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림보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중략) ... 모든 법이 온 곳도 없고 지은이도 없으며
어디로부터 난 곳도 없으니
어떻다고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온갖 사물이 온 곳이 없으니 생(生)한 것이 아니며,
이미 생한 것이 아니니 멸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온갖 사물이 생(生)한 일도 없고 또 멸(滅)함도 없으니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여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물이 난 일이 없으니
제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분별하여 안다면
이 사람은 깊은 이치를 알 것이며,
사물이 제 성품이 없으므로
능히 알 리도 없는 것이니
이렇게 사물을 이해하면
필경은 이해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 [대방광불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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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망>을 위한 변명 *****
1997년 MBC 수목드라마 <미망>
원작: 박완서 / 극본: 임충 / 연출: 소원영
출연: 채시라 / 최불암 / 최주봉 / 홍리나 / 김상중 / 최재성 / 전광렬 등
<<미망을 준비하는 동안 헌 책방도 참 많이 돌아다녔다.
인물의 성격이나 이야기 줄거리는 다 돼 있었지만, 그때 사람들이 산 일상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중략)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 얘기를 쓴다는 게
나로서는 여간 힘들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중략) 이 지면은 실은
소설 <미망>을 해설하라고 제공된 자리가 아니라 MBC의 수목드라마 <미망>을 보고 나서
그 원작자로서의 느낌이나 유감의 뜻 같은 걸 표명해보라고 주어진 자리이다.
그러나 원작 <미망>과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미망>은 원작의 뜻을 훼손했다든가 살렸다든가
하는 비교나 불평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혀 별개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중략)
또 원작을 읽은 시청자 중에는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나에게 거칠게 항의를 해오는 분도 있다.
여러 번 거듭해서 전화로 엄중하게 항의하는 분에게는 나한테 그러지 말고
MBC한테 직접 항의하시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겁이 날 정도로
고증문제를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지속적으로 분개하는 노인분도 계셨다.
나는 지금 그런 분한테 변명을 하고 싶어서 이 지면을 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각색자가 바꾸어놓은 운명은 끝까지 각색자가 책임을 져야지 내가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원작자의 입장을 떠나 시청자의 입장에 선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시절 여염집 과부의 남자사냥 나들이가 과연 가능했나보다는
처음에는 원작대로 밑이 빠진 걸로 돼 있던 여자가 돌연 남자사냥을 나서는 일이다.
밑이 빠진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희귀한 병이지만 출산 후 곧 물동이를 이는 등
힘든 가사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옛날 농촌에서는 그닥 드문 병이 아니었다.
밑이 빠지는 증세의 비극성은 당시로서는 고칠 방도가 없는 불치병이라는 데도 있지만
부부생활이 불가능해진다는 데 있다. 밑이 빠진 걸 그럴 듯하게 연기한 머릿방 아씨가
돌연 꼿꼿한 자세로 요염한 웃음을 띠고 남자사냥을 나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밑이 빠진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원작에서는 밑이 빠진 원인 제공을 시어머니보다는 민란에 두었다.
나는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란이란 대개 세상을 바꿔보려는
정의감 넘치는 젊음의 집단행동의 결과인데 집단의 꿈이 무자비하게 할퀴고 지나간 개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머릿방 아씨가 인기가 있다고 해서 돌연 명을 연장시키니까
성격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결국은 그 성격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정말 죽으면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식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 소리를 되풀이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너무도 가당찮은 교훈의 말씀에 나는 닭살이 돋곤 했다.
열연을 한 하야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내가 전혀 창조한 바 없는 인물이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일개 일본 낭인이 총독부를 좌지우지할 실권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 이상의 고위층이었다면 좀더 세련되고 문화적인 탈을 쓰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급 순사나 단순한 하수인이라면 모를까, 일본제국주의의 얼굴을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희화화시키는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 제국주의가 무서운 것은 식민지의 지식인까지 홀리고
추종케 하는 한 단계 높은 이중성에 있는 것이지 그렇게 드러내놓고 야비한 인간을
식민지 종주국의 얼굴로 그리면 그런 것들한테 먹힌 식민지 백성의 체면은 뭐가 되나.
또 그 당시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개 상인이 살인 명령을 내리고 그의 명령 한 마디로 칼도 아니고 총을 난사하다니
그 말도 안 되는 설정 때문에 무협극이 되고 말았다. 무협극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중요인물들은 거의 몇 번씩이나 칼을 맞지 않으면 총에 맞아 죽거나 죽을 고비를 넘는다.
채시라가 예쁘긴 해도 할아버지 대를 이어 살인명령을 내리거나 삼촌에게 자결명령을 내리는 게
그럴 듯해 보일 만한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무협지에 고증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덜 떨어진 수작 같긴 하지만 채시라의 미모만 돋보이게 하려고 19세기말에 서울서 양장을 하고
말을 타고 귀향한다거나, 부부가 결혼해서 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는 소리를
떡 먹듯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가당치 않음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 순사들이 총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녔다는 것도 현재 육십 세 전후세대만 해도
역력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인데 총대 메고 파출소 앞에 서 있는 순사에 이르러서는
원작자의 입장을 떠나서 한 평범한 시청자로서라도 그 무성의한 고증에 아연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후반의 박승재네 집안 식구들이 일본 기모노를 입고 날치면서
여란이까지 얽히고 섞여서 벌이는 애정인지 치정놀음에다 대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건 도대체 뭘까? 나처럼 욕 잘하는 할망구도 말을 잃는다. 그리고 참담해진다.
나는 좋은 문학작품은 구태여 작가가 나서서 변호해주지 않더라도
아무도 함부로 왜곡시킬 수 없는 뼈대랄까 품위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미망>을 책으로 낼 때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지척에 둔 고향땅(개성)을 이 세상 끝보다 더 멀게 느끼면서 살아온 지 어언 40년째가 된다.
도대체 어째볼 수 없다는 무력감, 풀 길 없는 분노 때문이었을까,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그렇다. <미망>은 내 귀향의 방법이자 고향에 바치는 헌사였다. 꿈도 컸지,
6년 전 MBC 측과 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미망>을 개성에 가서 찍을 수 있기를 바랬었다.
<미망>은 개성지방 특유의 생활문화뿐 아니라 아름다운 산천을 묘사하는 데도 내 딴에는
지극한 애정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남북관계가 덜 경직돼 있었던지
그런 뜻을 문서화하진 않았지만 전혀 가망 없는 일은 아니라는 말을 주고받았던 생각을 하면서
민속촌에서 벌어지는 <미망>을 보는 일은 원작을 살렸고 못 살렸고를 떠나서도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 박완서 에세이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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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치 그림 잘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채색을 써서
환상처럼 그림을 그리지만
그 성품은 차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본 성품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가운데 본 성품이 없지만
그러나 본 성품을 떠나서는
빛깔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는
그림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은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온갖 것을 그리지만 마음과 사물은
서로 알지 못합니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합니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5온(주: 색/수/상/행/식)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짓지 못하는 일이 없으며,
마음과 같이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과는 서로 차별이 없으며
서로 다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모든 세간을 짓는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을 알게 되며,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현재-미래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같이 깨달을 수 있으면
이 사람은 참다운 부처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