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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선의 독서왕 김득신(金得臣)
이장희 추천 0 조회 224 14.10.08 16: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멀뚱박사] 조선의 독서왕 김득신(金得臣) : 1604(선조37) - 1684(숙종10) 2012.04.01

흔히들?讀書狂(독서광)을 이야기?할 때?사람들은?나폴레온(Napoleon)을 빼놓지 않는다. 나폴레온은 전쟁의 영웅이면서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 중에도 책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는 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 평생 읽은 책이 어마어마 할 것이고 독서광이라 불러도 당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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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의 역사 속에도 나폴레온을 뺨치는 독서광이 있었다. 조선 중기 김덕신이라는 사람이다.?이 분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金時敏(김시민) 장군의 손자이다. 타고난 머리가 둔재라 서당의 선생마져 가르치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金緻(김치)는 머리가 모자라는 자식을 나무라기 보다는 늘 용기를 북돋우고 '너도 잘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기암시를 갖도록 했다. 요새 말로 치면 피그말리온 效果 [Pygmalion Effect]를 잘 살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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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남긴 讀數記(독수기 : 어떤 책을 몇 번 읽었는지 그 숫자를 기록한 수첩)에는 1만 번 미만 읽은 책은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백이전>을 1억 1만 3,000번 읽었고, <노자전>을 2만 번 읽었다는 식이다. 이 정도면 독서광이나 독서 중독자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겠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5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서 인간승리의 귀감이 되었으며 <백곡집>이라는 문집을 남겨 당시?선비들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멀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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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여기서 <백이전>을 1억 1만 3,000번 읽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기록을 보면 11만 3,000번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당시 셈법으로는 1만 위의 단위가 1억이라는 설명도 있다. 사실 김득신이 80세까지 살았으니까?지금의 수개념으로 <백이전>을 11만 3,000번 읽었다고 한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루에 평균 3.9회 정도 일은 셈이니 참 미련한 사람이다. -멀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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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증평군은 조선 중기 다독 시인으로 알려진 백곡 김득신 선생의 묘소 일대를 문학공원으로

조성한다고 3일 밝혔다. 사진은 증평군 향토유적 6호인 증평군 증평읍 율리 김득신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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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독서왕을 꼽으라면 단연 김득신(1604~1684)이다. 김득신은 옛 글 36편을 읽은 횟수를 '고문삼육수독수기(古文三六首讀數記)'에 기록했다. 1만번에 미치지 못하면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았다. 《사기(史記)》의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 읽었다. 한유의 '사설(師說)'을 1만3000번,'악어문(鰐魚文)' 1만4000번,'노자전(老子傳)' 2만 번,'능허대기(凌虛臺記)'를 2만500번이나 읽었다. 정약용(1762~1836)은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종횡으로 수천년과 3만리를 다 뒤져도 대단한 독서가는 김득신이 으뜸"이라고 평했다.

조선에 책읽기로 화제를 뿌린 김득신은 사실 '가문의 둔재'였다. 열 살 무렵 글을 익히기 시작했으나 돌아서면 잊어버리고,글을 떠듬거리며?읽었으며, 스무살 때 겨우 한 편의 글을 지었다. 김득신의 할아버지 김시회는 스물다섯 살에 문과에 급제했고,아버지 김치는 스무 살에 문과에 급제한 천재였으며. 양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영웅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김시민이다.(아마 아버지 김치가 김시민의 양자로 간 것으로 생각됨)?아버지 김치는 "공부는 꾸준히 하는 것이다. 과거가 목적이 아니다"라며 아들을 꾸준히 지켜보고 기다렸다. 주위의 믿음 속에 김득신은 독서를 계속해 쉰아홉 살에 문과에 급제하는 인간승리를 이룬다. 둔재로 태어났으나 끝없는 노력으로 당대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인정받은 김득신.그는 미리 지은 묘지명에 이런 문구를 썼다.

'재주가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말라.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에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

러면 '억만재億萬齋'는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은 글자 그대로 김득신이 독서를 할 때마다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독서를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득신이 만년에 세운 '취묵당醉墨堂'이 충북 괴산군에 현재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독수기讀數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의 36편의 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김득신이 『사기史記』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億 지금의 10만을 가리킴)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시의 선비들은 독서의 횟수를 어디에 기록을 했을까?

조선시대의 선비들 중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였기에, 종이 등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하면서 지속적인 독서를 하였던 것이기에, 김득신의 독서 횟수의 기록은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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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이 말년에 괴산으로 낙향하여 지은 취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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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이 말년에 충북 괴산으로 낙향하여, 조상의 묘 근처에 두칸 짜리 초당草堂을 짓고, 당호堂號를 '취묵당醉墨堂'이라고 하였다. 김득신은 그의 저서인 『백곡집』 「취묵당기醉默堂記」에 기록하기를, "결코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당호라고 하면서,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을 이름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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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했어도 침묵하지 않고 깨어 있어도 침묵하지 않는다.?이렇듯 말로 인해서 재앙을 만나지 않도록 경계할 줄 모르니, 어찌 걱정스럽지?않겠는가??취해 있어도 입을 다물고 깨어 있어도 입을 다물며, 평소 마치 병의 마개를 닫듯이 하면 반드시 재앙의 조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해 있어도 침묵하지 않고 깨어나서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몸을 산야(山野)에 둔다고 하더라도 도성都城 안에 거쳐하면서 말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이런 이유로 구당 박중구朴仲久가 임인년 여름에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 내게 침묵하지 않음을 경계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당호를 '취묵당醉默堂'이라고 내걸게 되었다. 무릇 취해 있어도 반드시 입을 다물겠다는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취묵당'은 '깨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취해도 입을 다물어야 재앙을 모면할 수 있으니 침묵을 금金으로 여기면서 삶을 살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억만재'는 김득신의 초당인 '취묵당'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만 서재이다. 김득신은 이곳 '억만재'에서?수천 혹은 수만 번에 이르는 독서를 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독수기를 쓰면서, 내 자손들이 이 독수기를 읽으면, 내가 책을 읽는데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 조선시대 최고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독서광인 김득신(1604~1684)은 누구인가?

김득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전투인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부제학인 김치金緻이다. 그는 어릴 때 매우 둔하여 10살이 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배우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김득신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김치金緻였다. 아버지는 우둔한 김득신에게 "분명히 나중에 큰 문장으로 이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를 하였다. 남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스무 살 때 비로소 글을 지은 김득신을 두고, 화를 내거나 꾸짖기는 커녕 공부는 과거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니 더욱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자식의 우둔함을 창피해하기는 것보다 성실히 노력하는 아들의 자세를 자랑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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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버지의 교육철학의 영향을 받은 김득신은 주변의 힐난과 멸시에 개념치 않고,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기를 노력하였다.? 그 방법이 바로, 남들이 몇 번 읽을 때 자신은 몇백 혹은 몇 천 번 읽는 것이었다.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기의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을 읽었다.?한유의 사설師說을 1만3000번, 악어문鰐魚文을 1만4000번, 노자전老子傳을 2만번, 능허대기凌虛臺記를 2만500 번씩이나 읽었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정약용 조차도 김득신을 평하기를 "서계書契(문자)가 있어온 이후로 상하上下로 수천 년과 종횡縱橫 3만 리를 통틀어도 독서讀書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柏谷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득신은 백이전을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읽었다. 영조 때 영의정인 이의현이 쓴 도곡집에 그 내용이 나온다. '80이 넘은 김득신은 딸을 먼저 여의었다.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그의 손에는 백이전이 들려 있었다. 또 아내를 잃었을 때 친척들이 '아이고, 아이고'라고 곡을 할 때 그는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

이런 독서법을 통해서 아주 때늦은 나이이지만 59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재주가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짓지 말라.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에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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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재주가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짓지 말라.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에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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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김득신의 풍속팔곡병 2012.03.17

성하직구 012. 4. 14

파적도

대장간

주막거리

투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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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TV <역사채널e> ‘임금의 밥상' 2011.11.18

지난 2011년 11월 4일(금) EBS TV <역사채널e>에 ‘임금의 밥상’이라는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각 도에서 진상된 음식으로 수라상을 차리고 백성의 마음을 살피며, 임금은 진상품목이나 수라상의 반찬을 줄였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역사채널e>(매주 금요일 밤 8시45~50분)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기획 된 프로그램으로 역사 관련 중요한 사건과 사실들을 5분 분량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로 하여금 보다 쉽게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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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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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의 맛을 전하고 있는곳 궁중음식연구원 소개 동영상-서울시PR Contents 폴리지미디어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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