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19주일설교 마가복음1:16-20 제자가 되어 살기
본문: 마가복음1:16-20
제목: 제자가 되어 살기
오늘은 마가복음1:16-20절의 말씀을 가지고 “제자가 되어 살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제가가 되어 살기”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서 몽골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몽골은 우리나라와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몽고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몽골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 한문으로 비슷하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서 조센징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몽골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우리나라와 많은 관계를 해왔습니다. 우리를 침략하여 오래 동안 싸움을 하기도 하였고 식민지처럼 지배를 당하기도 하면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비슷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의 구조나 사람들의 외향이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몽골이 소련의 공산주의 아래에 있다가 1990년에 독립한 후 제일 처음으로 수교를 맺을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서울 거리도 있고 고비 사막에 나무를 심기도 하고, 많은 한국 제품들과 식당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 왔다 간 사람이 인구의 10분이 일이 넘는 40만 정도가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참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울란바토르 곧 몽골의 수도에서 말을 하다보면 우리가 한국 사람인 줄을 알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어떤 몽골인은 한국에서도 듣기 힘든 욕을 아주 걸쭉하게 해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민 신문에서도 몽골 사람들이 있는데서 한국말로 몽골사람들을 비하하거나 욕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그 사람들에게 한국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한국은 코리아라고 부르지 않고 솔롱고스 곧 무지개의 나라라고 친밀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꿈의 나라였고 또한 따듯하고 친절한 그런 나라로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악한 한국인도 있어서 몽골에 가서 거들먹거리다가 욕을 먹거나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짐 말을 붙이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몽골은 지난주에 주보에 기록한대로 인구에 비해 엄청난 넓은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도 게르(몽골식 천막집) 한 채 발견하기도 어려운 곳이 많았습니다. 여름이어서 초지인 들판이 길고 넓었습니다.
지평선이 보이고 그 지평선에 차를 타고 달리면 신기루가 보였습니다. 고속도로가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길은 그냥 초지를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로 길이 있지 않고 빠지지 않고 달리면 길이 되었습니다.
이틀 정도 고비 사막에 갔었습니다. 고비 사막은 남서쪽에서 북동쪽까지 1,610 km이고 북쪽에서 남쪽까지 800 km로 측정되는 곳이었습니다. 사막에는 양과 염소 그리고 소와 말과 낙타를 키우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백암면에 한 가족이 살고 원삼면에 한 가족이 살고 양지면에 한 가족이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린다고 했는데 요즘은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보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양을 치고 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땅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은 몽골에 가면 땅은 원 없이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이 없어서 겨우 짐승들이나 키우며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건조한 날씨 9월만 되어도 땅이 얼고 추워서 한 겨울이면 영하 50도가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땅에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교회가 줄어들고 성도들도 줄어들었다고 걱정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련회에 참석한 목회자들은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한국에 돈을 벌로 왔다가 복음을 만나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분들이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상당수가 한국에 돈을 벌로 갔다 왔으며 가능하면 또 가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으로 들어가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은 우리가 지난주에 나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바로 이어서 갈릴리 해변에서 네 명의 제자를 불러 그의 뒤를 잇게 하는 이야기를 마가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한 제자의 삶
네 명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름에 삶을 지탱해 주는 곧 먹고 사는 수단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의 경우는 그물을 버렸고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는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일꾼들을-즉시 버리고 따라 나섭니다.
어떻게 이렇게 그들이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소리를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예수를 믿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회심하는 많은 사람들은 언제인가 어디서인가 복음에 대해서 들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경우가 어린시절 교회에 한번이라도 나가본 사람들이며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다닌 사람들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제자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아가 배를 소유한 이들이 아니라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고 서술함으로써 하류층에 속한 이들이었음을 시사합니다(1;16)
배가 없어서 그저 육지에서 갈릴리 바다를 향해서 그물을 던지거나 얕은 물 속에 들어가서 그물을 던지는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달리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가 배를 소유하였고 일꾼들을 고용할 정도의 중산층의 사람들로 표시됩니다.
아무튼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포된 갈릴리에서 그 새 구원의 조직에 뛰어든 첫 번째 그룹이 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해준 것들을 박차고 일어나서 예수의 부름에 따라 나섬으로써 이들은 일단 돌아섬의 경험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음을 믿고 따르기 위해 돌아섬 곧 회개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버림으로 무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제 자신의 것은 없고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서는 제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회개를 한 자들에게 자신의 것에서 예수의 것으로 돌아선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집니다. 막4:11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그렇습니다. 회개의 경험을 하고 돌아선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이들에게는 오직 거듭거듭 “믿음”을 가지라는 촉구가 주어집니다.막막4:40에서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하시면서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믿음이 없다가 책망합니다.
또한 막9:19에서도 “믿음이 없는 세대여”하면서 책망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11:22-23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가 우리에게 전해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오심의 선포 곧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회개를 통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조직에 들어왔으면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조직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제자로서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
세례자 요한이 하나님이 오실 길의 건설을 예수에 앞서서 실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제 그 길의 건설을 제자들에 앞서 수행하는 이요, 그들을 위한 한 “소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마가15:34).
그래서 마가는 계속해서 예수를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는 이”(10:32)로 묘사합니다. 마가복음10:32에 보면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 앞서 가십니다. 두려움 때문에 다 보내놓고 뒤에서 머뭇거렸던 야곱과 다르게 앞에서 가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고, 또한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해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제자를 부르고 제자가 되는 구원의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 것입니까? 그것은 본문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고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들을 부르고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사탄, 죽음, 아비소스(무저갱)의 상징으로 표시가 됩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끌어 올리듯이 이제부터는 제자들은 사람들을 억누르는 의무와 부담의 무거운 빚더미 속에서 “사람”을 끌어 올리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난주에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어떤 공간적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 이해는 “하나님만이 왕이다”(비교 삼상12:12)는 사상에 바탕을 둡니다.
모든 지상적 왕권이나 지배적인 힘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여하한 인간적 제도나 권력 구조에 서로 반대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힘이나 권력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 2장과 7장 11절 이하는 지상적 지배권에 서로 반대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사람 과 같은 이”의 출현으로 대조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의 수립은 바로 “사람”의 회복에서 수립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명백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보다 앞서 길을 가는 예수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그 나라의 도래를 현재적으로 개막시키는 예수님이 그 자신을 “사람의 아들”리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구원의 조직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세계는 분명히 새로운 정치-경제적 구조이며, 새로운 인간 평가의 형태일 것이며, 새로운 공동체 곧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란 단순히 사람 하나를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 숫자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보여주는 “제2의 아담” 곧 “마지막 인간”으로서 어떻게 인간들이 회복되어야 할 방향의 설정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존재로서 종말의 때에 나타날 구체적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의 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아니 성경전체를 통해서 그런 예수님이 보여주는 참인간을 보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 제자로서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