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식 金元植(1889~1940)】 "1924년 정의부(正義府) 설립 중심적 역할"
김원식(金元植)은 1919년과 1920년 대구를 중심으로 폭탄 구입과 임시정부 자금 지원에 참여하였다가 만주 펑톈성[奉天省]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안동 출신 인물들이 집결해 있던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과 동포 지원 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에는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뒤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파견원으로 북경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24년 11월에는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24년 11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결성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1926년 11월 26일 중앙집행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 선전부 간부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8년 7월에는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27~1928년에는 만주 지역 3대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를 통합하는 3부 통합회의에 정의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2년 4월, 김원식은 상해에 잠입하여 김원봉·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만주사변에 대항한 중한항일의용군을 결성하였으며, 1933년 동녕현 전투 이후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이후 김원식은 신한독립당 결성에 주역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어서 1935년 남경에서 민족 협동 전선체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여 새로운 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 들어갔던 이청천과 조소앙(趙素昻) 세력이 곧 이탈하여 김구(金九)와 연합하자, 임시정부 주변에는 두 개의 거대한 연합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1930년대 중후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국 본토 지역의 동향이었다. 김원식은 이 과정에서 이청천과 같은 길을 걸었다. 새로운 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동북군사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체포된 김원식은 간도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 후 지린성[吉林省]에서 1940년 1월 10일 순국하였다.
○ 1889년 8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김원식은 1919년 안동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더이상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만주지역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그는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 1924년 3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통합을 알리는 선언문을 발표할 때, 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후 정의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보좌해 각종 기밀과 인사에 관한 총체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간정원(幹政院)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하였다. ○ 1924년 8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당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유일당촉성회파가 중심이 된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조직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 1930년 김좌진이 한인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7월에 지청천 등이 북만주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유호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上海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11월에는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 1932년 4월 13일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전 국민부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을 만나 만주지역의 정정(政情)과 독립운동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7월에는 남경에서 김상덕과 함께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는 방략에 대해 논의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 1933년 11월 홍진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尹琦燮)과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여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 이후 북경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입교생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김두천(金斗千)에게 서신을 통해 만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교생의 모집을 의뢰하여 만주 각지에서 18명의 학생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