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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고성이씨 임청각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51 14.08.20 19: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고성이씨 임청각(固城李氏 臨淸閣)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20
건 축 주 :  이명(李?, 생몰미상)
건축시기 :  조선 중기
소 유 자 :  이창수(관리자 : 안동시청 )
문 화 재 :  보물 제18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정자 건물의 정면에는 군자정이라고 단정한 글씨로 쓴 현판이 붙어 있고, 정자 안쪽 마루방의 서편으로는 임청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건축 배경
이명이 형 이굉(李?)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형은 귀래정(歸來亭)을 지어 노닐고, 아우는 임청각을 지어 노닐었다.

건축 특징
본채는 用자 형상을 취하고 있고, 정자는 丁자 형상을 갖추고 있다.

건축 구성
옆으로 펼쳐진 공간의 동편 끝으로는 사당이 있고, 가운데는 군자정이며, 서편은 본채이다. 본채 건물은 산기슭의 기울기를 그대로 이용하여 위에는 안채, 아래쪽엔 행랑채를 배치하였다. 안채의 마당에는 井자 형상의 우물이 있다.

현판
군자정(君子亭)
본채 동편의 정자 건물 이름이다.
임청각(臨淸閣)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온 것이다.
거국음(去國吟)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지었다.

문중이야기

문중 이야기
- 임청각
‘임청각’은 현재 안동 시내의 고가를 대표한다. ‘임청각’은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별당형 정자 건축. 보물 제182호. 이 건물은 1515년(중종 10)에 형조좌랑 이락(『세보』에는 이명이다. 여기 이락은 오기이다.)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 건축이다. 정자의 평면은 丁자 모양이며 …… 특히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만 ‘방지’(네모진 연못)가 있고, ‘방지’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세 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람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영혼의 방)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좋은 형국)으로 말하는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임청각 종가는 철도에 의하여 앞이 막혀 있다. 전통시대에 안동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것이 철도였다면, 임청각 종가는 그 현대화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래가 있지만, 기차길 옆 고대 광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군자정은 8계단의 석축 위에 올라서 있었다. 군자정의 동쪽으로는 정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다. 연못 주위는 군자정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곳이다. 연못의 물은 깊지 않았고, 바닥에는 뻘이 쌓여 있었지만, 뻘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우렁이가 보일 정도로 맑았다. 잔바람이 불어들자 맑은 물의 표면에는 비늘같은 파랑이 일고, 북쪽 한켠에 서 있는 모과나무의 분홍색 꽃잎이 여럿 물 위로 떨어져 조각배처럼 조금씩 떠돌고 있었다.

연못의 동쪽으로는 사당이 보인다. 그러나 임청각 종가의 사당은 텅 비어 있다. 위패는 다 치워지고 빈 마루방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집이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종가로서의 의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일까? 이제 임청각은 종가가 아니라 빈 집에 불과한 것인가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오늘날 종가가 처하고 있는 위상을 증거하여 주는 것이 있을까?

임청각종가를 지배하는 것은 빛바랜 갈색이다. 철도길의 기름먹인 침목이 세월에 바래서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은 색조가 기왓장에서, 집의 기둥과 서까래에서, 마루의 난간 가로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 보았다. 안채는 안내판에 적혀 있듯이 한자로 用자 형상을 하고 있다. 글씨는 서쪽을 머리로 삼고 동쪽, 그러니까 군자정 쪽을 다리로 삼아 옆으로 누워 있다. 그 앞, 좁은 마당 안에는 화강암 판을 이용하여 井자 모양으로 쌓은 우물이 있다. 우물 속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대대로 이 가문의 사람들이 마셨을 물은 여전히 투명할 정도로 맑은데, 이제는 마셔줄 사람이 이 집에 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맑은 우물물도 점점 더럽혀져 갈 것이다.

다시 안내판 쪽으로 내려와 섰다. 이번에는 안채의 아래쪽 건물들, 그러니까 用자의 첫 번째 내려 그은 선이 시선을 잡아끈다. 고방과 행랑방 등이 일선으로 붙어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건물들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다. 석축은 동쪽은 낮고 서쪽은 높다. 석축 위에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수선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횡선이 담담하게 교차한다. 그 담담한 수선과 횡선의 만남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직선의 벽면 위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단조롭다고 할 수 없게 된다. 그 벽면의 위쪽에 무수하게 내려뻗은 서까래의 횡선과 곡선들은 또 어떠한가. 서까래와 기둥이야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니 임청각에서만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종묘와 같은 건물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에서 이렇게 긴 한옥 건물의 직선과 만날 수 있을 것이겠는가? 축대 위를 보통 어른의 발걸음을 평상보다 넓게 해서 53보. 어림잡아 40m 정도의 직선이 거기 있는 것이었다. 그 긴 직선 위에서 14개의 기둥과 111개의 서까래가 담담하게 교차하면서 한옥의 미학을 낮은 음조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53보에 이르는 건물의 선, 그것은 전통시대에 이 가문의 살림살이가 어떤 규모였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그 속에 사람들이 가득 찼을 때는 얼마나 번잡하였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 속에는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그 집이 너무 큰 규모이기 때문인지, 그 속에 사는 사람의 부재는 더욱 커다란 공허감으로 가슴 속을 비집고 든다.

내(윤천근)가 임청각을 돌아보고 나올 때, 관람객 서너 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앞의 철길을 기차가 빼액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기차의 진동 때문에 땅이 조금 흔들렸다.
- 이증의 안동정착
원래 고성이씨 일문이 안동에 내려와 살게 된 것은 이증(李增, 1419∼1480)으로부터이다.

“고성이씨(철성이씨)가 안동으로 이거하여 와서 정착하게 된 것은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해 영산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한 이증이 벼슬을 그만둔 후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부성(안동부의 성) 남문 외(밖)에 우거(자리 잡음)하여서였고, 뒤에 성동(성의 동쪽) 법흥동으로 이가(집을 옮김)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주석의 기록이다.
이 기록 속에서 ‘성의 남문 밖에 자리 잡았다’고 하는 것은 ‘귀래정’을 뜻하고, ‘성의 동쪽인 법흥동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은 ‘임청각’을 의미한다.

이증은 고성이씨 11세 이원의 여섯 째 아들이다. 이증은 1419년(세종 1) 출생으로, 영산 현감을 거쳤으며,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다. 그는 1480년(성종 11)에 62세로 타계하였다. 배위는 경주이씨인데, 『고성이씨세보』에는 그들 슬하에 5남 1녀가 기재되어 있다. 그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향리의 나이 많고 덕이 높은 12명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어 향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증의 장남은 이평인데, 함창, 보은, 평택의 수령을 거쳤고,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 상서원 정이라는 증직을 받았으며, 1440년(세종 22)에 출생하여 1491년(성종 22)에 타계하였다.

“맏집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피해를 당했습니다. 맏집은 청도에 살아요.”라고 귀래정 종가에서 만난 이인형 씨가 말하였다.
“숫자도 제일 많지요. 맏집 후손이 우리 양 문중(귀래정과 임청각)을 합친 것보다 몇 배 많아요.”

귀래정종가는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李?)의 후손이다.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낙포(洛浦)이다. 1441년(세종 23)에 출생하여 25세에 진사가 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세보』의 이굉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귀래정’은 이굉이 만년에 지어놓고 즐기던 곳이라고 하겠다.
이굉의 후손들은 정상동의 ‘귀래정’을 중심으로 하여 안동에서의 삶을 이어나간다. 임청각은 귀래정의 아우 이명(李?)이 지었다.



관련문서
- 고성이씨 세계초(固城李氏 世系草)
이「고성이씨(固城李氏) 세계초(世系草)」는 족보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이는 본인을 중심으로 하여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되는 가승보(家乘譜)라고 할 수 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이명(李?, 생몰미상)의 가족 관계
이명(李?)은 자가 호원(浩源)인데, 진사이며, 형조좌랑을 지냈고, 이조참의를 증직으로 받았다.
“안동에 사는 ‘임청각’ 후손은 다 ‘반구정’ 후손입니다.”라고 이인형은 말하였다.

반구정은 이명의 여섯 째 아들 이굉(李肱)을 말한다. “자는 계임이고, 신묘 생원이다. 예빈시 별제를 지냈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반구정’을 지었다. 호는 ‘반구옹’이다.”라고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굉은 성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용(李容)을 낳았다. 이용은 자가 사관(士寬)이고, 호가 어은(漁隱)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후릉참봉을 지냈다. 세간의 명리를 뜬구름 같이 여겨 반구정을 지어 놓고 만년을 즐겼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도 ‘반구정’ 후손입니다.”
라고 이인형이 말하였다.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반구정의 16대 손이다. 이상룡의 족보상 이름은 상희이다.
『세보』는 이상희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명 상룡이라 한다. 자는 만초이고, 호는 석주이다. 1858(철종 9)에 출생하여 서산 김선생(김흥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상희는 이승목의 아들인데, 이승목은 자가 군현, 호가 추암이며, 유치명의 문인이다. 이승목은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이상희와 이용희, 이윤희를 낳았다.
- 이상룡(李相龍, 1858~1932)

“1911년 서간도로 망명 후 계원으로, 이어서 이상룡으로 개명하였다. …… 정치제도와 실용지학을 탐구하였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에 은신하면서 병학(군사학)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진지를 구축하고 의병항전을 시도하였으며,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김동삼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 1910년 11월 주진수?황만영 등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 설정계획을 전해 듣고, 1911년 1월 양기탁과 협의한 후, 2월 서간도 회인형 항도천에 도착하였다 …….”

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이다.
이상룡은 1905년 김동삼(金東三), 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유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항일 민족 독립운동 노선으로 산업ㆍ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군정부 총재로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는 일에 관여하는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는 심각한 대립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으므로, 국무령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는 1932년 길림성에서 병으로 타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동 > 시내권 > 법흥동
- 법흥사의 터에 고성이씨가 정착하며 형성한 마을
법흥동은 지금의 임청각(臨淸閣) 부근으로 신라 때 법흥사(法興寺)가 있었던 연유로 법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중앙선 철로가 부설되기 전에는 옛 법흥사의 지형적인 본모습과 약간의 평지도 있었다. 조선시대 이후 고성이씨가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법흥사도 원형을 상실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동은 낙동강(洛東江) 줄기와 만나는 영남산 동쪽 산기슭을 따라 형성되었으므로 산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몇 개의 고갯마루를 형성하였다.
그 중 법흥동의 고갯마루는 마을의 경계와 표지 역할을 했고, 이 언덕에 일찍부터 고목이 있어 이 언덕을 괴목(槐木) 마루라 불렀다. 지금의 안동보조댐 지역이다. 현재 안동댐 진입로 가운데에 있는 고목은 임청각 정문에 있던 회나무(유가에서는 선비목으로 보통 앞문에 심음)이므로 오히려 이 회나무 고목을 통하여 임청각 고택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안동부의 동쪽 이(二)리 포항(浦項:개목나루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법흥 인도교의 바로 아래임) 부근에 선농단(先農團)이 있었다. 선농단은 농사를 관장하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지방 각 고을에 있었으며, 수령이 제사를 받들어 백성이 농사에 힘쓰게 하였다.

법흥사의 뒷산이며 영남산의 동남 기슭에는 안동부성의 외성 역할을 하는 토성(土城)이 있는데 동성(東城)이라 불렸다. 이곳에 안동교도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과거 법흥사 터에는 국내 최대의 전탑인 신세동칠층전탑(국보 제16호)이 세워져 있다. 법흥사의 법당이 있었던 곳에는 고성이씨 종택이 들어서서 법흥사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전탑마저 중앙선로가 가로막아 기단부와 전망이 크게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는 통일신라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8세기 중엽에 부석사 의상 화엄종의 영향 아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유학파인 의상의 해동 화엄종이 통일신라의 이념으로 발전해가자 대당 유학승이 의상 문하로 몰려오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당시 새로운 중국 문화인 전탑 문화를 이 지역에 도입한 결과가 법흥사의 전탑으로 나타났다.

법흥사 일대의 계곡을 탑골이라 하며, 그 남쪽의 비교적 너른 경작지를 평지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 살았던 고성이씨의 이헌복(李憲復) 선생의 호가 평지옹(平地翁)이며, 지금도 그 자손들을 평지인(平地人)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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