어진 인연들이라 만나면 할 이야기들이 많다. 좋은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지금도 그때 제자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 부모님들이 시골 마을에서 아직도 농사지으며 살고 계신단다. 오래전 좋은 기억들이 또렷이 떠오른다. 만 45년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은 주변이 많이 변했겠지.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첫댓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반 담임선생님이 생각이 납니다.
시골생활은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됩니다
처녀 선생님의 오지학교 채험담.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닥아오는군요. 바람에 흩날려 버렸던 지난 일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작업. 이것이 수필의 매력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