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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
채옥을 바라보는 윤의 얼굴이 곤혹스럽다.
'그게...뭐지?...'
'근위축 측삭경화증'
'쉽게 설명해'
윤의 입에서 쉽게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듯하다.
'루게릭....'
'루게릭?......그.......'
말을 하다 멈춰 버리는 채옥.....어이없이 웃고 만다.
'말도 안돼 ! 농담하는거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던 윤의 얼굴이 서서히 냉정을 찾아간다.
안경너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또박또박 입을 연다.
'앞으로 이런 일 자주 생길거야. 무리하지마...'
굳은 듯 움직임이 없다.
한참 후 침착한 채옥의 못소리가 들린다.
'자세히....설명해봐'
'대뇌와 척수의 운동 신경원이 선택적으로 파괴되는 병이야.
하지만 감각신경이나 자율신경쪽장애는 나타나지 않아'
'그딴것 말고 !'
채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른다.
윤은 그녀가 무얼 궁금해 하는지 안다.
그로서는 가장하기 힘든 말.....채옥으로서도 가장 받아 들이기 힘든 말이겠지.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어렵게 꺼낸 말이다.
채옥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차라리....죽으라고 해......'
절망스런 채옥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 박힌다.
'미안하다.'
자신이 의사 인것이 지금 이순간 처럼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넋을 놓고 있던 채옥이 일어서 나간다.
'어디가?..'
말없이 나가 버린다.
재빨리 가운을 벗어 던지고 따라 나가 채옥의 팔을 잡아 세운다.
'잠깐만 기다려 곧 나올께.'
'혼자 있고 싶어.'
팔을 잡고 있는 윤의 손을 떼내고 돌아서 가 버린다.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귀에 들리는 소리.....
계곡을 흐르다 바위에 부딪히는 물 같은 소리.....
파도처럼 가슴을 휘 젓는 소리....
뇌 속을 굽이 굽이 곡예하듯 통통 뛰는 소리....
심장을 가지고 노는 소리....
.......그 기타소리........
갑자기 채옥은 달리기 시작한다.
젖어오는 땀방울이 그녀의 몸에서 스물스물 기어 음율처럼 떨어진다.
가로등들이 하나 둘 켜진다.
주택가 허름한 창고.....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는 채옥......
숨을 몰아쉰다.
어질러진 물건들 틈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백색 기타...
천천히 손으로 집어든다.
얼굴에 번지는 미소 손가락으로 튕겨본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
가슴속으로 들려오는 기타소리.....
눈을 감은 채옥의 얼굴이 그 소리속에 묻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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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마도 마약 같은 것...
또 쓰고 싶은 요 알 수 없는 충동...
이번 건 중간쯤 가다 멈춰 버릴지도 모르겠소...
계획없이 쓰는 것이니...
이년은 영원항 옥폐인인데....
짜꾸 채옥이만 아프게 만드오.
이게 무슨 심리일까?.....
며칠째 채옥과 연락이 되지 않자 불안해진 윤은 기어이 그곳을 찾아오고 말았다.
채옥이 살고 있는 곳, 작업실처럼....집처럼 지내는 주택가 허름한 창고.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지갑속에 깊숙히 들어 있는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문을 연다.
집안이 엉망이다.
잠시 망연자실해 있던 윤은 옷을 걷고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이 녀석...늘 이런다.....
이리저리 널부러진 책들....옷가지들....
한쪽 구석에 세워진 저 기타.....
흩어진 오선지들이 꾸깃꾸깃 채옥의 손을 스쳐간 흔적.....
그러다 책들 틈에서 툭 떨어지는 사진 한장.....성백과 채옥....웃고 있다.
윤의 얼굴에 노여움이 스친다.
아래층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철제 계단을 올라 간다.
..어......있었네..........
채옥이 침대에 누워있다.
곤히 잠든 듯...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채옥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다가가 들여다 보는 윤....
......일어나...오빠왔다,,,,,,
거짓말 처럼 채옥이 눈을 뜬다.
'어...오빠 왔네...'
'또 밤 샜어?'
'...음.........'
'무리하지 말........'
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커텐을 걷는다.
'와....날씨 좋다....우리...바다 가자.'
파도를 따라 다니느라 바쁜 채옥....
그런 채옥을 따라 다니느라 바쁜 윤의 눈....
강한 바닷 바람에 채옥의 머릿카락이 흩날려 윤의 얼굴을 스치고 간다.
코끝을 스치고 가는 이 향........
'오빠 !'
어느새 다가와 있는 채옥.
'무슨 생각해?....불러도 대답도 않고'
'생각은 무슨....'
'난희 언니 생각했지?'
장난스럽게 윤을 쳐다본다.
'아~냐...'
'피~...이번에 언니 귀국하면 결혼 한다던데.'
채옥을 바라보는 윤의 얼굴이 슬프다.
'아빠한테 전화 왔었어.'
신발로 그리는 음률을 내려다 본다.
'채옥아....병원.....'
채옥의 신발이 멈춘다.
'하지마......아무한테도 얘기 하지마.
..........나에게도......오빠에게도.........생각도 하지마...'
'그냥......어느날 갑자기 내 손가락이 기타줄을 .....기타소리를 낼 수 없게 되면......'
'채옥아.....'
'그러면 오빠가.......날....보내줘.'
'왜 그런 소릴 해!....'
윤의 눈이 화를 내고 있다.
'오빤 알잖아........그거 못하면 내가 살아가지 못할 거란거....'
말없이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를 보아도 울지 않는다.
서로를 보며 울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다.
'너....잔인하다........잔인해....'
'...그래.....나...잔인해...'
조금도 흔들림 없는 채옥의 눈...그 눈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기타........결국 너의 모든 삶을...그게 가져가 버린 셈이군...'
'아니....내가 그 속으로 들어 간 거야.'
채옥의 대답이 단호하다.
바다 멀리 향한 눈.......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또 다시 저 바다들이 음률이 되어 떠 다니겠지...
이 바람도........이 느낌도........
심지어는 잔인하다고 한 내 말까지도 이미 너의 피 속에서 음악으로 녹아 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그것 때문에 성백이도 그렇게 보내 버렸을까?.......
(회상)
+++++++++++++++++++++++++++++++++
'그 애....음악하고 있을 시간 충분히 줘.'
'걱정하지 마라. 그 부분은....내가 채옥이 사랑하는거 안에 그것도 들어 있다.'
술잔을 부딪혀 오는 성백의 눈이 자신감에 차 있다.
그런 성백을 보는 윤...눈에 가득한 아픔...
바래다 주겠다는 성백을 뿌리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비틀거리며 벽에 부딪힌다.
넘어가다 걸려 버린 술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웩~.......'
속이 뒤집힐 듯 쏟아지는 배속의 오물들...
....모두 쏟아져 나와 버렸으면.....
너의 그 작은 눈길 하나까지 모두 쏟아버렸으면 좋겠다......
누가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
채옥이다.....등을 토닥인다.....
'오빠 괜찮아?.....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윤은 채옥이 토닥이는 그 등이 아프다.
'괜찮아.'
채옥의 그 손을 치운다.
'성백이랑.....'
'성백오빠랑?....'
.......저 아이 눈이 빛난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머리를 감싸고 흔들어 본다.
...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등이 아팠던 기억......집으로 들어서며 채옥이에게 무슨 말인가 한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실로 나와 물을 마시는 윤의 귀에 들리는 음악소리....
끊어질듯 다시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
............또 밤을 샌건가?...........
왜 음악이 외로워 하지?........
채옥의 방 앞에서 움직일 줄 모르는 윤......창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
'추워....가자'
열려진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채옥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윤은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받아 들이는 채옥이 마음 아프다.
.......절대로.....누구에게도....기대어 오지 않을 거다.....
'그런눈으로 보지마....'
윤의 눈을 의식한 채옥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한마디 던진다.
'내가 불쌍하다거나....뭐..그런 생각 하지마.
......웃기지 않어. 제이슨 베이크 말이야.
나랑 똑 같은 병이다. 신기하지?....'
그러면서 흥얼 거리는 채옥....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자유롭지
백창우
좋은 음악은 향기가 있지
금방 알 수 있어
황폐한 스무살, 창없는 방에 엎드려
날마다 가위 눌릴 때
나를 깨워준 건 바로 음악이었어
좋은 음악은 나를 돌아 보게 해 주지 금방
느낄 수 있어
무엇을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하나 알려주지
음악은 나에게 이르는 길이야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자유롭지
나를 둘러싼 모든 담장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로 길이 활짝 열리는 걸
막막한 어둠속에 있을 때도 내가
푸른 하늘을 꿈꿀 수 있는 건
내 몸 어딘가에
내 마음 어딘가에
맑은 음악의 시냇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야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생의 비밀을 알게 되지
뒤 늦게 서예에 재미를 붙인 어머니가 요즘은 사군자까지 즐기신다.
저녁식사 후에도 계속 그 곁에 앉아 있는 윤을 힐끗 돌아본다.
'무슨 할 말 있니?'
'아뇨...'
'저...어머니...채옥이요.....'
순간 변하는 정인의 표정...
'그 애 얘긴 하지 마라.'
'어머니!....'
'그만 가서 쉬어라'
도저히 말을 붙이지 못할 만큼 싸늘해져 있다.
돌아 나오는 윤....침대로 가 누워 버린다.
어머니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금만 더 너그러우시면 안되는 건가?
(회상)
++++++++++++++++++++++++++++++++++++++++++++++++++++++++
'당신을 용서 할 수 없어 !!!'
어머니의 찢어지는 절규가 집안에 찬 물을 끼 얹는다.
'이제 그만 좀 해 제발'
'누구 아이에요?.....당신이 그 애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야!'
'얘기 했잖소...지운이라고...권지운!'
벌써 사흘째다.
어머니의 히스테리....
채옥이....내 동생 채옥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아이는 옆에 없다.
처음 그 아이 데려 왔을 때...
그 맑은 눈이 너무 예뻐서 말을 잊게 했던 아이...
다섯살 여자 아이를 입양했다.
그 아이를 꽃처럼 키웠던 어머니...
아버지의 첫사랑의 아이...
어머니를 미치도록 절규하게 만들어 버린 장재희 라는 여자의 아이...
나를.....
내 영혼이 따라가는 아이...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
성백을 사랑하는 아이.....
쫒겨 나듯이 가방 하나 들고 나갔다.
급히 개조한 창고가 그럴듯 하다.
'이쁘다...맘에 든다. 오빠 '
'누구?...나?'
옆에 선 성백의 너스레에 웃고 만다.
.........저 녀석은 늘 저 아이를 웃게 한다.......
'둘 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는 윤을 떠민다.
'가, 오빠...엄마...오빠가 위로 잘 해 드려...응?...응?....'
'응...'
창고 앞...불빛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서 있던 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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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잠시 낮에 얼굴을 스치던 채옥의 머리칼을 생각한다.
잊은 줄 알았다.
이런 감정....
다 끝난 줄 알았다.
성백에게 채옥을 보내면서 접으리라 했던 마음이었다.
성백이 떠난 후 무너지는 채옥을 보며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마음 이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건다.
.....여덟, 아홉,열...
'네...'
'....나다...늦게 받네.....'
'응...실은 컵을 깨 먹었거든...'
'컵?...'
'그냥 툭 떨어졌어...'
......이런 말 들으면...내가 아픈 걸 알까?.....
'여보세요?..오빠?'
'응...'
'끊은 줄 알았네.'
'밤 새지마.'
'그 말 할려고 전화 했어?'
'응....아니...'
'응..아니?....알았어.'
수화기를 내리는 채옥...컵에 베인 자국에서 피가 난다.
서랍을 뒤진다.
...... 이 모양이다. 뭐 하나 제 자리에 있는게 없네....
뒤지다 주저 앉는다.
......오빠 그러지 마라....그러지 마......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
..
'웬일이야?'
등을 툭 치며 원해가 옆에 앉는다.
'술이나 한잔 하자고...'
'짜식.......'
회사얘기.....집 얘기.....얼마전에 태어난 애기 얘기.....
그러다 문득 윤을 돌아 본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 버린다.
'나비.....'
'뭐?......'
'나비.....아주 천천히 날아서 잡기 쉬울것 같은데...잘 잡히지 않는 나비 말이야.'
'무슨 소리냐?.....'
'어쩌다 잡아 보면 작은 손길에도 그 무늬가 지워져 버려서 잡기가 두려운 그런 나비......'
'짜식...웬 뜬금없이 나비타령이냐?......난희씨 언제 귀국해?'
'다음 달'
'이번엔 국수 먹을 수 있는거지?'
대답없이 다시 술잔을 한번에 들이켜 버린다.
'참..요즘 채옥이 곡 좋더라. 그 녀석은 잘 있지?'
'응...잘 있어, 잘 있지.....'
또 다시 한번에 들이키는 술잔...
'그거 독한 술이야 임마....
....무슨 일이야?'
탁자위에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놓는 윤...
'성백이......그 자식 소식 알어?'
금방 얼굴이 굳어 버리는 원해...윤을 바라보는 눈길이 안타깝다.
'그 녀석 얘기는 왜 또 해....잊은거 아니었어?'
'잊었지.....'
'이제 그만해. 그녀석 생활도 채옥이 만큼이나 엉망이었나 보더라.'
술잔을 든 윤의 손이 떨린다.
'채옥이 만큼이나......훗.......'
그 떨리는 술잔에 술을 채워 주는 원해..
'5년이야....'
원해와 헤어진 윤...채옥의 집 앞까지 와 버렸다.
창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창으로 음악이 흘러 나온다.
..........La Mia Musica.......
....피아노 소리가 이쁘다.
...근데 뭐지.....저 칙칙한 목소리......
......뭐해?.....
....나.....무섭다.......무섭다 채옥아.......
....무슨 소리.....
문을 열고 나온다.
문에 기대어 잠 든 윤....
윗층으로 가서 이불을 가져 온다.
신발을 벗기고....윗도리를 벗기고....
가로등처럼 발갛게 물든 윤의 얼굴....
...술 냄새......
오랫동안 윤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 윗층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다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채옥...다리에 힘이 빠진다.
오늘 아침에도 두어번...아무래도 아래층으로 내려와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오르려다 계단에 앉아 버린다.
그렇게 앉아서 잠 든 윤을 건너다 본다.
.....오빠.....겁 먹었구나?....
(회상)
++++++++++++++++++++++++++++++++++++++++++++++++++++++++++
'오빠...나 무서워 빨리 와'
땀에 젖은 윤이 창고로 뛰어 들어 온다.
눈물 범벅이 되어 떨고 있는 채옥...윤을 보자 달려가 안긴다.
좀처럼 그쳐지지 않는 채옥의 울음....
'정신차려!......왜 그래! 왜 이제와서 이래!..'
가슴에서 채옥을 떼어 내어 흔든다.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채옥...
'성백 오빠 떠났어......'
윤의 눈 앞이 아득해 진다.
'1 년전에 떠났잖아. 갑자기 왜 그래?...'
'나 버리고 갔어.....'
'니가 버렸다고 했잖아.....'
다가가 앉아 다독인다.
'잊었다고 했잖아.........'
'아닌줄 알았어.....그거 아닌 줄 알았어.....'
윤의 손이 채옥의 어께에서 툭 떨어져 내린다.
'옆에 없어도...괜찮은 사람인줄 알았어.....
......근데...무서워......무섭다. 오빠....'
윤의 눈이 절망스러워진다.
그리고 천천히 떨고 있는 채옥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내가....찾아볼께...찾아올께. 울지마라...'
+++++++++++++++++++++++++++++++++++++++++++++++++++++++++++++
......오빠도....나처럼 겁 먹었구나...........
다시 계단을 내려가 윤의 곁으로 간다.
손을 잡아본다.
........오랜만이네....오빠 손 잡는거.....
....근데 오빠....그러지마..나처럼 그러지마......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 잠을 깬다.
......어디지?........
채옥의 창고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어 보고 옷을 걸치는 윤...
차려진 식탁을 발견한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자꾸 그러면 난희 언니한테 일른다. ^^ 오빠 좋아하는 북어국 끊여 놨으니까 꼭 먹고 가.'
또박 또박 쓰여진 쪽지를 본다...
구겨 버린다...
던져 버린다...
나비에서
박영
나비가 높이 날 수 없는 건
하늘이 너무 무거운 까닭이다
나비가 빨리 날 수 없는 건
바람이 너무 파도치는 까닭이다
나비의 눈동자가 작은 건
눈보라에 접고 닫은 까닭이다
나비가 날개를 접는 건
접어야 할 아픔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나비가 치아가 없는 건
사랑의 촉수로 세상을 핥는 까닭이다
나비가 온 몸이 떡잎 같은 건
짐승같은 욕심이 없는 식물인 까닭이다
나비가 색색의 이웃을 따르는 건
거짓 믿음, 이념의 우상을 세우지 않는 까닭이다
나비가 팔랑이는 건
파닥거리지 않아도 아름다운 까닭이다
나비가 오래 머물지 않는 건
지상을 못믿기 보다 못잊는 까닭이다
나비의 웃음이 소리가 없는 건
입술과 눈이 너무 깊이 있는 까닭이다
나비의 비행이 무너지지 않는 건
태양을 등에 이고지고 있는 까닭이다
'안 박사님?...저 황보윤입니다.'
어디서건 절망적인 대답 뿐이다.
알면서도 자꾸 확인하려는 자신의 어리섞음을 실감할 뿐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연락도 안 되는지.....
며칠째 채옥과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
불꺼진 집을 바라보다 돌아가기를 3일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회상)
++++++++++++++++++++++++++++++++++++++++++++++++++++++++++++++++++
'우리 결혼 할거야.'
성백이 불쑥 찾아와 하는 말.....
......결혼............
돌아보니 채옥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낙엽하나가 윤의 발 아래로 또르르 굴러가고,
...........눈이 따갑다.
한달....두달.......
채옥이 시들어 간다.
한달....두달......
성백이 말라 간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웃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자.......
그들은 이제 겨울을 산다.
황량한 벌판처럼.......
마른먼지에 날려 부서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끝나버린 두 사람의 결혼 1년....
.......내게서 음악을 뺏으려면 떠나라.......
+++++++++++++++++++++++++++++++++++++++++++++++++++++++++++
결국 성백은 채옥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그 음악을 견디지 못해 떠나버린 것일까?
..........나도 실은 그 아이의 음악이 오르지 못할 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도 집안 이곳 저곳에 굴러 다니는 성백의 물건들....
윤은 채옥이 아직 성백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윤의 차가 빠르게 달려온다.
채옥이 며칠만에 불쑥 전화해서 저녁 먹으러 오라 한다.
'벌써 왔어?.....아직 준비 덜 했는데.'
도마 소리가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다.
윤은 뒤에 앉아 채옥의 겨드랑이 사이로 속살을 하얗게 드러내며 깍여지는 감자를 본다.
빗방울 소리를 내며 식탁으로 올려지는 반찬들을 본다.
'맛있어?'
'맛있어.....'
'성백 오빠는 이거 싫어 했어'
나박나박 채설어져 접시에 누운 감자 볶음을 가리키며 말한다.
윤의 젖가락이 느려진다.
자꾸 젖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감자들.....
채옥의 젓가락이 얼른 그것을 윤의 숟가락 위로 올려 놓는다.
'맛...없어?'
'....맛있어'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를 타려던 윤은 난감하다.
잔이 하나도 없다.
채옥이 다가와 커다란 머그잔 두개를 내민다.
'난 왜 이렇게 덜렁 대는지 몰라. 자꾸 깨먹어...툭..툭...'
커피 맛이 쓰다.
'역시 오빠가 타 주는 커피는 맛있어.'
맛이 쓰다....
열려진 창으로 음악이 흘러 나간다.
.............Oracle...
...저 아이는 이미 저 속에 들어가 버렸겠지......
'무슨 생각해?'
'...바다.....파도.....거품 하나.....거기 먼지들......'
'..................'
'...킥..오빠 새끼 손가락에 데인 자국...'
'데인자국?......그런 거 없는데'
'있어'
자신의 손가락을 살핀다.
왼손 새끼 손가락 두 번쨰 마디...
'어....있네!'
윤은 신기한듯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살핀다.
희미하게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는 흔적....
'오빠, 빨리 결혼 해라. 친구들이 그러는데 조카가 정말 이쁘데.'
'.............'
'응?........'
'..............'
'응?..........'
'......응...'
윤이 가고 나자 짐을 옮기는 채옥...
윗층의 물건들이 하나하나 아래로 내려온다.
그러다 문득 인기척에 문을 열어보니 플라스틱 컵이 한 묶음 놓여 있다.
컵을 식탁에 올려 놓는다.
그것으로 이리저리 탑을 쌓아본다.
와르르 무너지며 바닦으로 떨어지는 컵들....
깨지지 않고 떼구르르 구르는 컵들....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난희가 귀국했다.
공항에서 목을 아프게 안아오는 난희...
난희를 만난 채옥이 난희가 윤에게 했듯이 그렇게 목을 안는다.
'언니...정말 보고 싶었어'
윤이 두 여자를 본다.
'부라보~~'
맥주잔들이 부딪힌다.
'야~우리 이렇게 다 모인게 얼마만이냐?'
'한 3년 됐나?....'
'난희씬 더 예뻐지신거 같습니다.'
여전히 제일 시끄러운건 병택이다.
윤은 천정에서 내려온 불빛 하나가 채옥의 머리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
'야,야~뭐야...곧 결혼 할 사람들이 맹숭맹숭해 가지고...'
병택이 짖굳게 윤과 난희를 밀친다.
난희가 윤의 가슴으로 밀려 머리를 안긴다.
술잔이 깨어진다.
'미안....손이 미끄러워서,,,'
채옥이 깨어진 유리 조각을 치운다.
얼른 채옥의 손을 치우는 윤...천천히 깨어진 유리조각을 모은다.
손수건을 꺼내어 쏟아진 맥주를 닦는다.
'여기 휴지...'
윤의 손수건에 술들이 흡수된다.
젖은 손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가는 윤....
씻는다...
또 씻는다....
눈물 한 방울이 수돗물에 쓸려 내러간다.
채옥이 술을 마신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밴드하는 준호가 들어온다.
'와~다 모이셨네요.....성백이 형만 끼면 딱.....'
원해가 준호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채옥에게 집중되는 시선....
채옥이 웃으며 술을 마신다.
웃으며 채옥의 옆으로 다가가 앉는 준호...
'누나, 우리 곡 언제 줄거야?'
'너 돈 많냐?......요즘 채옥이 곡 인기가 얼마나 좋은데 임마'
병택의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비워진 채옥의 잔을 채우며 다시 다가 앉는다.
'그런거 말고, 누나 진짜 곡....'
채옥이 턱을 괸채 준호를 보며 웃는다.
'너 밥 굶어...'
'굶어도 좋으니 좀 주슈!'
피식 웃고 다시 술을 따른다.
'아~~오늘 기분 너~무 좋다.'
일렁이는 물결모양 채옥의 목으로 넘어가는 술들...
'윤아 걱정마라. 내가 채옥이 잘 모실테니까 넌 난희씨나 바래다 줘.'
병택이 큰 소리로 떠든다.
'괜찮아. 나 안취했어'
체옥이 휘청인다.
윤이 택시를 세운다.
'미안해'
휘청이는 채옥을 살피다,.....휘청이는 윤의 눈을 살피다.....
택시를 타는 난희...
병택의 팔에 안겨있는 채옥을 당긴다.
'야...걱정 말라니까. 짜식...'
'너도 취했어. 다음에 보자.'
벨트에 묶인채 자꾸만 옆으로 툭 툭 떨어지는 채옥의 머리가 운전을 방해한다.
윗층의 물건들이 전부 아래로 내려와 있다.
이불을 깔고, 신발을 벗기고, 윗도리를 벗긴다.
철재 계단을 오르는 윤......
윗층에는 옮길 물건이 하나도 없다
빈방을 보다 다시 가파른 철재 계단을 본다.
윤의 가슴에 휑하니 바람이 분다.
계단을 내려가다 앉아 버린다.
거기 앉아서 잠든 채옥을 건너다 본다.
..............보고 싶어?....................
(회상)
++++++++++++++++++++++++++++++++++++++++++++++++++++++++++++
이곳 저곳 널부러진 맥주 캔들....
침대에 널부러져 잠이 든 채옥....
성백이 떠난지 일년만에 채옥은 무너져 간다.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가끔 퉁 퉁 튕겨지는 기타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성백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어느곳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어느날부터 다시 채옥의 창으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오빠, 찾지마.....찾아도 오지 않을거야.'
'채옥아......'
'같이 도망쳐 보려고 했는데 안되네....'
'어디?.........'
'음악.....성백오빠라면 날...이 음악으로부터 도망치게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음악?.........너의 음악으로부터 도망.........
+++++++++++++++++++++++++++++++++++++++++++++++++++++++++++++++
불을 끄고 문을 잠근다.
몇겹의 장막이 쳐진 사막속의 텐트같은 불꺼진 채옥의 방....
............Broken Bycicles.........
...어느 뒷골목의 부서진 자전거처럼........
Broken bicycles,
Old busted chains,
With busted handle bars
Out in the rain.
Somebody must
Have an orphanage for
All these things that nobody
Wants any more
September's reminding July
It's time to be saying good-bye.
부서진 자전거,
낡은 사슬에 매어져,
손잡이가 망가진 채로
비속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아무도 가지고 싶지 않은
저 고아 같은 자전거를 돌봐줘야 할 텐데요
9월은 7월이 생각나게 합니다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때인가요.
Summer is gone,
Our love will remain.
Like old broken bicycles
Out in the rain.
여름은 지나갔지만,
우리의 사랑은 남아 있겠지요.
비속에 내버려진
낡은 자전거처럼 말입니다.
Broken Bicycles,
Don't tell my folks;
There's all those playing cards
Pinned to the spokes,
Laid down like skeletons
out on the lawn.
The wheels won't turn
When the other has gone.
The seasons can turn on a dime,
Somehow I forget every time;
For all the things that you've given me
Will always stay
Broken, but I'll never throw them away
부서진 자전거,
내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카드 놀이나 하고 있는 저들에게는요
수레바퀴에 구멍이 난 채,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누워서
빈터에 내버려져 있어요
저 바퀴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바퀴도 망가졌으니.
인생의 한 시기는 갑자기 변하고 말지요,
아무래도 그 세월을 잊어야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그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엉망으로,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얘, 난희 하고 의논해 봤어?'
모처럼 일찍 퇴근한 윤을 어머니가 잡아 앉힌다.
'뭘요?'
'뭐긴...니들 결혼 말이지. 엄만 올 가을 가기전이 좋을 것 같은데.....'
'.................'
'난희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서두르자. 연애만 7년씩이나 했는데 넌 지겹지 않겠어?'
'....................'
'내가 그 댁에 전화해 보랴'
'.........의논해 볼께요.'
방을 나온 윤은 창고처럼 짐이 쌓인 채옥이 쓰던 방으로 들어간다.
찬기운이 돈다.
(회상)
++++++++++++++++++++++++++++++++++++++++++++++++++++++++++++
'오빤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을거지?'
'그래'
'기쁠때나 슬플때나 아플때나 건강할때나.....'
'임마, 그건 결혼 서약때 하는 말이잖아?'
'난 오빠랑 결혼할건데....'
'뭐?.....쪼그만게 못하는 말이 없네'
채옥이 혀를 낼름거리며 도망간다.
이제 이마에 뾰로지가 나기 시작하는 나이....
'엄마! 오빠 좀 말려줘....'
'너 거기 안 서!'
'악! 농담이야..농담...나도 오빠같은 느끼남은 싫다 뭐'
'야 ! 너 정말'
'엄마! 엄마!.....'
부엌으로가 어머니의 등 뒤에 달라 붙는 채옥...
등뒤에 붙어 까르르 웃는다.
++++++++++++++++++++++++++++++++++++++++++++++++++++++++++++++
그 웃음 소리가 빗소리에 잦아든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창을 열고 비를 내다 보던 윤이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수퍼에 들러 물건을 고른다.
되도록이면 손이 덜가는 반찬거리를 고른다.
하나를 드니 여섯이 쪼르르 딸려오는 맥주도 고른다.
수퍼를 나오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난희다.....
'좀 만나'
'저.....나 지금 바쁜데.....내일 만나'
'잠깐만....'
끊어 버린다.
비가 앞을 분간할수 없을 만큼 쏟아진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가는 윤.......갑작스런 앞차의 급정지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브레이크를 밟는다.
앞차에서 내리는 운전자...빗줄기 사이로 그의 화난 얼굴이 보인다.
난감한 표정.....
......무슨 일이지?........
내려 다가가는 윤....
우산........
우산을 들고 쪼그린 여자.......
빗줄기에 갈라지는 채옥의 얼굴......그녀의 검은 눈이 윤을 본다.
'....채옥아.........'
'아는 사람 이에요?.....에이, 정말 십년 감수했네....뭐 하시는 거에요. 큰일 날뻔 했잖아요.'
짜증섞인 그 사람의 목소리도........
채옥의 얼굴로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도....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와 비소리를 내고 있다.
자동차와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
손을 잡아 보지만 일어 나지 못한다.
우산이 떨어진다.
우산 위에서 빗줄기가 속주기타 소리를 낸다.
채옥을 안아 차에 태우는 윤....쏟아지는 빗줄기가 따갑다.
비닐봉지 밖으로 삐죽 나온 참치캔이 비를 맞고 있다.
채옥을 의자에 앉히고 수퍼에서 사온 물건들을 내린다.
삐죽나온 참치캔이 든 비닐 봉지도 물을 뚝뚝 흘리며 윤의 손에 들려 들어온다.
물건들이 소리를 내며 식탁위로 툭툭 던져진다.
끝도 없이 올라 오는 물건들.....
채옥은 윤의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를 본다.
비 맞은 참치캔이 심한 소리를 내며 식탁위로 던져 진다.
'기어서라도 피해야 할거 아냐 !'
소리지르며 돌아보는 윤의 눈을 바라보는 채옥의 검은 눈.....
떨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힘이 빠진다.
아직도 머리카락에서는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다.
수건을 가져가 머리칼을 닦는다.
바닷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스쳐가던 그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 꼭꼭 누른다.
떨고 있다.
파래진 입술....
옷장에서 옷을 꺼내어 가져다 주고 철재 계단을 올라가는 윤.
어둡고,,,텅 빈 방....
창으로 가 쏟아지는 비를 본다.
그 창에 이마를 기댄다.
머리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비소리...
윤이 운다.
어깨를 들썩이며 윤이 운다.
비소리에 숨어서 윤이 울고 있다.
비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채옥의 무릎에 손을 얹는다,
옆에 쳐진 손을 잡는다.
'집으로 가자.......'
'.................'
'어머니...그러셔도 마음으로는 너 사랑하시잖아.'
'...................'
'가자....'
'여기...있고 싶어. 오빠'
,br>
고개숙인 채옥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
'내일 아침이면...또 괜찮아 질거야....요즘 자주 그래'
'.........자주........'
잡은 손을 꼭 쥐는 윤.....
'정말 집에 안 갈래?'
'여기가 편해'
'그럼.....내가 좀 더 자주 올께...'
'그러지마........'
윤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채옥의 손....
'........그러지마..'
빠져 나가서 자꾸 등 뒤로 숨는 손....
가렴
가렴
다시 세상이 그립고
두고 온 것들이 살아나 견딜 수 없을 때
그리로 가렴
그곳에서 너 다시
외로워지고
무서운 어둠 앞에
혼자 서게 될 때
내가 들려준 노래를
기억하렴
네가 큰 추위 하나
남겨놓는다 해도
난 괜찮아
난 늘
혼
자
였
는
걸
백 창 우
윤은 의자에 앉아 어제 저녁 자신의 손에서 빠져 나가던 채옥의 손을 생각한다.
자꾸만 뒤로 숨던 그 손을 생각한다.
'일찍 왔네?'
그 미소가 항상 사람을 편하게 하는 난희....
'나...오늘 기분 무지 좋은거 알어?'
저녁식사 내내 그녀는 햇살처럼 웃는다.
윤은 그 햇살너머 빗줄기속의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난희야......'
'응....'
'우리 말이다.......'
난희의 눈이 빛난다.
윤의 입에서 힘겹게 나오는 말...
'........결혼........좀 미루면 안될까?'
컵을 만지던 손이 멈춘다.
난희는 그 날 술을 흡수하던 윤의 손수건을 생각한다.
'이번엔 또 뭐야?.......얼마나 기다리면 되는건데?.......'
의외로 담담한 난희의 목소리.....
윤은 말 할 수 없다.
'지난번 나 미국 들어갈때....마지막이라고 했잖아....'
'................'
'다시는....기다리게 안 한다고 했잖아'
'.......................'
'니들....참 대단하다....'
'...................'
'사람 바보 만드는거........'
난희는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얼른 훔쳐낸다.
'다시 또 미루면 너와나 끝이란것도...기억하지?.....'
'...............'
'......흐.......바보 같다....정말 바보 같애......나도....너도......'
'......미안해'
윤을 노려보던 난희가 벌떡 일어나 나간다.
나가다 다시 돌아오는 난희....
윤의 뺨을 세차게 때려준다.
'고마워 해. 이렇게 쉽게 놓아 주는거......'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날....손수건으로 흡수되던 술을 보며....
채옥이를 따라 휘청이던, 변하지 않은 윤의 눈을 보며.....
아니,이미 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알면서도 쉽게 놓을 수 없었던 윤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돌아서 버리는 자신을 모르겠다.
슬픔도...눈물도...그녀 속에는 없다.
미리....이 이별을 다 앓아버렸던 걸까?......
윤은 채옥에게로 간다.
골목길에서 꼬마들과 부딪쳐 검은 봉지속의 귤이 떼굴떼굴 굴러간다.
귤을 따라가는 윤....
.......바보 같다..........
귤을 줏어 담는다.
........바보 같애....나도....너도.......
그녀의 창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흘러 나온다.
......Runaways..................
...저 음악을 들으며 어느곳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흘러가 어느 바닷가에서 빈집속에 널 가두고 있을지.....
채옥이 청소를 하고 있다.
들어서는 윤을 보며 웃는다.
'어...오빠 오늘 일찍 마쳤나봐?'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더워?'
'....훗...너무 열심히 일했나봐.'
물기어린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잠깐만 오빠...이것만 빨고....'
손에 든 걸레를 보이며 돌아서는 채옥....다리를 절룩인다.
귤을 까는 윤......
알멩이 하나하나 하얗게 덮은 속껍질까지 깐다.
'어!.......'
타 들고 온 커피를 식탁에 놓으며 속껍질을 벗고 앉은 귤 알멩이들을 본다.
'너 이렇게 먹었잖아.'
'피~~이젠 그렇게 안 먹어.'
옆에 금방 까놓은 속옷입은 귤을 입에 쏙 넣는다.
'오빠, 바보 같애'
다시 접시에 쪼르르 놓여 있는 까진 귤들을 손으로 집어 먹는 채옥...
'맛있어'
'채옥아....'
'응'
'내일....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 오실거야.'
'........나 아직 그런거 필요 없어 오빠...'
'필요 없어도......내가 필요해.'
'오빠.......'
'또...지난번처럼 그럴수 있어'
'내가 알아서 할께'
'알아서 하는게 차도 못 피해!'
'.......안 피했어'
윤이 채옥의 손을 낚아챈다.
입술을 깨물고 떠는 윤....그의 눈에 분노가 흐른다.
'니 맘대로.....하지마.'
던지듯 채옥의 손을 놓아 버린다.
'니 맘대로 하지마.'
윤이 차갑게 돌아서 나가 버린다.
빗속에서 갈라지던 채옥의 얼굴이.........
떨고 있던 검은 눈이........
윤을 얼마나 떨게 했는지........
한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윤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버린것을.....
손에서 빠져 나가던 그녀의 손이 다시는 돌아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밤의 두려움을..........
채옥은 알고 있을까?...............
오렴
오렴
사는 일에 지쳐 자꾸
세상이 싫어질 때
모든 일 다 제쳐두고
내게 오렴
눈물이 많아지고
가슴이 추워질 때
그저 빈 몸으로 아무 때나
내게 오렴
네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방 하나 마련해놓고
널 위해 만든 노래들을 들려줄게
네가 일어날 때
아침이 시작되고
네가 누울 때
밤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너를 찾으렴
망가져가는 너의 꿈을
다시 빛나게 하렴
백 창 우
아침 일찍 온 아주머니가 청소를 한다.
구석구석....어제 치웠던 곳에서 또 먼지가 나온다.
빨래를 하고.......똑딱똑딱 반찬을 만든다.
며칠전부터 졸라대는 준호 덕분에 오랜만에 기타를 튕겨본다.
어느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듯...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특징없는 기타음......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음들과 함께 스스로 변형되어 가는 내 머리속의 선율들.....
결국은 그 모든것이 불꽃속으로 사그라져 버릴것들이지만....
하나의 음이 '통' 하고 내 가슴에 들어와 일으키는 파문은
또 다른 잠자고 있던 선율들을 깨운다.
'꼭 우리고향 개천소리 같네요.'
파를 다듬던 손으로 다가와 서 있는 아주머니...
'...그래요?.........'
'네...우리고향 가면 개천이 그렇게 흘러요.'
'고마워요....'
퇴근하여 오는 윤은 트렁크를 열고 물건들을 꺼낸다.
운동 기구들........
채옥은 윤이 들고 들어오는 그것들을 쳐다본다.
다시 나가 비닐봉투 가득한 과일들을 들고 들어온다.
그것들을 냉장고에 챙겨 넣는다.
더운 듯 윗도리를 벗는 윤......
채옥은 그의 목 뒤에서 흐르는 땀 방울을 본다.
'오빠......'
지난번 화가 아직 안 풀렸다.
'오빠, 나 물 좀 줘.'
운동 기구를 조립하던 윤의 손이 멈춘다.
그는 채옥을 보지 못한다.
'그냥.....움직이기 싫어서 그래....'
물을 가져다 준다.
'고마워....'
다 먹은 컵을 뺏듯이 가져가 버리는 윤.
다시 운동기구를 조립한다.
'오빠 맨날 여기오면...난희 언니는 언제 만나?.....'
'.............'
'같이 와라. 언니 보고 싶어.'
나사를 조이는 윤....
다 조립된 운동기구를 시험해 본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씻으러 들어가는 윤....
채옥은 과일을 깍는다.
사과를 깍는다.
껍질을 길게 늘어 뜨리며 깍이는 사과...
껍질이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비누냄새를 풍기며 의자에 앉는 윤...
그의 앞에 귤을 내미는 채옥...
'까 줘...'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잘라 접시에 놓는다.
다시 그 접시를 윤의 앞으로 미는 채옥...
'까 줘'
하얀 속껍질들이 윤의 손에서 쉽게 쉽게 벗겨진다.
주황색 속살을 드러낸 귤들이 접시로 오기도 전에 채옥의 입으로 들어간다.
'맛있어...'
'..............'
'내가 예전에...오빠 무지 부려 먹었지?....'
'..........'
'오빠 한꺼번에 귤 열개를 이렇게 깐적도 있었지?.......'
채옥이 고개를 숙여 장난스럽게 윤을 올려다 본다.
피식 웃고 마는 윤....
'웃었다!'
그 소리에 다시 한번 웃는 윤...
'오빠...화 내지 마라. 슬프다...'
'......슬 퍼?...........'
'응...다른 사람은 화나면 무서운데....오빠가 화나면 슬프다. 이상하지...'
'오빠 화 안 났어....'
윤이 까 놓은 귤을 먹으며 채옥은 길게 깍아놓은 사과 껍질을 들여다 본다.
'원해 오빠'
'웬일이야?...나한테 전화도 다 하고?..'
'잘 지내지?'
'그래 임마. 놀러 좀 와라. 요즘 왜 그렇게 뜸해?'
'..응.....'
'너 요즘 잘 나가더라. 한턱 쏘는거다.'
'그래...오빠 혹시 난희 언니 연락처 알아?'
'.................'
'전화 하는데 계속 안 되네...'
'...윤이가 얘기 안 했어?.....'
'무슨?......'
'난희 도로 미국 갔어...보름 정도 됐나?....'
스르르 전화기를 내려 버리는 채옥.
그리던 오선지를 구겨 버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현관까지 거리가 참 멀다.
'엄...마....'
정인이 들어온다.
성백과의 결혼식때 보고 6년만이다.
놀란 채옥을 지나쳐 들어서는 정인....방안을 살피다 의자에 앉는다.
그런 정인을 멀건히 쳐다보는 채옥...
'앉거라'
정인 앞에...침대에 걸터 앉는다.
'잘...지내셨어요?....'
채옥을 살피는 눈...잠시 아련함이 사라지고 차가워 지는 눈...
'도대체...니들 모녀는 나하고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는지 모르겠다.'
'엄마....'
'내가 왜 니 엄마니?........
이제 어쩔거야?....난희 도로 미국 가 버렸다.'
'................'
'넌 이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해?'
'..................'
'니 에미가 내 인생 망치더니 이젠 니가 우리 윤이 인생까지 망치고 있어.'
'엄마 그게 아니라.........'
'나쁜 기집애.'
채옥의 뺨으로 날아오는 손.....
'기껏 키워 준 은혜를 이 따위로 갚어. 또 다시 윤이 곁에 얼씬거리면 그땐 네 호적을 팔 줄 알아라.'
정인이 차가운 눈덩이 하나를 채옥의 가슴에 툭 던져 두고 간다.
정지한 듯......움직이지 않는 채옥.......
째깍 거리는 시계만이 시간을 한 웅큼씩 들고 와 옆에 두고 간다,
채옥의 창에 불빛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윤은 멀리서부터 달려온다.
문을 두드린다.
'채옥아!..채옥아!......'
지갑 깊은 곳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연다.
열리지 않는 문....
안에서 잠겨 있다.
'채옥아.....
채옥아.....'
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채옥아..........'
불이 켜지고.....창으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저 휘파람 소리.......
'채옥아...문 열어'
'무슨 일이야?....문 좀 열어!'
자신을 음악속으로 감춰 버리 듯.....
안으로부터 잠겨 버린 문......
.........왜?...............
빈집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무슨 말씀이세요?...채옥이를 찾아 가셨어요?...'
'그래,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왔다. 그러니 너도 그만 정신차려'
.....안으로부터 잠겨져 있던 문......
'그애한테 무슨 말씀을 하신 거에요?'
'또 다시 네게 다가오면 호적을 파겠다고 했다.'
'어머니!....'
'난희 한테 연락해서 사과하고 다시 시작해...'
'어머니...채옥이한테 어떻게 그런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걔...호적 파란소리 제일 무서워 하니까....그럼 다시는 네게 안 다가오니까...'
무릎위에서 주먹 쥔 손이 떨린다.
'그럼.......파세요....
....파 버리세요.'
'뭐?....너 정말.......'
'파 버린 호적은.....다시.....연결하면 되니까.....'
'무슨 소리냐? 그게....'
'................'
'무슨 소리냐니까?'
'결혼하면........채옥이 이름...다시 제 이름 옆에 적힐 수 있어요.'
'너.......'
'........결혼하겠습니다.'
하얗게 질린 정인의 얼굴이 다가온다.
'너.. 재정신이냐?.....제 정신이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 있어?....
이 나쁜놈...나쁜놈...'
눈물젖은 정인의 주먹이 윤의 어깨위를 때린다.
'이 나쁜놈....니가 어떻게 에미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는 소리를 할 수 있어?....'
어깨 위로 아프게 떨어지는 정인의 작은 손.....
'네 아버지 하나로도 부족해서...너까지 그래.....'
'...어머니......'
'안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건 안 돼'
어깨 위로 떨어지는 정인의 작은 손을 잡는다.
'어머니....제발.....'
젖은 아들의 가슴을 들여다 보는 어머니...
'걔 가슴속에 있는 건 너 아니다.......
.......너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엄마를 보고도 몰라?'
젖은 눈이 바라본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연민한다.
'........견딜 수......
.......있어요.......'
정인은 아들의 손을 놓아 버린다.
어두운 방안에서 돌아 누워 있던 남편......
함께 있어도 늘 혼자인 느낌.....
그 외롭고, 깊은 그리움......
넌.......모른다.......
윤은 오늘도 채옥의 창 앞에 와 있다.
며칠째 안으로 꼭꼭 잠겨 있는 문....
가로등 아래에서 창으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흘러 나오는 음악속에 채옥의 눈이 있고,감자를 깍던 그 손도 있다.
'채옥아....문 안 열어 줄래?......'
음악소리가 높아진다.
그 음악이
....나 말짱해.......
......가.....
라고 말한다.
윤은 채옥의 오선지에 그려져 있던 그 음률들이 닥지닥지 붙은
작고 허름한 창고를.....
그 문고리를.......
그 벽들을 만져본다.
'내일 다시 올께.....'
더 이상 날기를 거부하는 저 나비.....
떡잎같은 날개를 가진 나비.....
........나는 이제 그 나비를 잡으려 애 써지 않을 것이다.
..그 나비가 날아와 앉을 수 있도록.....
풀꽃 가득한 밭을 만들면 될것이다............
윤은 벽에 기대어 아주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아주머니가 나온다.
문이 닫힌다.
재빠르게 그 문에 손을 끼우는 윤....
밀친다.......
버틴다.......
그러나 너무 쉽게....밀려 버리는 문....
'....니 맘대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채옥의 검은 눈이 윤을 바라본다.
사 랑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드러나 울어대는 매미와
숨어서 훔쳐보는 나비의 싸움이오.
그 검은 눈이 두렵도록 윤을 쳐다본다.
윤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니 맘대로 하지마.'
검은 눈이 가슴을 파고 들어와 앉는다.
'오빠가 뭔데?.....'
조금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절벽같은 눈.......
윤은 그 눈을 가슴으로 밀고 들어간다.
바닥에 내려져 있는 운동기구.....얼핏 스치었던 땀 냄새....
윤은 주먹을 쥔다.
뚜벅뚜벅 걸어 식탁으로 간다.
'배고프다. 일곱 시간을 서 있었어...'
꺼내어지는 반찬들......
금방 해 놓은 듯한 밥 두 공기, 국 두 그릇...
채옥은 윤의 손으로 가지런히 놓아지는 젓가락을 본다.
'같이 먹자'
고개도 들지 않고 밥을 먹는 윤....
그런 윤을 멀건히 바라보던 채옥은 느린 걸음으로 이불속으로 스며 든다.
채옥을 힐끗 보다 다시 밥을 먹는 윤....
'맛있다...아주머니 음식솜씨 좋으신거 같애....'
갈치조림을 먹으려던 윤은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갈치조림 통을 꺼낸다.
다시 빈통을 하나 가져와 뼈를 발라내고 그 새통에 옮겨 담는다.
'너 말이야....왜 생선가시를 발라낼 줄 모르는지 알아?....'
꼼짝 않고 누운 채옥....
'생선가시는 언제나 정해진 곳에만 있는데...넌 자꾸 헤메........
뼈만 발라내면 되는데....넌 살을 긁어 먹으려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잖아....'
다 발라진 갈치를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귤을 깐다.
그녀는 이불속에 스며들어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방안을 흘러, 그 공기를 쓸어 창으로 흘러 나간다.
'채옥아.....'
'.............'
'채옥아......잠깐만 얼굴 좀 봐'
침대에 앉는 윤.....
그 무게에 흔들리는 채옥의 머리...
'어머니 하신 말...마음에 담지마....늘 그러시잖아'
'.........................'
'어머니도....불쌍하신 분이야.'
미동도 없는 채옥을 보다 일어선다.
'.....오빠..........
....오빠....다시 난희 언니 찾아...결혼해라...'
저 깊은 곳에서 들리듯 낮고 작은 목소리.....
'그 얘긴..하지마....이미 끝난 일이야'
'결혼해라......'
'난희 한테 더 이상...거짓말 하고 싶지 않아....누구에게도.....'
'사랑.....해 주면 되잖아'
윤은 채옥의 얼굴을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운다.
눈을 멀건히 뜨고 있는 채옥...
'넌....사랑해 주려고 하면...사랑해 져?...'
'노력해 봐....'
윤은 침대에 얼굴을 대고 모로 누운 채옥의 얼굴만 본다.
'......그만하자. 그 얘기...내일 다시 올께'
더 이상 어떤 말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나가는 윤을 보며 몸을 일으키는 채옥...
'웃긴다......웃겨.엄마도..오빠도....'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 사랑한 사람도 아빠고 나 데려다 키운 사람도 아빤데....왜 나 미워해?'
'채옥아..그건....'
'오빤. 왜 나 괴롭혀?...'
'나, 너 괴롭힌 적 없어'
'.................'
'나...너........'
'다신 오지마.'
매정한 듯, 차가운 듯....단숨에 나오는 말...
'.......내일 올께...'
윤이 돌아서 나간다.
'다신 오지마!'
차가운 그 목소리가 윤의 발목을 잡는다.
돌아와 채옥의 팔목을 나꿔채는 윤...
윤은 그 손에 다시 힘을 주어 당긴다.
'이제.....내게 오라 가라 하지마........
...더 이상 바보 같이 살지 않기로 했으니까.....'
채옥의 두려운 눈이 윤을 바라본다.
'무슨...소리야?.......'
'................'
'무슨 소리야?'
'너하고 함께 할거야....니 옆에 있을 거야...'
채옥의 눈이 멈춘다.....
'....싫어.....오지마......
오빠 내 옆에 오지마!'
손목을 빼려는 채옥....윤의 손이 그것을 더 옥죄어 온다.
'이젠 너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나....동정해......'
'.................'
'그거야?.......동정해?......'
윤은 잡은 손목을 당겨 채옥의 그 검은 눈을 바라본다.
그리고 10년을 가슴에 품어온.....
이젠 짓눌러져 형체조차 희미해져 버린......
생명줄처럼 잡고 있었던 그 말을 토해낸다.
'..........사랑해............
...............................사랑해..'
검은 눈이 더 깊어져 나락으로 추락하듯......
.......안 돼............
곤두박질 쳐 떨어져 내리는 눈.......
.....안돼.............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발버둥친다.
윤은 빠져 나가는 채옥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팔로.....가슴으로......당겨 안는다.
'..........죽을만큼 사랑해............'
발버둥치다 지쳐버린 그 나비는 눈을 감는다.
.........꿈이기를..............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 주기를........
윤의 어깨너머 보이는 붉은 벽을 본다.
.....차라리 저 벽속에 묻혀 버렸으면..................
이 사랑
이 사랑은
이토록 사납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한
이 사랑은
대낮같이 아름답고
날씨처럼 나쁜 사랑은,
날씨가 나쁠 때
이토록 진실한 이 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은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또 이토록 덧없어
어둠속 어린애처럼 두려움에 떨지만
한밤에도 태연한 어른처럼 자신있는 이 사랑은
다른 이들을 겁나게 하던 이 사랑
그들의 입을 열게 하던
그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은
우리가 그네들의 목지키고 있었기에
염탐당한 이 사랑은
우리가 그를 추격하고 해하고 짓밟고 죽이고
부정하고 잊어버렸기 때문에
쫓기고 상처받고 짓밟히고 살해되고
부정되고 잊혀진 이 사랑은
아직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볕에 쪼인
송두리째 이 사랑은
이것은 너의 것
이것은 나의 것
언제나 언제나 새로왔던 그것
한번도 변함없던 사랑
초목같이 진정하고
새처럼 애처롭고
여름처럼 따뜻하고 생명에 차
우리는 둘이 다
가고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잊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잠들 수 있고
잠깨고 고통하고 늙을 수 있고
다시 잠들고
죽음을 꿈꾸고
정신들고 미소짓고 웃음 터뜨리고
다시 젊어질 수 있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 고스란히
멍텅구리처럼 고집세고
욕망처럼 피끓고
기억처럼 잔인하고
회한처럼 어리석고
대리석처럼 차디차고
대낮처럼 아름답고
어린애처럼 연약하여
웃음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아무말 없이도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인다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외친다
나를 위해 외친다
네게 애원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서로 사랑하였던 모두를 위해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
거기 있거라
지금 있는 거기 있거라
옛날에 있던 그 자리에
거기 있거라
움직이지 마라
떠나버리지 마라
사랑받는 우리는
너를 잊어버렸지만
너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땅 위에 오직 너뿐
우리들 차디차게 변하도록 버리지 마라
항상 더욱 더 먼 곳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에게 생명의 기별을 다오
훨씬 더 훗날 어느 숲기슭에서
기억의 숲 속에서
문득 솟아나거라
우리에게 손 내밀고
우리를 구원하여라.
자끄 프레베르..
윤은 새벽같이 달려와 채옥의 창가에서 음악을 듣고.....
아침을 이야기하고.....
해가지면 달려와 창으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이야기 한다.
이야기 하며 귤을 까고.....말라 버린 귤을 버린다.
채옥은 혼자 음악을 듣고.....
혼자 음악을 그리고.....
혼자 하루를 보낸다.
그 끝없는 외면이 그를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해 주기를......
윤은 함께 음악을 듣고......
음악속에 함께 있고.....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 끝없는 울음이 그녀를 지쳐 돌아보게 해 주기를......
윤은 퇴근길에 국화꽃을 산다.
인형을 산다.
레코드가게에 들러 주문해 두었던 음반을 산다.
그리고 시집을 산다.
붕어빵을 사고, 귤을 산다.
10 년동안 너무나 해 보고 싶었던 일.....
오늘은 음반 기획사와 약속이 있다 했으니 늦을 것이다.
집에 들어선 윤은 청소를 한다.
일주일에 한 두번씩 아주머니가 와서 해 주지만 그래도 치울것은 여전히 많다.
오전내내는 그렸을 법한 오선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오선지에 그려진 선율들이 급하게 달리듯, 혹은 꿈꾸듯 혼란스러워 보인다.
청소가 끝나자 윤은 편지를 쓴다.
썻다 지웠다....다시 읽어보고 구겨버린다.
'채옥아......'
그 이름을 써 놓고는 30분째 진전이 없다.
국화꽃을 꽂아 식탁에 올린다.
음반을 오디오 옆에 챙겨두고, 인형과 시집은 베개 옆에 둔다.
그리고, 버릇처럼 귤을 까고, 그에게 또한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음악을 듣는다.
그는 음악에서 채옥의 눈을 만나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향을 만나고,
처음 채옥으로 인해 가슴 떨었던 그 어린날의 기억과 함께 한다.
채옥은 자신의 불꺼진 창을 본다.
늘 어두웠던....서늘한 냉기가 흐르던 그 창.....
함께 음반을 만들어 보자는 그 기획자와의 만남이 너무 길어졌다.
집안 가득 국화향이 풍긴다.
잘 정돈 된 집....
식탁에 윤이 수십번은 만졌을 법한 국화 꽃이 있다.
그 옆에 속껍질을 벗은 귤 알멩이들이 옹기종기.....
채옥은 그 귤을 입에 넣는다.
입에서 즙처럼 짜지는 귤들이 목구멍으로 힘겹게 넘어간다.
오디오 옆에 놓여진....몇달전부터 찾고 있던 그 음반을 듣는다.
베개 위의 인형과 시집 한권....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편지를 본다.
'채옥아...............'
그 한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 편지를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이른 아침 채옥의 창에서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윤은 망설이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안 가득한 국화향....
그 옆에......비어 있는 귤 접시.....
채옥은 잠들어 있다.
인형을 아프도록 안고 잠이 들어 있다.
윤은 웅크린 그 작은 몸을 인형에 의지해 잠들어 있는 날개가 젖은 나비를 본다.
저 물기가 마르면 언젠가는 접은 날개를 다시 펼칠 나비.....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방을 갈라놓을때까지 그렇게 바라본다.
'일어나...오빠왔다....'
거짓말처럼 채옥이 눈을 뜬다.
들어온 햇살이 얼굴로 떨어져 그녀의 검은 눈을 가린다.
'오빠........'
'.......응....'
'오빠..............'
'..응.........'
'.............'
'............응'
'....오빠......안 울거지?......'
'...........'
'..내가 아무리.........어떻게 해도.....
...안 울거지?.........'
'...........응...'
'..............'
'..그래.........'
'그럼...........옆에 있어....'
윤은 채옥의 몸을 일으켜 가슴에 품어 안는다.
윤의 따뜻한 손이 채옥의 식은 몸을 안는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저 벽들이 나를 삼키 듯..........
.............답답해................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대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정 호 승
윤은 채옥이 그를 위해 차리는 저녁 식탁을 본다.
그 날처럼 빗방울 소리가 나는 저녁상을 차린다.
겨드랑이 사이로 하얀 속살의 감자도 보이고,
감포 바닷가의 자갈에서 빠져 나가던 파도 소리도 들린다.
그는 수저를 가지런히 놓고, 그녀는 그 파도 소리가 나던 구워진 생선을 내려 놓는다.
'먹자.....'
'먹어.....'
그녀는 그를 위해 감자를 올려주고....
그는 그녀를 위해 생선뼈를 발라준다.
커피를 마시며 윤은 채옥의 오선지 위에 그려지는 선율들을 넘겨다 본다.
파도치듯, 때로는 나비처럼 쓱쓱 그려지는 그 선율들을 넘겨다 본다.
'왜?........'
'...신기해서.....'
'피.........'
'너....그런일 하는거....자세히 보는것 처음이다.'
채옥은 윤을 빤히 쳐다보다 알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왜?.....'
'.....바보 같애'
윤은 채옥의 바보란 말에 히죽히죽 웃는다.
'왜 웃어...정말 바보 같다.'
여전히 웃기만 하는 윤...이제는 소리내어 웃는다.
'왜?.......'
답답한 채옥이 다그친다.
'너도 바보다...알어?'
채옥은 웃으며 돌아서는 윤을 그저 바라만 본다.
............답답해..................
준호를 만나러 간 채옥이 너무 늦다.
다시 전화를 한다.
'아..형, 잠깐만요.....누나...누나.........윤이 형...............'
전화속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
'누나.......형전화.........됐어..끊어.......누나.........답답해..............'
....답답해. 라고 한다.
'형....누나 너무 취해서 통화 못하겠어요.................가라고 해....'
....가라고 해. 라고 한다.
전화를 내리는 윤.....문을 여니 찬 바람이 확 하고 들어온다.
채옥이 열두 시가 다 되어 준호의 팔에 이끌려 들어온다.
'누나....정신 좀 차려....'
'수고했다.'
'형....별로 많이 마시지도 안했는데 이러네...'
늘어진 채옥을 윤에게 넘기며 준호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채옥에게 혀꼬부라진 소리로 한마디 한다.
'누나도 이제 갔어....고깟 술에 정신 못차리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채옥을 침대에 눕힌다.
......못 견디겠으면 내게 말하지. 그랬어?...........
윗도리를 벗긴다.
'...준호야....조금만 더 있어.......싫어....나 집에 가기 싫어..........'
옷을 벗기던 윤의 손이 멈춘다.
눈을 떠는 채옥....주위를 살핀다.
'어...집이네......오빠 아직 안 갔어?........'
'...........응.'
채옥이 몸을 일으키며 윤의 목을 안는다.
'후.....오빠.....우리오빠............사랑하는 우리오빠.........'
윤은 채옥을 떼어낸다.
'정신차려....'
'.......우리 오빠...........'
다시 쓰러져 잠이 든다.
윤은 채옥을 멍청히 내려다 보다 식탁으로 가 꿀물을 타 두고 조용히 나간다.
불이 꺼지고.......딸깍 바깥에서 문 잠그는 소리.....
어두운 방안을 기어간다.
속이 뒤집어 질 것 같다.
화장실로 가 토한다.
..............답답해.............답답해............
......성백오빠........나 좀.......구해줘................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방을 갈라놓는다.
채옥은 늦은 아침을 먹는다.
밥 한 공기......갈치조림.......
물을 먹으려다 관둔다.
왼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밥을 한 숟갈 먹고 윤이 발라 놓은 갈치살을 먹는다.
그러다 냉장고로 가 아주머니가 새로 해 놓은 갈치조림 통을 꺼내어 온다.
가시박힌 갈치살을 긁어 먹는다.
가을이 다 가 버린 듯, 날이 너무 차다.
윤은 몸을 움츠리며 채옥의 집으로 들어선다.
'어...추워. 벌써 겨울이다.'
윤이 멈칫한다.
식탁에 있던 꽃병이 깨어져 있다.
바닦에 흥건한 물.....
채옥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한다.
'모르고 왼손으로 들었지 뭐야....'
'...왼손?.......'
'잘 안 움직여.....그래도 다행이다. 오른쪽이 먼저가 아니라서....'
오선지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채옥의 태연함이 윤의 눈을 붙잡는다,
'........응'
윤은 천천히 깨어진 병조각을 치운다.
채옥은 어깨너머 보이는 윤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다.
-김선우,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 <장자> 인간세편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채옥이 갑자기 바다를 가자 한다.
'감포 가자'
윤과 채옥이 가장 사랑하는 바다......
그 바다에 가면 자갈에서 빠져 나가는 파도에서 개울물 소리가 난다.
초겨울의 차고 알싸한 바람이 머리속을 뚫고 들어온다.
'오빠....좋지?.......
정말 좋다...'
요즘와서 답답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있던 채옥이었다.
진작 좀 데리고 올 걸 싶다.
솔 숲에서 마른 바다들이 소금냄새를 풍긴다.
바다를 따라 다니는 채옥의 걸음이 힘겹다.
윤은 채옥의 지나친 태연함이 오히려 두렵다.
무엇이 채옥을 견디게 하는 걸까?.......
자신을 생각해 보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마는 윤....
......음악일까?.............
..................................성백일까?...
자갈에 앉은 채옥이 옆으로 오라한다.
손가락만이 움직이고 있는 채옥의 왼팔이 자갈위에 툭 떨어져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채옥의 머리칼이 자꾸 윤을 괴롭힌다.
채옥이 힘겹게 입을 뗀다.
'............오빠..'
'응'
'그 아주머니 있지......혼자 사신데...'
'누구?.....도우미 아주머니.....'
'그래서 함께 살자고 했어'
놀라 돌아보는 윤......
채옥의 눈은 저 바다 끝에 있다.
'내가.....짐 옮길께'
'싫어'
단호하다.
'내가 할께.......'
채옥이 돌아본다.
'오빤......안 돼'
'왜 그렇게 생각해?'
'....훗.......오빤...겁쟁이니까.........
내 몸이 더 망가지면......도망갈거야'
윤은 채옥의 어깨를 돌린다.
'내가 왜 도망가......채옥아. 오빠.....너 정말.....'
말을 끊어 들어오는 채옥....
'봐......벌써 눈에 겁이 잔뜩 들었잖아'
채옥이 윤을 똑바로 쳐다 본다.
윤은 채옥을 당겨 가슴에 안는다.
'아니야...아니야 채옥아......나....너 정말 사랑해.
겁 같은 거 안 먹어'
채옥은 자신의 힘 없는 팔을 들어 윤을 밀어낸다.
그리고 돌맹이를 줏어 바다로 던진다.
'저렇게 던져 버려......그리고 우리 그냥 오빠 동생하자'
윤은 옆으로 돌려진 채옥의 얼굴을 본다.
'사랑해.....'
'그러지마. 오빠'
'옆에 있으라 했잖아?'
다시 돌을 던진다.
'내가 잠깐 잘못 생각했어'
'...............'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빠 옆에 있는거........
...답답하고 불편해.....'
윤은 채옥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냥 가끔......예전처럼 한번씩 놀러와라...'
윤의 눈이 떨고 있다.
바람에 날려오는 채옥의 머리칼 떄문에 자꾸 눈이 따갑다.
'니가........날........성백이를...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거 알아..하지만......'
윤은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화가난다.
'....불편하기까지........해?...........'
윤을 빤히 쳐다보는 눈......
윤은 그 눈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래'
느리지만 단호한 채옥의 대답....
돌아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윤....
밤 늦도록 집으로 갈 생각을 안한다.
두 사람의 침묵 사이로 음악이 흘러 다닌다.
12시가 넘자 윤이 윗도리를 걸친다.
'내일 아침....짐을 가지고 올거다.'
'......제발 그러지마...'
윤의 입술이 떨린다.
'니가 날.....사랑하지 않아도.............
....다른사람이 네 속에 있어도.........견딜 수 있어.....'
윤이 돌아서 나간다.
'오빠가.....다칠거야....'
'이미............상관 없어'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가 버리는 윤....
윤은 채옥의 창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간의 따뜻했던 채옥의 눈길이 꿈이었던 듯.....
또 다시 절벽 같아져 버린 채옥.....
저 찬바람 부는 어두운 골목에 버려진 듯한 외로움.....
......................목이 마르다.................
새벽
그녀의 머리에는 계단이 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항상 물이 끓는다.
원형의 광장처럼
물줄기는 자꾸 돌아
내 허리를 적신다.
그녀의 가슴 속에 나는 독약을 탄다.
내 독약이 끓는다.
그녀의 몸 속을 돌고 돌아
내 입술을 적신다.
그녀의 머리에는 계단이 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독약을 탄다.
나는 매일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가
나에게로 돌아올 독약을 탄다.
박상순
철재 계단위로 윤의 짐이 올라간다.
짐이라야 간단한 옷가방이 전부지만 그 무거움이 윤을 지치게 한다.
'저녁에 일찍 올께'
'.........오빠 지금 잘못하고 있는거야...'
윤은 창을 뚫고 들어 온 햇살에 투명해진 채옥의 얼굴을 본다.
그 햇살이 다시 자신의 얼굴로 뚫고 들어 오기를....
'....일찍 올께....'
손을 잡아주고 가는 윤...그 손을 뿌리칠 힘마저 없어져 버린 채옥의 손....
'진행이 너무 빨라......'
며칠전 병원을 다녀간 채옥을 검사한 양 선생을 만났다.
'자네에겐 얘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그동안 쭉 병원 다녔었어......'
'.............어느정도로....'
'이 상태로 가면 곧...하체도 마비가 올거야.........
......말도 잃게 되겠지......'
머리속에 수십마리의 벌들이 날아다니 듯....윤은 뒤집어져 오는 속을 견딜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간다.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는다.
손을 씻는다.
비누칠을 하고, 씻어내고 다시 비누칠을 한다.
'봐...벌써 눈에 겁이 잔뜩 들었잖아....'
................그래....난...겁이 난다.....무서워 죽을 것 같다.........
저녁.....
윤은 가슴에 품고 온 군고구마를 내어 보인다.
'아직 따뜻하다.....기다려. 금방 까줄께.....'
까서 잘려진 노란 군 고구마가 채옥의 코 앞으로 불쑥 들어온다.
'먹어....'
포크로 집어 다시 내민다.
하는수 없이 받아 먹는 채옥...다시 집어서 내미는 윤...
'내가 먹을께..'
들고 있던 펜을 오선지 위에 올려 두고 포크를 받아든다.
오선지 위를 구르는 펜.......성백의 만년필.......
'물....가져다 줄까?.....'
'응'
포크를 내리고 다시 만년필을 집어 든다.
오선지 위에 그려지는 그 만년필의 흔적들........
그 검은 선을 따라 윤의 마음에 검은 줄이 그려진다.
'물 줘'
'응?..................응...'
물을 가져다 주는 윤.....채옥의 목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소리......
...............목이 마르다..................
채옥은 끝없이 성백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시집을 끄집어 내고.......
음반들을 끄집어 내고.......
사진을.....끄집어 낸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목이 마르다 ......끝없이 목이 마르다......
철재 계단을 더듬어 내려오는 윤....
부엌으로 가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올라 가려다 채옥에게로 향한다.
쪼그리고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늘 이런다......
이불을 당겨 올려주다 그 옆에 앉는다.
굳어져 가는 손을 잡는다.
차다....
....................왜?......날 이토록 거부해?..............
....채옥아..............
윤의 깊은 한숨소리가 방안을 휘감는다.
......채옥아............한번만.....돌아 봐 주면 안돼?........
윤은 굳은 그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간다.
.......나....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니가 너무 보고 싶다.........
윤의 눈물이 채옥의 귓불로 떨어진다.
채옥의 오른손이 올라온다.
그러나....고개숙인 윤의 머리 위에서 멈추고 마는 손.......
다시 이불속으로 숨는 손......
윤의 휘청거리는 몸이 문에 부딪힌다.
.......싫다.....이러는 내가...싫다..........
윤은 채옥의 굳어가는 몸보다 사랑을 더 크게 갈망하는 자신에게 화가난다.
침대옆에 쓰러지듯 기대 앉는다.
'미안해......미안해.....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채옥아.....'
채옥은 윤의 어깨를 흔들어 본다.
잠이 들어 버렸다.
내려와 꺠워 보지만 꼼짝도 않는다.
윤을 안아 침대에 올리려 애쓴다.
그러나....윤의 팔 하나 제대로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그곳에 앉아....윤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채옥.....
이마를 훑어 콧잔등으로........
입술로.........
턱으로.........
그 깊은 눈이 얼굴을 들여다 본다.
낮 동안 채옥을 돌봐주고 있는 아주머니로 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집으로 좀 오라는 소리.....
채옥이 널부러져 있다.....
맥주캔들이 널부러져 있다.....
아주머니가 윤을 맞는다.
'금방 잠 들었어요...소리소리 지르며 울더니....'
아주머니를 보내고 널부러진 맥주 캔들을 치운다.
'.....음...........미안해...미안.........
............성백오빠.....정말 미안해............'
윤은 들고 있던 캔을 떨어 뜨린다.
.............똑같다.......
.......그때랑 똑같다..........
성백이 떠나고 무너지던 채옥의 모습........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끝없이 무너져 간다.
술에 의지해 성백에게 미안하다고만 하는 채옥.....
더 이상 윤의 접근마저 거부한다.
.....그 만큼이야?.........그 만큼이었어?..........
윤은 어제 저녁 자신 몰래 기듯이 화장실을 가던 채옥을 보고 모든 의지가 꺽이고 말았다.
............그 만큼 절실했어?...........
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게에 무너지고 마는 자신의 의지를 본다.
...........찾아 올께............
...........데려 올께...........
...........그만해..........
이 눈물이 지나가면
김상길
이 눈물이 지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오겠지요
낯선 듯 돌아섰던 사람들이
다시 다가와 길을 열어주고
꽃들은 새 하늘을 품고 하늘거리겠지요
방향을 몰라 서성거렸던 것이 아닙니다
별을 못 봐 노래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침묵으로 창을 닫아 놓았을 뿐
이 눈물이 지나가면
그 때는 말하겠습니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를
그 때는 풀리겠지요
끝끝내 남아 있던 눈초리도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웃음도
온화한 실내의 불빛처럼
따뜻하게 풀려 나갈 겁니다
누구에게나 흔적은 있는 것
그 흔적으로 사랑의 무늬를 만들겠습니다
이 눈물이 지나가면
구름처럼 웃으며
스쳐간 표정들을 말할 수 있겠지요
'찾지마라.....'
말리는 원해를 뿌리치고 성백에게 간다.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얼마나 큰것인지.....
상관하고 싶지않다.
윤은 지금 모든것을 포기하듯 무너져 내리는 채옥 앞에
그를 데려다 놓고 싶은 생각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예전처럼....가슴을 짓누르며 바라보게 되더라도....
독일......
왜?.......성백은 이 먼 이국땅으로 와야만 했을까?....
아직까지 윤에게는 그것이 의문이다.
두 사람중 어느 누구도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헤어져 버렸고........떠나 버렸다.
한적한 시골......허름한 농장......
흙 묻은 바지를 입고 목 긴 장화를 신은 성백이 나온다.
푸른 눈의 여인에게 입을 맞춘다.
윤은 순간적으로 가슴에서 이는 분노를 느낀다.
윤을 발견한 듯 다가온다.
'올거란 소리는 들었다.'
'..........................'
'오랜만이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윤은 입술을 깨문다.
'나쁜 자식.............'
멋적은 듯 미소지며 손을 거둔다.
'가자...............
......가자!..........'
윤이 소리 지르자 헛간에서 서너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뛰어 나와 성백의 품에 안긴다.
꼬마를 달래어 집으로 들여 보내는 성백.....
'애가 놀랬잖아.'
윤은 성백의 멱살을 잡는다.
'어떻게.....니가 어떻게......채옥이에게 이럴 수 있어....'
성백의 표정이 굳어지며 멱살을 잡은 윤의 손을 떼어낸다.
'여전하구나....채옥이에 대한 너의 그 맹목적인 태도....'
'......................'
'보다시피 난 이미 재혼 했고...더 이상 지난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 애쓴다.
'..그래.....그럼 부탁하지........
....채옥이.......한번만 찾아줘라'
성백은 감정없는 얼굴로 먼 곳만 응시하고 있다.
'채옥이가......아프다.........많이 아프다......'
'.......................'
'널......보고 싶어 해'
성백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 변화가 없다.
말없이 윤만을 바라본다.
이윽고 입을 여는 성백...
'넌..........아직도 내가 채옥이의 음악을 못 견뎌서 떠났다고 생각해?'
'.......아니냐?....'
성백의 얼굴이 허탈한 듯......순간적으로 스치는 분노......
'너의 그 어리섞음과........채옥이의 지독함은 언제나 나를 숨막히게 한다.'
'무슨 말이냐?......'
'넌.....누구보다 똑똑한 녀석이지만 채옥이 앞에서만은 항상 완벽한 바보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란 것도 채옥이가 맞다면
...네겐....그게 곧 진실이 되니까......'
'............................'
'넌 단 한번도 채옥일 의심해 본적 없지?.....'
'...................그래...의심...안해...'
성백은 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내가 왜 떠났는지 얘기해줘?.........
............난 끔찍했어...............
채옥이에게서....떼어내도 떼어내도.............끊임없이 달라 붙어 있던.........네 그림자...'
'.....내........그림자?................'
윤은 성백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모르겠어?..........너는 아직도 채옥이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게 음악이라고 생각해?....'
'....그래.....그 앤 음악을......사랑해...'
'난........내 눈엔.....채옥이의 음악속에 또아리 틀고 들어 앉은 네가 보인다'
윤은 고개를 흔든다.
'물론 넌 볼수 없었겠지......그앤 그곳에 숨어서 널 만나고 있으니까....
....자기 자신마저 속일만큼 철저하게..........'
윤은 다시 고개를 흔든다.
'...채옥인....널 ...찾고 있어.....'
성백은 허탈한 웃음을 웃는다.
'내게....내 이름에 메달리겠지........네가 다가가면 갈수록........'
'........................'
'원해에게 들었다.....채옥이 병.....'
윤은 성백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린다.
'그애에겐 지금...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게.....
........네가 받을 상처일거다..........'
윤은 휘청이며 바닦으로 주저 앉는다.
그런 윤을 안스러운 듯 보는 성백....
'나는.....지금쯤이면 너희들이 서로를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넌 여전하구나....'
이국의 마른 바람이 윤의 얼굴을 할퀴듯 쓸고 간다.
'정말....바보스럽다. 너희 두 사람........'
.....아니다..............아니다..........
..이게...아니다..............
윤은 성백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머리속에서 혼란스런 그림자처럼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다.
'그 앤....널 위해서라면.....자신을 완벽하게 죽여 버릴수도 있어......'
명치끝에 징을 박은 듯.....
윤은 일어나 달린다.
..........나비.........내 나비..............
.........내 목덜미에 앉아서....내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나비..........
아무리 보려고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그 가벼움으로.......
소리도....느낌도 없이 다가와.....
볼 수 없는.......목 뒷덜미 어딘가에쯤 앉아 자신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을 나비.......
윤은 달린다.
'널.....위해서라면 자신을 완벽하게 죽여 버릴 수도 있어'
................나비.......
.........................................내 나비.........
고무줄 같은
- 강미정
내 사랑, 질기게 늘어나기만 하네
팽팽하게 늘어난 고무줄을 놓으면
수많은 잔떨림으로 살던 내 사랑은
한순간 하나로 몰려 제자리로 돌아가네
심하게 나를 때리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마지막 사랑의 자리는 아프네
놀란 새가 날아간 뒤 남겨진
나뭇가지의 수선스런 모습처럼 아프네
그 끝에서 다시 끊어버리겠다고
힘껏 잡아당기면
늘어뜨려진 사랑은 터지지도 않네
속 터지는 마음을 끊어버리려고
마음아 마음아, 아프구나
안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땀에 젖은 지폐처럼
눈 앞 어룽어룽 흐려지며 아프네
무엇이 간절하게 나를 잡아당기는지
무엇이 길고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는지
가늘고 높고 센 떨림의 파장으로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고탄력,
생고무줄같은 내 사랑 질기네
이제 윤는 오지 않는다.
채옥은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옮겨 앉는다.
며칠만에 술에서 깨어났을때 윤은 곁에 없었다.
그리고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오늘도.....
그는 오지 않는다.
............이제..........
.............됐다.........
채옥은 다시 오선지를 든다.
오른손의 움직임마저 완전히 멈추기전에......
그 오선지위에 그린다.
윤의 눈길을............
윤의 목소리를........
윤의 손길을..........
그리고 윤의 체온을.......
윤의 숨결을 그려 넣는다.
'너 그런 일 하는거...자세히 보는거 처음이다'
채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바보..........
채옥의 오선지에 그려지는 바보..........
'결국...너의 모든 삶을 그게 가져가 버린 셈이군'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간거야'
채옥의 오선지에 그려지는 바보...........
'다른 사람이 네 속에 있어도.....견딜 수 있어'
채옥의 오선지에 그려지는 바보...........
왼손 새끼손가락 둘째마디.......
전화가 울린다.
힘들게 수화기를 드는 채옥..
'네..........'
말이 없다.
'누구세요?.........'
'..............나....'
성백의 목소리.....
채옥은 떨어지는 수화기를 간신히 잡는다.
'잘...지냈어?......'
'................응....오빤?....'
'...나도..........몸은 좀....어때?...'
'..응?...........응........'
'채옥아....'
'오빠....'
'........먼저 말해..'
전화기를 타고 흐르는 침묵......이윽고 성백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다.
'....이제.....그만해. 윤이에게도....네게도......그만 바보처럼 살아라.'
'......................'
'그리고....내게도....그만 미안해 해.'
'오빠..............'
'.........윤이가...다녀갔다.....'
순간 채옥의 동공이 멈춘다.
'듣고 있어?....'
채옥은 떨어지는 수화기를 다시 잡는다.
'.............응'
'너의 사랑만이....네 방법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마라.....
....내가 널 떠난것도....내 방법보단...널.....네 사랑을 인정해서 였으니까.......
.....나로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였으니까.........듣고 있어?........'
'...................응...'
'....윤이것도........너로써는 어찌 할 수 없는거야......'
'..................'
'듣고 있지?........'
'...응...........'
또 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만 끊을께.....'
'오빠 잠깐..............잠깐만..'
'..................'
'...오빠...내가........오빠를 ...사랑하지 않았다고....생각하진마......'
'..................'
'..응?..........그렇게 생각하지마...'
'그렇게 생각 안해....넌......최선 다해서 나 사랑했어..'
'..........고마워.....고마워.....'
수화기가 내려지고.....성백의 목소리도 사라진다.....
채옥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다..................
.............알아 버렸다...............
오선지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성백의 만년필이 그려놓은 오선지 위의 바보들이
채옥의 눈물을 타고 검은 물결처럼 번진다.
불이 켜진 창......그 창으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윤은 그 창 아래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저 음악속에 내가 살고 있다.........
윤은 그 사랑이 벅차서 움직일 수가 없다.
....바보....완벽한 바보........
지금껏 윤에게 모든 진실은 채옥이에게 있었고, 모든 결정도 채옥이가 했다.
귀먹고, 눈 멀어 버린듯....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신.....
윤은 가로등 불빛에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 두번째 마디를 비춰 본다.
보일듯 말듯 희미한 흔적......채옥이만 알고 있었던 자신의 몸의 작은 상처......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는다.
돌려.....들어서는 윤.......
휠체어에 앉은 채옥의 검고 깊은 눈을 마주한다.
두 눈은 정지한다.....
두 눈은 공기를 가르고 서로의 가슴으로 향한다.
두 눈은 머리속의 작은 공기 방울마저 멈추게 한다.
가슴속의 모든것이 터쳐버릴 듯....윤이 다가온다.
다가와.....천천히.....쓰러지듯 채옥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 윤.......
채옥의 무릎이 뜨거워온다.
윤의 어깨가 떨리고, 숨죽인 흐느낌이 집안의 모든 공기를 집어 삼킬것만 같다.
그 손등에 핏줄이 일어선다.
천천히 힘겹게 올라오는 채옥의 손......윤의 머리를 만진다.
뜨거운 눈물방울들이 윤의 머리칼 위로 뚝뚝 떨어진다.
뜨겁게 뜨겁게 숨죽여 오열하는 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채옥의 손을 부서질듯 움켜 잡는다.
그렇게 소리없는 두 사람의 울음이 음악을 타고 창으로 흘러 나간다.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박형진 '사 랑'
........그렇게........가슴에 안고 가 버릴 생각이었어?.........
........몰랐으면 좋았잖아..........몰랐으면....덜 아플지도 모르잖아............
.......가자....................
..................우리 바다............감포..............
..그 바다에 가면.........개울물 소리....마른바다의 소금냄새.....
채옥을 안아 검은 자갈 위에 앉히고 담요를 가져와 덮는다.
차다........이곳 바다 바람은 유난히 차다.
윤은 채옥의 옆에 앉아 그녀를 본다.
그 깊고 검은 눈.....두 눈이 서로를 응시한다.
어떠한 말도....어떠한 소리도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
잡은 손에서 채옥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그리고 윤의 왼손 새끼 손가락 둘째마디를 자꾸만 만진다.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거지?......내 가장 작은 모든것 까지.....
....넌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윤은 바람이 헝클어 놓은 채옥의 머리칼을 매만진다.
'다 알아.........오빠도 니 맘 다 알아........'
채옥이 미소 짓는다.
'우리.........거기 갈까?'
채옥이 돌아보자 윤은 뒷편 산을 가리킨다.
멀리 감포바다가 그림처럼 보이는 곳...석굴암 예쁜 흙길.......
그곳에 휠체어를 내린다.
구름인 듯...산인 듯.....
그곳에서는 자세히 보아야 바다라고 느껴진다.
윤은 채옥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고 다시 차로 달려간다.
....아........너무 좋다.......여기 바람........
'채옥아...'
감고 있던 눈을 뜨는 채옥.....윤이 국화 꽃을 들고 서 있다.
윤의 눈이 떨고 있다.
그 꽃을 채옥의 가슴에 안긴다.
'나랑...........결혼해 줘....'
떨리는 목소리....채옥의 커진 눈이 윤의 얼굴을 쳐다본다.
무릅을 굽혀 채옥의 눈을 마주하는 윤......
'...사랑해..............결혼해 줘'
동공의 움직임도...흔들림도 없이 쳐다만 보는 채옥의 눈......
한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마주하고 섰다.
휠체어 탄 신부와......
그 옆에 무릎꿇은 신랑......
'나 황보윤은....장채옥을 아내로 맞아....'
......나 장채옥은 황보윤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때나 슬플때나......건강할 때나 병들때나...........'
.........기쁠때나 슬플때나......건강할 때나 병들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갈라 놓더라도....'
.......죽음이....우리를......갈라 놓더라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 합니다.'
..........아끼고 사랑할 것을...맹세합니다.........
'맹세 합니다.......'
........맹세 합니다..............
마주보는 두 눈에는 더 이상 들어 올 것이 없다.
'.....사랑해......................사랑해........'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들려 줄 말이 없다.
'마음 아파 하지마...........네 눈이 다 말해주잖아.......'
윤은 채옥의 깊은 눈을 본다.
그 눈이
...................사랑해................
라고 말한다.
채옥은 새벽 미명이 올때부터 눈을 뜨고 있다.
옆에 누운 윤을 들여다 본다.
그 눈이 이마를 만지고 콧잔등을 쓰다듬고...........
턱을 쓸고 볼을 거쳐..........
........입술을 더듬는다.
햇살이 커튼을 삐집고 들어오고 있다.
그 햇살이 윤을 깨운다.
정지한듯......자신을 살피는 깊고 검은 눈......
말없이 그 눈을 살피던 윤은 채옥의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마를 만지고 콧잔등을 쓰다듬는다.
그 손이 턱을 쓸고 볼을 거쳐........
.........입술에 닿는다.
그 손가락이 윤의 입술을 더듬는다.
천천히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윤의 입술선.......
위에서 아래로.......다시 아래에서 위로......
손끝이 저리도록 입술을 더듬는다.
윤은 채옥의 그 뜨거운 입맞춤에 가슴이 벅차 올라 눈을 감고 만다.
숨소리가 거칠어 지고 그 손을 깨무는 윤..........
채옥의 눈에 봉숭아 꽃물이 든다.
뜨겁고 뜨거운.........그들의 입맞춤............
한 잎의 女子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
자.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
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
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女
子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같은 女子,
詩集같은 여자, 그리고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
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물푸레나무 그림자 같
은 슬픈 女子.
윤은 채옥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음악을 그린다.
그 오선지 위에는 손잡고 뛰는 어린 채옥이도 있고.....
오빠를 사랑해 버린 겁에 질린 눈동자도 있고.....
그래서 음악속으로 도망치는......도망쳐 문 잠그는 소리도 있다.
그 오선지 위에는 감자써는 소리......자작자작 고기 익히는 소리......
수돗물 타고 눈물 흐르는 소리.......
윤이 들어 올리는 오선지를 보던 채옥이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을 다시 보던 윤이 히죽 웃는다.
그리고 오선지를 들어 채옥에게 보인다.
'이건 너고, 이건 나지?.....'
그려진 선율들을 가리킨다.
채옥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손가락으로 바뀌었다고 표시한다.
'이게 나야?...............'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윤........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내가 이랬어.........훗.....'
윤이 웃자 채옥도 따라 웃는다.
채옥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윤의 가슴에 들어와 물감처럼 번진다.
준호의 콘서트가 있던 날......
윤과 채옥은 관중들 틈에 끼어 무대위를 날아 다니는 하얀 나비를 본다.
준호의 손에 들려진 채옥의 백색 기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팔랑팔랑 소리없이 날아 다니는 나비......
그 나비를 쫓아 다니는 눈먼 소년......
자신의 목 뒷덜미에 붙은 나비를 볼 수 없는 소년....
나비는 그곳에서 자신의 촉수로 소년을 핧고 있다.
'채옥아...........채옥아..................'
창밖에 눈이 내린다.
'채옥아................'
그녀의 눈동자는 한곳만을 응시한다.
윤은 휠체어 앞에 앉아 그녀를 부른다.
'채옥아.............너.........어디있어?.........'
채옥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미미하게 움직인다.
힘겹게 힘겹게 윤을 향하는 손가락.....
윤은 채옥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가슴에 댄다.
'.....여기?......................'
채옥의 눈이 깜박인다.
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그들은 하나처럼 행복하다.
그리고...........그 겨울 끝자락.............
나비는 홀연히 날아갔다.
내게 자신의 흔적이 남을까 두려워 했던 나비......
나와 호흡을 함께 했던.................
눈이 너무 깊어 울지 못했던 나비..............
나의 목숨.............
나의 영혼을 가진............
...............내 나비...............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어...............
윤은 그 바다에 다시 왔다.
그들의 바다....................감포.........
바다가득 일렁이는 물결위에 채옥의 음악이 흘러 다닌다.
'잘 있었어?..................'
그 음악이 달려와 개울물 소리를 내며 윤에게 인사한다.
........................오빠......................
윤은 그 음악을 한 웅큼 잡아본다.
그러나 금방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 버린다.
'난..................아직도.......니가 너무 목마르다................
....너의 음악처럼............내겐 널 대신할게 아무것도 없어........'
윤은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넌 ....이럴 줄 알았지?..............내가 이럴줄 알고......날 그렇게 밀어 냈던 거지?..............
.............난.........너무 목이 마르다............
자동차가 달려간다.
음악이 일렁이는 그 바다로.................
그 깊은 바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나비 곁으로..............
........자동차는 달린다.................
너를 만나면
이승훈
너를 만나면
우선 타버린 심장을
꺼내 보여야지
다음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해야지
잘 익은 빵을
한 바구니 사야지
너를 만나면
우선 웃어야지
그럼 나는
두배나 커지겠지
너를 만나면
가을이 오겠지
세상은 온통 가을이겠지
너를 만나면
나는 세배나 커지겠지
식사를 하고
거리를 걸으면
백 개나 해가 뜨겠지
다신 병들지 않겠지
너를 만나면
기쁘고 한없이 고요한
마음이 되겠지
아아 너를 만나면
감기로 시달리던
밤들에 대해
전쟁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말아야지
너를 만나면
이렇게 비만 내리는
밤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