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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감별사(失鄕感別詞) (산명, 수명, 고적)
실향감별사의 뜻은 고향을 수몰로 잃고, 이별의 감정을 적은 글이다.
1970년대에 오천정씨 선무랑공파의 후손들이 자양면에 16, 17대에 걸쳐 살던 터전을 영천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그 자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특히 삼휴공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500여년을 살아오던
터전을 잃게 되어 뜻있는 어른 분들께서
지나온 수 백 년간의 자취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차에
만우(晩愚) 휘 홍식(泓植)) 족숙께서 붓을 잡아 수몰될 고장의 기록들을
실향감별사로 남긴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산명, 수명, 고적유물, 선조의 내력, 풍속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내용이 어려운 한문(漢文)의 어휘로 되어있어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앞날의 후세들을 위해 쉽게 풀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은 실향감별사 중에서 산명, 수명, 고적 들을 기록한 부문만을 옮겨 알기 쉽게 사전적 풀이를 하
였고, 그 위치와 사진 등을 정리 해보았다.
*2014년 4월 20일 발간 된 오천정씨하천종약회 회보 30호에 실향감별사 전문이 전재되어 있다.
*특히 시리봉과 소(沼)의 위치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정했으나 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 수정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바랍니다.
1.운주산(雲住山)
산이 높아서 구름이 항상 머룰고 있다는 뜻으로 운주산이라 불렀다.
어느 해 가을과 겨울에 눈 덮인 모습.
흘립만고(屹立萬古) 운주산(雲住山)은 자양산(紫陽山)의 조종(祖宗)이요
엄연묵연(嚴然默然) 정중(鄭重)함은 은군자(隱君子)의 태도(態度)이요
<운주산(雲住山)은 오랜 세월 동안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자양산의 으뜸 되는 산이요
그 모습이 의젓하고 말없이 정중함은 세상을 피하는 군자와 같은 태도이다.>
*흘립(屹立) : 산이나 바위, 나무 따위가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다.
*엄연(嚴然) : 매우 의젓한 모양.
*묵연(默然) : 잠잠히 말이 없다
*은군자(隱君子) : 재능은 있으나 부귀공명을 구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여 사는 사람.
*운주산은 우리 고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원족(소풍)을 신방마을을 지나 다녀왔다. 정상에서 동해가 보인다고 하나 그날은 보이지 않아서 섭섭했다.
*정상 부근에 대호군공(휘 時諶)의 묘소가 있다.
2.안국사(安國寺)
운주산 포항 쪽 산기슭에 자리한 안국사의 대웅전과 종각이 2013년에 대웅전이 붕괴되어 복원 되지
않고 있다.
정영산복(崢嶸山腹) 안국사(安國寺)에 미문종성(微聞鍾聲) 처량(凄凉)하다.
<높고 가파른 모양의 산의 허리에 자리한 안국사의 은은한 종소리가 처량하다.>
*정영산복(崢嶸山腹) : 산이 높고 가파른 산허리.
*안국사(安國寺) : 운주산의 포항 쪽의 산기슭에 자리했으며,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중건하였다. 상, 하 두 곳의 안국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옛 사찰의 터가 있는 상 안국사를 칭한다. 1915년 을사륵약이 체결된 후 영남지역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陳)의 근거지로 알려져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우리고장 분들이 ‘불리재’를 넘어 절에 다니기도 하였다.
3.보현산(普賢山)
보현산 천문대가 보인다.
보현산(普賢山) 준엄(峻嚴)함은 백절불굴(百折不屈) 기상(氣像)이요
<보현산의 준엄한 모습은 백번을 꺾이더라도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드러난 모양이요.>
*준엄(峻嚴) : 조금도 타협함이 없이 매우 엄격하다.
*백절불굴(百折不屈) : 백번을 꺾이더라도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뜻. 어떠한 난관에도 결코 굽히지 않음
*기상(氣像) : 사람이 타고난 기개나 마음씨. 또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
*정상 부근에는 보현산 천문대가 위치해있고, 역사적으로 한말에 산남의진의 의병들이 활동하였던 곳이다.
4.거동사(巨洞寺)
거동사의 대운전과 법당안의 불상
거동사(巨洞寺) 천년고적(千年古蹟) 옛 신라(新羅)의 유물(遺物)이라.
<천년고적인 거동사는 옛 신라 때의 유물이라>
*거동사(巨洞寺) : 신라 때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남아 있는 절터를 보면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2동의 요사가 있다. 신라 때의 건축 양식을 지닌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문살에 국화무늬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특히 한말의 산남의진의 활동의 거점이 되어 호국불교의 역할을 하였다.
5.기룡산(騎龍山)
용화마을 지나 처다 본 기룡산과 정상의 모습들
효용(驍勇)한 기룡산(騎龍山)은 호협웅장(豪挾雄壯) 기벽(氣癖)이요
<날래고 용감하게 생긴 기룡산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거대하고 성대한 자부심이 강한 성질이요>.
*효용(驍勇) : 날래고 용감하다.
*호협(豪挾) :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다 *웅장(雄壯) : 규모 따위가 거대하고 성대하다.
*기벽(氣癖) : 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
*기룡산의 이름은 묘각사 창건의 설화에 따르면, 창건 당시에 동해 용왕이 의상에게 법을 듣기 위하여 말처럼 달려왔다고 해서 절이 들어선 산 이름을 기룡산(騎龍山)이라 했다고 한다.
*기룡산의 줄기가 우리의 성지인 하천묘역으로 벋어 그 정기로 인하여 명당으로 이름 높다.
6.묘각사(妙覺寺)
저 멀리 기룡산 산허리에 묘각사가 보인다.
천년고찰 묘각사의 모습
이 중봉(中峰) 묘각사(妙覺寺)는 고인수교(古人手巧) 묘각(妙覺)일세
<이 기룡산 중턱에 있는 묘각사는 옛사람들의 손재주가 마치 온갖 번뇌를 끊어 버린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네.>
*고인수교(古人手巧) : 옛사람의 손재주 즉 손으로 무엇을 잘 만들어 내거나 다루는 재주.
*묘각(妙覺) :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위(五十二位) 단계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 온갖 번뇌를 끊어 버린 부처의 경지에 해당한다.
*묘각사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하였다. 설화에 따르면, 용왕이 달려와서 의상에게 법문을 청하자, 의상이 법성게(法性偈)를 설하였더니 문득 깨닫고 승천하였다. 용왕은 하늘에서 감로(甘露)를 뿌렸는데, 이 비로 당시 극심했던 가뭄을 해소하고 민심을 수습했다고 한다. 이에 의상은 묘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묘각사라 하였다.
7.오미산(烏尾山)
사진의 왼쪽이 백암산이고, 중앙의 높은 산이 오미산이며. 오른쪽이 가동산이다.
영천댐의 둑과 연결된 오미산의 모습
봉용미자(丰容美姿) 오미산(烏尾山)은 물외고사(物外高士) 자품(資稟)인 듯
<토실토실한 아름다운 얼굴과 아름다운 모습인 오미산은 현실세계의 바깥세상에 있는 높은 선비의 바
탕과 성품인 듯>
*봉용미자(丰容美姿) : 토실토실한 아름다운 얼굴과 아름다운 모양.
*물외고사(物外高士) :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바깥세상에 있는 높은 선비.
*자품(資稟) : 사람의 타고난 바탕과 성품.
*오미산은 자양면의 입구에 자리하여 수문장의 역할을 했고, 산 밑에는 피부병에 좋은 약수탕이 있어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다. 1970
년대에 마주보는 가동산(嘉桐山)을 이어 둑을 막아 영천댐이 건설되었다
.
8.필대산(筆大山)
사진의 두 봉우리 중 왼편 산이 필대산이다. 아랫귀미마을 앞을 흘러간 1995년대의 자호천의 모습!
필대봉(筆大山) 쌓은 붓은 명화필(名畵筆)의 근원(根源)이요
<필대산 쌓은 붓은 유명한 그림을 그리는 붓의 근원이요>
*명화필(名畵筆) : 유명한 그림을 그리는 붓.
*필대산은 귀미마을 남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그 이름이 붓과 관련 있으므로 사람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었다. 면학하여 성공하겠다는 희망을 갖게 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9.탕건봉(宕巾峰)
이 사진의 중앙부에 3층봉우리의 맨 아래봉과 둘째봉이 귀미마을 쪽에서 보면 탄건 모양으로 보인다.
탕건봉(宕巾峰) 기절(奇絶)함은 예측과한(豫測科翰) 범상(凡常)하다.
<탄건 같이 생긴 탄건봉의 신기하게 생긴 모습은 과거(科擧)에 등과가 예측되니 범상하다.>
*기절(奇絶) ; 아주 신기한 절벽.
*과한(科翰) :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
*백암산 동봉 쪽의 3단의 봉우리 중 아랫 봉과 둘째 봉이 합해져서 귀미마을 쪽에서 보면 탕건 같이 보인다.
한편 청석으로 된 바위산이며 산 사이에 골자기가 있어 ‘청석골’이라고도 했다. 어릴 때 청석골 즉 탕건바위 밑에서 목욕도하고 고기를 잡기도 했다.
10.병풍봉(屛風峰)
병풍봉은 운주산 줄기인데 바위가 병풍같이 펼쳐 서 있다.
부인암하(婦人岩下) 병풍봉(屛風峰)은 이 자양(紫陽)의 보병(寶屛)일세
자생화초(自生花草) 수(繡)가 되고 창공비학(蒼空飛鶴) 화(畵)이로다
<부인암 아래 병풍봉은 이 자양의 보물 같은 병풍 일세
병풍봉에 자란 자생화초가 수(繡)가 되고, 창공을 나는 학의 그림이 되도다.>
*보병(寶屛) : 보배스런 병풍
*수(繡) : 헝겊에 색실로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바늘로 떠서 놓는 일.
*중귀미 마을과 안귀미 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못골로 올라가면 병풍암에 다다른다.
11.노적산(露積山)
어느 해 댐의 물이 줄어 인구와 월연 사이의 ‘앞거랑’ 넘어 보이는 노적산은 그리 크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산 밑으로 도로가 나 있다.
노적산(露積山) 쌓은 양곡(糧穀) 풍유여량(豊裕餘粮) 노적(露積)이요
<노적봉 쌓은 양곡은 넉넉하여 식량이 남아서 한데에 수북이 쌓은 노적의 형상이오>
*풍유여량(豊裕餘粮) : 풍유해서 식량이 남아도는 것
*노적(露積) : 곡식 따위를 한데에 수북이 쌓음.
*꼬깔산 아래에 노적을 쌓은 형상인 작은 산이 노적산이다.
12.성혈암(聖穴岩)
기룡산 기슭에 바위 동굴이 있는데 지금은 절이 들어 서 있다.
성혈암의 동굴 속의 모습
성현군자(聖賢君子) 영정피란(影幀避亂) 성혈암(聖穴岩)의 공적(功積)이라
<포은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성현과 군자의 영정을 피란함은 성혈암의 공적이라.>
*성혈암(聖穴岩) : 일명 성현암(聖賢巖), 기룡산 줄기인 성곡리의 고깔산 중턱에 바위 동굴을 성혈암이라고 한다. 그 동굴 속에 임진왜란 당시 포은선생을 비롯하여 영천 향교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피난시켰으며, 또한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호수공의 아드님들이 한때 어머니 손씨부인을 모시고 피란한곳이기도 하다.
13.시루봉(峰)
사진의 호수 북쪽의 중앙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시루봉인데 하천(夏泉)서 서쪽으로 보인다.
시루봉(峰) 익힌 음식(飮食) 위선접빈(爲先接賓) 수물(需物)인가.
<시루봉에서 익힌 음식은 조상을 위해 온 손님을 대접하려고 구한 여러 가지 물품인가>
*시루 :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둥근 질그릇. 모양이 자배기 같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다.
*위선(爲先) :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조상을 위하여 일함
*수물(需物) : 구한 여러 가지 물품.
*위치를 수소문 하던 중 하천종약회 회보 1호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확인한 결과 하천묘역을 설명하면서 주위의 산 표시에 시리봉이 있었다.
14.백암산(栢岩山)
수몰 후 들러난 우리 마을 터에서 백암산을 배경으로 운계형님과
백암산에 올라 수몰 직전의 면소재지와 인구, 월연, 원각마을 찍은 사진
단면여벽(斷面如壁) 백암산(栢岩山)은 우리 삼촌(三村) 경대(鏡臺)인 듯.
<단면이 절벽 같이 생긴 백암산은 우리 귀미, 인구, 월연 삼촌의 경대인 듯>
*단면여벽(斷面如壁) : 물체의 잘라 낸 면이 마치 벽과 같다.
*백암산은 면소재지인 인구, 월연마을의 남쪽에 위치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위산이다. 옛날에는 부엉이가 살고 있었고, 저녁때에는 부엉이 울름소리도 들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 식목행사시 나무도 심고, 호기심에서 동무들과 자주 놀러 올라가보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넓은 시야의 용산리의 우리 마을 정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5.진경산(進慶山)
호수의 앞줄 산은 백암산 줄기이고 뒷줄의 산줄기가 이어진 산이 진경산이다.
그사이에 노항마을이 있었다.
일지장맥(一枝長脈) 진경산(進慶山)은 세세오가(世世吾家) 진경(進慶)이요.
<한줄기 긴 기운과 힘이 이어진 진경산은 대대로 우리 집의 경사스러운 일을 끌어들이는 일이요>
*일지장맥(一枝長脈) : 한줄기 긴 기운이나 힘.
*세세(世世) :대대(代代), (거듭된 여러 대).
*오가(吾家) : 우리 집.
*진경(進慶) : 경사스러운 일을 끌어들이는 일.
*진경산은 운주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긴 산맥을 이루어 신방, 노항마을을 지나 오미산에서 끝이 난다.
16.자호천(紫湖川)
사진의 위쪽 장부터 아래 장으로 내려가며 본다. 1996년 겨울에 댐의 물이 줄어 나타난
자호천의 모습 들을 담아 놓은 것이다.
<1.충효에서 흘러내린 물이 ‘삿갓바위 연을 지나, 2.‘새들보, ‘뒷귀미들’, ‘호계탄(중귀미 물나들)’을 지나 3.‘아랫귀미 앞과 가마소를 지나 4.‘탄건바위’와 ‘백암산’ 밑을 지나 5.오미산 밑을 지나 임고면으로> 자호천이 흘렀다
장류불식(長流不息) 자호천(紫湖川)은 굽이굽이 선경(仙景)일세
<쉬지 않고 길게 흐르는 자호천은 굽이굽이 경치가 신비롭고 그윽하네>
*장류불식(長流不息) : 쉬지 않고, 길게 흐름.
*선경(仙景) :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자호천(紫湖川) : 영천시 보현산(普賢山)과 포항시 죽장면의 상옥리에서 발원하여 충효리에 합쳐지고, 자양면의 영천호를 거처 선원천과 덕천천을 합한 후 금호강(116㎞)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이글에서 나오는 산수풍경은 모두가 자호천 기슭에 있다. 옛 이름은 자양면을 흐르는 물길을 호계(虎溪)라고도 불렀다.
17.용궁담(龍宮潭)
사진 중앙부의 호수 쪽으로 벋은 지형의 아랫 쪽에 창말마을 앞에 용궁담이 있었다.
깊고 맑은 용궁담(龍宮潭)은 수궁녀(水宮女)의 놀이턴가
<깊고 맑은 용궁담은 수중궁궐 궁녀들의 놀이턴가>
*수궁녀(水宮女) : 물속 용궁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여인.
*성곡리의 창말마을에서 노항으로 건너가는 자호천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그곳을 용궁담(沼)이라고 불렸다.
18.삿갓 연(淵)(사갓바위)
멀리 보이는 소금강(굴뱅이) 아래의 도로 밑에는 삿갓모양의 큰 바위가 솟아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그 속에 묻혀 버렸다.
소금강하(小金剛下) 삿갓 연(淵)은 소인(騷人)의 시제(詩題)되고
<소금강 아래 삿갓 소는 시인과 문사들의 시의 제목이 되고 >
*소인(騷人) : 시인과 문사(文士)를 통틀어 이르는 말. 중국 초나라의 굴원이 지은 이소부(離騷賦)에서 나온 말이다.
*소금강을 일명 굴뱅이라고도 했다. 바위산 절벽의 경치가 좋아 소금강이라 불렀는데, 일제 때 도로를 내기 위해 아래쪽의 바위들을 파괴하였기에 옛 모습이 줄어들었다. 그 후에도 물속에서 사갓 모양의 큰 바위덩어리가 높이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 깊고 넓은 큰 소가 형성되어 소금강의 경치와 어울려 절경이었다. 1970년대 댐건설로 도로를 확장 하면서 현재의 도로 밑으로 모두 묻혀버렸다. 옛날에 사돈손님이 오면 그곳에서 물고기 잡아 대접하는 ‘천렵’을 하며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19.호계탄(虎溪灘)
호계탄 자리에 댐으로 수몰되어 토사가 여울에 쌓여있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호계탄(虎溪灘) 내린 물은 묵객(墨客)의 현수(硯水)인가
<호계탄 흘어 내린 물은 먹을 가지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벼루물인가.
*탄(灘) :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
*묵객(墨客) : 먹을 가지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현수(硯水) : 벼룻물.
*옛날에는 ‘중귀미 물나들’이라고 불렀다. 여울물의 물길이 경사가 심하여 귀미 쪽으로 힘차고 사납게 흘러서 호계탄이라 불었다.
20.가마소(沼)
군위형님 머리위쪽의 산 밑에 가마소가 있었다. 노방할배 머리위쪽은 아랫귀미의 터전
사진 중앙의 산이 탕건봉이고 그 왼쪽의 산을 지나 그 근처에 가마소가 있었다.
가마소 맑은 청담(淸潭) 탁영세이(濯纓洗耳) 장소(場所)로다
기산영수(箕山潁水) 좋다하나 이 이상(以上) 더 할 손가
<가마소 맑은 못은 갓끈과 귀를 씻은 장소로다. 허유가 귀를 씻은 기산의 영수가 좋다하나 이 이상 더
할 손가>
*탁영세이(濯纓洗耳) : 갓끈을 씻고 귀를 씻는다는 뜻
*기산영수(箕山潁水)의 고사 : 은둔하는 고결한 뜻을 이르는 말. 허유(許由)가 요임금이 자기에게 천하를 물려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기산(箕山)에 숨었다가 요 임금이 다시불러 구주장을 삼으려고 하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潁水)강 가에서 귀를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가마소는 아랫귀미 마을과 탕건봉 사이의 산 밑에 있으며 모양이 가마 솥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마소라 이름 부쳐진 소(沼)이다.
첫댓글 실향감별사의 내용은 어럽게 기록되여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지도와 곳곳 지형,산세등사진같이 수록되여있서 어릴때 옛추억이 세롭습니다
보현산,운주산,백암산,필대산,꼬깔산,, 정상까지 등산도 해보았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무더위에 편집 하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파란표지에 인쇄된 "失鄕感別詞" 정홍식 저
저도 그 책을 오래 갖고 있다가 이사를 하면서 없어진듯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군요
그때 저 생각은 정홍식씨가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 분인가 의심을 하였지요
고향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고향을 잃어 버리는 실향민의 애틋한 심정을 가사로 표현 하심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때 코흘리며 자란 추억의 터전들이 물속에 잠겨 버린 참담한 심정
너무 슬프고 애틋한 심정 멀지않은 생의 마감을 앞에두고 저생에 가서 다시 그곳에 뛰어 놀 기회가 올지...
형님께서 자료와 현재의 사진까지 촬영 편집하여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후손들이 이해하고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뒷솔밭에 신석기시대의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수몰된 고향산천을 후세에 올바르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은 했는데 내가 소장한 사진자료와 인터넷의 자료도 찾고했지만 앞으로 귀향의 기회에 찍어와 보충할 생각이다.
특히 바로 우리의 것이요, 어릴때 뛰놀던 곳이라 즐거웠던 부모형제와의 옛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배골아재는 초야에 은거하신 선비시었다. 감별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떻게 그리아시고 한문의 문장들을 인용하셨는지 감탄스럽다. 앞으로 누군가가 쉬운글로 가다듬는 일을 하여야 하는대?
요사히 날씨는 덥고 별탈없이 건강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