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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박물관 신성해 관장님 강연
<원불교 역사의 정립 – 원불교 역사박물관을 통해 본 원불교 정책>
오늘 세 번째가 끝이네요. 제목이 조금 바뀌긴 했는데, -원불교 역사박물관을 통해 본 원불교 정책- 사실 우리 종교는 알다시피 대종사님이 출가, 재가 할 것 없이 같이 합력해서 했을 때 완성된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정작 요즘에는 구분도 너무 많고 단계도 인위적으로 생긴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박물관을 통해서 보면 초기교단과 현재의 교도들과 비교를 해보면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해서 이런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1. 전문기관 설립의 제안
보시는 것과 같이 위의 제목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교화, 자선, 교육 여러 파트가 있습니다. 그 목표 중 ‘교육’이면, 교육에서도 여러분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특히 기업들을 보면 자본주의 국가니깐, 돈의 결과로 흐름을 잡고 있기 때문에 회사의 특성에 맞게끔 흐름에 맞게 관할하는 부서가 체계적으로 나옵니다.
우리를 보면 전문기관 같은 것들이 이름뿐인 기관이 많습니다. 우리 교무님이라면 내가 상상하는 교무님이라면 정말 아침부터 좌선과 같이 정좌하시고 그 이외에 모든 것들 정신세계에서 자문자답 할 수 없는 것들을 의지할 수 있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천도독경이 있습니다. 천도 독경을 할 때 ‘같이 하지 않으면 내가 천도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독경의 강약, 높낮이 등에서 감동을 주는 교무님, 그런 것만 담당하는 교무님이 아니더라도, 혹은 재가들이 하는 것에 비해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최선으로 받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가는 전문적인 시간도 있고 돈도 있고 어떻게 보면 한량 끼도 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 출가 분들은 재가 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화’라는 전문적인 파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가가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리 일반인들이 갖지 않은 것들을 출가교무님들이 한다면 용납이 될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전문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섣불리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감수되고 검토되어진 책들이나 행사들 만남이 되었을 때는 정말 지금 보다 더 돈독히 모든 것들을 짚어보는 기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헤레도토스라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가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전쟁을 담은 <히스토리아>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그 책을 쓴 목적은 ‘지금까지 봐온 전쟁 중 이런 전쟁이 없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큰 경험이 있을까?’ 다른 후진에게 남겨야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사람들은 헤로도토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여줬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후대에게 알리기 위한 목표가 있고,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지의 포맷을 갖추고 책을 썼습니다.
우리로 보면 왜 이 책들이 박물관까지 오는 것인가? 할 생각이 들 정도의 책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 책들 중에 너무 많은 것들이 식상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말 괜찮은 교도님들의 일기장과 같이 남겨진 것들이 더 후대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50년 동안 농사일지를 쓴 것이라고 해서 가져왔는데, 읽어보니 농사일지가 아니고, 원불교 교도의 일지입니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교무님에 대한 얘기가 안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 초기 교단의 생활일지나 다름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그 교도님이 갖게 된 모든 것을 교무님께 가져다 줬다고 노력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책으로 낸 사람들 보다 일기장처럼 남겨진 책이 더 가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사적인 것, 고고학적인 것은 가장 타이틀이 가장 갖추어져 있는 것이 신부님들의 책입니다. 한 눈에 봤을 때 보통 것들이 아닌 것들은, 범상치 않는 것들은, 누가 손을 댄 것 같은 것들은 다 선생님들 것입니다. 나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신적인 감응을 받을 수 있는 중개인들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성직자들도 그만큼 역량을 갖췄고 잘했고, 신자들도 받들어 드리고,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고, 그래서 웨스트 미스터 사원에까지 공의회를 거칠 수 있도록 가져옴으로써 고고학이 발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르네상스 오기 전까지도, 실물을 알아야 하고, 몸의 내장도 알아야 하니까 죽은 사람 무덤을 파헤쳐가지고도 아는 것들, 그것을 아는 분들도 다 신부님들입니다. 목사, 신교 되기 이전에도 그런겁니다. 사회의 변화, 발달사를 알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현재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연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로체같은 대 학자들도 그랬습니다. 지금 나가 하나가 아니라 과거에 있어왔던 결집으로서의 나이고, 미래 생활의 기본이 될 수 있는 나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미래를 떠날 수도 없다는 게 바로 철학자들이 말하는, 요즘에 다 알고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미래를 연결하려면 초기 교단에 관심이 많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원불교는 대종사님 당대의 유물만 보더라도 초기교단의 포맷이 얼마나 잘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교단의 것을 잘 알지 못하면, 우리 미래를 어떻게 나갈 것인가 알 수 있을 텐데, 헉헉대면서 기성 교단을 따라가기 바쁜데, 우리 교단은 그런 교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교단이 아닙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문기관이 만들어 짐으로써 초기에 어떤 삶을 살고자 하셨는지, 회상 사람들을 끌고 나갈 때 나도 대종사님처럼 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다, 우리 교도들은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을 알겠는가, 알았으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전문기관이라는 것이 총부도 마찬가지지만, 교당에서도 초기교단에 관심 있고 이런 사람들이 뭉쳐져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교무님이 계시니까요. 부족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저에게도 언제든지 하시고요. 지금 답변을 못해드려도 또 연구해서 해드리고, 이렇게 하나하나 단계를 거쳐서 진보해가야 하는 겁니다. 해결 못하면 항상 폭탄이 되어요. 100년을 어떤 다른 교단보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교단이에요. 그런데 제가 주산종사 전시회 할 때 멋진 선진 후진 후배 했다가 인쇄를 했는데, 선진 후진을 뺐더라고요. 이런 주산종사님, 스무살 약관에 서울에 발령 받으셔서, 당대 지식인이라든가, 왕가의 사람이라든가, 이런 사람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분을 서울에 보내신 대종사님이나, 그 수많은 대중들을 다 휘어잡아서, 초기 교단의 독실한 교도들, 자기가 누구인지 깨쳐서 해결할 수 있는 생활하는 교도들을 다 그때 만드신 겁니다. 스무살, 요즘 애기들 아니에요? 정말 참 놀랐습니다.
한니발이 세계를 정복할 때 몇 살인 줄 아십니까? 고등학교 때 세계사 봤을 때 참 놀랐어요. 상장군일 때가 25세입니다. 내가 25세 때 무엇을 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까요? 어떤 학자 분은 50이 넘어서야 사관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럼 그 전에 가르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참 멘토가 필요하잖아요. 우리가 60이 넘고, 7-80대가 되어서 찾아가고 훈증 받고 싶어 하는 것도, 치밀어 오르는 화도 한 번에 누그러뜨릴 수 있는 말씀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 알기 위해서, 전문기관들에서 만들어진 많은 것들로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책이나 기록물들을 남긴 것을 보면, 기록관리실 일로만 볼 수 있지만, 요즘은 참 기록이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교단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기록물이든 유물이든, 전언된 것들이든,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도구들이라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막상 뭔가 한다고 할 때 어떻게 어프로치 할 것인가? 여러분들 이 3번 째 강의가 끝나면 꼭 도구로 쓰이기 위해 박물관으로 오셔서 보시고, 큰 역할을 하시려면 대종사님의 흔적이 많은 곳에 오면 기운이 달라요, 박물관이나 총부 오시면 그 기운을 쉽게 느낄 수 있어요. 꼭 해보시길 바랍니다.
개인 발행물의 문제들
제가 강의를 500번 넘게 했는데, 가장 컴플레인 받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자료를 쓰고 싶을 때 알고 싶을 때 통로가 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되요. 우리가 알고 싶고 지자본위하고 싶은데, 아무데나 전화 걸어서 알 수 있는 채널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요. 우리 박물관에 가장 전화를 많이 해요. 원불교 역사박물관 3명이에요, 저쪽 박물관은 1명이고, 내가 왔다갔다 해서 2명이니까 총 5명이에요. 박물관 내의 일을 제외하면 전화 받는 전문성이 없을 수밖에 없어요. 참 필요한데 설치가 안 되고 하니까, 여러분들, 공부 많이 한 분들이 자력적으로 모여서 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개인 저작물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평가절하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요. 정말 안 좋은 것은 완전히 나오지 못하게 파쇄해야 하고, 교단사적으로 남겨야 할 것들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맨 처음에 대종사님 탄생 백주년이라고 해서 담무갈을 냈을 때, 자존심도 상하고, 어떻게 이런 수준의 책을 돈 주고 만들어서 원불교를 불교의 사생아로 만들어 놓는 책이 나오는 데 참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와서 일하면서 울고불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요. 이게 돈 내서 했다고 해도 안 써야 하는데 그렇게 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원불교가 불교에 입양된 듯한 표현, 이런 것들을 봐보세요. 자존심이 상해요. 총부문이 강철문이 아닌데 여지껏 어떻게 있었나 싶어요.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간다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요.
대종사님들과 관계된 책들을 썼을 때, 그 후손들이 박물관장도 하고, 동생은 준외교관이고 하는데, 검증도 안 되었고 사실도 아닌데, 개인이 단지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들을 쓴다고요. 이런 것들엔 전문적인 검열이 있어야 하고, 교단적으로 뭔가가 나오면 처음부터 끝까지 봐서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하는 것이에요. 개인이 보고나서 자존심 상한다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력의 문제도 강력하게 했던 것이, 전통적인 산신령도를 따라 했는데, 새 시대 새 부처를 그렇게 한 거에요. 게다가 공의를 안 받았는데도 100주년의 달력이 나오다니 통탄할 일이에요. 그런 것들을 아닌 것은 강하게 없애서 파쇄 시켜서 못쓰게 하는 강력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전 세계 어떤 교단에서 교리적인 것을 담지 않는 것이 이렇게 나오겠어요. 우리가 아는 것만큼 보이기 때문에, 때론 강력하게 융통성 있게 그것들을 배척하고, 또 부담이 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전문기구 설립의 필요성
재가교도님들이 전문기구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알고 있는 분들을 섭외해서, 본인이 못해도 권선을 해서 마땅히 써야 될 자리를 선택해서 교단에 쓰일 수 있게 하는 것이 굉장히 공덕이 큽니다. 제가 봤을 때 일반 교도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권선이에요. 최고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못하더라도 내 정성에 의해서 주변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교무님 통해서 할 수 있게끔. 이것이 정말 큰 역할이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장기적으로 근무할 전문 인력 양성하는 것이지요.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알타이 문명전을 한 사람이에요. 영하 40도가 넘는 그 추위에도 러시아에 40번 왔다 갔다 했어요. 광복 50주년 기념 알타이 문명전, 가장 큰 행사를 대충 했겠어요? 우리나라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서가 부제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니까요. 거기 있는 사람들과 성사가 되서 260개를 가지고 해야 하는 데 670개의 유물을 받게 되었어요. 수교되기 전 나라임에도 그 정도이니까 얼마나 온힘을 써서 열심히 했겠어요. 다 준비 끝나고 우리나라에 와서 하는 걸로 되어있어서 러시아 사람들을 데리고 국립박물관에 전시를 기본으로 해서 온 거에요. 우리가 거기서 한 것은 다 하고, 한국 데리고 와서 하려는데 그새 사람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새롭게 설명하고 인사시켜주고, 거기서 한 것들 또 가져오고 노력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안 된다고 해요. 그 사람 데리고 하려고 했더니 또 바뀌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계속 하는데 우리는 장기적으로 해야 해요. 고인 물이 물론 잘못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고인 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 할 게 많습니다. 20년을 오롯이 했습니다. 지금도 유물 정리라는 것이 일이 너무 많아서 하나도 못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대산종사님 것까지 혼자 했어요. 지금까지의 속도로 봤을 때 지금 인원을 가지고 한다면 17년 기간이 남았어요. 지금 발을 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고 힘들어요. 지금 정리만 해서 분리되어 보존처리만 해도 100년 1000년 만년 이상 가는 거 아니에요. 20년 전에 왔을 때 완벽했던 유물들이 지금은 좀 먹고 상해서 2-30%가 없어지는 데,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장기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에요. 저도 여기 오기 전까지 30년 이상을 공부하고 이것을 맡은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해외에 가서 많이 보고 보존 처리시설도 보고 결과도 봐야 해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집트의 투탕카멘, 20세기 최고의 발견이라고 하는 그것이 1920년에 발견 되었는데, 전시는 몇 번 했지만 그거 보존처리해서 정리된 것이 90년 후에, 바로 10년 전 쯤에 되었어요. 그것을 조금 조금씩 하다가 더 발달된 최고의 기술로 하려고 했어요. 겨우 왕이에요. 우리는 인류를 구원할 종교의 역사인데, 대종사님의 유물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여러분들이 느끼고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초기 교단사에 대해 알고, 그래야 새로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교무님들에게만 맡길 수 없어요. 기성교단과 견주어 보았을 때도 교무님들의 역할이 벅차요. 미래 기획에만도 벅차요. 그런 역할들은 여러분들이 해주셔야 합니다. 잠자는 교도도 깨우고 새로운 교도들도 데리고 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100년 전에 지자본위를 부르짖었는데 세상에 우리 같은 교단이 어디 있어요. 우매한 민중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고, 그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도 ‘물소 같은 놈’하면서도 그 힘든 상황에서 얼마나 급하셨으면 공부를 시키겠어요. 그래서 우리 교도들이 일당백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단에서는 전문기관에서 잘 검열 되어서 나와서 그대로 보고 외우고 실행만 하더라도 단단하고 믿음직한 교도가 되어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지요. 이럴 때야 대종사님께서 출가자 재가자가 구분이 없다고 하신 것이지, 아무것도 안하고 나서 교무님과 역할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교단의 전문 연구기관 설립
교화연구소, 정책연구소 이런 것들이 있는데 아쉬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박물관도 포맷이 갖추어져 있습니다만, 박물관의 완성이 되려면 연구실이 있어야합니다. 연구소를 하려면 재정, 인재도 문제가 됩니다. 종교문제 연구소와도 링크를 해야 하고요. 제가 하지 않으려다가 유물을 한다고 하니까 공개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이제 비로소 100주년이 되었으니 공개도 많이 되고 정부도 많은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대종사님의 유적이 문화재로 등록을 해야 합니다. 단순 프로젝트로만 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교단이 발전합니다. 이런 단계들을 알아야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교화연구소, 정책연구소가 겸직이에요. 하나만 해도 굉장히 큰데 말이에요. 박물관도 이 큰 박물관 두 곳이 겸직이에요. 고고학이 아니더라도 유물에 대해서 신심, 공심으로 받들 수 있는 사람들을 정말 필요로 합니다. 박물관 오셔서 땅바닥에 풀도 뽑아주면서 도와주어야 해요. 제가 풀 뽑다가 어깨가 빠졌잖아요. 해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풀 뽑고 나서 뒤돌면 바로 풀이 다시 나와요. 이제 잔디와 풀하고 구별이 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도 옆에 곁가지 내용들은 빼고 핵심을 해야 하잖아요. 지금 박물관도 마찬가지에요. 저보고 이 풀을 뽑으라고 사람을 안준다는 생각을 해봐요.
아침 6시에 좌선 끝나고 나면 하루에 전체 잔디밭을 2주 나누어서 조금씩 해나가면 2달에 끝납니다. 다시 원상태 되면 또 뽑습니다. 9월 달이 되면 이제 풀이 안나요. 그때 든 생각이, 풀 뽑을 때 내가 집중할 수 있더라고요. 화두로 삼고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풀이 예뻐 보였습니다. 풀이 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데, 제가 원불교 일을 하면서 해야 할 것 가려야 할 것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철들면서 계속 해서 대학교 때 까지도 계속 시간표를 짜서 해왔잖아요. 절대 지켜지지 않더라도, 계속 했잖아요. 우리가 뭐 될지 모르고 컸는데, 엄마 말 듣고 한 거에요. 밥 먹고 노는 것 말고 별로 할 게 없었는데, 그 시간표 보고 조금씩 했잖아요. 아무것도 몰랐는데도 시간표를 만들어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100만 교도도 안 된다고 하는 교도들이, 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길을 가르쳐주는, 낙원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이 전사들인데, 손을 놓고 있어요. 각자 한정된 생명의 시간들이 있는데 시간표도 안 만들고 사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때에 전문기관에서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에요. 믿을 수 있는 것들을 검열해서 교도들이 하루에 한 장이라도 볼 수 있게 해야 해요. 우리는 그랬어요, 하루에 영어책 한 줄 씩 하니까, 졸업까지 9권을 했어요. 우리는 발굴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하루에 한 장씩 하지 않으면 땅만 파다 만 것 같아요. 영어책을 한 권씩 번역 안 하면 쫓아냈어요. 저도 그게 좋았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급할 것도 없고 꿀릴 것도 없고 나는 시간따라 계획따라 다 해왔어요. 여러분도 다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내가 신심과 공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무님을 귀찮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도들끼리도 모여서 교전이라도 한 번씩 읽자고 해야 합니다. 교도들 사이에서 그래야하지 않는가요? 우리 때는 스터디 그룹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사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인 것도 하자고 했어요. 논어, 맹자 이런 것들도 했습니다. 각기 다른 특성의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준비 해와서 했습니다. 아침 6시에 나와서 했어요. 계획적으로 해왔어요. 내가 여기 와서 가장 허전한 게 계획적으로 해 온 것이 없었어요. 어떤 것들이 만들어지고 하는 것들을 못 봤습니다. 이것이 비난이 아니라, 저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할 때 사람을 모아야 하니깐, 5년, 7년 이렇게 준비를 했어요. 우리 상산종사님 할 때도 7년을 준비했어요. 하고 나니까 이렇게 위대한 분들이 대종사님 제자로 계시는데 대종사님은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으셔요. 여러분들이 이런 위대한 선진님들을 보고 나면, 땅바닥에 본드가 붙은 것처럼 어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비교를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경우에는 박물관에서 인력의 잦은 교체와 임기제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사명감과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옛날 사람을 뒤돌아보면서 생각해보면서 그 당시의 사람처럼 역할극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알아갈 수 있어요.
초기 교단사 전문연구기관 설립
저는 나름대로 완전무결한 교법과 제도의 현대적 적용을 위해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아도 현대의 어떤 것들을 어떻게 접하게 될지를 모르면 안돼요.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에요. 이것을 전문기관에서 해주면 우리가 그대로 따라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교단에서도 교당에서도 역할극을 해봐야 해요.
저희가 한번은 여유가 될 때 영산성지, 익산성지 이런데서 해보려고 했어요. 영산성지 20년이에요, 익산성지 20년이에요. 탄생지와 완성지에요. 또 다른 성지들도 있잖아요. 영산성지에서 당시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5월에 아카시아가 나오면 아카시아 밥을 해먹었대요. 너무 먹을 게 없어서도 그랬지만,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1차 방언 답이 얼마 되지도 않은데, 그 앞에 구석에 연꽃방죽이 옛날부터 있어요. 가시연꽃말이에요. 그거 없애고 쌀을 지어도 모자랄 텐데, 그 여유를 보세요. 그 방언답에 연꽃을 보자고 만들었어요. 요즘에는 그냥 조경으로 만들지만, 당시 쌀농사 지어서 교단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 당시 마음을 보고 생각해보면 너무나 마음이 뭉클해요. 그 공간을 더 농사짓는다고 우리 교단이 부자가 되나요? 아니에요, 해결도 못해서 나중에 이공주 선진님이 갚아주셨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왜 그 방언공사가 우리의 정신으로 살아남느냐면,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그것을 훈련시켜서 사람들이 건실한 사회인, 불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터전을 습성을 만든 것이에요.
저는 처음에 창립정신과 교단 공부를 하고 갔을 때, 그것을 생각하기에 엄청 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작은 땅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기교단의 방언공사는 엄청난 일이잖아요. 겨우 그것 땅 때문에 만족하려고 했겠어요? 잘 생각해봐야 해요. 훈련이었어요. 대종사님은 “훈련주” 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실주”입니다. 내가 초기교단과 대종사님을 그리워한다면, 어떤 인식으로 체험을 해야 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현재 실행적인 측면인데, 초기교단의 것들이 많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단회를 하는데, 대종사님 당대에는 죽비를 갖고 말하는 사람을 정해서 했어요.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나요? 청수도 어느 틈에 없어졌습니다. 20%의 교당만 청수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많아요. 영산 성지에서는 그런 것들이 참 많아요. 거기 가서 보면 대각절이나, 법인절 되면 그 당시에 먹었던 것을 해요. 간장이나 고추장에 비벼서 먹는다거나, 아카시아 밥, 감밥, 이런 것들을 어른들에게 들어서 아는데 그것만 특화시켜서 하면, 우리 교도들이 성지들을 갈 때 먹거리만 달라도 참 좋을텐데, 교단은 교단적으로 좋고 여러분들도 할 일이 있어서 참 좋을 텐데, 지금 친견하신 분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계획을 하고 뭔가 필요해서 발을 내딛으면 좋을텐데요. 정말 우리 교단은 몇 명이서 움직임인 교단이 아닌, 처음부터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움직임인 교단이었음을 안다면, 나 하나로 인해서 교단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에요. 토인비가 말한 소수의 창조가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해요. 과연 내가 누구일까? 나는 어떤 역할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대종사님이 말씀하시는 낙원세계를 직접 맡아서 할 수 있습니다.
2. 정책적 인재 양성
제일 중요한 게 인재양성입니다. 한 사람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아까 말했던 소수의 창조자가 될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우는 건은 굉장한 것입니다. 두 분의 교무님이 나가려고 할 때 제가 나가지 말라고 할 때 뭐라고 했냐하면 당신 키울 때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줄 아냐고 했습니다. 인재를 길러낼 때마다 우리 교단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아셔야 합니다. 우리 박물관만 하더라도 “교무님 좀 주세요, 여자교무님들 더 주세요.” 별 소리 안하겠어요? 출가자가 없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교화 현장에 보내지고, 이쪽에는 보낼 교무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화현장이 아니라는 소리에 제가 또 한 번 발끈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4만 명씩 오고 그럽니다. 엄청나게 많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이 700-800개 정도 되는데, 제대로 그 역할을 못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 우리도 선진국의 포맷이 갖춰집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어떻게 교육받은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고, 불특정 다수들이 오게 됩니다. 많은 교무님들이 교화의 현장에 먼저 발령이 나고, 그래서 박물관에는 보낼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연 4만 명이 오면 교화현장이잖아요. 정말 체계적으로 많이 해야합니다. 전화걸고 우리한테 예약하면 어느 날은 아무것도 못하고 설명만 하다 끝날 때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자원봉사 등으로 인력이 대체되어야 하는데, 박물관이 좀 멀리 있으니 그게 안 되잖아요. 여러분들도 여기서 정년퇴임하시면 박물관 오셔서 총부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제 꽃발심으로 교화현장에서 있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에 있어왔던 환경이라던가, 지식이라던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나중에 현장뿐 만 아니라 다른 교단적인 역할에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조사하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인재양성이 될 때 교역자로서의 자신의 방향을 세우고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잖아요. 그렇게 하고 전문성을 갖춘 교육자가 배출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보면 공부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요즘 교무님들 석사 출신입니다. 예비교무님들이 다른 학과의 석사를 따기도 하는데, 90프로 이상이 사회복지학과입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위탁으로해서 하니까 몇 명 많이 쓰이지도 않습니다. 교단이 제대로 일어나면 그것은 한 파트일 뿐입니다. 뭐 때문에 필요한지는 여러분들 아실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다수의 다른 분야들은 미개척지로 있게 됩니다. 교단이 아무리 전문적인 사람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교무님들 중에도 전문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불교도 학승과 수도하는 교무님들 따로 있다. 우리도 이런 것들이 완전하게 구분되어 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완전히 구분해서, 공부하러 가는 교무님들도 조금 미안한 마음 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더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검수만 하게 되더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단적으로 보면 건축 등과 같이 필요한 부분에 따른 우리 교단에서 전문적인 사람들이 늘어나면 경험이 축적되어 웬만한 것들은 함부로 못하게 됩니다. 지금은 그냥 맡겨지니깐 그래서 전문적인 사람들에게 놀아날 수도 있고 등한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인재들이 양성이 되려면 예비 교무의 정책적 인재양성과, 방향설정 및 준비 등의 기초적인 것들을 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에이 플랜, 비 플랜이 많잖아요! 요즘 실용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특히나 진짜 다른데서보다 더 사회를 선도하면서 해야합니다. 에이플랜에서 잘하는 사람이 비 플랜에서도 일등 하거든요! 여기서도 전문적인 교역자들이 배출이 되면, 더 기획이나 모든 것들이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수분야에 대한 서원 시에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 연결을 시켜줘야 합니다. 한편으로 수양적 교화적인 면의 역할로만 지내다가도, 교무님들이라도 다른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거나 변화를 주어야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 될 때, 휴지기를 가지면서 공부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40대에 박물관 관장을 한 것이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 까지 이것보다 더 기쁜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특수 분야에 대한 것 선생님, 교무님 다른 어떤 부분도 교단적으로 연결이 되어 유대감이 있고 인간적으로 연결을 해준다면 더 교단이 전문적으로 잘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3. 박물관과 현 교단체제의 아쉬움
원불교 역사박물관으로 보면 제일 아쉬운 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복원·복제처리를 하게 되면, 지금 상하는 것에서 데이터베이스 가 구축이 되어서 많은 것들이 교단에 복사를 해서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시급합니다. 김정호 선생이 만든 원본 지도의 크기를 아십니까? 제가 서있는 위치에서 저 문까지도 모자랍니다. 제 주장은 그 지도를 실물사이즈로 학교에 복사해서 나눠주라는 겁니다. 그래야 김정호가 걸어 다니면서 그 지도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갔을까를 아이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대종사님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불교 정전은 필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교단적으로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도님들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셔서 직접 원불교 정전 원본을 보시고, 정전과 비슷한 시기에 한용운 선생님의 불교 혁신론과 비교도 해보시고, 대종사님이 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우리가 누구라는 것 또한 잘 알게 되고, 대종사님이 얼 만큼 우리를 skip해주셨다 것을 아실 겁니다.
이런 유물들을 통해서 원불교 박물관의 교단적인 위치가 높아져야 합니다. 제가 원불교의 유물들을 정리하면서, 이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다녔습니다. 일요일날 지방 교당 보며 놀랐어요. 지방에도 그렇고 이런 공심 신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이 일당백으로 일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어떤 식으로 끌고 가야하는지도 모르고,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입니다. 좀 더 서울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교당에 앉아서 자리만 채워주어도 너무나 고맙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당에서 투쟁적으로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주를 7년째 못 본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오로지 원불교와 대종사님을 믿고, 너무 좋아서 법회를 출석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이젠 우리가 강력하게 나서서 좋은 것들을 알려줘야 합니다. 전시회도 하고 하면서 이럴 때 원불교 박물관의 역사적위치가 높아질 것입니다. 서울에서 7년 째 닥종이 인형으로 십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전시회를 하려고 생각중입니다. 그 때 안암교당의 청년들이 많이 봉사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08년을 위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과 초기교단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정리하면서 일반 교도들에게 알리는 것이 옥당박물관, 원불교 역사박물관들의 역할입니다. 교도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전해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옥당박물관, 원불교 박물관이 조그만 기관이지만 원불교 성지에 있다는 이유로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그런 유물들을 알고자 할 때에는 하루라도 한시라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와서 보세요.
저는 초기교단이나 대종사님도 잘 모르고, 교무님 통해서 교단적인 것을 감을 잡거나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용품을 보는 순간에 너무나 벅차더라고요. 대종사님의 친견 글씨만 하더라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대단한 걸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선을 할 때마다 우리 이렇게 감상담 나누듯이 글을 쓰게 하잖아요. 우리 원불교 교도는 붓글씨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못 왔나 싶을 정도로 일필휘지(一筆揮之)입니다. 또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한글로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필 시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감상담들을 보면서 얼마나 커나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또 공심을 갖고 있었는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교도의 감상담 중 하나는 ‘등심(燈心)’이라고 쓰여 있어요. 오를 등 마음 심. 이런 글자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나중에 책을 낼 때에는 쓴 글을 사진 찍어서 넣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누구 관련된 사람인지 사진과 함께 넣으면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까 싶습니다. 번역도 지금 끝난 상태입니다. 정말 엄청난 자료입니다. 초기의 교도들의 대종사님을 보면서 기뻤던 그런 마음들, 내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서, 창생을 구제할 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해주셨는데, 목숨 바쳐서 못할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뭐 하나 대충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박물관의 근무의 특수성과 여타문제들을 좀 느끼셔야 합니다. 아무리 교무님이라도 젊은 사람이 근무할 때, 서울이 아니니깐 거리가 문제가 됩니다. 옥당박물관은 영산에서도 또 10분 넘게 들어가는 오지입니다. 사람이 많으면 그 안에서 축구도 할 수 있고, 테니스장도 쓸 수 있고 하지만, 제가 원불교역사박물관에 가있으면 혼자서 근무를 합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있겠어요? 이런 특수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에서는 주로 체험학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지역에서도 많이 와서, 원불교 안에서 체험하는 것들로 발굴하고 하는 프로그램을 합니다. 그러면서 원불교 교리적인 것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씩 해줍니다. 이렇게 사람이 없으면 밖에 절대 나갈 수 없는 근무의 특수성이 문제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교단적으로 알아서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열악한 재정은 기본입니다. 이번에 돌풍이 왔는데 지붕이 날아갔습니다. 염분이 있는 바람이다 보니 날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장고 쪽으로 비가 떨어지는데 속수무책입니다. 굉장히 열악합니다.
또한 교단의 유물을 이해하고 관리할 정책적인 인재가 양성되어야 합니다. 한 파트파트마다 ‘인재양성’을 꼭 넣은 것은 이런 것들이 가슴으로 느껴지면서, 네덜란드에서 한 사람이 무너질 둑을 막은 것처럼 우리도 개인 개인들의 힘으로라도 막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이 있을 자리에 있을 수 있어야 해요. 우리 분야에도 필요하고, 다른 분야에서도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묻지 말라는 기성불교와 달리, 우리는 새 불교잖아요. 그러니 있어왔던 많은 경험과 환경을 백분 이용해서 습득해서 재가들과의 연계와 더불어 더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도록 하게 되는 정책을 만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원불교 박물관의 전망과 과제
우리는 원불교역사박물관,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 2개관 모두 1종 전문박물관, 경력인증대상기관 자격취득하여서 국립박물관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또 다른 박물관은 거의 없어서 힘든데, 우리는 교무님들이 몇 분이 학예사를 땄어요. 이렇게 자격증은 따신 교무님들께서 미국같은 곳에 우리 성지의 박물관이 생겨날 때 아마 전문가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박물관에 근무할 때 교무님들이 학예사를 딸 수 있게 2년간 기회를 드립니다. 자격증 따는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 관련 전공 및 다양한 실무경험의 교역자 나올 수 있게, 원광대 원불교 교립학과에 학생들을 방학 때 데려와서 가르쳐도 주고, 우리도 정리하는 작업에 도움을 받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설과 장비의 재투자, 전시실 리모델링 절실한데, 100주년에도 리모델링이 안 되는데 언제 기약해야 할까요, 108년에는 기대를 해볼까요?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인재를 양성하면 언젠가는 쓰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금 원광대와 연계하여서 앞서 말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기능의 강화를 통한 기대효과
요즘에는 전시에서 참여로 바뀌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의 참여로, 내가 소속이 되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도 설명과 체험으로 그 당시를 알 수 있게 좀 더 문화인으로 만들 수 있고, 특히 소외되어 있는 계층들을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 총부 기관이나, 원로원, 그리고 다른 종교 기관들이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기관으로 문화교화, 청소년 교화를 하고 있는데, 특히 국가 정책상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이 되어서 수요일마다 융·복합 시대를 여는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메인작업으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로 하고 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유치원 어린이들, 또 원로원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참여할 수 있게 진행합니다. 이번에는 군종 교화를 위해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토기에 분청 하는 체험 등을 통하여 원불교를 더욱 알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가 요즘에 화두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박물관에서만 고정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 가는 박물관’으로 해서 여러 가지 체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초기 교단의 연구를 통한 현대적 적용과 세계를 선도할 방향, 정체성 확립, 이 부분은 박물관에서만 말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원불교의 과제인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초기교단을 연구하게 되면,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아이덴티티가 정립이 되고, 미래에 우리교단이 나아갈 방향을 선도적으로 할 인재들을 양성시킬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단적으로 봤을 때, 대종사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전무후무한 교단으로 5만년의 대운이 터져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선사시대를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5만년의 대운이 역사적으로 처음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이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100살을 사는 중에 1년만 대운이 트면 우리나라에 입지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전 세계의 5만년의 대운이 튼 교단이에요. 영생을 보장받는 교단입니다. 통합 종교 5만년의 대운이 튼 교단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있을 교단은 대종사님 말씀하신 것만 보더라도, 앞으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불투명한, 불확실한 5만년이 아니라는 겁니다. 옥당박물관에 본의 아니게 왜 구석기시대의 것을 옮겨두었냐면 5만년을 얘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석기의 5만년 전의 조각 등을 전시해놨는데,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앞으로 있을 5만년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앞으로 있을 5만년은 불특정 다수, 불특정 연한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기계적으로도 확실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종사님 금강산 다녀오시고 현 금강한다고 했습니다. 10년 전에 누가 금강산관광을 할 줄 알았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강점기에도 갱조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시 태어난다고 독립이 된다고 교도들한테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준비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에요. 앞으로 미래를 선도할 수 있게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금강산이 세계적으로 관광지가 되고, 갱조선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현금강 할테니, 갱조선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교도들이 준비해서 우리 세계를 인도하고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되어라 한 메시지를 바로 그 당대에 해주셨다는 것만 해도, 우리는 초기교단을 연구를 통해서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한사람의 개개인들이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자부심 가질 수 있는 대종사님의 제자가 됩니다. 지하철 같은데 보면, 불특정다수에게 같이 믿지 같이 다니자 하는 사람한테 하는 사람들 보면 부럽네요. 싫은 소리도 들으면서 저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좋으면 나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저럴까 싶어요.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교화를 안 하고 있는데,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타종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부러워요. 우리는 그렇게 안하잖아요. 교리가 너무 좋아서 찾아올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천 년에 찾아올까요... 그렇지요? 그런 것들 보면 참... 요즘에는 그렇잖아요. 한 해 한 해 빠르게 바뀌는데 기다리고 앉아서 바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도들이 나서서 해야 합니다. 우리 담백하게 불단 처리 해놓은거 한 번도 구경 못해본 사람들도 많잖아요. 생일을 맞았을 때 파티하자고 하고 한번 데리고 오고, 밖에서 밥도 사주고, 여기 와서 교무님께 차 한 잔 달라고 할 수도 있고요. 담백해서도 교도가 될 수 있습니다. 교도가 안 되어도 됩니다. 그냥 원불교 알리기라도 합시다! 액션이 없으면 하나도 변화가 없습니다. 한 번쯤 액션을 해봐서 좀 적극적이고 자립적인 교도가 됩시다. ‘자립갱생’이라고 합니다. 좀 더 강력한 자립갱생으로서 더 적극적으로 대종사님의 교리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나도 또한 지자본위가 되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알리면서 좋은 교단이라는 것을 알려도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자본위의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질문
1. 장효병 교도님
바쁘신 와중에 세 번이나 방문해주시고, 이렇게 강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상당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정년퇴직을 하고, 우리 원불교 교단에 뭔가 좀 내 나름대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생활을 해야겠다 싶어서 제가 총부에 연락을 하니까 그 때 마침 박물관에 근무할 사람이 필요했고, 관장님께서 영국에서 공부하시고 40대 초반에 그때 오셔가지고 처음 일을 하셨을 때입니다. 저도 한 1년 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했는데, 관장님께서 교도님이시면서도 출가자 못지않게 이것저것 성심성의껏 열심히 하신 것을 제가 보아왔습니다. 또 여러 가지 오늘 말씀하신대로 여러 가지 과제와 임무들을 말씀하셨는데, 여기 교도님들도 함께 관장님 모시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해나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마지막 말씀
진짜 안암교당은 예외적으로 지식적으로 풍요롭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무님께서 이렇게 관심가지고 여러분들을 이끌고 계셔서, 늘 관심이 가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어서 많은 준비는 못했지만 미력하게나마 여러분들과 이렇게 같이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고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말 관심을 가져서 교리도 그렇고, 감히 제가 말씀드리자면 알면 알수록 너무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교단의 교도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끼실 거예요. 더 빨리 그것을 느끼셔서 이변이 없다면 8~90대까지 맨 정신으로 더 행복한 마음 갖고 계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재밌고, 진짜 자부심 갖는 그런 일들이 많거든요. 꼭 얘기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박물관에서 한 번 유물 본 사람하고, 두 번 본 사람하고, 또 직접 땅을 파서 발굴해서 시간이 지나서 변한 것을 본 사람하고, 또 그것을 정리해서 보고서 쓰면서 본 사람, 전시한 사람, 이 단계를 다 거친 사람, 단계를 한번 거친 사람, 두 번 거친 사람마다 유물을 보는 것이 전혀 달라요. 마찬가지에요. 박물관에 이렇게 널려있는 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제 앞으로 108년 쯤 되겠지요? 좀 더 교단에서 지원이 되면, 대종사님과 초기선진 유물들은 다 완전 패킹이에요. 100주년이 지났으니까 200주년, 300주년 이럴 때만 친견, 그중에서도 몇 개 이렇지, 지금같이 대종사님 유물 이만큼, 진짜 무작위로 놓은 거나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있는 것들이 보여 지는데,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이 열 번, 스 무 번 오셔서 보셔야 돼요. 오히려 강원도, 경상도 등의 지방분들은요. 올해 내가 20년차라서, 30년차라서 왔다 하면서 총부에 오십니다. 매년 신년하례 때 일이 있어 못 왓었대요. 그래서 2~3명의 노인들이 손 붙잡고 같이 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교단의 교도로서 기뻐하는 자발적 자아가 참 굉장히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이 지금 2차, 3차 증언이잖아요.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면, 감찰원장 송인호님 어머니이신 명타원님이 옷감을 펼쳐놓고 대종사님과 함께 디자인한 것이 법복입니다. 이 법복은 유일한 디자인입니다. 원래는 왕의 옷 곤룡포에만 하는 장식이 우리 법복에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교단은 꼭 무엇을 할 때 국가를 성립하는 것처럼 만들어졌습니다. 법복 자체도 여염집 두루마기가 아니라, 굉장히 바느질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왕가의 유물들 보면서 봤던 그것입니다. 대종사님이 하나 둘 하신 것들을 보면 그 하나하나가 히스토리들이 너무나도 많고, 너무나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유물을 보고 거기서 수용의 흔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눈썰미까지 갖춰지면 굉장히 다른 그 의미들이 보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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