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제천(弘濟川) 길 따라 걷다
- 세검정(洗劍亭)에서 홍지문(弘智門) 거쳐 옥천암(玉泉庵)까지 -
요즘 그야말로 봄꽃이 만발한 가운데 개나리가 절정을 향해 가기에 걷기 운동을 하면서 제거 걷고 있는 탐방로의 사진을 소개해 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며칠 사이 미세먼지로 시야가 맑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3월 30일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시야가 말끔했습니다. 잘 되었다 싶어 오전 10시 5분, 카메라를 들고 나섰습니다. 집에서 5분거리에 있는 세검정 개천길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동네 세검정 개천길. 이 개천을 세검천(洗劍川) 또는 홍제천(弘濟川)이라 부릅니다.
이 개천은 흘러흘러 한강에 이릅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각산 서쪽 기슭과 북악산 북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홍지동과 홍은동을 지나 백련산 동쪽을 감싸 돌면서 남가좌동에 이르고 불광천을 합류하여 난지도를 끼고 한강에 유입되는 한강 제1
지류이다. 홍제천 길이는 13.92㎞이고 평균 하폭은 50m이다. 홍제천 위로 내부순환로가 가설되
어 한강 이북지역의 교통 소통에 일조하고 있다. 모래내, 사천, 홍제원내, 홍제원천, 성산천, 세검
천, 홍은천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세검정방면의 북한산 구기동쪽, 평창동쪽, 북악산 부암동쪽, 인왕산 부암동, 신영동,
홍지동쪽 물은 모두 이 홍제천으로 모여들고 한강으로 향합니다.
이 개천길 끝에 세검정이 있습니다.
이 개천길은 동네사람들의 산책로이자 운동장입니다.
이 길은 제 걸음으로 178보(步)로 약 150m정도 됩니다. 이 길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이곳을 이용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저도 참 많이 애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사연도 있습니다. 작년 한 해는 뜻하지 않은 담도암으로 암환자가 되어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재작년인 2019년 11월부터 간헐적으로 복통이 일다가 진정되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2020년 2월 20일에 홍은동의 한 내과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하여 채혈을 하고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위염과 십이지장염이 있다는 검사 결과를 받고 처방을 받았습니다. 약을 먹으면 치유할 수 있어 안심하고 돌아왔습니다.
운동기구가 이는 이곳은 벚꽃이 활짝 폈습니다.
그런데 2월 21일, 혈액검사에 간수치가 높으니 굶고 내원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고 2월 22에 내원하여 복부 초음파검사를 받았는데... 선생님 말씀이 '담관 확장증세'가 있다며 영상의학센터에 가서 복부 CT나 MRI을 찍어 보라고 하여 바로 가서 찍었고, 그 결과를 가지고 선생님에게 드리니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담도에 혹이 있습니다. 아, 죄송하지만 제 손을 떠났으니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세요." 라고 하여 심각성을 우리도 인지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손을 떠났으니 큰병원을 소개해 주시겠다며 서울대, 세브란스, 강북삼성병원 등을 소개하며 선택하라 하셔서 우리는 삼성병원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혹인지 암인지는 명확히 말씀을 아꼈습니다.
그로부터 보살은 인터넷을 검색해보더니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담도암이라면 5년 생존율이 극히 낮은 암임을 알았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암이었지요. 그런 마음을 안고 2월 25일 삼성병원에 입원하여 각종 검사를 다시 받고 우여곡절 끝에 3월 26일 수술을 받고, 4월 9일 퇴원한 이래 제일 먼저 밖에 나가 운동한 곳이 바로 이 개천길 걷기였습니다. 코로나19로 병동 통로걷기를 하거나 집 방안 돌기를 하다가 밖에 나가는 것은 꿈속의 일 같았습니다.
그 짧은 곳을 다람쥐 체바퀴 돌 듯 하다가 개천길로 나가서 도는 것은 병동 통로걷기나 방안 돌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세계였지요. 이곳을 처음엔 3바퀴, 5바퀴씩 돌다가 점점 그 양이 늘어나 항암 중에는 백사실길을 돌았고, 항암이 끝난 후는 백사실길을 넘어 인근의 탐방로를 길게 돌았으며, 인근 둘레길을 찾아 인왕산 자락길, 인왕산 숲길, 북한산 둘레길, 북한산 자락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선 개나리가 만발한 북한산 자락길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개천길을 따라가다 보면 북한산 자락길로 이어집니다. 여기는 북한산 자락길로 향하는 초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왼쪽 끝에 살짝 세검정이 보입니다.
오십견으로 이 운동기구를 날마다 이용합니다.
항암이 끝난 후 생긴 오십견 통증... 낮에는 비교적 괜찮으나 잠을 잘 때면 나타나는 통증에 얼마나 많은 밤을 괴롭게 지냈던가? 지난 1월 초음파 치료를 받고부터는 호전되어 요즘은 편히 잠잘 수 있습니다. 팔이 잘 안 올라갔는데 이 운동으로 80%는 올라갑니다.
이 징검다리를 거너서 가면 세검정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지난 번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 중간에 건널 수 없는 곳이 있어 위로 우회합니다.
우회하여 찾아갑니다.
세검정 뒷모습입니다. 정자는 이곳에서 오를 수 있지만 출입금지입니다.
여기에 안내판이 있어 옮겨 봅니다.
세검정(洗劍亭)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 시대 : 조선 후기. 1977년 정자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 6호
세검정은 홍제천 일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1748년(영조 24)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洗劍亭) 현판을 달았다.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은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림의 세검정은 정자 뒤로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길쪽에 문이 있으며, 개울쪽으로도 작은문이 있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숙종 대에 북한산성과 서울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蕩春大城)을 건설하는 등 이 일대가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서 중요성이 커지면서 무신들의 휴식처로 자주 이용되었다.」
길가 개천가에 있는 모습입니다.
정면의 모습
세검정 편액
겸재 정선(謙齋 鄭歚) 선생의 세검정도(洗劒亭圖)
그림을 보면 정자 뒤로 바위 산이 있고 앞에 개천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또 정자 뒤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자 옆으로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일대는 풍광이 수려해 연산군이 연산군 11년(1505)에 이곳에 탕춘대(蕩春臺)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러한 풍광을 볼 수 없습니다. 정자 옆은 바로 4차선도로 입니다. 옛날의 바위산을 절단하여 도로를 낸 것이죠.
1890대의 세검정 모습
이때만 보아도 그림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뒤에는 산이고 담장이 있는 모습입니다. 일가족이 소풍을 나온 모습이 보입니다.
측면의 모습
세검정은 언제 지어졌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세검정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세검정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 안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장의사지(莊義寺址) 당간지주인데 보물 제235호입니다. 장의사는 백제와 황산벌에서 싸우다 전사한 신라의 화랑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이곳이 경관이 수려해서 여기에 장의사를 지었으니 일찍부터 이곳이 아마도 정자터였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또 세검정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 조선 초기에 세워진 소림사(少林寺)가 있으니 정자터로는 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연산군은 장의사를 허물고 화계(花階)를 설치하여 꽃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물길 바로 위에 이궁(離宮)을 짓고 석조(石槽)를 파 미희들과 유희한 곳이 탕춘대(蕩春臺)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자도 지어졌으리라는 설입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광해군 15년인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1557∼1632)ㆍ김류(金瑬. 1571년 ~ 1648년)등 반정군들은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 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세검정
옛날에는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광을 그리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고 합니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밖 유람처 중에서 장의사 앞의 계곡이 가장 빼어나다.'하였으니 시인 묵객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 없습니다.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시 하나 감상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제목은 <자북한회지세검정희위육언(自北漢回至洗劍亭戱爲六言)>입니다.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에 이르러 장난삼아 육언으로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客行出自幽谷 객행출자유곡 나그네 발길 깊숙한 골짝에서 나오니
溪上翼然有亭 계상익연유정 시냇가에 날아갈 듯 정자 하나 서 있네. 雨過盤陀濯濯 우과반타탁탁 비 지나간 바위는 비에 씻겨 깨끗하고
風吹虛籟泠泠 풍취허뢰영령 바람 부는 허공은 해맑기 그지없다. 近城僧院猶俗 근성승원유속 성 가까운 절간은 외려 俗氣 짙은데
下界丹楓尙靑 하계단풍상청 하계의 단풍은 오히려 푸르구나. 若使塵埃裏至 약사진애이지 만약에 티끌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可憐霞帳雲屛 가련하장운병 노을 휘장 구름 병풍 어여삐 여기리라.
차일암(遮日岩)
세검정 밑에 있는 너럭바위를 차일암이라 합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실록 편찬을 완료한 후 초본(草本)을 없애기 위해 세초(洗草)를 한 곳입니다. 실록 편찬에 사용된 사초(史草)를 잘게 찢고 흐르는 물에 담가 먹물을 씻어냈는데 이를 세초(洗草)라 합니다. 이때 사초한 종이는 재활용하기 위해 인근에 있는 조지서(造紙署)로 보냈다고 합니다. 세초는 사초의 유출을 막아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해 시행되었는데, 실록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서 차일(遮日)을 치고 세초를 한 후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가 베풀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일(遮日)을 치고 세초연(洗草宴)을 한 곳이라 차일암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위에는 차일을 친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세검정 앞 개울가에 있노라니 오리 두 마리가 다가오네요.
다가와 줘서 고맙다.
고기를 잡는가 봅니다.
세검정을 떠나 뒤돌아본 모습입니다.
세검정 모습을 담고 저 아득한 다리 끝에서 나와 홍제천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 개천을 따라 약 9km정도 가면 한강이 나온다고 합니다만 끝까지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걸어보고 싶긴 합니다.
여기는 상명대 입구. 몸을 푹 숙이고 계단옆으로 나아갑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상명대로 이어집니다. 또는 방향을 바꾸어 광화문ㆍ시청쪽으로 갈 수 있고, 홍은동ㆍ신촌쪽으로도 갈 수 있고, 반대방향으로 가면 북악터널, 정릉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앞에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이 보입니다.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입니다.
상명대입구 앞에서 홍은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홍지문이 나옵니다. 이 홍지문은 인왕산 북쪽 끝자락 홍은동 방면의 도로 밑에 있는데 탕춘대성(蕩春臺城)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탕춘대 성은 지금은 도로가 있어 끊어져 있지만 남으로 인왕산(仁王山)과 이어져 있고 상명대쪽으로 이어져 북한산 향로봉 근처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을 지나 담아본 모습입니다.
홍지문(弘智門)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大城)에 대하여 안내판이 있어 옮겨 봅니다.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大城)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 / 시대 : 1719(숙종 4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 4번지
이 성은 1719년(숙종 45)에 쌓은 것으로,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성이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만든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녔다.
성곽 둘레는 약 4km로서, 성 안에 연무장(鍊武場)인 연융대(鍊戎臺)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추었다. 성벽은 크기가 고른 장방형의 돌로 반듯하게 쌓아 숙종 때 성을 쌓는 기법을 잘 보여 준다.
홍지문(弘智門)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문루(門樓)를 지었는데, 대개의 성문처럼 우진각(隅進閣)지붕이다. 그 옆으로 이어진 수문(水門)인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은 홍예 5칸을 틀어 수구(水口)로 썼다.
성의 이름은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지금 세검정초등학교)를 쌓고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홍지문은 한북문(漢北門)으로도 불렸다. 1921년 홍수로 인해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은 무너졌으나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어졌다.」
홍지문(弘智門) 편액. 숙종(肅宗)의 글씨.
홍지문의 지(智)는 '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북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홍지문은 북쪽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사대문(四大門)에 드는 것도 아니고 사소문(四小門)에 드는 것도 아닙니다.
사대문이란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이죠. 그리고 사소문은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말합니다.
사대문 이름을 보면 오상(五常)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는데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만 다릅니다.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肅淸門)이기도 합니다만 정도전(鄭道傳)이 이름을 지을 때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인의예지신(仁義 禮智信) 오상을 받드는 유교를 받드는 국가로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과 정화의 의미를 담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지어졌고, 연산군 때 숙청문이 폐쇄되고 나중에 원래 자리에서 약간 이건하면서 지혜를 공경한다는 의미로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고 합니다. 북대문을 처음 의도한 홍지문이라 했으면 더 적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 홍지문이란 명칭이 숙종 때 살아나서 이곳을 지키는 문이 되었습니다.
탕춘대성(蕩春臺城)
제가 이 탕춘대성 길[옛성길]을 따라서도 몇 번 걸어봤는데 내려다 보는 풍광이 좋습니다. 기회가 되면 옛성길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담아보겠습니다.
상명대 일대
이 다리는 내부순환로 교각입니다. 개나리가 보입니다.
홍지문에서 잠깐 내려오면 보이는 광경입니다.
개나리가 만발한 곳은 이곳에서 유명한 옥천암(玉泉庵)일대입니다. 보이는 다리는 보도교(普渡橋)인데 건너면 바로 옥천암입니다. 하루 전에 연등을 설치하는 모습을 봤는데 장엄한 모습입니다. 이 옥천암은 홍지문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약300m 지점에 있습니다.
보도교(普渡橋)란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두루 건네주는 다리란 뜻이니 피안으로 인도하는 피안교(彼岸橋)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 피안의 옥천암으로 갑니다. 옥천암은 기도도량으로 유명합니다. 옥천암이 유명한 것은 전적으로 마애관음보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옥천암 전경입니다.
보도각(普渡閣) 모습입니다.
오전 10시 43분 보도각에 도착했습니다. 예전에 8년 전에 순례기를 올린 바 있었는데 그때의 보도각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길도 없었습니다. 이곳을 찾아 예배하려면 보도교를 건너 들어가 절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성벽 같은 돌담이 없어졌고 얕으막한 울타리가 둘려쳐져 있고 그 앞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오다가다 합장 삼배하고 지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둘레길을 걷다가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도각입니다.
보도각(普渡閣) 편액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글씨-
보도(普渡)란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두루 건너게 한다는 뜻입니다.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뜻으로 보도(普度)와 같은 뜻입니다.
사시예불하시는 모습입니다.
옥천암은 예로부터 기도도량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서 기도한 일이 있고, 흥선대원군 부인이 아들인 고종을 위하여 자주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표적 영험담으로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사는 나무장수 노총각 윤덕삼(尹德三)이 이곳에서 기도하여 아내를 얻어 잘 살았다는 전설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이야기>방 7번에 소개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기세 당당한 왜군들은 한강을 타고 들어와 서대문을 넘어 자하문을 지나 한양도성으로 쳐 들어갈 기세여서 권율장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치고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야간 매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후 야음을 틈타 왜군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때 왜군들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장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에 왜군들은 조선의 장수로 생각하여 일제히 조총을 쏘았는데 총알을 다 쓰도록 장수가 쓰러질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날이 밝자 그 장수가 돌부처임을 확인하고 이에 당황한 왜군들은 겁을 먹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권율장군이 반격하여 왜군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신비한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분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자안(慈眼)과 수인(手印)모습.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좌상(玉泉庵 磨崖觀世音菩薩坐像)
옥천암 마애보살좌상(玉泉庵 磨崖菩薩坐像)에 대하여
「지정번호 : 보물 제1820호 /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번지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일컫지만, 조선 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 난 불교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ㆍ코ㆍ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은 1973년 6월 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7호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지정되었으나, 2009년 6월 4일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 磨崖坐像)'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고, 다시 2014년 3월 1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20호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명칭이 두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은 참으로 모호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옥천암에서는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좌상(玉泉庵 磨崖觀世音菩薩坐像)'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백불로 불릴 만큼 온통 하얀 것은 호분(胡粉), 즉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표면에 입혀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관세음보살님은 백의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에 이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관음상은 해수관세음보살(海水觀世音菩薩)이라고도 합니다.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 _(())_
북한산 자락길을 걸으려면 이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늘 기도하고 지날 수 있어 좋습니다.
다음은 본격적인 북한산 자락길을 소개해 봅니다. 개나리가 만발한 모습을 보시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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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우님의 병상 일지가 잠깐 나오는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홍은동의 백의관세음보살님도 친견하고 싶고
한강까지 9키로 정도 되는 길도 걸어 보고 싶고...ㅎㅎㅎ
개나리 사진도 기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_()_
병이 나지 않았으면 둘레길은 잘 안 걸었을 것입니다.
발병 때문에 잘 안 걸었던 길도 걷게 되니 시절인연인가 봅니다.
옥천암 관세음보살상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것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일부 글도 수정했습니다.
서울득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라 했는데, 보물 제1820호임을 바로잡습니다.
상경할 기회가 생기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북한산자락길도 사진도 거의 완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백우 넵!
상경할 기회는 있는데 시간을 낼 수가 없기에 여름엔 넘 더워서 가을쯤 함께 걷고 백의관음상도 친견하고 그렇게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
@보현 그때 쯤이면 코로나의 병겁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해 봅니다.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