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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그리스도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말씀은 우리를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매일 이 기쁨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두 강조적인 동사로 표현된 영혼의 곤고함을 보십시오. ‘수고하다’는 단어는 기진하여 완전히 쇠미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짐 진’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짐’의 성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크리소스톰이나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그 짐을 ‘율법의 의식과 예식’으로 해석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죄의 짐’이라고 말합니다. 본성의 부패와 악한 행실에 대한 무거운 죄책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죄책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영혼이라면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까지도 알게 됩니다.
이어서 ‘내게로 오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주님께서 ‘모든’ 짐 진 영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곧 죄와 죄책의 종류와 정도를 불문하고 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나오는 자들에게 모든 곤고와 수고로부터 쉴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죄의 상태를 고집하거나, 짐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은택을 입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누르는 무거운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기기’ 때문입니다(잠14:9). 어떤 이들은 죄에 대하여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죄를 아주 즐거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을 낙으로 삼습니다(잠10:23).
죄를 무거운 짐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죄의 악함을 알고, 죄가 가져오는 영원한 비참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영혼을 누르는 무거운 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에게 임하여 그 양심을 각성케 하여 죄에 대한 회개와 회오감을 가지게 합니다. 양심의 ‘송사’는 무섭습니다. 양심은 모든 것을 들추어냅니다. 시편19:6절의 말씀에 비추어 양심은 태양과 같습니다. 피해나갈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하는 양심의 고발은 양심이 가지는 직무 중 하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심은 ‘선고와 정죄’의 직무가 있습니다. 양심의 정죄는 율법의 정죄와 맞먹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는 그 누구도 참아낼 수 없는 고통입니다. 가인과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 양심이 어떠한 효과를 발휘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그것은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죄인을 그 비참 아래 가두어 놓은 채 끊임없이 그를 책망합니다. 양심의 이 효력으로 사람은 매우 큰 공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양심의 직무입니다. 정죄로 인해 이미 비참 가운데 있는 자를 질책하고 책망하는 것은 고통을 몇 배나 증가시킵니다. 양심이 쏘아대는 화살에 그 영혼이 어찌할 바 몰라 놀라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임박한 진노에 대한 가공스러운 두려움, 인간의 표현으로는 이 공포심을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생명의 밧줄에 언젠가는 떨어질 영원한 불에 대한 공포로 살아가는 그들이 무엇을 먹어 어떠한 맛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양심이 주는 고통의 짐이며, 그 어떤 고통도 그와 같이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의 내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자는 그 어떤 피조물로부터 오는 즐거움도 달갑게 느끼지 않습니다. 양심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상처는 너무나 깊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어느 것으로도 치료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처럼 양심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고통을 겪는 시간은 영혼에게 있어서 매우 서글픈 시간입니다. 하지만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영혼들은 아주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혼들이며, 그리스도께 인도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고 있는 여러분의 영혼 속에 하나의 소망을 남겨두십니다. 그 소망이 여러분의 마음을 최후까지 견지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사람들의 영혼에 죄의 짐을 무겁게 얹어 놓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쓴 맛을 체험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죄에서 멀리 떠나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는 마음을 가질 때는 죄의 쓴 맛을 느낄 때 뿐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달갑고 간절하게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식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쓴 것’이 아닌 상태에서는 그리스도를 결코 달게 여기지 않습니다.
죄의 찌르는 아픔으로 상처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영혼은 세상에서 빈곤하고 환난에 처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을 가장 갈망합니다. 그런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죄가 죄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의식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각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죄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십니다. 불에 덴 적이 있는 아이는 불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죄의 고통을 경험한 회개한 영혼에게 물어보십시오. 다시 예전의 죄의 길로 돌아가겠는가? 죄의 값에 치른 값비싼 대가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짐은 이렇듯 무겁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의 짐을 짊어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면 죄의 짐에 대한 대가는 실로 가공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영혼이 죄의 짐으로 느끼는 고통은 실로 무겁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만약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 짐을 내려 놓고 구원을 받을 소망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이는 얼마나 더 가공스러운 일입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중, 지옥의 비참함을 온전히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양심의 찌름으로 이 땅에서 고통 당하는 영혼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어떠한 소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저주 받은 자들이 영원히 느낄 고통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서 죄의 짐에 짓눌려 양심의 찌름으로 고통 당하는 자가 용서받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사슬에 묶여 사형만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가 어느날 갑자기 풀려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무거운 죄 짐으로 괴로워하던 영혼이 그 두려워 떠는 양심 속에서 용서와 평안의 음성을 듣게 되다니요! 양심의 고통과 두려움 아래 살아가던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과 용서를 알게 될 때처럼 달콤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용서의 달콤함은 정말 상상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죄에 대한 고뇌를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기쁨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긴 밤을 지새우며 안타까워 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서글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리둥절한 영혼’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양심’은 그로 말미암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 ‘어리둥절한 영혼’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그 무감각함이 그리스도로 향해야 할 영혼의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옥의 전조가 아니겠습니까? 긍휼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죄 짐으로 곤비해 있고 무거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일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분명 열매 없는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이에게 여러분의 고통을 쏟아내느라 그리스도를 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분명 여러분들의 눈을 가리려는 마귀의 술책입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 악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평안’을 경계하십시오. 이것은 죄의 고통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가장 망하게 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평안’ 또는 ‘죄로 인해 가지는 평안’입니다. 사람들은 죄의 각성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사그라들면, 마치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이 학질열이 떠난 것을 병에서 완전히 나은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고통을 제거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상처를 그저 덮으려고만 합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제거하실 오직 유일하신 분께 그 상처를 열어 보이는 것이 나은데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현재 받고 있는 내면적 고통을 근거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절망적인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곤고한 밤이 지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은 그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예전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무뎠던 여러분의 지각이 이제는 깨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질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이 죄책의 고통을 겪고 있는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진실로 죄의 무게를 진지하게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은밀한 죄행 속에 살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고후7:11). 또한 그러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자신이 비열하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또 이들은 세상의 환난을 매우 가벼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에서도 마음 깊은 즐거움이나 위안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영혼에 평안을 주시기까지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죄에 대한 고통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지속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는 오류와 실수를 범하곤 합니다. 그들은 또 그리스도와 그 의를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곤 합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그토록 주목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금과 이전 상태를 진지하게 비교해 본다면 자기들이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평안이나 안식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동원해 왔던 모든 방법들이 다 허사이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와 평강은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모든 짐을 맡기시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롬5:1).
그리스도께서는 죄 짐으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시는 이 음성은 죄인에게 있어서 영혼이 들었던 것 중 가장 기쁨에 찬 소리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요6:35). 다만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에게 많은 탁월하고 부요한 것들을 암시해 주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죄의 각성을 받고 죄짐으로 무거워하던 영혼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자기들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분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11:6).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압니다. 자기들의 생명과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에는 구원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음을 그 영혼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모든 본성적인 방도가 무익함을 깨달을 때 믿음의 길을 시도합니다. 자기들의 유일한 마지막 처방책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아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은 자기 자신의 본성적인 모든 능력들을 훨씬 뛰어넘는 행동입니다. 곧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은 초자연적이고 전능하신 능력에 의한 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영혼에는 기꺼운 마음이 존재합니다. 아버지의 이끄심에는 그 영혼의 자발성을 파괴시킴으로 영혼을 이끄시지 않습니다. 권능과 압도적인 달콤함을 통해 그 의지를 설득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내게 생명보다 귀한 분이시다. 나의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과 그리스도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들이나 규례들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방편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적지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또한 영혼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만약 그러한 기대나 소망이 없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향해 움직여 나가겠습니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말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이 가지는 소망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부지런히 활동하도록 할 것입니다. 소망은 활동의 샘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에 함축되어 있는 또 다른 것은, 행복에 대한 정확한 영적 안목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에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는 당신께 나아가는 자들의 생명과 모든 필요를 채우실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분함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정당한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시는지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 일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일입니다. 사명 받은 사신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은 ‘외면적’인 방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이러한 모든 외적 방편들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합니다. 그 설교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이 없다면 어떠한 영혼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 안에서 ‘권위있는 부르심’을 발하십니다. 이 성령의 부르심은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장벽을 제거합니다. 두려움, 고집스러운 마음을 일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용기를 심어줍니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공스러운 위협’을 발하십니다. 또한 ‘감동적인 실례’를 통해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또 ‘효과적인 설득’을 통해 죄인들의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성령께서 우리 죄인들을 그토록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하시는가?’라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친히 주신 사명입니다(사61:1).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명을 받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청에 앞서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각성을 먼저 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각성으로 고통 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질서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죄의 악함을 알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과 평안과 용서를 누리라고 말하다니요! 그런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을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눅5:31).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사에게 가지 않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가라는 사람의 말을 비웃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병들어 자신의 생명이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사람들을 보내 의사가 오기를 간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그 의사의 의술에 감탄해 할 것입니다.
은혜의 방식도 이러합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구원을 얻어 영혼의 안전과 안식을 취하는 동시에, 그 영혼을 치료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로 인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말씀 속에 등장하는 ‘다’(all)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것은 죄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단어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진 죄인 중 누구라도 내 긍휼을 받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