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5권, 4년(1571 신미 / 명 융경(隆慶) 5년) 8월 27일(병진) 1번째기사 강릉 정자각이 불이 나 타다
강릉(康陵) 정자각(丁字閣)이 실화로 소진(燒盡)되었다. 궁중이 몹시 놀래어 즉시 5일 동안 흰옷을 입었고 백관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외관(外官)들도 문서가 도착한 날로부터 5일 동안 흰옷을 입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5장 A면
선조 12권, 11년(1578 무인 / 명 만력(萬曆) 6년) 1월 11일(계해) 3번째기사
간원이 강릉의 정자각을 잘못 지은 도청 색랑을 파직하라고 청하다
“ 의 정자각(丁字閣)은 다시 지은 지가 7∼8년도 못되었는데 충연(衝椽)과 선연(扇椽)이 모두 빠져나갔으니 마음써서 짓지 않은 죄가 큽니다. 공장(工匠)을 추고하고 도청 색랑(都廳色郞)은 파직시키고 감동 제조(監董提調)를 추고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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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8권, 7년(1574 갑술 / 명 만력(萬曆) 2년) 4월 20일(갑자) 1번째기사 강릉에 제사지내다
인시(寅時) 정각에 상이 동대문에 이르렀는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묘시에 삼기리(三岐里)에 이르러 조금 쉬며 주정(晝停)하였다. 옥당이 대궐 안팎에서 공판(公辦)했다. 진시(辰時)에 태릉(泰陵)에 이르러 상이 정자각(丁字閣)에서 제사했는데, 제장(諸將)들은 홍살문[紅箭門] 밖에 서 있기만 했다. 상이 몸소 능에 올라가 봉심(奉審)하고자 하므로 영상 홍섬(洪暹)과 우상 노수신이 날씨가 더워 옥체(玉體)가 수고로와 상하게 될까 싶다는 것을 들어 올라가지 말라고 청하니, 상이 앞으로도 일이 있다고 그대로 따랐다. |
사시(巳時)에 강릉(康陵)에 이르니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자각에서 제사하고 또 친히 능에 올라가 봉심했다. 상이 길을 돌려 돌아오다 태릉 앞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모두 걸었다. 제신(諸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신시(申時)에 길을 떠나 환궁(還宮)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28장 B면
선조 9권, 8년(1575 을해 / 명 만력(萬曆) 3년) 1월 15일(을묘) 1번째기사 강릉의 묘자리를 해좌 사향으로 판명하다
공조 판서 원혼(元混) 등이 강릉(康陵)의 무덤 앞으로 올라가니 네 대신(大臣)도 따라 올라가서 상지관(相地官)으로 하여금 기형(機衡)을 펼쳐 놓고 또 건당구범철(乾唐龜泛鐵)을 놓고 보게 하니 모두 해좌 사향(亥坐巳向)이 매우 분명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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